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조선판 체 게바라 허균의 고향 강릉
사대부가에서 태어나 서자들과 어울리며 계급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조선의 체 게바라. 허균의 고향을 찾아가 초당마을과 초당두부, 허균허난설헌기념관, 이광로가옥, 교문암 등을 통해 한글 소설 <홍길동전>이 탄생한 배경을 살펴본다.
조선시대 최초의 한글 소설이 잉태된 고장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 국문 필사본 ⓒ국립한글박물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은 조선 인조 때를 배경으로 신분 차별이라는 당시 시대상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작품이다. 홍판서의 서자로 태어난 홍길동은 호부호형(呼父呼兄) 즉,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형을 형이라 부르는 것을 할 수 없는 현실에 부딪치고 천대를 견디다 못해 가출하게 된다. 이후 활빈당이라는 의적을 조직하고 탐관오리의 재물을 빼앗아 백성을 구제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홍길동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바다 건너 섬으로 가서 자신의 이상향인 율도국을 건설한다.
조선시대에 이처럼 신분을 초월한 혁명적 내용을 담은 한글 소설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홍길동전>이 탄생한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작자인 교산 허균의 고향 강릉땅을 찾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곳에서 허균이 살았던 초당마을을 산책하며 그의 문학적 세계관이 담긴 기념관을 둘러보노라면 시대의 이단아였던 교산 허균의 깊은 속내를 알 수 있을지 모른다.
강릉 초당마을에서 허균의 흔적을 만나다
허균의 누이 난설헌의 생가터 ⓒ강릉시청
조선시대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작가인 허균의 사상과 삶의 흔적을 온전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꼭 한 번 찾아가보아야 할 강릉의 명소를 몇 군데 꼽을 수 있다. 초당마을 일대의 유적과 기념과 그리고 허균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애일당(愛日堂) 터와 젊은 시절 호연지기를 키우며 바라보았을 사천진 바닷가의 교문암이 바로 그곳이다.
허균의 발자취와 만나는 전통문학 여행은 강릉 경포호와 이웃하고 있는 초당마을에서 시작된다. 허균과 그의 누이 난설헌이 살았던 생가터는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에 위치한다. 초당마을에 접어들면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거센 바닷바람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주는 울창한 해송숲이다. 바로 이 소나무숲에 허균의 누이 난설헌이 태어나고 허균이 자랐다는 생가터가 자리한다. 현재 ‘난설헌생가’로 알려진 옛 집인 ‘이광로가옥’이 바로 그 곳이다. 물론 난설헌 생가로 알려진 이 집은 아쉽게도 당시의 그 집은 아니고, 옛집이 있던 자리에 다시 지은 가옥이다.
초당마을에 위치하는 허균허난설헌기념관 ⓒ강릉시청
기념관에서 허균과 허난설헌의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디자인밈
이광로가옥 옆에는 허균과 난설헌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담은 기념관 건물이 위치한다. ‘허균·허난설헌기념관’은 예쁘게 잘 지어진 전통 한옥 건물이다. 전시관 뜨락에는 기라성 같은 허씨 집안의 인재 5명의 시비가 서 있다. 아버지 허엽을 비롯해 맏아들 허성, 둘째 허봉, 딸 난설헌 그리고 셋째 아들 허균이 그들이다. 모두들 탁월한 문재(文才)로 당대를 주름잡았던 인물이지만 특히 요절한 천재 시인 하곡 허봉은 허균의 형이자 동시에 그가 스승처럼 존경하고 따르던 인물이었다.
초당마을은 허균의 가문과도 관련이 있는 곳이다. 우선 마을의 이름인 ‘초당’은 허균의 아버지인 초당 허엽의 호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엽은 조선 선조 때 대사간, 부제학, 경상감사 등 굵직한 벼슬을 두루 지낸 인물이다. 강릉의 유명한 먹거리인 초당두부 역시 초당 허엽이 바닷물을 간수로 사용한 두부를 만들면서 ‘초당두부’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을 정도로 초당마을과 허씨 가문의 인연은 깊다.
참된 용은 아직 오르지 않았는데…
강릉시 사천면 하평리에 위치하는 허균시비 ⓒ강릉시청
이번에는 허균이 태어난 강릉시 사천면으로 향해 본다. 사천면 하평리는 강원도의 대표적 민속놀인 ‘답교놀이’로 유명한 바닷가 마을로 허균이 태어난 ‘애일당’ 옛터가 남아있다. 사천면 하평리의 나지막한 산인 교산 기슭의 교산시비가 세워진 자리가 바로 애일당 터다. 허균은 애일당을 품고 있는 교산(蛟山)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다시 바닷가로 나아가 사천진해수욕장 초입에 있는 교문암을 찾아가 보자. 사천진 바닷가에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바위 무리는 ‘교암’, 또는 ‘교문암’이라고 불리는데, 이무기가 하늘로 승천하면서 꼬리로 바위를 쳐서 갈라졌다거나, 용이 못돼 분노한 이무기가 꼬리로 쳤다는 등 조금씩 다른 내용의 전설이 전해지는 바위다. 마치 용이 되지 못한 채 이무기로 마감한 허균의 안타까운 생애를 상징하는 듯하다.
신분제라는 일그러진 시대의 초상과 싸우다 좌절한 허균의 삶은 안타깝고도 위대한 생애였다. 문학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과 하늘을 찌르는 오만, 시대를 앞서간 개혁과 자유정신으로 요약되는 허균의 삶은 그 시대가 당시의 엘리트들에게 요구했던 당연한 덕목, 이를테면 고매한 덕성과 품격과 타협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타협 대신 자신의 시대와 맞서 싸우는 길을 택했던 그는 끝내 용이 되어 승천하지 못하고 울분에 찬 이무기로 삶을 마감했던 것이다. 왜소한 선비들의 끊임없는 참소에 대꾸하는 허균의 쟁쟁한 음성은 글로 남아 지금도 편견과 통념에 안주하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의 심금을 아프게 울리고 있다.
사천진 바닷가의 교문암 ⓒ디자인밈
출처<https://www.kculture.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