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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 이현보의 「어부단가」
이원걸(문학박사)
1. 영남가단의 전통과 농암의 국문 시가
안동 지방의 전래적인 시조 짓기 유습의 기원은 여러 가지로 유추할 수 있겠지만 같은 고을의 우탁의 시조 짓기와 관련시키지 않을 수 없다. 이미 한 고을에 역동의 시조가 구전 전승되어 오고 있는 상황에서 때늦은 민요의 변이를 따를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실정으로는 민요가 일반 서민들이 향유했던 노래라면, 시조는 사대부가의 노래였다는 점에서도 그 타당성은 높다. 따라서 영남 시조 문학의 형성에 우탁의 시조 짓기는 중요한 배경으로 성립될 수 있다.
그런데 영남의 실증적 시조 작가들은 농암의 모친 권씨․ 농암․ 퇴계 등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탁과 한 고을에 이주하여 가문을 연 영천이씨의 가풍 중에 시조 지어 노래 부르기가 전해 온다는 점이다. 영천 이씨 가문의 부녀자인 권씨가 아들 농암이 서울에서부터 금의환향하자, 아들을 축하하는 시조 「선반가」를 짓고, 집안의 남녀종들에게 가르쳐서 노래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안 고을은 여말선초 이래 국문 시가 창작 전통이 면면히 계승되어 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우탁의 시조 창작이 농암에게 직접 전수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다만 우탁 이래 생활화한 예안 고을의 우리말 노래 짓기 유풍이 간접적으로 그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고, 그 중간 매개 고리를 담당한 이는 그의 어머니였다. 이 같은 정황은 「애일당희환서愛日堂戱歡序」에 잘 나타나 있다. 자식에 대한 애정을 우리말 노래로 표현할 줄 알았던 그의 어머니는 농암의 시가 창작에 있어서 훌륭한 스승이었다.
권씨는 안동 권씨로 호군護軍이었던 겸謙의 따님이다. 남편 이흠李欽이 40 중반에 잠시 현감을 지낸 기간 이외에는 늘 재지사족으로 가문을 지켜 온 탓에 맏며느리로서의 가풍과 지방 유습에 익숙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권씨의 시조 짓기도 권씨대에 와서 최초로 시작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는 없다. 아들의 방문을 받고 이 정도의 시조를 지어 분위기를 돋울 수 있었다는 것은 이 고을의 사대부가에서도 평소에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 늘 노래지어 부르는 행위를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아들 농암 역시 가문에서 행해지는 잔치 자리에 늘 시조로서 노래했다. 그리고 농암의 아들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1519-1592)이 가문을 이끌면서 연중행사로 친족들을 모아 시조 부르기 행사를 행하였으며, 농암의 종증손從曾孫인 선우당善迂堂 이시李蒔(1569-1637)가 아우를 타이르기 위한 방편으로 시조를 지었다고 했다. 그리고 기록에 나타난 것으로 보면 농암의 가문은 4대에 걸쳐서 시조를 짓는 가문이었음이 확인된다.
농암이 「애일당희환서」에서 밝혔듯이, 그는 일찍이 우리말로 노래 짓는 것을 하나의 즐거움으로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말년에 귀향한 이후, 아무런 제약 없이 자연스럽게 국문 시가를 창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농암의 시조 창작을 이어 우리말 노래 짓기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이는 퇴계이다. 농암이 우리말 시가를 전래의 유풍과 관행을 수용하는 차원으로 이해하였다면, 퇴계는 보다 차분한 관찰을 통해 시조 짓기의 정당성을 논리화한 분이다.
특히, 농암의 경우 문학적 이력을 검토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은 철저히 한문학만을 위주로 하다가, 벼슬살이를 청산하고 귀향해서는 국문 문학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벼슬을 그만 두고 귀향하는 사대부들이 은퇴할 때에는 한시로 「귀거래사」를 읊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래야만 사대부다운 시대 풍조였음에 비해 농암은 최초의 국문 귀거래사인 「효빈가」를 읊었을 뿐만 아니라, 「농암가」로 감계를 펼쳤다. 그리고 「생일가」로 흥을 돋우었는데, 향촌 사회의 풍류가 산수 자연의 취미와 결합하여 가창적이고 즉흥적이며 오락적인 것으로 발달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농암은 「어부가」로 자연합일을 이루어 신선의 경지를 밟았던 것이다. 이는 향토적 배경을 수용한 국문시가적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농암 시가의 진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농암의 풍류성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농암의 시가에는 이 같은 생활 이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히려 농암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농암이 당대에 모든 이들에게 그처럼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은 까닭 중에 하나가 바로 민족 정서의 중요 부분인 열정과 어울린 풍류성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선조의 풍류성은 주로 산과 물, 즉 강호를 매개했다. 우리 민족은 산수를 그 어떤 민족보다 애호하고 존중했다. 그래서 산기슭이나 강가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살아 왔던 것이다.
농암의 강호에 대한 인식은 이러한 우리의 민족 전통 의식과 맞물려 있다. 농암의 시가가 시공을 초월해서 애호되는 것도 이러한 우리 민족의 강호 전통 의식과 연관되어 있다. 아울러 그의 시가는 우리 민족의 심성인 열정과 거기에 어울린 풍류성이 가미되었기 때문에 이처럼 애호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농암은 분명 영남가단의 창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영남 시조 문학은 14세기에 이 지방에서 한국 최초의 시조 작가로 등장한 우탁을 배경으로 했고, 15세기의 농암이 등장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이어서 역시 한 고을의 퇴계가 이들 유풍을 나름대로 수렴하여 문학사상적 체계와 틀을 마련하였으며, 이를 이어 안동 지방에서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많은 시조 작가를 배출하여 영남가단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농암은 한국문학사, 특히 시조 문학사에서 송순과 함께 강호가도를 창설한 인물이며, 그가 생장한 영남의 가단歌壇 형성에 있어서도 초석을 마련했던 것이다.
농암의 [문집]에는 120여 수의 한시 작품이 있다. 농암은 이에 못지않게 그는 국문학 작품인 시조를 남겼다. 이는 그의 나이 76세 이후의 만년 작품으로, 「귀전록歸田錄」의 3수․ 「어부단가漁父短歌」 5수․ 「어부장가漁父長歌」 9수를 남겼다. 이는 모두 국문학사에서 불후의 작품으로 전한다. 즉, 「어부가」는 자연에 묻혀 사는 어부의 생애를 노래한 것인데, 고려 때부터 전해 오던 작자 미상의 「어부사」 12장을 농암이 만년에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와 「어부단가」 5수와 「어부장가」 9수로 개작한 것이다. 이들 작품이 김천택의 [청구영언]에 실려 전한다. 「귀전록」의 시조 작품은 이미 정리했다. 여기서는 「어부단가」를 정리하기로 한다. 「어부가」의 전통에 대해 정리하기로 한다.
2. 「어부가」의 전통
자연미를 노래한 강호 문학 가운데 어부의 생활과 그의 심정을 읊거나, 그에 가탁하여 세상을 벗어난 채 고고하게 살아가는 인간형이나 벼슬살이를 모두 마친 후에 자연과 함께 지내면서 부른 「어부가」가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농암의 「어부가」 개찬改撰은 그 자신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먼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어부와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어부의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즉, 어부漁夫는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것을 말하며, 어부漁父는 직업적․ 영리적 목적을 지니지 않는 가어옹假漁翁을 말하는데, 강호에서 한적한 생활을 동경하고 은둔 생활을 즐기는 은사隱士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부가漁夫歌」와 「어부가漁父歌」는 변별성을 지니면서도 근친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어부들의 노래는 어부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불린 노동요라면, 농암이 창작한 노래는 어부들의 현실적․ 실제적 생활에서 수고와 생존의 치열한 대결을 제외시킨 한가와 풍류만을 뽑아 낸 풍류성의 노래라는 점에서 변별된다.
아무튼 이러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어부가」의 창작자들은 비록 자신이 직업적인 어부는 아니지만 그들이 동경하는 어부들의 풍류와 멋에 대해 어느 정도 상식을 갖추고 있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강호에 낙향하여 직접 현장에서 어부들의 삶을 눈여겨보면서 체득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구전되어 오던 민요들에 접하면서 어부들의 실제적 체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공감대에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노래들이 창작되어 전해지다가 현전 최고最古의 「어부가」 문헌인 악장가사樂章歌詞에 수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려 후반기에 제작되어 많은 사랑을 받아 오던 「어부가」는 조선조에 들어 와서 점차 잊혀 져서 마침내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서 거의 사라져 갔다. 그 이유로는 고려의 사대부들이 「어부가」를 즐겨 노래하였지만 실제로는 강호에 완전히 귀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조정에서 관료 생활을 계속 유지하면서 이따금씩 강호의 정취를 간접적으로 향유하였던 것이다. 이 당시 「어부가」는 「경기체가」나 「한림별곡」 등과 함께 처사적 문학 세계를 이루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 말에 이르러, 이러한 문학을 향유하던 계층이 기울어져 가는 고려를 택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택하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되자 이들은 강호의 풍류를 읊은 노래를 부를 여유를 잃게 된 것이다.
수요자를 상실한 이 계통의 문학 역시 공급을 중단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조선이 창업되면서부터 이에 반대했던 고려조 사대부들은 역사의 이면으로 퇴출되었으며, 새 왕조 창업에 가담한 부류들은 새 왕조 기틀 마련에 부심하여 그 수요와 공급은 종전 수위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함께 「어부사」는 실종 위기에 놓였던 것이다. 한편 이 노래가 위축된 것은 고유 음악성을 조선조 사대부들이 기피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를 가져 왔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던 것이 조선 초기 정치 격변기였던 여러 사화를 거치면서 불합리적이고 모순된 현실을 벗어나겠다는 데서 자연에 대한 동경이 대두되었다. 그리고 벼슬을 모두 마친 인물이 한가함 가운데 이런 부류의 노래를 다시 애호하면서 「어부사」는 그 명맥을 잇게 된 것이다. 농암의 경우, 그가 정계에 몸담고 있는 동안 살육이 난무하는 시대에 그 역시 적지 않은 시련을 겪었던 인물이고 보면, 귀전은거의 의지는 늘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만년에 그가 평생 바라던 강호로의 귀의를 이루게 되었고, 거기서 안분낙도安分樂道하며 유유자적한 가운데 「어부가」를 고쳐 짓게 된 것이다. 이후, 그 전통은 지속되며, 실제 그러한 작품을 남긴 인물 송강 정철이나 고산 윤선도 등의 삶은 농암의 그것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이제 농암의 「어부단가」를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기로 한다.
3. 「어부단가」의 강호은거미
위에서 「어부단가」가 「어부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과 한 동안 그 맥이 단절되었던 역사적 배경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어부단가」를 간략히 검토하기로 한다. 농암은 전래되어 오던 「어부장가」 12장을 9장으로, 「어부단가」 10장을 5장으로 개작했는데, 이 두 작품은 자연 속에 묻혀 뱃놀이와 낚시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어부의 풍류로운 삶과 그 정취를 표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농암은 이 작품을 83세였던 1549년에 고쳐지었다. 농암은 강호의 한적한 생활을 동경하며 은둔적인 생활을 즐겨 하는 은사를 지칭하는 어부를 자청하여 그 멋스러움을 한껏 발휘하였다. 농암이 「어부단가」로 개작한 「어부가」는 그의 나이 손자사위 금계 황준량이 구입해 준 것이다. 농암은 이렇게 입수한 「어부가」를 개작하여 새로운 「어부가」를 만들었다. 이러한 개작 과정에서 퇴계 등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어부가」는 자신의 의식과 함께 시대적 취향이 반영되어 있다 하겠다. 이 작품을 차례로 분석해 보기로 한다.
이 중에 시름없는 것은 어부의 생애로다.
작은 조각배를 끝없는 물결에 띄워두고
인간 세상을 다 잊었으니 세월 가는 줄 알리오.
이 듕에 시름업스니 漁父의 生涯이로다.
一葉扁舟를 萬頃波애 워두고
人世를 다 니젯거니 날 가는 주를 알랴.(1수)
시인은 어부의 삶에 가탁하여 한 조각배를 강에 띄워 두고 시름없는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종장에서 인간 세상의 일체를 잊어 버렸으니 세월이 가는 것도 잊어버릴 것 같다고 고백하였다. 초장의 시름없는 인생은 종장의 인간 세상사와 대조를 이룬다. 즉, 만사를 잊은 듯 조용하고 평안한 자연 세계는 분잡한 세상과는 결별된 채 시인과 자연이 함께 만나 물욕을 잊고 소박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상은 「어부단가」의 전체를 일관하고 있다. 시인은 다음 수에서 배에서 사물을 관조하며 세속과의 단절 속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모색하게 된다.
굽어보면 천길 깊은 물 돌아보니 겹겹 푸른 산
열 길 붉은 티끌이 얼마나 가려 있었던가.
강호에 달이 밝아 오니 더욱 무심해 지는구나.
구버 千尋綠水 도라보니 萬疊靑山
十丈紅塵이 언매나 롓고.
江湖에 月白거든 더옥 無心얘라.(2수)
농암은 배 위에서 강물을 굽어보고, 청산을 돌아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무심한 탈속의 공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는 중장에서 무심할 수 없는 공간이 설정된다. 세속을 의미하는 홍진과 이를 차단하는 천심녹수와 만척청산의 대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즈음에 이르러 농암은 이미 천 길 강물과 만 겹의 청산으로 세속의 일체를 단절시켰기 때문에 무심한 경지에 이르렀다.
이런 점은 종장에서 확인된다. 즉, 저녁이 되어 강 물 위에 흰 달이 떠오르면 그 무심한 경지가 더욱 깊어진다는 데서 이미 자신이 무심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제3수에서는 더욱 자연과 밀착된 농암의 생활미를 엿보게 한다.
푸른 연잎에 밥을 싸고 푸른 버들가지에 고기를 꿰어
갈대 꽃 덤불에 배를 매어 두었으니
한결같이 맑은 뜻을 어느 분이 아실까.
靑荷애 바고 綠柳에 고기어
蘆荻花叢에야 두고
一般淸意味를 어부니 아실고.(3수)
농암은 어느새 평범한 어부가 되어 있다. 푸른 연 잎에 밥을 싸고 버들가지에 고기를 꿰어 술안주로 삼는다. 그리고 타고 온 배는 갈대꽃 사이에 매어 두는데, 이런 멋을 아는 이 드물다고 하였다. 위의 '일반청의미'는 송나라 때 도학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소강절邵康節의 「청야음淸夜吟」에서 '달은 하늘 가운데 떠있고, 수면에는 바람이 잔물결 일으키네. 이렇듯 청신한 맛을 아는 이 드물다(月到天心處 風來水面時 一般淸意味 料得少人知).'의 한 구절을 빌려 쓴 것이다. 농암의 위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소강절의 시가 담고 있는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시는 철학적 사유를 반영한 것으로, 공중의 달이 하늘 한 가운데 떠 있는 상태는 달을 가리는 구름이 모두 제거된 상태를 의미하고, 수면에서는 바람이 파도를 잠재우고 잔잔한 수면을 형성한 상태를 말해 준다. 이는 곧 인간의 심성에 모든 물욕과 상념이 정화된 상태를 말해 주는 것이다. 곧 천리天理가 하늘과 땅에서 유행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 둥근 달과 잔잔한 호수처럼 인간의 마음이 평정되고 묘한 이치를 깨달은 상태를 세상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사유를 농암도 그대로 수용하였을 것이다. 자신이 현재 누리는 참된 기쁨과 흥겨움을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 것이다. 이는 다음 제4수에서 자연 대상과의 합일된 기쁨을 노래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산등성이에 한가로이 구름 일고 물가엔 갈매기 날아라.
무심하고 다정한 이는 이 두 것뿐이로세.
평생토록 시름 잊고 너를 쫓아 놀리라.
山頭에 閑雲이 起고 水中에 白鷗이 飛이라.
無心코 多情니 이 두 거시로다.
一生애 시르믈 닛고 너를 조차 놀리라.(4수)
산마루 위에는 한가롭게 구름이 일어나고 물위에는 흰 새가 날고 있다. 푸른 강물과 흰 구름과 새가 좋은 색감을 이룬다. 초장의 경물 묘사에 이어 중장에서는 그 객관 경물이 시인과 합일된 경지에 이르렀음을 표현해 내었다. 시인 농암이 세속의 기운을 벗고 기심機心을 잊은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구름과 새가 다정히 접근해 왔다. 평온한 시상이 전체 시에 흐르고 있다. 그래서 시인 농암은 이렇게 평온하고 느긋한 생활을 종신토록 누리고 싶다 하였다. 다음 제5수는 농암이 여태껏 강호에서 자유를 갈망했던 배경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서울을 돌아보니 대궐이 천리로다.
고깃배 누워 있다 한들 잊은 때가 있으랴.
두어라 내가 시름할 일 아니니 세상을 구제할 현인이 없으랴.
長安을 도라 보니 北闕이 千里로다.
漁舟애 누어신 니즌 스치 이시랴.
두어라 내 시 아니라 濟世賢이 업스랴.(5수)
제5수는 농암의 현실적 고민이 담겨진 작품이다. 농암은 어옹漁翁으로 장안을 돌아보았다. 실제로 그는 어부로 가탁하여 분강에서 배를 띄우며 이렇듯 평온한 삶을 지향해 왔지만, 서울을 잊은 때가 없었다. 그는 분명 부귀영화를 못 잊어 그곳을 동경한 것은 아니다. 혼란한 정국이 여전히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그는 경세제민의 유학자로서 어지러운 나라의 정치적 격변을 염려하며 고민하였던 것이다. 그는 강호에 있으면서도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며 어진 이가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해 나가길 염려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1-4수에서 그가 추구하던 강호귀의에 따른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한 염원이 위축되지는 않는다. 그는 분명 개인적 세속의 명리나 물욕 등에서 초극했기 때문에 현실적인 염려는 다른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4. 마무리
이처럼 농암의 「어부단가」에는 당대 16세기 정치 격동기에서 급진적 개혁 이념을 지향하다가 거듭 좌절을 당한 사림의 세계관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농암 개인적으로는 모순 정치 현실에 대한 현실 비판 의식의 표출임과 동시에 내면 지향의 서정화라고 할 수 있겠다.
「어부가」가 가진 금욕적 관조의 시각과 자기 억제, 그리고 강호와 속세의 양분법적 시상 전개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농암 자신의 의식 세계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모순 현실에 벗어나 자연과 동화를 이룬 가운데 자신의 심성을 기르고 보다 나은 미래를 전망하는 것 역시 현실 정치 참여 못지않은 삶의 자세이다.
이는 조선조 선비들의 처세와 연관이 된다. 여기서 강호 곧, 자연은 이런 과정에서 심성 수양의 도장이며, 문학에서 강호가도를 산출하게 하는 매개로 작용된 것이다. 그의 국문 시가 가운데 문학적 가치가 가장 높은 작품이 「농암가」라면 문화사적 가치가 가장 높은 작품은 「어부가」이다.
그는 사라질 위기에 있었던 「어부가」의 가치를 재발견하여 이를 수정하고 다듬어서 후세에 전해 주었을 따름이지만 그에 의하여 수정된 「어부가」는 그의 호를 따서 「농암어부가」라 불리며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어 농암의 「어부장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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