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불행한 나날을 보내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자 여섯의 불행’을 여러 챕터들 중 하나로 생각해내고서는 무척이나 뿌듯했다. 쓸 거리가 많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 여섯이 보낸 수많은 밤들 사이에는 각자의 불행이 한 겹 두 겹 꿰어져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나는, 술상에 놓인 안주들보다도 각자의 불행에 관해 이야기하며 위로를 건네는 일이 제일 훌륭한 찬이 되었을 적이 분명 있었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나의 불행들을 낱낱이 들여다보았다. 그중 무엇을 이 글에 풀어내면 독자의 절절한 동정을 받아낼 수 있을까 고민도 해보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문제를 발견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체로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는 것. 그간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대부분의 날들은 과잉된 자기연민에서 비롯된 의식의 합리화였다. 지금에 와서야 가능한, ‘냉철하게 바라보기’ 권법을 써서 냉정하게 나의 연대기를 바라보자면 하는 수 없이 그렇게 됐다. 의도치 않게 글감 보따리가 무척 가난해졌다. 다행히도(다행이라고 말해도 되는 건가), 오히려 선명해지는 불행들도 있었다. 그중 내 시선을 오래 묶은 하루에 관해 쓰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 하루를 생각하면 황량한 기분이 들고 금세 기분이 잡친다. 말하자면 날벼락 같은 날이었다. 하루 아침에 왕따가 된 날이고 나를 보호하던 무리가 갑자기 나를 막다른 길목으로 몰아세우는 이리떼로 돌변해버린 날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날은 체육대회 날이었다. 벽으로 반으로 분리되어 있던 전교생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오는 날. 그리고 내 엄마가 방문할 것으로 예정돼있던 날.
체육대회 전날이었다. 하굣길에서 나를 포함한 세 명이 남은 무리로부터 왕따로 지목됐다. 당시 우리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등하교를 함께했는데, 체육대회 전날도 다름없이 나는 종례 후에 친구들이 모여있을 학교 정문으로 바삐 나갔다. 정문 앞 벤치에 앉아있던 친구 몇, 그 주변에 서 있는 친구 몇. 그들은 따돌림 모의를 막 마친 참이었고 우리 셋에게 고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영영 연을 끊어버리자고 매몰차게 말하고 돌아서는 주동자를 선두로 몇 시간 전까지 나와 하하호호거리며 점심을 먹던 친구까지 마저 등을 돌려 멀어졌다. 우리 셋은 좀 망연히 멍을 때리다가 헤어졌다. 나와 다른 친구 하나는 집까지 같은 방향이었고 남은 친구 한 명은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갔다. 다른 두 갈래의 길이 체육대회 날 울고 웃을 자의 표정을 결정해버릴 줄은 영 모르는 채였다.
다음날 등교를 하고보니 전날 나를 포함한 다른 왕따 친구 한 명과 다른 방향으로 갔던 한 명은 남은 무리와 화해를 한 상태였다. 하룻밤 사이에 그런 급진적인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다름 아니라 그 애의 집이 왕따 주동자 친구의 등굣길 위에 있고, 그 애는 평소처럼 등굣길에서 등교 무리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고, 그렇게 친구들에게 합류하면서 자연스럽게 화해를 하게 된 모양이었다. 그 애가 부러웠다. 짧은 시간 동안만 불안할 수 있었을 테니까. 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운동장에 설치된 철봉을 둘러싼 채 법석을 피우며 놀고있는 어제까지의 친구들에게 접근했는데 호락호락하게 나를 그 사이로 들여주지는 않았다. 거부당한 느낌에 확실히 상처받고서 우리 반이 있는 구역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다른 왕따 동지가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 왕따 동지가 출결을 신경쓰는 일이나 품위 좋은 학생으로 보이는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아이였다는 데에 있었다. 체육대회란 모름지기 무리지어 웃고 떠들고 달리다가 포카리 한 병 나눠 마셔주며 당을 보충하는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자신이 왕따가 됨으로써 이 모든 재미들을 압수당했다고 생각한 그 동지는 나를 버리고 무단 조퇴를 해버렸다. 덕분에 나는 확실한 혼자가 되었다. 운동장의 왕따, 그렇다고 그 애처럼 그곳을 용감하게 떠나버리는 무단 조퇴 소녀가 되기엔 간땡이가 덜 부은 왕따. 아무튼 왕따.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왔다. 이로써 그날은 빼도박도 못하게 불행해졌다. 엄마는 담임 선생님께 하나 드리라고, 또 친한 친구랑 나눠 마시라고 캔으로 된 포카리스웨트 세 개를 사서 검정 비닐봉지에 담아 내게 건넸다. 그 포카리가 그날 나를 불행의 정점에 데려다 놓았다. 나는 엄마를 보자마자 더 외로워졌고 슬퍼졌다. 이참에 엄마에게 그냥 말하고 싶었다. 이 포카리를 건넬 친구가 오늘 나는 없다고. 나는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이 음료수를 여섯 개짜리 묶음으로 사왔어도 부족할 친구들과 함께였는데, 그리고 오늘도 여지없이 함께일 줄 알았는데 하루 아침에 따돌림 당했다고. 이 비극적인 사실이 발각되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운동장엔 엄마 한 명뿐이었으니까.
엄마는 음료수를 친구에게 갖다주지 않고 뭐하냐고, 음료 다 뜨거워지겠다며 자꾸만 나를 재촉했다. 엄마가 잠시 왕따 주동자보다 원망스러웠지만 그 마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엄마는 바빴고 금세 내게 인사를 하며 홀연 가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하지만 엄마는 그 운동장에 더 오래 남아줄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내 얼굴에 깔린 표정이 말보다 더 솔직한 무언의 막막함을 고백하고 있었을 테니 엄마는 황급히 자리를 떠나준 것이다.
그 나이쯤에 서있는 나는 초조하면 초조한 대로, 당황하면 당황한 대로 티가 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평정을 죽도록 찾아헤매 봐도 그걸 내 것처럼 가지기엔 몸도 마음도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막막한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며 엄마가 이 운동장을 나가기만을 기다리던 나를, 근방 몇 미터가 휑하니 비어버린 내 곁을 차라리 지키지 않고 금세 떠나주어서 고마웠다. 무엇보다 엄마가 내 절망을 아는 체하지 않아주어서, 그렇게 그 당시 내게 가장 중요한 자존심을 다치게 하지 않아주어서 고마웠다.
어떤 무리에서 추방당하고 실격되었다는 느낌을 건너 종착한 상실감이라는 마음이 그날의 나를 한껏 잡쳐놨기도 했으나 더 강렬하게 나를 쥐어 패던 무엇은 아무래도 사무치는 쪽팔림이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땐 돌아가며 왕따 시키고 왕따 당하는 건 우리 소녀들 사이에 공유되는 어떤 종류의 자학적인 놀이이자 문화였다. 그 문화는 어떤 나라의 아이들이 거친다는 성인식처럼 은밀하기까지 했다. 나는 언젠가 그 문화를 통과하는 게 어쩌면 이 무리의 진정한 일원이 되었다는 임명 절차와도 같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건 언제까지나 내가 왕따인 상태가 나와 무리, 그리고 학교에 눈치빠른 몇 명만 알고서 비밀스럽게 넘어갈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였다. 엄마까지 알게 될지도 모르는 무방비의 체육대회 공간 상에서는 난 혼자가 되길 결코 바란 적 없었다.
하루가 영원 같던 그 어린 날을 뒤로,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때만큼의 절절한 불행, 절절한 막막함을 피부로 느껴본 적이 한 손에 꼽는 것 같다. 분명 불행은 그때보다 훨씬 더 커다란 덩치로 내 앞에 나타났겠지만 지나간 시간 값을 하며 커진 내 임기응변 능력이나 합리화 능력, 처세술 따위가 나를 그로부터 구해줬을 것이기 때문에.
이번을 계기로 불행에 관해 생각하면서는 불행이 정직하게 단어 그대로 ‘행복하지 않은 상태’라기보다는 더 가혹한 요소가 뒤엉킨 상태라고 확신했다. 그렇기에 내 불행 보따리가 구조조정 당해 홀쭉해졌고. 와중에 남은 쓸 거리들 사이에서, 굳이 이 이야기를 골라 써내리면서는 불행이 때로 사무치는 쪽팔림에 무방비의 상태로 노출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불행은 막막함이 나를 편애하는 일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지 굴욕적인 일. 다만 한참 지나고 보면 분명 술상에 올려 안주 하나로 삼기에 빠짐없이 온전한 무엇이라고도 생각했다.
첫댓글 너의 가장 큰 불행이
청소년 시절의 이 하루로 그쳐서 다행이라는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루를 상상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내 마음이
오늘의 내 불행
이 유죄여자가 나를 또 캡처하게 만듭니다
뒤지게 설레버려서 잠 못자는 중
김주연 글 읽으면 너무나 적확한 묘사와 어휘 선택에 뇌로 호올스 먹는 기분이 들어.. 그래서 글에 더 몰입하게 되고.. 결국 저 시간과 공간 속에 함께 서 있게 되는 것 같아.. 나는 체육대회 운동장에 막막하게 서 있던 김주연 그림자가 된 기분이었어.. 단어 하나만으로도 멀리까지 사유할 수 있는 그대.. 너무 좋아..
완전 킹정하는 답글입니다
나도 분명 너와 무척이나 유사한 경험이 있었는데 불행을 써보라고 했을 때 떠올리지도 못했어
아마 무의식적으로 그때의 기억을 찬찬히 써내려가는게 너무 마음아플 거 같아서 그랬던 거 같아
내가 그 기억에 대해 쓰지 않고 너의 글로 그 기억을 다시 꺼내 본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이렇게 용감하고 담담하게는 못 썼을 거 같아
....좀 깨긴 하지만 그때 우리 둘이 친구할 걸....
둘 다 친구 없었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신에게 이렇게 냉철할 수 있다는 게 너무 대단하고 부럽고..
그런데 홀쭉해진 불행 주머니 가운데 이 이야기를 꺼내들었다는 것이 너무 마음 아프고
주연이는 늘 담담하게 쓰다고 쓰겠지만 읽는 사람은 이것만큼 생생하게 읽히는 글이 없다
이야기 먼저 꺼내줘서 고맙고 나도 이야기 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어
난 앞으로 눈물 맛을 뜨거운 포카리 맛이라고 하겠어 ... 어린 시절 받는 상처는 진짜 별거 아니지만 유독 오래가고 엄청 아프지 특히 친구는 내 힘으로 만든 첫 인간관계니까 유독 상처 받는 것 같아...
난 성인 되고 나서 ㅈ같은 일들이 쏟아졌음이도 중딩 때 왕따 당한 걸 내 인생에서 정말 큰 절망으로 꼽는데, 너 글을 보니 왠지 딱 알겠어 지나간 시간 값을 하면서 내 임기응변 같은 것들도 커져서 이후의 불행에서 날 구원했다는 말이 딱 들어맞아
보아하니 우리 다 왕따였던 듯한데 그때 어떻기든 <뜨거운 포카리 맛의 눈물을 흘리는 여자들>이란 공동체를 결성했어야했다 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