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조정(趙鼎)은 후당(後唐) 사람으로 신라 말기에 두 동생 조부(趙釜)와 조당을 데리고 절강사람 장길(張吉)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김선평, 권행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고 하며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931년 고창성(현 안동)에서 왕건을 도와 견훤을 대파하고 동경주현(東京州縣) 대부분을 항복받아 고려통일에 큰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으로 대장군이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함안에 살면서 본관을 함안으로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유명한 인물로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여(旅)로 그는 시조의 10대손이다. 여의 후손은 모두 현달하였는데, 현손 종도(宗道)와 임도(任道)가 유명하다. 종도는 선조 때의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아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임도는 전원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인조반정 후에 공조좌랑을 지냈다. 영조 때에는 시·서·화 삼절(三絶)로 이름난 영우(榮祐)가 있고, 조선 후기에는 화가로 산수·인물에 뛰어난 정규(廷奎)와 희룡(熙龍)이 있다.
-안동의 칠현사(七賢祠), 동주의 충렬사(忠烈祠)에서 제향한다.
[가문의번영] 조승소는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에 가서 저작랑(著作郞)을 지내다가 귀국하여 부여감무(扶餘監務)를 지냈다. 조선 중종 때의 인물인 조연(趙淵)은 1510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음보로 등용되어 1529년 선릉삼봉(宣陵參奉)을 거쳐 뒤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 등을 역임하였으며,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조여(趙旅), 조임도(趙任道)는 인조반정 후에 공조좌랑(工曺佐郞), 조평(趙平)은 찰방(察訪), 조봉원(趙逢源)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지냈다. 또 조영우(趙榮祐)는 171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첨지중추(僉知中樞)를 지냈고, 조근(趙根)은 166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를 지냈으며, 조영복(趙榮福)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역임하였다. 영조 때의 조중회(趙重晦)는 1736년 정시문과(庭試文科)로 급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판서(吏曺判書)를 지냈다. 조석진(趙錫晋)은 화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산수, 인물, 화조 등에 모두 능했다. 고종의 초상화를 그린 공으로 영춘군수(永春郡守)가 되고, 품계가 정3품에 올랐다. 독립운동가로서 이름을 드높인 조명하(趙明河)는 1963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단장을 수여받았고, 조용은(趙鏞殷)은 임시정부의장을 지내면서 시사촉진회(時事促進會)를 조직했다. 그는 해방 후에 국민의회의 상암위원회의장을 지내고, 1948년 남북협상에 찬동하여 평양에 갔으나 실패하고 1950년 5월에 있은 국회의원 선거에 성북구에서 출마하여 전국 최고득점으로 당선되었으나 6.25사변 때 납북되었다.
[집성촌] -경북 청송군 현동면 -경남 함안군 가야면 도항리 -경남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본관지] -경상남도 함안군
[기 타]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31,728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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