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가장 가까이 할 사람은 친구다.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어, 아무런 부담이 없어 좋다. 친구의 범주를 보면 같은 나이 동갑 친구, 사회에서 만난 친구와 학교 친구가 있다. 대학교 친구들과 20여 년 모임을 하고 있지만, 나이 차이도 있고 학교 선후배도 있어 마음 놓고 해대지를 못한다. 족보가 꼬이다 보니 예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중고등학교 친구도 막역지우(莫逆之友) 이상은 될 수가 없다. 뭐니 뭐니 해도 친구라면 불알친구인 초딩이 좋다. 남녀가 따로 없고 나이도 초월한다. 여자애들과 심한 스킨쉽도 반가움의 상징이고, 심한 말도 다정함의 표현일 뿐이다. 시비가 없고 다툼이 없으며 끝이 없다. 모든 것이 허락되는 그야말로 사는 날까지 같이 가는 보약 같은 친구다.
얼마 전 “백전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우리 42회 동기들이 많이 참석했다. 예전에 총동창회장을 우리 기수가 맡아야 하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 고민할 정도로 빈약한 동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정말 멋진 친구들이 많음을 알았다. 그중에서 특히 박연환과 소옥희가 우리 기수의 위신을 세웠다. 누가 뭐래도 남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자랑스런 친구다. 이런 멋진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존감이 쑥~쑥 자란다.
초등학교 친구들과 인생의 제2막이 열였다. 골프 친다는 사실을 안 박연환 회장이 라운딩을 하잔다. 서울 소옥희, 울산 이성춘, 합천 정두현이 “지산CC”에서 만났다. 시골뜨기가 도시 친구에게 한 수 배우러 온 것이다. 촌놈이라는 핀잔을 안 받으려 연습도 다부지게 했다. 미리 알아본 바로는 모두가 잘 친다고 하여 약간 주눅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장시간 운전과 긴장감으로 인해 첫 홀에 더블파를 했다. 무척 창피했다. 역시 촌 골프라고 무시를 당해도 싸다. 남자의 자존심이라는 드라이브와 아이언이 제멋대로다. 긴장된 마음으로 몇 홀 쳤다. 좋은 분위기 덕분에 평상심을 찾는다. 서서히 자신감이 붙으면서 급기야 연속 버디로 체면을 살렸다.
벌써 가을 냄새가 곳곳에서 인다. 풋풋하던 잔디의 기세는 한층 부드러워지고, 푸른 나뭇잎도 젓닢을 만든다. 즐겁게 노래하든 새들도 갈 곳을 찾는지 하늘만 맴돈다. 좋은 세월은 우리에게만 오는 게 아닌가 보다. 세월이 갈 곳은 어디일까? 겨울은 봄으로, 봄은 여름으로, 그렇게 무덥던 여름은 또 가을로 가는가 보다. 머지않아 짧은 가을도 우리들 가슴에 주단을 깔고 하얀 솜이불 덮으러 가겠지. 짧다면 짧은 인생이 아니던가. 인생의 제2막을 아름답게 장식해 보자.
박회장은 퍼트가 일품이다. 먼 거리인데도 쏙쏙 잘 들어간다. 곧 버디는 따 놓은 당상이다. 이회장은 많이 쳐본 폼이다. 홀인원과 싱글도 달성했고, 삼 연속 버디로 박회장이 해준 트로피를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소회장은 짧은 기간에 잘 완성된 조각품 같다. 여자는 폼이 아름다워야 하는데 뒤에서 보면 너무 뷰티풀 해서 살며시 허거하고 싶을 정도다.
스코어가 중요하겠나요. 버디가 기쁘겠나요. 파란 잔디를 밟으며 농에 웃고 라떼 개그에 박장대소하니, 어떻게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는가. 정말 좋다. 성공한 42회 동기생이 아니던가! 이 그룹에 함께 즐긴다는 것 또한 대단한 영광이다. 여태껏 누리지 못한 홍복이다. 클럽하우스에서 제일 맛있는 해물볶음, 버디 팁, 캐디피는 물론이고 그늘집 등 모든 것을 박회장이 책임졌다.
좀 더 본론으로 돌아가자. 골프 라운딩은 전초전에 불과하다. 본인이 마다해도 다음에 친구들과 나드리 하려고 사전 답사하려 했는데, 입이 간지러운 박회장이 사업장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품위 있는 K.Hemingway Bakery Cafe & Dining. 그 이름에 걸맞은 규모에 입이 쫙 벌어진다. 모든 빵이라는 이름은 다 있으며, 맛이라는 맛은 다 풍미할 수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베이커리 카페다.
2층에 올라가니 주위 경관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이미 큰 물류창고가 보이며 바로 옆에는 큰 공원이 예정되어 있다. 그 아래엔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는 그야말로 천혜의 입지 조건이다. 이 좋은 자리를 어떻게 찾았을까? 사람은 각자의 일에 특출나야 하나 보다. 이런 완벽한 조건이 이루어진 곳에 개업하다니, 정말 규모에 놀라고 사업수완에 혀를 찼다. 친구가 너무 멋지게 보여 한 번 더 쳐다봤다. 정원도 귀한 나무와 돌을 놓아, 분위기를 한층 더 높여주고 있다. 평일보다 주말에는 그 큰 매장이 인산인해라니 정말 가슴 뿌듯하겠다. 큰 보람이자 자랑거리다.
사람은 누구나 가슴앓이 하나쯤은 안고 산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하지 않았나. 오래 살다 보면 마른날도 있고 궂은날도 있다. 어두운 날이 있으면 쨍하고 해 뜰 날도 있다. 어찌 가슴 아픈 일들이 없겠는가. 친구도 자식을 먼저 보내는 아픔을 잘 이겨내고 이렇게 성공했다. 애지중지 삶의 버팀목인 둘째 아들을 위해 이 멋진 베이커리 카페를 열었다. 덕분에 예쁜 며느리까지 얻게 되었고, 이제 곧 그렇게 열망하던 할아버지가 된다고 하니 일석 삼조가 아니겠는가. 얼마나 좋았으면 아이 셋을 낳아 달라 했겠는가! 손주 하나 안길 때마다 백억쯤 주어도 아깝지 않으리.
골프 라운딩 마치고, 매장 관람하고, 고향 쇠고기로 배 채우며 이리저리 삶을 조명하는 사이 벌써 해는 서산에 걸쳐있다. 보람된 하루를 베고 길게 드리운 노을이 아름답다. “삐딱하게 날아가는 저 산 비둘기. 가지 끝에 하루를 접네. 여보게 우리 쉬었다 가세. 남은 얘기 다 하고 가세. 가면 어때 저 세월. 가면 어때 이 청춘. 저녁 깔린 빈 마당에 쉬었다 가세. 여보게 쉬었다 가세.”
맛있는 빵을 한 아름 안고, 뿌듯한 벗들의 사랑은 앙가슴에 품고 어두운 길을 달린다. 박회장 삶도 바닥을 치고 솟아 올라 천상 누각을 지었다. 천하장사의 위풍인 이회장도 단단한 사업으로 대를 잇게 한다. 옥희도 ‘벌건 대낮에 눈뜨고 코베인다’는 서울에서 성공하여 딸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시골 쥐가 서울에 갔다가 정신문화 연수를 받고 온 느낌이다. 친구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약간의 카테고리 차이는 있다. 하지만 고층빌딩이건 초가삼간이던 우리는 기초가 튼튼한 초딩 친구가 아닌가. 벗어 놓으면 가진 건 불알 두 개가 전부다. 나이가 들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똑 같다 하지 않았는가.
내려오면서 성춘이와 오랜 시간 많은 이야기 나눴다. 늦다고 생각했을 때가 빠르다고 했다. 고희의 나이지만 이제라도 서로 만나 세월을 논하고, 낚으며 여생을 더 보람있게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이 건강이다. 인생의 제2막에 건강 잘 챙겨 오래오래 즐겁게 삶을 함께 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