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골 성지는 수원시와 용인시에 걸쳐 있는 광교산(光橋山, 582m) 기슭,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로437번길 67에 있다. 원래 손골 성지에는 교우촌이 있었다. 교우촌은 천주교 박해시기 박해를 피해 신자들만이 모여 살던 작은 마을을 말한다.
손골 교우촌의 형성 우리나라에 교우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이미 신해박해(1791년) 때부터였다. 하지만 손골에 교우촌이 형성된 정확한 시기는 알지 못한다. 단지 교회사의 흐름에 따라 기해박해(1839년) 이전이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초기 교회 가장 큰 박해였던 신유박해(1801년) 이후 많은 신자가 박해를 피해 서울이나 경기도에서 멀리 떨어진 강원도나 충청도 등으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지방에서도 박해가 일어나자 지방에 살던 신자들도 이주해야 했다. 어떤 신자들은 서울에서 더 멀리 떨어진 경상도나 전라도로 피신하기도 했지만 어떤 신자들은 서울 가까이 이동하여 교우촌을 이루며 살기도 했다. 서울 가까이 가서 살아야 신자들 상호 간 연락도 쉽게 할 수 있고 서로 도우며 신앙생활을 더 원활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해박해 이전에 이미 서울 가까이에 몇몇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831년 조선대리감목구(朝鮮代理監牧區)가 설정되고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서울 근교에는 교우촌이 많이 형성되었다. 선교사들이 자연스레 서울 중심으로 사목을 하게 되자 신부들 가까이 있어야 성사나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으므로 서울 근교에 교우촌이 늘어나게 되었다.
박해시기 손골 교우촌의 규모 병인박해 때 손골에서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한 도리 신부의 편지에 따르면, 도리 신부가 손골에 체류할 당시 손골에는 신자들만 살고 있었고 모두 12가구였다고 한다. 그리고 근처에 3명의 불교 스님이 살고 있었다. 이는 도리 신부가 손골에 있을 때 10여 가구가 살았다는 정부 측 기록과도 일치한다. 한편 박해가 끝난 다음 1900년 하우현에 본당이 생겼을 때 그 공소로 편입된 손골 교우촌의 신자가 47명이었다.
이렇게 볼 때 손골에는 적어도 45-50명 정도의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살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던 것 같다. 도리 신부의 편지에 따르면, ‘손골의 교우들은 주로 담배 농사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꾸려갔고, 논이 조금 있기는 하였지만 홍수로 폐허가 되어 먹을 것조차 구하기 어려운 생활을 하며 살았다’라고 한다.
손골 교우촌의 중요성
성 도리 헨리코 신부가 사목하다 신자들을 모두 피신시킨 후 홀로 포졸들에게 체포된 곳일 뿐 아니라 성 오메트르 신부 등 여러 선교사들이 입국해서 한국말과 풍습 등을 배우며 선교를 준비하고 활동하던 곳이다.
박해시대 서양 선교사들이 입국하면 안전한 곳에서 우리나라에서의 삶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선교사들이 신자들을 사목하기 위해서는 우선 새로운 언어와 풍습을 익혀야 했고 조선에서 살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안전하게 머물면서 이런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신자들만 모여 사는 적합한 교우촌을 찾아야 했다. 이런 교우촌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그곳에 사는 신자들이 열심하고 믿을 수 있어야 했다.
손골 교우촌은 이런 의미에서 다른 어떤 교우촌보다 선교사들의 신뢰를 받았던 것 같다. 박해시기인 1857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5명의 선교사가 손골에 묵으면서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적응기간을 가졌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도 신자들을 방문하며 사목하는 것을 잠시 쉬는 여름철 농번기에는 손골을 찾아와 피정도 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만큼 손골 교우촌의 신자들이 신앙적으로 견고하고 믿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가톨릭 굿뉴스 참조)
성지와사적지- (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