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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용수) | 올림픽공원(이용수) | 국회의사당 |
서울은 한반도의 중앙에 자리 잡은 오랜 수도이다. “잘 있거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라고 했듯이, 삼각산과 한강수를 상징으로 삼는다. 삼각산은 북한산(北漢山)이라고도 한다. 남쪽에는 남산(南山), 서쪽에는 인왕산(仁王山), 동쪽에는 낙산(駱山)이 있다. 시가지 한가운데의 청계천(淸溪川)은 수난과 변천을 많이 겪다가 지금은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단장되어 있다.
송파구(松坡區) 풍납(風納)토성과 몽촌(夢村)토성 일대는 백제(百濟) 초기의 수도였다. 서울 중심지는 고려시대에 양주(陽州) 고을이며, 남경(南京)이라고 했다. 조선왕조가 도읍으로 삼은 시기의 모습을 정도전(鄭道傳)의 <신도가>(新都歌)(1392년경), 권근(權近)의 <상대별곡>(霜臺別曲)(1399년)에서 보여준다. 조선 초기에 사방 둘러싼 성이 무너진 것을 보수해놓았다. 사방의 성문 가운데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이 남아 있다. 궁궐은 경복궁(景福宮), 창경궁(昌慶宮), 덕수궁(德壽宮)이 남아 있다. 조선왕조 역대 국왕에게 제시를 지내는 종묘(宗廟) 제례(祭禮) 및 종묘 제례악(祭禮樂)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이 식민지통치를 하면서 면모를 훼손했다, 경복궁 전면을 헐고 총독부를 세운 것을 다시 헐고 원래의 모습을 복원했다. 1950-53년의 전쟁으로 파괴되고 재건된 곳이 많다. 강남이 개발되고, 도시화된 인근 지역까지 포함해서 서울은 면적이 늘어나고, 인구가 1천만을 넘어섰다. 지하 교통이 발달해 지하철역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도시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역사적인 도시의 면모를 보존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크게 지어 한국 문화에 전반에 관한 많은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세 곳, 서울시립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미술관이 있다.
1) 낙성대
2) 문수사
3) 삼각산
4) 정도전과 무학
5) 학의 지형
6) 신도가와 상대별곡
7) 태종우
8) 삼각산과 한강수
9) 남산에
10) 남산은
11) 이래도
12) 남산 누에머리
13) 불암산
14) 인왕산 호랑이
15) 덕릉고개
16) 애고개
17) 한양가
18) 왕조의 번영
19) 경복궁 중건
20) 그 날이 오면
21) 천변풍경
22) 을지로의 첫눈
23) 성북동 비둘기
=> 서울에는 소개할 자료가 너무 많다. 성격과 시대가 다른 것들을 다양하게 들면서 너무 번다해지지 않게 한다.
1) 낙성대
전에는 시흥군(始興郡)이었다가 서울에 편입된 관악구(冠嶽區) 봉천동(奉天洞)에 낙성대(落星垈)가 있다.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강감찬(姜邯贊)이 그 근처에서 태어났음을 알리는 기념물이다. 그 연유가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사신(使臣)이 밤에 시흥군에 들어가 큰 별이 인가에 떨어 지는 것을 보고 관리를 보내 알아보게 하니, 마침 그 집 며느리가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사신이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해서 데리고 돌아와 기른 그 아이가 강감찬 이다. 강감찬이 재상이 되자 송나라 사신이 보고서 자기도 모르게 절을 하며, “문 곡성(文曲星)이 보이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더니, 지금 여기 계시는구나”라고 했다 고 한다.
강감찬이 시흥군의 어느 인가에서 태어났다고 했을 뿐이고, 가문이 어떻고 아버지는 누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강감찬 대목 앞 쪽에서 아버지가 태조를 섬겨 최고 공신의 지위를 차지했다고 분명히 밝혔는데,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는 그런 사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강감찬이 이름 없는 백성의 자식인 듯이, 그래서 태어난 집에서 자라지 못하고 누가 데려다 길러 나라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으로 꾸며놓았다.
출신을 미천하게 한 것은 강감찬을 민중영웅으로 만들고자 한 개변이어서, 국풍의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천상의 무슨 별이 떨어져 강감찬이 태어났다고 하고, 다시 문곡성이 지상에 와서 강감찬이 되었다고 한 것은 도교적인 발상에 근거를 두고 중국에서 먼저 생겨난 설화의 수용이어서, 화풍이라고 할 수 있다. 후대에도 강감찬이 미천한 영웅임을 강조하는 전설이 널리 관심을 끄는 한편, 별이 떨어졌다는 곳을 낙성대라고 부르면서 명소로 삼고 있다.
=> 봉천동 산48의 낙성대 건물은 근래에 지었으나, 구내에 있는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에 “姜邯贊落星垈(강감찬낙성대)”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탑은 원래 강감찬이 태어난 인근의 봉천동 218번지 집터에 있던 것을 1973-74년에 낙성대로 옮긴 것이다. 집터에는 유허비를 세워 사적지임을 표시했다.
강감찬은 고려시대에 이미 신화적인 영웅이 되었다. 강감찬이 신이한 능력을 발휘했다는 이야기가 전국에 파다하게 전한다.
거대도시가 된 서울에 신화의 증거물인 낙성대가 있고. 그 옆에는 서울특별시과학전시장이 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서울대학교가 있다. 지하철역이 낙성대역이다. 강감찬의 시호 인헌(仁憲)을 딴 인헌초등학교가 근처에 있다.
2) 문수사
서울 북쪽 삼각산에 문수사(文殊寺)라는 절이 있다. 고려 시대의 명승 탄연(坦然, 1070-1159)이 창건한 절이다. 탄연은 사상적인 활동이 알려져 있지 않고 명필로 이름을 얻었으며, 격조 높은 시인이라는 평을 들었다. 선종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의 각성을 사상적인 논설로 펴기보다는 예술적 감각으로 표현하는 데 더 힘썼음을 알 수 있다. 불교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기에 설명하거나 주장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것을 시를 지어서 나타내려고 했다. <<보한집>>(補閑集)에 전하는 시 <문수사>(文殊寺)를 보자.
一室何蓼廓 방이 하나 어찌 그리 휑한지,
萬緣俱寂寞 온갖 시름이 모두 잠잠해지네.
路穿石罅通 길은 돌 사이로 통하고,
泉透雲根落 샘물은 바위틈에서 솟아 떨어지네.
晧月掛簷楹 흰 달이 처마 기둥에 걸려 있고,
凉風動林壑 서늘한 바람 숲 골짜기를 움직이네.
誰從彼上人 누가 저 어른을 따르면서
淸坐學眞樂 맑은 자리에 앉아 참 즐거움 배우리.
언뜻 보면 절간 풍경을 읊은 것 같다. 절에 가니 높은 스님을 따라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뜻을 나타낸 것 같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어느 말이든 자체로서 생동하는 맛을 지니면서 은근하게 풍기는 바가 놀랍다는 것을 알아야만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방이 밝고 커서 온갖 시름을 잠잠하게 한다는 대목은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묘사한 것이면서 스님의 높은 정신세계를 암시했다. 절에 이르자면 돌구멍을 뚫어 통하는 길을 거쳐 샘물이 떨어지는 곳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말은 험난한 편력을 나타냈다. 흰 달이나 서늘한 바람은 깨달은 경지이다. 참 즐거움은 새삼스럽게 배워야 할 무엇이 아니고 시를 제대로 읽으면 저절로 알 수 있다.
=> 서울 시가의 혼잡을 벗어나면 이런 곳이 있어, 조용함을 즐기면서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 서울이 조선왕조의 수도가 되기 전 고려시대에 지은 절이 지금도 있다. 절집은 6.25 때 불타 다시 지었으나, 그 자리, 그 풍광, 그 정신은 이어진다.
3) 삼각산
삼각산은 백운(白雲), 인수(仁壽), 만경(萬景), 이 세 봉우리가 삼각을 이룬 산이다. 삼국시대에는 부아악(負兒岳), 횡악(橫岳), 한산(漢山) 등으로도 불렸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삼각산 또는 화산(華山)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삼각산은 한양을 병풍처럼 둘러싼 북악(北岳)으로 서울이라는 우주를 지탱하는 다섯 기둥 오악(五岳) 가운데 북쪽 기둥에 해당하는 산이다.
<삼각산을 바라보며>(望三角山) 오순(吳洵)
聳空三朶碧芙蓉 허공에 우뚝한 세 떨기 푸른 부용
縹渺煙霞幾萬重 아스라한 안개 노을 몇 만 겹인가.
却憶當年倚樓處 그 때 누각에 올랐던 일 떠오르는데
日沈蕭寺數鐘聲 해 저문 절간 종소리 몇 번인가.
오순(吳洵)은 생몰연대가 미상이고, 1315년 과거에 장원급제한 기록이 있다. 이 시가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어 고려시대 사람들이 이미 삼각산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사실을 알려준다. 첫 줄의 “세 떨기 부용”은 백운, 인수, 만경, 세 봉우리를 말한다.
조선시대 무학대사가 궁궐 터를 잡기 위해 천지를 돌아다니다가 백운대로부터 지맥을 따라 비봉에 이르렀는데 “무학이 길을 잘못 들어 여기에 이른다”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석이 있었다. 이것은 도선이 세워둔 비석이었다. 그 때문에 지금의 경복궁이 있는 곳에 궁궐 터를 정했다.
조선의 도읍을 정할 때 전국의 명산 가운데 구봉산(九峰山)과 삼각산이 선택되었다. 도사에게 물어 두 산 가운데 백 개의 봉우리를 먼저 만드는 쪽을 도읍으로 정하기로 했다. 두 산의 산신령이 봉우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구봉산 산신령이 먼저 백 개의 봉우리를 만들자 삼각산 산신령이 억수 같은 비를 퍼부어 한 개의 봉우리를 무너뜨렸다. 그 사이 삼각산 산신령이 마지막 봉우리를 만들어 결국 삼각산에 도읍을 정하게 되었다.
어느 날 천 년 묵은 너구리와 여우가 내기해서 이기는 쪽이 삼각산을 차지하고 지는 쪽이 개성 송악산을 차지하기로 했다. 서울의 어느 대감 댁 딸과 혼인하는 것으로 내기를 삼았는데, 여우가 총각으로 변신해서 대감 집에 들어가 대감의 딸과 문장을 겨루게 되었다. 딸이 먼저 시제를 내자 여우가 멋진 문장으로 화답하기 위해 중국에 있는 두보의 무덤에 가서 두보 귀신에게 답을 얻어 왔다. 딸이 총각의 시 구절을 듣고 의심하여 자신의 집에 있는 삽살개를 동원해 여우의 정체를 밝혀냈다.
=> 삼각산이 오랜 이름이다. 그 곳에 있는 산성을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고 하다가, 북한산이라는 이름을 삼각산을 대신해 쓰게 되었다.
삼각산은 고려시대부터 명산으로 숭앙했다. 이색(李穡, 1328-1396)은 삼각산을 읊은 시를 여러 편 남겼다. 그 전례를 조선시대에 이어받았다. 조선왕조는 한양을 수도로 하자 삼각산이 주산이 되었다.
삼각산에 관한 전승은 다양하게 중첩되어 있다.
4) 정도전과 무학
서울 도성을 만들 때의 이야기이다. 무학사대사(無學大師)는 불교를 왕성하게 하기 위해 인왕산에 있는 스님 형상의 선바위를 도성 안쪽에 넣고자 했으나, 정도전(鄭道傳)이 반대했다. 결정을 못하고 있었는데, 밤에 눈이 내렸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이상하게도 안쪽은 전혀 눈이 없고 바깥쪽으로만 눈이 쌓여 있었다. 천신의 계시로 알고 그 선을 기준으로 삼아 성을 쌓은 것이 서울의 도성이 되었다. 뜻을 이루지 못한 무학대사는 “이후 불자(佛子)는 유생(儒生)의 책 보따리나 지고 나르는 심부름꾼을 면치 못하겠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태조가 한양 정도에 대하여 무학에게 좌(座, 방향)를 물으니 동향으로 하라 하는데, 정도전은 남향을 주장했다. 실세였던 정도전 주장대로 결정되자, 무학이 “한양 말세에 백성이 배고플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이에 정도전은 “남방에 보리가 나니 걱정할 것 없다.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당시 보리가 없었는데 정도전은 몇 백 년 후 일을 미리 알았다.
=> 유학에 입각해 조선왕조의 설계하고자 한 정도전은 불교 승려 무학과 경쟁해 가까스로 이겨냈다.
5) 학의 지형
조선이 건국되어 한양에 대궐을 짓는 일을 무학대사가 맡았다. 그런데 대궐을 몇 군데 지어 놓으면 곧바로 허물어졌다. 대궐 짓는 것을 작파하고 다른 곳에 대궐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한 곳에 가니까 노인이 소를 가지고 밭을 갈고 있었다. “이놈의 소! 무학같이 미련한 소야!” 하면서 소를 나무랬다. 무학은 이 말을 듣고 그 노인한테 가서 무학이가 어째서 미련하냐고 물었다.
노인은 “한양의 지형은 학의 지형인데 무학은 그것도 모르고 대궐을 지으니 허물어질 수 밖에 없지 않느냐”라고 했다. “학은 나는 새이기 때문에 학에다 집을 지으면 허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학을 날지 못하게 하려면 날개를 눌러 놔야 한다. 사대문을 지어서 나래를 눌러 놓고 대궐을 지어야 하는데 무학은 그런 이치도 모르고 대궐부터 지으니 대궐이 허물어질 수밖에…”라고 말하고는 소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무학은 노인의 말을 듣고 과연 그렇다 하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서 사대문을 먼저 짓고 경복궁을 지었다.
=> 무학대사가 한양 도읍 터를 잡을 때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 밖에도 많이 있다. 유식하다는 무학이 무식하고 무식한 것 같은 노인이 유식했다는 역전의 구조는 이토정과 소금장수, 명재상 서애(西厓)와 무명의 형인 겸암(謙庵) 등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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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 別有天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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