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둘째날 (2015.10.11 일요일)
2014-2015회기 강판수 총재님과 주 삼은 황금사자회 회장님, 지구임원, 81명의 황금사자들은 노산입구에서 해외연수 2일 째인 노산에서 화합으로 화이팅!
노산 : 노산은 중국 18,000㎞ 해안선 중 87.3㎞의 해안선과 16개의 섬을 거느리고 해변 산 중 유일하게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28개나 되고 유역면적이 1,133㎢(지리산 440㎢의 약3.9배)으로 1억년 전에 생성되었으며 주봉인 거봉(巨峰)은 해발(중국의 수준 영점이 칭다오에 설치되어 있다) 1,132.7m다. 수많은 봉우리와 암봉으로 이루어진 능선, 살아 있는 것 같은 자태로 72개의 도교사원인 도관과 도교센터를 품은 운무와 해무가 일어나는 환상적 풍경은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신하를 자주보내 백성들의 노고가 많고 산이 넓고 크서 오름에 힘들고 고생스러워 勞자에 산(山)가 들어갔다고 한다.(자전에는 없는 글자임)
청도시내에서 약 40㎞ 거리에 위치하며 전체가 AAAA등급이며 셔틀버스로 가파른 경사로를 올라가는데 아래는 땅떨어지로 아찔한 전율을 느낀다. 케이블카 탑승장에 도착하여 케이블카로 약 15분 올라가면 노산 중턱에 도착된다. 남연의 지리학자 안모는 태산이 비록 높다하나 노산만 못하다고 하였으며 천하명산을 유람한 도사 구처기는 5악 중 4악을 다 가보았지만 노산에 비할 수 없네라고 하였으며 청나라 강유위는 노산에 오르니 기암괴석이 온산 가득 파도처럼 넘실거린다라고 노래 하였다.
진시황(BC259-210)이 이곳 낭야군에 왔을 때 800년을 살았다는 팽조(彭祖)보다 200년을 더 살았다는 안기공(安期公)을 만나 천년 뒤 봉래산(蓬萊山)에서 재회하기로 약속했다는 산으로 당나라 이백(李白)은 노산에 오른 후 일찌기 동해 노산의 붉은 노을을 맛보고 안기공과 만나 참외처럼 큰 대추(仙棗)를 먹었노라 중년에 황제를 뵈옵지만 즐겁지 않아 자연으로 돌아 왔도다. 젊음은 봄 햇살에 시들고 이제 백발이 된 삶을 굽어보노라. 선약을 구해 바람처럼 구름 마차위에 오르리라. 도인을 따라 하늘에 올라가 한가로이 신선과 함께 떨어진 꽃이나 쓸리라.
노산은 광천수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청도맥주에 청량하고 시원한 맛을 제공한다.
음양 복희 8쾌, 주역 64쾌
천해일색(天海一色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나무도 푸르고 지붕도 푸르다)
태청궁(太淸宮) 서한(西漢) 건원원년(建元元年 기원전 140년) 건립되어 약 2150년이 되어으며, 노산 최초의 도교사원으로 가장 오래된 도교사원으로 규모도 최대이며 일처(一處)도관이다. 창시자는 장염부(張廉夫)다. 태청궁의 규모는 약 3만㎡로 청석기와로 장식했다. 주된 사상은 청정무위(淸靜無爲) 수신양성(修身養性)이다.
음양 8쾌 12간지 : 태극은 우리나라 태극기의 기초이론이다.
노자는 초(楚)나라 여향 곡인리 사람이며 성은 이(李) 름은 이(耳) 주(周)왕실 서고를 관리한 사관(史官)이다. 모든 것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 것(無名)을 요체로 삼았다. 함곡관 지기 윤희가 "선생께서는 이제 은둔하려 하시니 어려우시겠지만 저를 위해 저서를 남겨 주십시요" 그래서 노자는 상, 하 두편의 책을 저술하여 도(道)와 덕(德)의 깊은 뜻에 대하여 설명한 5천여 글자의 문장을 남기고 관(關)을 떠났다. 노자는 백 육십여 세까지 살았다고 하고 혹은 이백세까지 살았다고도 한다. 도를 닦아 수양한 덕분에 장수했을 것이다.(사마천의 사기에서 요약)
왕 중양(王 重陽) 중국 도교의 한 분파인 전진교를 연 1대 조사로서 1112-1170년 송(송)나라에서 태어나 금(金)나라에서 성장한 문인으로 섬서 함양 사람으로 도호를 중양자(重陽子)라 했다. 왕중양은 문과시험과 무과시험에 등용되지 못하는 등 여러번의 실패끝에 도가사상에 매료되어 스스로 수련하여 전진파의 개파 시조가 되었다.
1,100년 된 은행나무로 숫나무로서 열매를 맺지 않는다.
공자가 주 나라에 갔을 때 예(禮)에 관하여 노자에게 가르침을 받으려 하자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 그대가 말하는 옛날의 성현(聖賢)이란 그 육신과 뼈다귀가 이미 썩어 버리고, 남은 것이란 오직 공언(空言)뿐이오. 게다가 군자(君子)라는 사람도 때를 얻으면 마차를 타고 건들거리는 신분이 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쑥대 씨앗이 바람에 날려 이곳 저곳 떠돌듯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될 뿐이오. 나는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이 감추어 언뜻 보면 가게가 텅 빈 것 같지만 속이 실하고, 진실로 훌륭한 사람은 많은 덕을 몸에 갖추고 있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어리석은 것같이 보인다.'고 들었소. 그대는 그 몸에 지니고 있는 교만과 탐욕, 그리고 잘탄 체하려는 것과 편견을 다 버려야 할 것이오. 그런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이로움도 주지 못하오. 내가 그대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이것 뿐이오. "(사마천의 사기 중)
공자는 노자와 헤어져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새가 잘 날고, 물고기가 헤엄을 잘 치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달리는 놈은 그물을 쳐서 잡고, 헤엄치는 놈은 낚시로 잡을 수 있고, 나는 놈은 화살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龍)만은, 바람과 구를을 타고 하늘을 오르는 놈이니 그 잡는 방법을 알 수가 없다. 나는 오늘 노자(老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과 같은 사람이라고나 할까..............."
삼황전(三皇展)이다.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를 모신 곳이다. 복희는 태호(太昊:큰 하늘)라 불렸으며, 뱀 몸에 사람 머리를 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사냥법과 불을 활용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신농은 염제(炎帝:불꽃 임금)라고도 불리며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가졌으며 태양의 신이자 농업의 신으로 농경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또한, 태양이 높게 떠 있는 시간에는 사람들에게 상업을 가르쳤다.
황제 헌원(軒轅)은 사람들에게 집 짓는 법과 옷짜는 법을 가르쳤으며, 수레를 발명했다. 천지 사방의 신 중, 황제를 따르지 않는 무리는 치우(蚩尤)를 따라 반란을 꾀했다. 치우는 눈이 넷, 손이 여섯이었으며, 구리와 쇠로된 이마를 가지고 있었다. 쇠와 돌을 즐겨 먹는 신으로 자신의 72명의 형제와 함께 싸움에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제는 치우의 모반을 알자마자 군사를 모아 판천과 탁록에서 치우를 격파하였다. 치우는 부하인 풍백, 우사와 함께 저항했으나 결국 황제에게 항복하였다.(백과사전 중)
사마천의 사기 본기(本記)는 황제로 부터 한 무제까지를 기록으로 남겼음에 비추어 황제로 부터 역사는 시작되고 복희, 신농은 전설이 아닌가 한다.
서왕모(西王母) 도교신화에 등장하는 아름답고 기품있는 영생불사의 생사를 주관하는 절대적 권능을 가진 여신(神), 여선(仙)인데 도교 신선들의 여왕 또는 대모(大母)로서 중국과 동아시아 여러나라에 토속 문화(문학, 미술 등), 민간신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요지(瑤池 :아름다운 옥으로 이루어진 연못)는 서왕모의 정원에 있는 아름다운 연못으로 서왕모가 목욕하는 곳으로 비취옥(翡翠玉)으로 되어있어서 모든 것들이 푸르고 연못의 물도 푸른비취빛으로 푸르다고한다.
천해일색(天海一色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나무도 푸르고 지붕도 푸르다)푸르다는 노산이 바로 서왕모의 요지를 뜻하고 푸른 것은 도교가 추구하는 영생불사를 뜻하는 것일까?
노산에는 장생불노하고자 하였던 진시황에 대한 전설이 많은 데 이곳 노산에도 16개의 목숨 수(수)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서복(徐福)은 자기가 불노초를 구할 차례임을 알고 어차피 불노초란 없는 것이고 돌아오면 죽을 목숨이라 생각하고, BC219(진시황28년)년 황제에게 " 저 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의 삼신산에 신선이 살고 있는데 동남 동녀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고자 합니다."라고 상소한다.
서복이 가리킨 삼신산은 봉래(蓬萊산은 금강산의 별칭), 방장(方丈산:지리산의 별칭), 영주(瀛州산:한라산의 별칭) 모두 한반도를 가리킨 것이다. 부산 영도에 봉래산이 있고 맞은 편에 영주동이 있는 것과도 관계가 있으리라?
제주도 서귀포(西歸浦)는 불노초를 구한 서복이 서쪽으로 향하여 귀로에 오르는 포구라는 뜻이며 정방폭포 옆 암벽에 새겨진 서복과지(徐福過之:서복이 지나간다)는 오래 전에 중국을 떠난 서복이 제주도를 거쳐 지나간다는 뜻으로 제주도를 거쳐 일본으로 갔다는 흔적이 있다.
중국 사람들은 약 50%는 불교신자이며 제2의 신자가 많은 종교는 도교이며 유교 기독교 등 종교의 자유는 있으나 포교는 금지되어 있다. 도교는 옥황상제를 믿는 종교이며 건강하게 불노 장생을 기원하는 종교다.
노산 케이블카는 전장 1,200m 높낮이 차이 220m (일방)시간당 800명 운송, 최대운송속도는 초당 5m다.
멀리 보이는 구름에 휩싸인 봉우리가 노산에서 가장 높은 주봉인 거봉(巨峰:1,132.7m)이다. 군사기지가 설치되어있어 가까이 갈 수 없다고 한다.
5.4광장 : 중국 근현대사의 기원이 된 1919. 5.4학생시위사건의 정신이 담긴 곳으로 청도 시민의 쉼터로 사랑받는 광장으로 중국의 5.4운동과 일본의 압제에 투쟁을 담은 자료 전시관인데 입장료는 무료다.
5.4운동은 혁명가인 소수 엘리트가 주축이 아닌 학생, 노동자, 농민이 주축이 된 민중들의 민주 혁명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1914년 8월 독일에 선전포고 한 뒤 중국에 있던 독일 조차지 칭다오를 비롯한 산뚱반도를 점령하고 1915.1.18 산뚱반도의 독일의 권익을 일본이 계승한다는 최후 통첩에 굴복한 중일협약과 일본의 독일 권익 승계를 인정한 1919.1파리강화회의(베르사이유조약) 등에 대하여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반식민주의,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한 애국 애족의 시위로 북경 천안문(天安門)광장에서 3,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한 사건으로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3.1독립운동(1919.3.1)이 5.4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리다자오(李大劍:1921년 중국 공산당을 창설한 인물) 북경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마르크스 학설 연구회가 설립되고
5.4운동의 요구조건 중 일부는 중국에서 열강이 차지하고 있는 모든 이권을 돌려주고 철수 할 것, 중국에서 모든 외국군의 철수, 중국 안에서 외국인의 치외법권 폐지, 중국 내 조차지 반환, 열강이 마음대로 관세를 정하는 횡포 중단과 중국의 자주권 인정 등이다.
5.4광장 맞은편 건물은 칭다오 시청건물이다.
시청 일대의 마천루
올림픽 경기장 : 2008년 베이징 올림픽때 베이징에는 바다가 없음으로 칭다오 5.4광장 앞 바다에서 요트 등 바다와 관련된 올림픽 종목의 경기를 진행하였다. 해운대 해변과 유사하다.
칭다오 박물관은 중국전체 또는 산동성의 문물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칭다오지방의 문물들만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높이 4m 무게 30톤, 부처의 얼굴상을 보면 보통의 부처의 얼굴과는 차이가 많다. 석가모니 사후에는 탑(진신 사리를 모신 스투파)신앙이 발달되었었고 불상은 없었으나 알렉산더대왕이 인도 북부까지 침공하다가 병사한 뒤로 그리스계통의 간다라 조각 미술이 전파되면서 불상이 만들어 졌다. 부처의 상은 피골이 상접한 모양도 있겠으나 간다라에서 전파된 조각 불상은 풍만하고 원만한 몸집과 얼굴을 주로 나타낸다. 이 불상은 북위시대의 불상으로 척천무후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척천무후 본인의 얼굴상 나타낸 것이다. 측전무후(624.1.23-705.11.2)는 당 고종의 황후로서 중국역사상 무려 550여명의 황제 중 여성으로 황제가 된 사람은 측천무후 단 한사람 뿐이다.
마오쩌뚱(毛澤東 1893.12.26-1976.9.9 82세)의 전시관이다. 마오쩌둥은 후난(湖南)성의 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1년 18세 때 쑨원에 의해 청조가 무너졌고, 1912년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마오는 고등학교 재학시 중국 공산당의 시조 마르크스주의자 이대검(李大劍: 중국 5.4운동을 일으킨 사람)을 만나 본격적인 사상지도를 받았고, 1926년 중국공산당이 창당되면서 창당멤버 12인 중 한사람이 되었다. 1926년 주덕(朱德)과 연합하여 홍군(紅軍)을 창설, 1927년 국공합작에 들어갔던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이 깨지고, 공산당원들은 지하로 숨어 들어갔다.
1931년 자신의 점령지에 토지 개혁운동을 벌여 농민의 지지를 유도해 1931년에는 180개 현에서 900만 명에 달하는 '중앙공농민주정부'를 수립하였다.
장제스(張介石)는 다섯번에 걸처 공산당 토벌을 단행했는데 마오는 게릴라식 유격전으로 오히려 1928년 1만명에 불과하던 병력을 1933년에는 30만명으로 세력을 크게 키우는 기회를 제공했다.
1934년 다섯번째 장개석의 대규모 토벌 전투에서 마오는 10만 병력을 이끌고 1만 킬로가 넘는 힘겨운 고난의 여정인 '대장정 大長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3만명이 채 안 되었다.
1935년 1차 국,공합작으로 항일항쟁우선을 이끌어 내어 장개석의 토벌을 교묘히 피했고, 1937년 주은래(周恩來),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宋美齡)도 나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 져 마오는 절멸의 위기에서 기사회생할 수 있었고, 1937년 4만 명이던 당원이 1945년 120만명, 1947년에는 200만 명으로 증강되었고, 임표(林彪)의 지휘로 1948년 11월 만주를 점령하고, 1949년 1월 베이징과 텐진이 공산당의 수중에 떨어졌고, 장개석은 타이완으로 철수하고,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마오는 초대 중앙인민정부의 주석으로 취임했다.
1958-1960년에 걸친 대약진 운동(농공업 대 증산정책)으로 중국식 집단농장계획과 산업화계획은 3,000-5000만 명이 굶어 죽는(2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이 죽음)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실패원인 중 몇가지 사례는 벼를 무조건 많이 심으면 수확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여 밀식하는 바람에 햇볕 부족으로 썩어죽고, 마오가 "참새는 해로운 새다"라는 말 한마디에 모두들 일을 놓고 참새를 잡는 바람에 메뚜기 등 해충이 창궐하여 수확량이 격감했으나, 통계 보고는 풍년이라고 허위보고하고, 운송 수단이 없어 남는 곡식을 옮기지 못하여 썩어 버리고, 산업화 계획에서 소규모 용광로 철생산을 지시하자 농민, 교사, 의사 등 모두들 밥솥, 숫가락, 철책, 농기구까지 모두 녹여 철생산에 매진하고 생산된 철은 조악하여 사용하지도 못하는 흉작+노동력이탈+자연재해+미숙한 행정의 비능률, 비생산의 연속으로 중국 경제를 20년 후퇴시킨 엄청난 재앙이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실각한 마오는 복권을 위한 권력투쟁으로 1966년 造反有理(모든 반역은 정당하다, 사령부를 포격하라)로 시작된1966-1970년에 걸친 프로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마오의 부인 장칭(江靑)에 의해 주도되었고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급진파 성격을 띤 군중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통제력을 상실하여 무력에 의한 군중폭동으로 번져 수백만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로 인해 중국 지식층 류사오치(劉少奇: 3할이 天災라면 7할은 人禍 :毛 비판으로 박해로 최후를 맞는 배경이 됨), 등샤오핑 등이 숙청되고 350만명이 검거됨으로 종결되었다.(1953년생 시쥔평 주석도 고향 시안에서 고된 노동으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1971년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은 체포되어 역사의 단죄를 받았다. 1976년 마오가 사망(레닌, 모택동, 호치민, 김일성, 김정일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공산주의자로서 시체 방부처리된 자)하고, 중국 역사를 10년 후퇴시킨 문화대혁명은 1981년 『약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로 마오의 오류에 대한 공식적 정리를 마치고 개혁 개방정책을 추진한다.
중국 농민들이 농노적인 삶을 살아갈때 농토를 분배하고 신분을 해방시킨 마오는 중국에서는 특히, 시골 농촌에서는 거의 신적인 존경을 받는다. 중국 인민폐의 도안 인물이 전부다 마오의 상이며, 전에 중국 계림 좡족 자치구에 여행 간적이 있는데 시골 공동 회의장에 마오의 초상이 정면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가이드가 박물관에서 무엇이 가장 인상적이었냐고 물어서 마오 전시관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해주었다.
일제로 부터 청도해방에 대한 부조다.
독일이 칭다오를 조차한 뒤 독일식 건물을 짓기 시작한 초기의 칭다오 모습이다.
명, 청 시대의 표일염아청화자 (飄逸㷋雅靑花瓷) : 청백의 독보적 색상과 웅후한 예술역량을 보이고 있다.
국제라이온스협회 355-A(부산)지구 2014-2015회기 강판수 총재님과 국제라이온스협회 383지구(칭다오)지구 총감 탕리는 2014.12.10일 자매지구를 조인하였습니다. 이번 황금사자회 해외연수에 중국 칭다오 지구 임원들께서 참석하셨습니다.
총재님 옆에 계신 여성분이 중국 383(칭다오)지구 2014-2015회기 탕리 총감이십니다.
오른 쪽 끝에 계신분은 2015-2016회기 383(칭다오)지구 마 선 총감입니다. 강판수 직전 총재님과는 19세의 나이차이가 있습니다.
영도크럽 2014-2015회기 회장 김용오회장 재임시에 중국 칭다오의 밍더(明德)사자회와 자매결연을 맺었고 자매결연 당시의 칭다오 밍더(명덕: 明德)사자회의 회장님께서 축하해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김용오회장과 저는 같은 방을 썻는데 새벽까지 안들어 오셔서 물었더니 밤 새도록 밍더(明德)사자회 임원들과 같이 술을 펏답니다.
2015-2015 중국 칭다오지구 마선 현회기 총감님이은 영도클럽과 자매결연한 칭다오 밍더(明德) 클럽 소속입니다.
뒷면 배경글 : 내 마음속에 한 송이 꽃이 있어요 : 그래요 칭다오 밍더클럽과 영도클럽의 우의를 나타내는 마음이런가?
라이온스클럽의 목적인 세계인류 상호간의 이해심을 배양하고 증진시킨다. 우의와 협력 그리고 상호이해로 클럽간의 유대를 덕욱 돈독히 한다.
중국 음식은 지지고. 볶고, 튀기고 기름이 들어가지 않으면 조리가 안된다. 중국사람들은 담백한 회를 상류층만 먹고 일반적으로 잘 먹지 않는데 중국에서 회맛을 알면 한국은 회구경하기도 어려우리라. 중국사람들이 한국여행하면서 4박 5일 동안 한식만 먹었더니 기름기가 다 빠져서 눈알 돌아가는 소리가 삐거덕 삐거덕......ㅎㅎ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