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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유성 목사 편 ∙∙∙∙∙∙∙∙∙
● 성결대학교 졸업(8회)
● 대전 감리교 신학대학 / 서울신학대학 대학원
● 에성 부흥사회 회장 역임
● 現 성결대학교 총동문회 총무
● 現 온수중앙교회 담임목사 <구로구 온수동 130-1>
☎ 681-0815(교회), 2617-6222(목사관)
◈ 4종류의 소리를 바로 듣자 (마 27:19)
◈ 마음에다 시온의 대로를 뚫어라 (시 84:4-5)
4종류의 소리를 바로 듣자
마 27:19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나면서 세상의 어떤 소리를 듣고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남편의 코고는 소리 또는 이웃집의 개 짖는 소리나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TV에서 들려오는 세상의 수많은 소리가 지구상에 존재하며 이 소리를 인간들은 듣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 3가지를 말하라고 하면 다음 3가지 소리를 말했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아기의 울음소리요, 둘째는 안방에서 들려오는 여인들의 다디미 소리라고 했고, 셋째는 사랑방에서 들려오는 선비들의 책 읽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은 세상의 소리가 아닌 하늘 나라의 소리를 듣고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빌라도의 아내가 사람의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음성을 잠을 자다가 듣고, 예수님의 재판을 앞에 둔 남편인 빌라도에게 권면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빌라도는 세상 사람들의 소리는 들을 줄 알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소리를 들어야 할까요? 소리의 종류와 결과를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양심의 소리가 있습니다
양심은 제 2의 율법이라고 합니다.
1. 양심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범죄는 양심의 가책으로 불안을 느끼게 합니다(요 8:9). 또한 양심을 속이면 상대에게 거리끼게 됩니다(행 24:16). 고로 성도들은 하나님 앞과 사람을 대할 때 거리낌이 없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떳떳한 삶은 양심에 “자신있다”는 증거가 됩니다(롬 2:15).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할 때, 양심을 걸고” 맹세를 하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됩니다.
2.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한 2가지 결과는 무엇인가?
빌라도는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입니다. 또한 빌라도는 양심의 소리를 들어도 양심대로 살지 못하고 자신의 권력을 연장하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허락한 자입니다. 오늘날에도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들어도 지키지 못하는 비양심적인 사람들은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백성의 소리가 있습니다.
1. 본문의 백성들은 화인(火印)맞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왕이 되어 달라고 좇아다니던 백성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주님께 많은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병들었을 때 병고침을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백성들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을 것을 예언하자 한 목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요구하고 나서는 화인맞은 사람들이었습니다.
2. 빌라도는 백성들의 소리를 바로 듣지 못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으라 요구할 때 그들의 소리를 분별할 줄 몰랐습니다. 만약 빌라도가 그들의 소리를 분별하였으면 거절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허락하였음으로 후대에 악한 자로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화인맞은 백성들의 소리가 두려워 불법을 행하며 자신의 신앙을 잃어버리는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을 볼 때 이런 사람들은 먼저 자신을 발견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3. 마귀의 소리가 있습니다.
1. 마귀는 마음을 주장합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 속에 마귀가 들어가니 예수를 팔 마음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마귀의 소리를 들은 유다는 인격이 무너지고 생각이 더러운 욕심으로 가득차서 스승을 팔아먹는 윤리가 무너지는 비인격의 사람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구약성경에 다윗의 마음속에 음란 마귀가 들어가니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려는 무서운 음모를 꾸미게 되었습니다. 신약 사도행전에 삽비라의 마음속에 마귀가 들어가니 성령을 훼방할 마음이 생겨, 베드로를 속이려고 거짓말을 했다가 저주를 받아 죽은 사건이 나옵니다.
2. 마귀는 3가지 작전으로 사람의 마음을 혼돈하게 만듭니다.
① 달콤한 말입니다 / 내 편에서 말을 해주지만 범죄하게 하는 말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려고 하면 다른 걱정을 앞세워 드리지 못하도록 인간의 생각을 마음 속에 넣어줍니다.
② 비교하는 말입니다 / 장로도 그만한 헌금 안했는데 내가 왜 하나? 다른 사람들이 비웃으면 어떻게 하나? 등
③ 다음으로 미루게 합니다 / 오늘만 날인가? 내일이나 다음에 하자. 등
4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1. 본문은 빌라도의 아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빌라도에게 권면한 말씀입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꿈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꿈의 내용은 빌라도의 아내가 꿈속에서 예수님 때문에 많은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해하지 않도록 당부하는 말씀이었습니다.
2. 그러나 빌라도는 아내를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보다 백성을 통하여 들려지는 사단의 음성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허락한 후에 자신의 손을 씻으며 자신의 무죄를 선포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은 무죄하고 결백하다고 선포한다고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는 일생일대의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불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 되었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제물로 죽으셨으나 3일만에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는 기적을 이루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결 론
1. 4가지 음성을 분별하여 듣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① 욕심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② 자기 고집이나 자기 생각으로 표준을 두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2. 4가지의 음성을 분별하여 들을 수 있는 방법은?
①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 회개(悔改)
②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할 때
③ 설교를 통하여 깨달음이 올 때
④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받아들이게 될 때
3. 소리를 바로 듣는 자의 결과
① 4종류의 소리를 바로 들으면 성공적인 삶으로 존경받는 사람으로 천당을 가게 되고 축복을 받게 됩니다.
② 4종류의 소리를 바로 듣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으로 가룟 유다와 같이 불행으로 끝나고 지옥을 가게 됩니다.
마음에다 시온의 대로를 뚫어라
시 84:4-5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도로는 문화 발전의 기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로 이 땅에는 3가지 종류의 도로가 있는데, 첫째가 전철, 고속도로, 철도 등이 다닐 수 있는 육로가 있고, 둘째는 비행기가 다니는 항로가 있는가 하면 배가 다니는 바다 위에 해로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6․25 사변을 통해서 많은 도로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시편 기자는 성도들에게 “마음에다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으니, 즉 “마음의 문을 넓게 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좁은 소견을 넓게 열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길은 어떻게 만들어지며 우리 심령에는 어떤 대로를 뚫어야 하는가?를 찾아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길을 만드는 방법
1. 골짜기를 메워야 길이 됩니다 / 부족한 것을 채워야 합니다.
① 무지한 것을 지혜의 은사를 받아 메워야 합니다.
요셉은 배움의 학식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애굽의 총리가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② 하나님께 믿음으로 모자란 것을 구하여 메워야 합니다.
지식이 없을 때 지식의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고전 1:5).
건강하지 못할 때 건강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주릴 때 물질의 축복을 주십니다. 광야생활의 40년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2. 높은 곳은 깎아 내려야 합니다.
① 교만한 것을 낮추어야 합니다 / 이기주의, 명예, 권세에 대한 허영심을 버려야 합니다.
② 세상의 생각은 버리고 겸손해야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교만의 바벨탑을 쌓지 말아야 합니다 /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3. 굽은 곳은 바로 잡아야 합니다.
① 삐뚤어진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고로 헛된 질투, 시기, 모함 등을 버려야 합니다.
② 내가 걸어가는 길이 잘못 되었으면 바로 잡아야 합니다. 탕자의 길이라면 돌이켜 아버지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노름, 도적, 시기 등).
2. 어떤 대로를 마음에다 뚫어야 하나?
1. 은혜의 대로를 뚫어야 합니다.
① 은혜는 예수이십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확신있게 믿어야 합니다.
②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인내, 온유, 사랑, 희생 등 입니다.
③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의 대로를 뚫을 수가 있습니다.
1)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주일성수하지 못한 죄, 하나님의 것 즉 십일조를 도적질한 죄, 영의 호흡인 기도 생활하지 못한 죄 등을 말합니다.
2) 마음의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3) 불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4) 불순종을 버려야 합니다.
2. 능력의 대로를 뚫어야 합니다.
① 능력이란 주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빌 4:13). ② 능력을 받으면 어떻게 변화받나?
큰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며 담대한 믿음으로 충성, 봉사, 순종하게 됩니다. 또한 유혹하는 마귀 싸워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신의 팔에 힘이 있는지를 알려면 상대와 팔씨름을 해보면 알게 되듯이, 마찬가지로 믿음도 고난을 당해 봐야 믿음의 척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③ 그러므로 능력을 받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막 9:29, 빌 4:6).
기도는 하는 방법에 따라 기도가 있으니, 언제나 드리는 기도요 또한 간구가 있으니 특별한 기도로 금식, 철야, 작정기도 등을 말합니다.
3. 시온의 대로를 뚫어야 합니다.
① 성경에 나타난 3대 산
1) 모리아산 :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던 산
2) 시내산 : 모세가 십계명(十誡命)을 받은 산
3) 감람산 : 예수께서 부활하신 산
② 성도의 마음에는 천국을 향한 시온의 대로가 뚫려야 합니다. 스데반은 순교할 때 하늘이 열리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③ 시온의 대로를 뚫는 방법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회개하고 기도하면서 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자라게 하고, 특별기간을 정해놓고 부르짖을 때 성령은 충만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결 론
1. 성도의 마음에는 3가지 대로가 열려야 합니다. 은혜의 대로, 능력의 대로, 시온의 대로입니다.
2. 3가지 대로가 열리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정(認定)을 받습니다(행 11:26).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됩니다(행 13:22).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됩니다(행 13:22).
송상구 목사 편 ∙∙∙∙∙∙∙∙∙
● 성결대학교 졸업(지사과 21회)
● 단국대학교 대학원 도시개발학과(행정학 석사)
● 現 성결대학교 총동문회 서기
● 現 예일교회 담임목사 (☎ 0344-912-3004)
<고양시 일산구 탄현동 1480 탄현부영아파트 704-911>
● 한국오라토리오 합창단 지도목사
● 수선화 선교무용단 지도목사
◈ 왜 낙심하십니까? (갈 6:6-10)
◈ 영원한 사랑(Love is Never-Ending) (고전 13:8-13)
왜 낙심하십니까?
갈 6:6-10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이미 세상을 떠난 스탠리 존스라는 선교사는 젊은 나이에 인도에서 선교 사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복음을 전해도 완악한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스탠리 존스는 너무 한심하기도 하고 사기도 떨어져서 사과나무 밑에 쓰러져 누워 있었습니다. 그 때 나무 사이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스탠리 존스, 피곤하지? 지쳤지?”
“예, 하나님, 지쳤습니다.”
“왜 지쳤느냐?”
“제가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저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저들에게는 열매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과나무를 보아라. 지금은 열매가 없는 것 같으나 뿌리가 땅에 묻혀 있고 잎이 태양을 향해 펼쳐 있고 채널이 나에게 향해 맞춰져 있을 땐 언젠가 좋은 열매가 맺힐 것이다. 낙심하지 말아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힐 것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잘될 때가 있는가 하면 안될 때도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온 정성을 다 한다고 하여도 좌절되고 실패할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역시 잘될 때가 있는가 하면 안될 때도 있는 법입니다. 좋은 일만 있을 때, 혹은 신앙생활이 잘될 때에야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정작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뭔가가 안될 때일 것입니다. 바로 이때 가장 먼저 찾아 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은 “낙심(落心)”이라는 불청객입니다.
낙심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마음이 떨어진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중 혹 좋은 일을 좋은 동기로 시작했다가 다른 사람에게 오해받고 그 일을 포기한 후 “내가 그 일을 괜히 시작했지”라고 후회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주의 일에 뭔가 해보려고 뛰어 들었다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차츰 그 일이 부담스러워져 마침내 뒤에 처지면서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했던고!” 하는 후회를 해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낙심은 일반적인 삶의 현장에서 혹은 신앙의 봉사 영역에서 어디에서나 존재하면서 우리를 괴롭히는 괴물과도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이 낙심의 원인이 무엇이며, 낙심이 주는 해독은 또한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이 낙심이라는 병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신앙의 표준으로 삼고 사는 신앙인들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그 해답을 얻어야 하는데 이 낙심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과 치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삶이 이 낙심 앞에 직면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낙심이 여러분의 삶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낙심의 이유와 치유방법을 찾아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가히 결과주의 시대라 말할 만큼 사람들은 결과만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과가 무엇이냐? 어떤 업적을 남겼느냐? 하는 이것이 무한경쟁사회의 실태입니다. 더구나 이런 경쟁 속에서 어떤 좋은 일을 좋은 의욕과 좋은 동기를 가지고 시작하지만 결과가 없을 때 낙심하고 맙니다. 땀은 흘렸지만, 의욕을 가지고 부딪쳐 보았지만, 노력했지만… 결과가 없을 때 낙심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의욕을 가지고 작정기도도 하고, 철야도 하고, 기도원도 가보지만 시간이 지나도록 기도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거기서 바로 낙심이란 불청객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과가 없을 때, 그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는 그 어떤 일의 결과보다 동기를 더 소중히 여기시는 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따라서 하나님의 관심은 결과보다 동기에 있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었느냐? 아니면 성령을 위하여 심었느냐? 본문의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심느냐? 네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좋은 동기로 시작한 일은 좋은 결과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좋은 동기를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사람들이 예수 믿다가 낙심합니까? 예수 믿는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소원성취 사업성공, 육신건강 등을 목적으로 예수를 믿었다면 이런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낙심하게 됩니다. 만일 성경적 동기인 구원받기 위하여 예수를 믿었다면 그 사람은 결코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봉사도 그렇습니다. 매년 교회 내에서 일할 분량을 맡지만 몇 개월이 지나면 낙심자가 생기고 맡겨진 일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나타납니까? 역시 동기의 문제입니다. 내가 왜 충성하는가? 내가 왜 봉사하는가? 나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함입니까?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함입니까?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함이었다면 “낙심”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헌금 문제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헌금을 함으로 은혜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드린 것 때문에 낙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낙심합니까? 바로 동기의 문제입니다. 왜 십일조를 하며, 왜 감사헌금을 드리며, 왜 기타 다른 헌금을 합니까? 내가 복 받기 위해서 입니까? 성경은 그러한 동기를 육체적 동기라고 말합니다. 물론 헌금을 드리면 복이 옵니다만 그것은 “이 모든 것”일 뿐이지 결코 “그의 나라와 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다음 세 가지 이유이여만 합니다.
첫째,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모든 의식주 생활이 하나님의 공급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까지 모든 것을 완벽히 구비해 놓으신 다음 마지막 잘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 인간이 가지고 온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태어날 때 밥숟가락을 들고 나온 분 있습니까? 옷을 입고 나온 분이 계십니까? 저금통장을 들고 나온 분이 계십니까? 세상 어느 누구든 다 빈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의 소유를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이 벌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러한 것을 소유할 수 있도록 건강, 직장, 사업을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홍포 입은 부자를 기억하십시오. 그는 자기 것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 불려가니 모든 것이 공수표였더란 말입니다. 따라서 헌금은 “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요 그것을 이 물질로 고백합니다.”하는 신앙고백적 동기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동기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순종하면 의요, 불순종하면 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말만의 사랑이 아닌 독생자를 죽이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이는 이론적인 사랑이 아닌 실제적 사랑이요, 차선적 사랑이 아닌 최선의 사랑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명확히 증명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 대한 사랑이 이러 하다면,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은 최선의 것을 희생하여 사랑을 표현하셨는데 여러분은 무엇을 희생하여 사랑을 표현하셨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헌금, 바로 이것이 사랑의 표현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입니다. 비록 분량으로는 십분의 일이지만 우리의 중심은 십분의 십이 다 담겨있어야 합니다. 물론 다 드린다고 해서 주님의 희생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십일조의 동기는 결코 축복의 수단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십일조하는 자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우리는 축복의 복채로 드려서는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십일조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사랑의 표현입니까, 아니면 축복의 복채입니까? 감사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예물을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감사의 조건을 더 많이 주시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감사예물을 드리는 동기가 단지 더 많은 감사조건을 받아내기 위함이라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동기임이 틀림없습니다. 감사예물은 그야말로 순수하게 감사를 예물로 표현하는 신앙고백이어야만 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의 희생에 비하면 억만 분의 일도 안된다는 빚진 마음을 간직한 채 무엇인가 드리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에서 드린 예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아이작 왓츠(I. Watts)라는 사람이 처음 구원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 같은 사람도 구원하셨다는 사실에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은혜에 너무나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는 구원의 감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벌레같은 날 위해 큰해 받으셨나
“벌레같은 날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다니” 그는 마치 꿈꾸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는 계속하여 고백합니다.
내 지은 죄 다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하나님의 그 큰사랑, 그 큰 은혜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내가 주님께 무엇을 드릴 것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들고 눈물 흘리도다
무엇을 드리고자 십자가 앞에 나갔건만, 십자가를 보자마자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얼굴을 감히 못 들고 그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바칩니다
“주님, 펑펑 쏟아지는 이 눈물로 주님의 은혜를 만 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는 아무리 울어도 눈물로는 못 갚을 줄 알아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몸 밖에 없어 이몸 바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예물은 바로 이러한 동기라야 합니다. 이러한 성령에 속한 동기 결여되었을 때 거기서 낙심이 찾아오는 법입니다. 왜 많은 한국교회 성도들이 헌금에 대하여 시험에 빠져 있습니까? 교회는 이러한 동기를 설정해 주지 못 한 채 “양(量)”만을 강조했기 때문이며, 이러한 성서적인 동기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기도는 어떻습니까? 기도에 대해서도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계십니까? 기도에 대해서도 동기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 기도하십니까?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십니까? 아니면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십니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마디를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기도제목을 대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도제목이 응답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케 되고 거룩하게 됩니까? 여러분의 기도응답이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됩니까? 이 세 가지 질문에 모두 “예” 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기도의 동기는 올바른 것이지만 이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하기를 주저하신다면 여러분의 기도의 동기는 육체를 위하여 심는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 가지를 스스로에게 던져서 여러분의 기도의 동기를 하나님의 뜻대로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낙심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의 동기를 보시고 채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를 추적하십니다. 결과보다 동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계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그 동기가 순결하다면 당장에 내가 기대하는 결과가 얻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고 나를 기쁘게 열납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성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모든 것을 네 마음대로 하라”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순수한 동기로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은 잘못될 수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어떤 동기로 그 일을 시작하셨습니까? 만일 여러분의 동기가 선하고 순결하다면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동기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혹 낙심하고 계신 분들은 다음 9절 말씀을 들어보시고 새 힘을 내십시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영원한 사랑(Love is Never-Ending)
고전 13:8-13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New England에 시민전쟁이 일어났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 아가씨가 약혼을 했습니다. 그 후 그녀의 약혼자는 군대에 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식은 제대 후로 연기하게 되었습니다. 이 약혼자는 늘 약혼녀를 생각하며 군복무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느 날 심한 전투에서 그만 그는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의 약혼녀는 그 상황을 소식도 모르고 사랑하는 이에게서 온 편지만을 읽고 또 읽으며 사랑하는 이가 돌아 올 날 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편지 오는 것도 끊겼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그녀는 하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를 받아보니 전에 오는 편지의 글씨체와 다른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서둘러서 편지 봉투를 열고 내용을 읽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약혼자는 “나의 사정을 당신에게 말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나는 전투 중에 두 팔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내 손으로 편지를 쓸 수 없어서 나의 친구가 대신 이 편지를 써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전에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는 당신을 우리의 약혼으로부터 자유케 하고 싶습니다”고 써 있었습니다. 이 아가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얼마 후 약혼녀는 답장을 하지 아니하고, 직접 기차를 타고 사랑하는 약혼자를 만나러 갔습니다. 군부대의 천막으로 지어진 병사들의 막사에 도착했을 때, 부대에서 그녀를 알아보고 그녀가 사랑하는 부상당한 병사에게 안내하여 주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사랑하는 약혼자를 만나는 순간에 그녀의 양팔은 부상당한 병사, 양팔이 없는 병사의 목, 장차 남편이 될 병사를 안고 울면서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나는 당신을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나의 두 팔이 지금부터 당신을 돕겠습니다. 나는 당신과 영원히 함께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그의 가족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또한 이 사랑은 성숙한 성도들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참 사랑은 세속적인 행복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참 사랑은 영원합니다 (True love has no ending at all).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우리는 다시 한번 살펴봅니다. 그리고 사랑은 무엇보다 제일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 신앙생활 속에 은사가 중요하지만 사랑은 이것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1.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합니다(8).
사랑은 영원합니다. 이 사랑은 사람이 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사랑이 아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할 때 우리의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 안에는 성령이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이 사랑은 남녀가 서로 만나 정을 주는 사랑과는 다릅니다. 우리 나라 지난해 통계에 보면 3-40대 결혼생활자 중에 10쌍 중 3쌍이 이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랑은 우리의 허리띠처럼 졸라 메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사람들로부터 억누르는 사랑이 아닙니다. 강제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환경으로부터 억누르는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이기에 자식을 사랑한다는 의무감이 아닙니다. 고린도의 교회들은 가장 중요시해야 할 사랑은 소홀히 했습니다.
교회가 사랑없이 부흥하여 보십시오. 그 교회는 언제가 그리스도의 몸을 아프게 합니다. 교회가 갈라집니다. 많은 교회가 성령의 역사 속에서 부흥되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갈라졌다고도 말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교회 안에 사랑이 넘친다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교회는 초대교회처럼 부흥의 불길이 치솟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로마의 권력아래 있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애들아! 너희들은 아느냐? 나는 나의 외아들 예수를 죽이면서까지 너희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주로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참다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송아지가 기뻐서 뛸 때는 앞발보다 뒷발을 더 높이 쳐들고 뜁니다. 우리가 앞에서 볼 때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뒤에서 볼 때는 그 송아지가 기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사람들의 뒷 모습을 바라 볼 때 기뻐할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8-12).
왜냐하면 은사는 신앙생활 하는데 중요하지만 온전한 것이 오면 사라집니다(8-10). 예수님이 오시면 필요하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사랑보다도 은사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은사 때문에 분란이 일어나 사람들의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내는데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강조한 사랑을 우리는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참된 영적 성숙을 찾아야한다(11).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 보는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 중요한 것을 잃게 됩니다.
얼마 전에 아프리카에서 20여년 동안 선교사로 있다 돌아 온 85세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2시간 동안 그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있을 때 자기 부인은 간호원으로 있었고 자기는 병동을 돌면서 의사와 간호사들 그리고 의과대학생들에게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하다보니 하나님이 원하는 일 중요한 일을 못했습니다. 마지막에 그의 말이 바쁘게 움직이는 스케줄 때문에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잃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바쁘게 만드는 것은 사단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기도의 위인들을 보십시오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이들은 생명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에스더, 느헤미아, 다니엘 … .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는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합니다(12).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학식으로는 명확하게 볼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 부인은 자기 남편을 부를 때 “백과사전”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자기 남편은 연구하기를 좋아하고 누가 질문하면 그것을 문서로 만들어 답을 하는 일을 즐겨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연구해도 우리의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알 뿐 입니다.
요한1서 3장 2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주님의 사랑을 이웃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목말라 있는 사람에게 냉수 한 컵이 필요합니다. 사랑에 굶주려 있는 사람에게 사랑이 필요합니다. 서양 사람 집에 방문하면 개나 고양이 없는 집이 별로 없습니다. 이것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고립된 생활 속에서 나오는 외로움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개도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좋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3. 사랑이 제일입니다(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실체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 사라집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을 때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병 낫기를 기도했을 때 병이 나았습니다. 그 후 다시 나은 병을 위하여 믿음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소망은 미래에 일어날 것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우리의 가장 귀한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욕망은 채워집니다. 우리가 휴거되는 순간 우리의 소망은 사라집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소망이었는데 만난 후에는 소망이 필요없습니다.
사랑은 제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은 어떤 것보다도 앞섭니다. 사랑없는 은사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은사보다도 중요합니다. 사랑은 제일입니다.
헤셀 포드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어떤 부자에게는 수년 동안 부리고 있는 충직한 중국인 하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하인이 주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인님, 다음 주에 고국으로 돌아갈 일이 생겼습니다.”
주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결혼하려고 고향에 가나? 그렇다면 좋네. 두 부부가 미국에 와서 우리 일을 도우면 월급을 배로 올려 주겠네.”
“아닙니다. 저는 죽으러 갑니다. 얼마 후 저는 죽을 것입니다.”
“무슨 소린가? 자네가 왜 죽어야 한단 말인가? 난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네.”
중국인 하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제 동생이 죄를 지어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동생은 나이가 26살이고 저는 56살입니다. 동생에겐 아내와 자녀가 있지만 저는 홀홀 단신 입니다. 동생은 가난하지만 저는 돈을 어느 정도 저축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는 가족 중에는 가족 중에서 다른 사람이 대신 형벌을 받아도 좋다는 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향에 돌아가서 그 동안 저축한 돈을 동생에게 주고 대신 죽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 후 그 충직한 종은 고향에 돌아가서 자기 동생을 살리고 대신 죽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우리를 사랑하신 형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형님되시는 우리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와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이기운 목사 편 ∙∙∙∙∙∙∙∙∙
● 성결대학교 졸업(23회)
● 들소리신문 이사
● 現 성결대학교 총동문회 부회계
● 現 서울1지방회 부회장
● 現 평강교회 담임목사 (☎ 313-3939, 362-1004)
<마포구 아현1동 85-315>
◈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4-8)
◈ 용서하며 삽시다 (행 7:54-60)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4-8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람은 대체로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선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에 이 육체에 따른 본능이 주도하는 육체 주도적인 인간.
둘째, 항상 합리적인 이론으로 이치에 맞는 삶을 살아가려는 이성 주도적인 인간.
셋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으로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진 성령 주도적인 인간입니다.
물론 사람은 육체를 입었기에 육체적인 욕망이 있고, 정신을 가졌으므로 합리성도 추구하며, 또한 기술도 있고 능력이 있기에 생산도 하며 돈을 벌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육체 주도적인 인간이냐? 이성 주도적인 인간이냐?, 아니면, 성령 주도적인 인간이냐? 가 가늠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이 그 안에 내재하셔서 성령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성령 주도적이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선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는 뜻입니다. 흔히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도 내가 기도해서 하나님이 보상하시고, 내가 선하고 의롭게 살아서 하나님이 그에 따른 보상을 주신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율법적인 요소가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우리 인간은 응답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약속과 성취의 전철로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은혜로 이끄시고 인간은 따라가는 것이 성경적 진리입니다. 이것을 보다 쉽게 이해하려면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가령,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고 착하면 부모님들은 칭찬을 하며 상을 주기도 하고, 잘못했을 때에는 책망도 하고 때리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 자식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주도하고 부모가 보상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전적으로 부모가 주도하고 자녀들은 순응하는 것뿐입니다. 자녀들이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 부모님은 아픈 마음으로 바로 인도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잘하면 기쁜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차이가 있을 뿐, 부모가 주도적인 사랑으로 이끌어간다는 데는 차이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전적인 은혜로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며, 우리는 이 은혜 앞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약속을 주시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들이 요구할 때마다 필요한 대로 주시면 좋을 텐데, 하나님은 왜 약속을 주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좀 조급한 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적 약속에는 하나님께서 정한 시기와 방법이 있습니다. 아니,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시기에 받을 자격을 키워서 주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요구한다고 해서 땅문서를 주는 부모가 있습니까? 요구한다고 해서 그대로 즉석에서 줄 수는 없으며, 주어서는 안되기에 먼저 약속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어음입니다. 약속어음은 당장에 현금화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약속 시간이 되어야 돈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한을 믿고 기다리며 오늘 내게 주신 바에 대해서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주시면서 우리가 자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중생을 통하여 태어나게 하고, 성령을 통하여 성장하며 성숙하게 되어, 그 어느 수준에까지 이르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그 수준에 이르러야 약속하신 그 선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사실인즉 조급한 편은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부모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자라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받을만한 자가 될 때를 안타깝게 기다리고 계신단 말입니다. 성경은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구할 때까지 기다려서 그 자격을 갖춘 다음에 주시는 것입니다. 받을 준비를 하지 못해 받지 못하는 우리도 다급하지만, 주고 싶어도 주시지 못하는 하나님은 더욱 마음 아파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믿음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가 주시고자 하는 시간과 방법을 우리가 이행하도록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도 약속의 성취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속대로 오셨고 말씀을 주셨으며 역사하셨고, 그리고 다시 재림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생활 속에서도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하여 약속을 주시고, 성취하시고, 또 약속하시고, 성취하시는 일들을 계속 반복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분할 성취라고 말합니다. 본문에도 분할 성취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으리라. 권능을 받으리라. 내 증인이 되리라”하신 약속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 그러면 그것을 받고 나서 귀한 일들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종말론적인 약속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크게 두 가지를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1. 성령의 세례를 받으리라는 약속입니다.
세례는 기독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세례 자체가 신학적 의미 전체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학적인 의미로 설명하면, 옛 사람은 완전히 죽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그 귀한 사건이 이 현실 속에 나타난 상징입니다. 이제 율법으로 죽고 은혜로 살며, 나 자신으로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인간, 세속적인 인간은 죽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성령 주도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역사가 세례이며, 성령이 임하면 이런 일이 이루어지겠다는 말씀입니다.
영적으로 오는 엄청난 변화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것은 생명적인 변화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신앙 생활을 “매일 세례”라는 한마디로 표현했습니다. 매일 죽고 매일 사는 것입니다. 세속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것을 계속 매일 죽이고, 그리스도적인 것으로 계속 살아나는 역사입니다. 이제 성령은 내 안에 계시며, 그가 주도하십니다. 내 생각도, 내 주장도, 내 목적도, 방법도 전부 성령이 주도하십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세례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역사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순간순간 임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할 때 기탄 없이 수천 명 앞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무식한 자였으나 그가 설교할 때 많은 사람이 감탄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충만하여 그의 언어와 지식을 성령이 주도하고 계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이용하셔서 역사하신 순간입니다. 또한 그는 성령이 충만할 때 비상한 용기를 가졌습니다. 어떤 비난이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어떤 오해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매맞고 핍박을 받으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들으랴, 하나님 말씀을 들으랴 너희가 판단하라”고 대단히 위트 있는 말을 했습니다. 이런 비상한 용기와 여유는 바로 성령 충만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온 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선택함에 있어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선택의 연속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직업을 선택하고, 사람을 선택하고, 순간순간 사건 속에서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그때마다 성령이 나의 선택을 인도하여 영적인 방향으로, 영원한 가치의 것으로, 그리스도적인 것으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성령은 내적인 변화를 일으킵니다. 어쩌면 이 변화는 자기도 모르게 변화하는 무의식적인 변화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딱부러지게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 세 번 거듭 나오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느 순간에 달라지게 됩니다. 성령은 나의 성격, 취향, 그리고 입맛까지도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면 취향도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지고, 성격까지도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그 변화는 계속되어서 어느 수준에 이르면 깜짝 놀랄 만큼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교회에 다니고도 아직 변화가 없다면 분명히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혹 가룟 유다의 후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룟 유다는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하고도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으니까요. 아무튼 변화하지 못한 자는 그 신앙에 뭔가 이상이 있음을 자각해야 하겠습니다.
성령이 내재하시면 내 생각, 내 존재, 즉 나의 나됨을 변화시키고 계속적으로 인쳐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주도권을 행사하여 “너는 내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항상 우리를 세례로 인도하십니다.
2. 본문에서는 “권능을 받으리라”고 약속을 주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습니다. 이 권능은 우선 죄를 이기고 죄책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그를 부인하고 도망갔던 제자입니다. 그런데 불과 50일쯤 후에 3천명 앞에서 담대하게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까? 아마 베드로의 마음속에서도 “내가 어떻게 감히 예수님을 전할 수 있을까?”하는 망설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을 이기는 힘이 성령입니다.
그는 죄를 이기고, 죄책을 이기고, 죄로 말미암은 저주를 이기고, 율법을 이기는 권능을 받아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권능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고 존경을 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예수의 이름으로 고쳤으니 조금도 우리를 특별나게 보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자기 교만을 극복하는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명예욕을 극복하는 귀한 시간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령받은 성도들은 욕심을 극복했습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유무 상통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권능은 협소한 민족주의의 문화적 장벽을 극복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이방 사람이라고 멸시하던 그들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권능은 고난과 핍박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오히려 핍박받을 때에 기뻐하며 공회로 나오리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손해도 보고, 매맞을 때에 오히려 감사하고, 찬송하며 기뻐했습니다. 이 권능은 죽음의 공포와, 나아가서 죽음을 이기는 엄청난 힘입니다. 그러기에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립시다. 힘으로나 능력으로도 안되는 것을 성령만이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에게만 능력이 있어 나를 죽이고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여 증인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권능을 받고, 그리고 증인이 되면 또 다른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두려워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용서하며 삽시다
행 7:54-80
저희가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그 소원은 예수님을 닮는 일입니다. 성경 인물 가운데서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이라는 말은 ‘스테파노스’ 즉 ‘면류관’이라는 뜻입니다. 면류관은 누가 받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자가 받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라는 이름은 예수를 닮은 최고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최고의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순교의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설교를 통하여 유대인에게 목이 곧고 할례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이를 갈며 달려들어 스데반을 돌로 쳤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하나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리고 다시 그는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하자 잠이 들었습니다.
1. 예수님을 닮은 스데반
성경에서 가장 길게 그리고 자세하게 기록된 죽음의 장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스데반의 순교의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죽으러 왔고 죽음을 통해서 그의 삶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도 위대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제일 먼저 십자가 상에서 용서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해주소서”라고 말씀하신 후 마지막으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반대로 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말한 후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것은 스데반의 겸손한 삶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감히 예수님처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요,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였기에 그는 주님 앞에 먼저 영혼을 부탁하고 그후에 용서를 빌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를 빌어 주는 기도는 아무나 못합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위대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설교를 잘했습니다. 그는 집사였지만 그의 설교를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그는 권능이 충만했기에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놀라운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으로 스데반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은 그의 인격 때문에 위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용서받은 자의 신앙 고백
우리는 스데반의 위대한 삶을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아야만 우리는 의롭다 인정을 받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용서받았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용서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서, 용서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용서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용서함을 받은 확증은 내가 남을 용서하는데서 나타납니다.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입니다. 용서받은 자는 남을 용서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자는 남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것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용서의 기도입니다. 나를 해치고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어야만 우리의 죄가 용서받은 확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주기도문을 반복하면 당신은 그때마다 당신의 사형판결문을 낭독하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면서 이 기도를 드리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 것 같이 나도 용서받지 못하고 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준다는 것은 내가 용서받은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용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함이요,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받은 것을 우리 스스로 확증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3. 용서받은 자의 천국
스데반이 돌에 맞는 순간, 그의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고 상처를 입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그는 누워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용서를 비는 기도는 있는 힘을 다해서 벌떡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냥 누워서 자기의 영혼만 부탁하고 죽어도 천국에 갈 것이거늘 어찌하여 그런 기도를 무릎을 꿇고 드려야 합니까? 그것은 용서받은 증거를 가지고 주님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귀한 말씀은 우리에게 심각한 도전이 됩니다.
스데반은 천국에 가서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원수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돌에 맞아 온몸에 상처를 입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핍박을 받고 순교자의 영광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그대로 죽어도 아쉬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상대방 때문만이 아니라 자기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천국을 사모하였으며 주님이 자신을 맞아 주실 것을 알고 있었기에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용서하며 용서받은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서 상 받기 위해서 그러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귀한 시간에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확신을 갖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확신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만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남을 용서하는데 망설이면 안됩니다. 사소한 일에도 부부간에 다투고, 과거를 들추어내고, 서로 작은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또 형제간에 서로 원한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부모에게도 한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천국 가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일흔 일곱 번씩이라도 용서하라.” 베드로가 생각하기에는 세 번만 용서하면 합당한 줄 알았는데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끊임없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끊임없이 용서받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4. 용서하는 자가 얻는 안식
용서하는 자에게는 안식이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60절). 여기 ‘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입니다. 이 말을 하고 잤다고 했습니다.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잤다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이 있고 잠든 사람이 있습니다. 죽으면서도 한이 맺혀 숨이 꾾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한에 사무쳐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를 갈며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잠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스데반은 잤다는 말은 용서받은 자로서 천국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천국은 주님과 함께 잠을 자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면 용서받은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렇게 용서하면 곧 나에게 평화가 오고 안식이 옵니다.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미국의 한 저명한 내과의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의 환자의 50%를 퇴원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투약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마음속에 용서의 마음을 투입하는 것이다. 나는 환자에게 약을 먹게 할 수 있고 주사를 혈관 속에 투입할 수는 있지만 저들 마음속에 용서의 마음을 줄 수는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저들의 병을 고칠 수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용서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지 못하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 미움 때문입니다.
5. 민족의 평화는 용서의 정신으로
한국전쟁이 가져온 이 민족의 최대의 수난은 서로 원수가 되어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원수가 되어 죽이고, 빼앗고, 미워하고, 저주하면서 그것을 정당시하고 살아왔습니다. 지금은 한 민족이라는 개념만 남아 있지 서로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민족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동족을 원수라고 큰소리 치는 자가 분단시대의 애국자입니다. 남한을 원수 도당이라고 하는 자가 북한 정권의 애국자요, 남한에서도 북한을 원수로 생각하는 사람이 애국자입니다.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김정일과 같은 자에게 계속 원수라고 해야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국토의 통일, 체제의 연합, 또는 사상의 일치가 아닙니다. 용서하는 마음, 이것이 민족의 혼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민족을 살리는 힘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는 목적이 다르고 방법이 다릅니다. 배신을 당할지언정 배신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보복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속임을 당해도 속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미움을 받아도 사랑하며, 욕을 먹어도 복을 빌어주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기도해야 마음속에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용서하며 사는 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혹시 이 가운데 지금도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십시오. 나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네 죄를 용서한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용서해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저가 나에게 악하게 하는 것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을 때 용서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6. 면류관을 받은 스데반
스데반은 원수를 용서하는 기도를 드림으로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 여러 형태로 만납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와서 보배합을 열고, 무릎을 꿇고 경배하였습니다. 예수님이 3년 동안 활동하실 때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르며 따라온 사람들에게 병을 고치는 등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입니다. 한 강도가 “주 예수여, 나를 생각하소서”할 때 “네가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시며 그를 낙원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 사도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나야 할 예수님은 하늘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입니다.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스데반이 만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서서 “스데반아, 내가 너를 맞이한다. 나를 닮은 네가 왔구나. 고맙다. 네가 나처럼 원수를 용서하고 오는구나.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면서 스데반을 맞이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이 보좌에서 일어서서 스데반을 맞이했을까요? 앉아서 맞이해도 될 텐데 왜 벌떡 일어서서 맞이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스데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상 주시기 위하여 일어나신 것입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서 눈을 감고 천국을 그려 보십시오. 내가 천국에 갔을 때 주님께서 어떻게 대하실 것인가를 한번쯤 생각해 보십시오.
천사가 “예수님, ○○교회에서 아무개가 왔습니다”할 때 “모른다”하실까, 아니면 “그 사람만 생각하면 기분이 별로 안좋아”하실까, 아니면 일어서서 어서 오라고 하시면서 맞으실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한 가지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할 때는 땅에서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상에 높이 달려 있을 때 용서하셨습니다. 자기를 죽여서 용서하셨습니다. 자기를 죽이지 않고는 용서할 수 없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남을 용서할 때 자기를 별세시켜야 합니다. 자기를 죽여야만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로부터 해를 받고, 피해를 보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십자가에서 죽임으로 가능합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다시 사는 죽음입니다. 용서는 별세신앙의 고백입니다. 용서하면 하늘나라의 안식을 얻습니다. 스데반의 용서를 배워 스데반의 천국과 안식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임태선 목사 편 ∙∙∙∙∙∙∙∙∙
● 성결대학교 졸업(1923회)
● 성결교 대학원 졸업
● 現 성결대학교 총동문회 인터넷 선교부장
● 現 다사랑교회 담임목사
(☎ 701-5776, 702-0191)
용산구 서부이촌동 212-21
◈ 하나님의 사랑 (창 22:9-18)
◈ 믿음은 디지털입니다 (계 3:15-16)
하나님의 사랑
창 22:9-18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가치관일 것입니다. 그것은 시대적으로도 급속하게 다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삶의 가치관 혼란으로 인하여 삶에 중심을 잃어 삶의 목적성과 방향성을 상실케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삶의 가치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삶의 기준점이자, 중심점이며, 삶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나침반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나침반을 향한 믿음이 상실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마치 험한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또는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과도 같을 것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험하고 거친 인생의 멀고 긴 여로에서 구원을 가능케 하시며, 지치고 병든 영혼과 육체를 강건함으로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엡 2:8).
우리는 단지 말씀에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향하여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현실은 선택과 결정이라는 갈림길에서 종종 자신의 경험이나 육적인 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눈앞에 잡히지도 않는 신기루와 같은 세상을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임재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축복의 과정들 가운데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바를 가장 극적인 모습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진정한 믿음의 순수성과 그 아름다운 순전성을 배우며 함께 그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삶의 존재적 가치관과 주체성을 확립하였고,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벗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만큼 일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를 나눈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려지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불렀고, 그가 응답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였기에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의 첫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1. 부르심(Summons) ; 아브람의 순종(창 12:1-9)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단순하면서도 그 입장이 분명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브람 당시의 갈대아 지방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지리학적으로 갈대아는 페르시안 만 근처에 있는 유브라데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서 인류 문명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속하는 곳입니다. 아브람 시대에 이곳은 인류 문명의 태동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타지역에 비하여 부요하고 상당히 인류문명이 발달된 곳이었습니다. 또한 종교적으로도 인근 각처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갖가지 우상 잡신들이 난무한 곳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이곳 갈대아 우르에서 데라의 아들로 태어나 하란이란 지역으로 이주하여 자신의 아버지 데라와 그의 부인 사래 그리고 조카 롯이 함께 삶의 터전을 일구며 평온히 살고 있었습니다(창 11:31-32).
아브람은 그곳에서 첫 번째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의 나이 75세라는 고령의 나이였습니다. 그는 좋은 땅과 친구와 친족을 떠나야 했고, 터를 잡고 살고 있는 거주지도 버리고 알지 못하는 땅을 향해 오직 믿음으로 나아갈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습니다(창 12:1). 그가 지금껏 일구어 왔던 삶의 기반들을 일순간에 포기해야 한다는 것과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땅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설령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고 할지라도 주변적 환경인 그에게 딸린 식솔들의 의사들을 고려하거나 반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평온한 삶 가운데서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커다란 시련이자 시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과연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할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회의감과 자괴감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인생은 늘 결정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져 ‘Yes’ 또는 ‘No’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자 섭리라고 생각될 때에도 종국에는 그 선택의 행동은 자신 스스로가 우선적 선택권을 갖게 되고 무책임하게도 그 결정에 대한 책임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참으로 비논리적인 모습들을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는 고등적 사고관을 가진 인간에게서만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불완전성을 가진 유약한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원죄라는 죄성을 가지고 있는 죄인임을 재차 확인하는 것 밖에 아무런 유익이 없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선행적 양심만을 가지고 의로움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다가온 주님의 음성이 자신에게 매우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모습을 가진 형태로 다가왔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신뢰를 가지고 순종으로 응답하여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어 그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까지 이끄시고 열방의 아비로 영화롭게 하시는 모습들을 볼 때 참으로 드라마틱하기만 합니다. 그 안에는 인간의 지혜와 경험으로도 판단하고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세상적인 방법보다는 자신의 방법으로 자신의 영광과 그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실질적으로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순간까지 많은 역경과 고난의 아픔들이 따랐지만 그 이면의 본질적인 내용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더하시려는 축복의 도화선으로서 그것이 발화되어지고 타들어가 종국에는 그가 진정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2. 아브람의 실패와 하나님의 사랑(Failure and God's love)
순종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았던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그는 바로에게 자신의 아내인 사래를 누이동생이라고 거짓말을 꾸며대기도 하였습니다. 그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이와 같은 수단을 쓰기도 하였습니다(창 12:10-16). 그의 죄는 곧 드러났고,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셨고, 바로는 애굽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일행을 급히 쫓아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회복하는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길은 헌신의 뜻으로 단을 쌓고, 겸손히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께 단을 쌓으므로 하나님과의 신뢰의 믿음을 회복하였습니다. 또한 아브람의 롯과의 땅 분배시, 하나님께 맡기는 이기적이 아닌 사랑과 롯을 구해 주었을 때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3. 이름을 바꾸어 주신 하나님
아브라함의 나이 99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창 17: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제 이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네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창 17:5)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내 사래에 대해서도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 17:15-1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아브람은 그토록 많은 훈련을 받아 축복을 주시려고 이름을 바꾸는 그 시점에서도 웃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중에 이르기를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 수 있단 말인가? 사라는 90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라고 했습니다. 그의 이성으로는 그 나이에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강력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이름을, 곧 생각과 성품을 열국의 아비와 열국의 어미로 바꾸어주시어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함을 통해 믿음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롬 4:18-22)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시겠다고 했을 때 기가 막혀 웃었던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후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입술로 그 말씀을 시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4. 최고의 시험(창 22:1-24)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그의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했고 이삭은 그의 아버지와 함께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으로부터 큰 민족들을 일으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무조건 신뢰하는 것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모리아 땅의 지시한 산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단을 쌓아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칼로 그 아들을 잡으려고 합니다. 이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 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시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게 되는 큰 축복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일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다급히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심으로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향하신 계획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는 능히 모든 훈련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을 미리 아심으로 시험을 통해서 의롭게 하시며 온전한 믿음으로 인정되었을 때 미리 정하심을 허락하셨습니다. 곧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으려고 칼로 내리치려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지 않으면 이삭을 죽일 줄을 미리 아시고 다급히 아브라함을 두 번 불러서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하시며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셨습니다. 그 미리 정하심을 이루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이 내 생각과 다를지라도 먼저 중요하게 믿고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디지털입니다
계 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오늘날 매스 미디어(MASS MIDEA)의 발달은 우리 인간들에게 많은 정보와 편리성을 제공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유익성도 한층 증가하고 있는 추세로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의 활용도는 더욱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컴퓨터가 어떻게 구현되고 작동되어지는지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보아도 낯설고 복잡한 기기들로 채워져 있을 뿐 어떻게 컴퓨터를 작동하고 구동되어지는가에 대한 이해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컴퓨터의 기본원리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확합니다.
컴퓨터 회로의 근본원리는 0과 1이라는 숫자들의 집합체로 이루어져 있어 사용자들의 명령에 따라 작동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부언하자면, 사용자가 명령을 내렸을 때 명령에 따라 ‘YES = 1' 또는, ‘NO = 0'의 결과로 회로도가 연결되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이분법적 구성원리가 바로 디지털(DIGITAL)개념인 것입니다.
이러한 디지털의 발달은 기억용량의 무제한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도록 하여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화로 상대방과 통화할 때 청각으로만 의존해서 상대방과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그러나, 디지털의 발달은 청각뿐만이 아니라 시각적인 효과도 가져오게 되어 실시간으로 상대방을 보면서 쌍방간의 대화를 할 수가 있고 필요한 자료들도 서로가 공유하거나 전달해 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왜 믿음을 디지털에 비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통해 그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믿음’을 사전적 용어의 의미는, “어떤 신조나 종교에 대한 옳다는 확신이요, 신뢰, 성실이며 또 충성으로 의자에 앉거나 침대에 누울 때 긴장을 풀고 다른 의심을 갖지 않고 몸을 올려놓을 수가 있는데 우리가 바닥으로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 또한 하나님의 의심할 수 없는 그 말씀에 의지하는 것으로서 전적으로 그의 존재하심을 믿고 완전히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가 바로 믿음입니다. 말씀대로 믿음은 차든지 뜨겁든지 둘 중에 하나이어야 합니다. 디지털 세상에는 회색이 없습니다. 0 아니면 1로 분류되기 때문입니다. 결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체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통해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여리고성의 함락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에 들어와서 먼저 여리고성을 무너뜨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수 있는 방법을 여호수아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수 6:3-5). 하나님은 백성들로 하여금 제사장이 맨 언약궤를 따라가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엿새 동안은 매일 한번씩 돌고 마지막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을 돌면서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수 6:10).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왜 한 순간에 여리고성을 허무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따라가는 온전한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였으며 그대로 행하였을 때(하나님 기준으로 1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셨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키셨던 것입니다.
2. 다윗과 골리앗(삼상 17:41-54)
사울이 이스라엘 왕으로 있을 때 블레셋인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 엘라 골짜기에서 이스라엘 군대와 마주보며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은 히타이트 인들에게서 철을 담금질하는 새로운 방법을 배워왔기 때문에 철기문화를 가진 강력한 도시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청동기 문화에 있었던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 싸움에서 가드 사람 골리앗은 이스라엘 진영을 향해 싸움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울 비롯한 이스라엘군은 골리앗의 위용에 눌려 아무도 그와의 싸움에 나서지를 못했습니다. 이때 다윗은 아버지 이새의 심부름으로 이스라엘 진에 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조롱하는 소리를 듣고 골리앗과의 싸움을 자원했습니다. 그는 목동으로 양을 칠 때 사자와 곰과 싸워 이기도록 하셨고, 자신을 항상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주권자이시자 전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분명히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을 말씀으로 알았고 믿고 있었기에 담대함으로 골리앗 앞에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막대기와 시내에서 주은 매끄러운 돌 다섯을 가지고 골리앗에게로 갔습니다. 막대기를 가지고 오는 다윗의 모습을 보고 골리앗은 우습게 여기고 다윗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담대하게 말했습니다(삼상 17:45-47).
담대함으로 기세가 당당한 블레셋의 군대 앞에서 외친 다윗은 돌을 취하여 물매를 던져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시키고 쓰러진 골리앗의 칼을 빼어들어 그를 죽였습니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부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소년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의 온전한 믿음(1) 보시고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다윗을 도구로 삼아 그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선포한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3. 달란트 비유(마 25:14-30)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하시는 비유입니다. 그 비유에서 5달란트 받은 종은 5달란트를 남겼습니다. 2달란트 받은 종은 2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1달란트 받은 종은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와서 하나도 남긴 것이 없었습니다. 주인이 평가할 때 5달란트와 2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라고 칭찬과 상을 받았으나,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그 주인이 대답하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달란트 비유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1. 달란트의 양과 관계없이 맡겨진 대로 열심히 작은 일에 충성할 때 많은 일을 감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시고 하나님과 함께 즐거움에 참예하도록 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2. 하나님의 평가기준은 사람의 기준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주인을 더 잘 알고 있다고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있습니다. 주인 앞에서도 당당히 주인을 판단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펼 때마다 디모데후서 3:16-17의 말씀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이 인간의 지성과 경험으로는 해석되지 아니하며 상식과 합리성으로도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 충만하여 그 말씀대로 죽도록 충성하는 자라야 그 말씀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 앞에서 1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달란트 받은 사람이 5달란트를 남긴 것은 5/5=1입니다. 2달란트 받은 사람이 2달란트를 남긴 것도 2/2=1입니다. 그러나 1달란트 받은 사람은 아무 것도 없으니 0/1=0입니다.
이와 같이 마지막 심판 때 각기 받은 달란트대로 최선을 다하여 1이 되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 원리는 컴퓨터의 원리이며 지금 세상에서 많이 광고되고 있는 디지털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질 때, 크다 작다 하는 크기와는 관계없이 자기의 주어진 환경에서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1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착하고 신실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라고 하는 칭찬을 하십니다.
1은 연결이고 0은 단절을 의미하는 디지털처럼 우리는 뜨거운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요한계시록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 기준에 합격이 된 더운 신앙(1) 곧, 성결한 삶, 기독자 완전, 온전 성화를 이루기 위해 항상 깨어서 사도 바울처럼 내 몸을 쳐 복종케 하며, 날마다 나를 죽이며(고전 15:31), 말씀대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빌 2:13)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