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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운남성 여행
(곤명. 대리. 여강)
2007 . 4. 8~ 4. 13(4박6일)
햇살이 조금씩 도타워지는 4월, 낮선 곳을 찾아 떠나는 일행(21명)을 태운 리무진 버스는 인천국제공항을 향해 달린다. 성서 톨게이트(오후2시경)를 출발한 버스는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벚꽃이 한껏 자태를 뽐내는 추풍령 휴게소에 잠시 멈췄다.
인천 국제공항을 밤 10시30분 출발한 중국 동방항공기는 4시간 여를 날아와 현지시간 새벽 1시를 넘어(한국보다 1시간 늦음) 중국땅 운남성의 곤명에 도착 했다. 중국 현지 가이드(김장성)가 보람관광(인솔자 김선환) 피켓과 꽃다발을 들고 우리를 기다린다.
중국에서의 피곤한 첫 일정은 공항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걸린 호라이든 호텔(천항대주점 天恒大酒店)에서 마무리한다.
☐ 운남성(雲南省 위난성)
한족(漢族)이 92%를 차지하는 중국에는 우리 조선족(韓族)등 55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진시황때 중국으로 흡수된 운남성은 버마, 라오스, 베트남과의 국경을 이루고 있는 중국의 변방중의 변방이다.
우리가 여행 할 곳은 운남성(雲南省)에 있는 곤명(昆明), 대리(大理) 그리고 여강(麗江)이다.
운남성에는 중국의 56개 민족 중 27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그야말로 소수민족의 보고로 각각의 민족은 나름대로의 언어와 문화를 영위하며 살아가고 있다.
운남성은 인류발원지중의 하나로 170만 년 전 원시인 석화가 발견 된 곳이다. 북경(北京이나 상해(上海)에 비하면 문화유산이나 현대 건물이 적어 한국의70~80년대와 같은 느낌이 든다.
☐ 곤명(昆明 쿤밍)
운남성의 省都(소재지)인 곤명은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다.
明나라 때부터 2,400 여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로 해발 1,895m의 산수 좋은 고원(高原) 도시다.
곤명에는 이족, 페족, 나시족, 하니족등의 민족이 각기 다른 전통과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온난한 기후로 사계절이 봄처럼 꽃이 피고 산이 푸르러서 춘성(春城)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도 불리며 어느 계절이나 여행하기에 좋은 곳이다.
세계 꽃 박람회가 개최된 1999년부터 세계에 알려져 1년 전부터 관광지로 개발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아 한국 여행객이 많지 않다.
특히, 이 곳은 범죄가 잦아서인지 택시에는 운전석과 승객자리 사이에 간이 창살이 있다.
더군다나 오지나 산간지대에서는 치안이 거의 미치지 못 할 정도이다.
▶ 서산 용문석굴(西山 龍門石窟)
곤명시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세가 미인이 잠을 자고 있는 듯 한 ‘잠자는 미인산(睡美人山)’이라고도 불리며, 누워 있는 모습이 부처와 같아 ‘와불산(臥佛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리프트를 타고 서산(西山 해발2,500m)에오르면 용문석굴(龍門石窟)을 만난다. 정상 부근에 있는 용문석굴의 채광(彩光)은 오전에 가장 좋다고 하여 첫 관광지로 갔으나 구름에 가려 볼 수가 없어 무척 아쉽기만 하다.
서산 관광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용문석굴은 바위를 뚫거나 깎아 만들었다. 중간 중간에 석불이 자리하고 있으며, 굴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몇 번 반복하여 용이 꿈틀거릴 것 같은 길을 따라 굴 아래로 내려간다.
용문은 1840년부터 13년에 걸쳐 많은 석공들이 밧줄에 매달려 조각한 1,333단의 석단이 만들어져 있는 석굴을 완성하는 데는 무려 76년이 걸렸다고 한다.
석굴 아래에는 탁 트인 곤명호(昆明湖 쿤밍후)가 넓게 자리하고 있다.
해발 1,885m에 위치한 곤명호는 남북으로 40km, 동서로 8km로 길쭉하게 뻗어있으며, 면적이 무려 340㎢로 중국에서 여섯 번째로 큰 담수호로 ‘고원의 진주’라고도 불린다. 호수 건너의 넓은 평원에는 평화로운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대관루(大觀樓) 공원
서산아래에서 현지식 점심을 먹고 간 곳이 대관루 공원이다.
곤명시 서쪽에 곤명호와 서산이 마주하는 곳으로 공원 입구의 꽃들이 너무 아름다워 카메라가 먼저 ‘찰깍’ ‘찰깍’ 소리를 낸다.
큰 나무가 심어져 있는 공원 안의 산책로를 경계로 네모난 큰 연못이 여러 개 있다.
그 당시 제일 높은 건물인 대관루는 명나라때 정원이 생기고 청나라때 누각이 세워졌다.
주변의 풍경이 아름다워 많은 옛 문인들이 이 곳에서 글을 썼다고 한다.
그들이 남긴 시와 문장들은 지금도 대관루에 보존되어 있는데 곤명호의 풍치와 운남의 역사를 말해준다.
▶원통사(圓通寺)
곤명에서 가장 큰 규모와 역사를 자랑하는 불교 사찰로 1,200년 전인 당나라때 건축되어 보타사로 부르다가 원나라때 원통사로 개칭하였으며 운남성의 불교 협회가 자리하고 있다.
사찰 안에는 좌불상이 있고, 대전 중앙에는 10m 높이의 원주가 두개 있는데 각각 한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여행 2일차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 양주와 소주잔을 드리우며 피로를 풀고 하루를 마감한다.
□ 대리(大理 다리)
여행 3일째(4월 10일) 대리로 가기 위하여 5시에 기상하여 6시에 도시락을 가지고 곤명 공항으로 달린다. 여객기 탑승 수속을 하는 동안 공항에서 도시락을 먹는다.
7시 50분 국내항공기인 중국 동방항공으로 40분을 날아와 대리공항에 도착한다. 대리공항은 1995년도에 개항된 조그마한 공항으로 시내에서 북쪽에 위치 해 있다
인구 48만 명의 대리는 운남성 서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소수민족이 반을 차지하고 그중에서 백족(바이족)이1/3을 차지한다.
곤명에서 약260km 거리에 있는 대리는 해발 2,086m의 고지에 위치해 있는 고산도시로 기온이 온화하여 벼농사가 활발하며, 송나라때 대리국의 도읍지로 번창하기도 했던 곳이다.
대리라는 이름은 대리석이 많이 생산된다하여 붙여졌다고 하나 한편으로는 ‘인생의 큰(大) 도리(理)를 가르쳐 준다’는 뜻으로도 불린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대리는 곤명, 미얀마, 티베트를 잇는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이해호와 창산 산맥으로 인해 빼어난 자연 경관을 가지고 있어 관광, 휴양객이 많이 찾아든다.
지금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도로를 만드는 등 관광과 상업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이 곳 특산물로는 금, 은, 대리석이며 농산물로는 마늘, 유채, 완두가 많이 생산된다.
▶이해호(洱海湖)
대리공항 인근에 위치한 이해호로 향한다.
고산지대라서인지 산들이 나지막하고 붉은 흙이 드러나는 민둥산이다. 나무가 잘 자라지 않은 듯 하다.
도로 옆 산비탈에 밭이 있으나 작물이 없는 빈 밭이 이어진다.
많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해호 선착장에 차를 세운다.
선착장 오른쪽에서 조그마한 유람선을 타고 나가다가 일행 한 사람이 타지 않았다. 유람선을 다시 선착장에 정박시키고 한 사람을 찾으러 헤매는 헤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해호는 ‘모양이 귀와 같이 생겼고 그 기세(파도)가 바다와 같다’하여 이해(洱海)로 불리게 되었다.
자연 담수호인 이해호는 해발1,972m에 넓이250㎢, 남북길이 43km, 폭은 3km~9km이며 깊이가10m~22m 로 중국에서 일곱 번째 큰 호수다. 이 곳 백족사람들은 ‘어머니의 호수’로 불린다.
이렇듯 크고 넓기 때문에 유람선으로 하루 종일 걸려도 다 못 볼뿐만 아니라 많은 비가 내리고 있어 30여분을 돌아보고 이해호의 관광을 마친다.
차는 다음 관광지인 창산을 향하여 달린다.
대리의 신도시가 나온다.
곧고 넓은 길이며 새로운 건축물이 많이 들어서 있다.
신도시를 지나면 창산 아래에 구도시가 나온다.
백족(바이족)이 많이 사는 곳이다.
백족은 흰색을 좋아한다.
백족마을의 고대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하얀 건물들이 골목길을 따라 줄지어 있으며, 하얀 전통의상을 입은 백족들이 쉽게 눈에 띤다.
백족들이 쓰는 모자는 ‘풍화설원’이라고 하는데 4단계로 되어 있다.
풍화는 상관(蒼山)과 하관(油菜), 설화는 창산의 눈(雪)과 이해의 달(月 :호수에 비친 달)을 뜻한다.
백족의 음식은 우리와 비슷하여 김치를 즐기며, 된장은 달고 고추장은 맵다.
그리고 고산지역이라 기압이 낮아 밥이 잘 되지 않아 쪄서 먹는다.
▶ 창산(蒼山)
창산은 곤명에서 400km떨어지고 이해호에서 서쪽으로 솟아 있으며 해발 4,122m인 고산으로 19개의 큰 봉우리에는 항상 눈이 쌓여 있는 곳이다.
히말라야 산맥으로 이어진다.
리프트를 타고 1,700m를 올라가면 해발 2,800m에 있는 도교 사원에 내린다. 우산을 받쳐 들고 리프트를 탔지만 무릎이 다 젖었다.
사찰 부엌에 들어가니 모닥불을 피워놓고 할머니들이 불을 쬐고 있다.
우리 일행을 맞이하며 옷을 말리라고 한다.
창산에서 내려다보는 대리의 옛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10~13세기에 형성 된 도시로 고층 건물이 없는 평온한 도시다.
도시 옆으로는 이해호가 보인다.
비가 오고 구름이 많아 산 정상으로는 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사원 안쪽에 조그마한 상점에는 훈제된 돼지고기를 천정에 걸어놓고 판매하고 있는데 오랫동안 보관 할 수 있단다.
다시 리프트를 타고 내려간다. 리프트 아래에 공동묘지가 보인다.
묘지 앞면에는 비석을 세우고 뒷면은 흙으로 덮여져 있다.
요즘은 이 곳에 묘를 쓸 수 없다고 한다.
양쪽의 울창한 잣나무에는 잣이 많이 달려있다.
버스를 타고 달린다.
도로 옆에는 야생화가 만발하다.
점심을 먹기 위하여 식당에 들어가는데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5층 건물인데 가운데 로비는 꽃으로, 입구 벽에는 큰 그림으로 장식 되어 있으며 사방으로 모두가 식당이다.
▶대리고성(大理古城)
대리 구시가지 인근에 위치해 있는 대리고성은 뒤로는 창산을, 옆으로는 이해호수가 바라보이는 곳으로 명나라 홍무제 15년에 건설된 고성이다. 1925년 대지진으로 일부 파손되었다.
우산을 펼쳐들고 성으로 들어간다.
성 밖에는 예쁜 꽃들이 우리를 반긴다.
성 안에는 동서남북으로 바둑판 같이 길이 나 있고, 상점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이 곳에서는 공예품, 차, 은, 피혁, 대리석등을 판매한다. 가짜제품이 많아 조심해야한다.
▶ 백족마을 삼도차(三道茶) 쇼
백족마을은 고성남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백족문화가 잘 나타나는 보호지역이다.
백족은 자기들의 언어를 가지고 불교를 숭상하는 민족이다.
백족의 삼도차는 서기742년부터 전래된 것으로 큰 행사가 있을 때 삼도차를 마시고 가무를 함께 즐긴다.
삼도차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3가지 방법에 따라 3가지의 맛을 내는데 인생철학을 잘 나타내고다.
첫 번째 차는 쓴맛을 낸다. 이는 인생을 비유하여 젊었을 때 쓰라림과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는 뜻이다.
두 번째 차는 달콤한 맛을 낸다. 이는 중년에 행복과 즐거움을 뜻하고
세 번째 차는 쓰면서도 달콤한 맛을 낸다. 이는 인생의 말기에 고통과 행복하고 즐거웠던 것을 회상한다는 뜻이다.
삼도차를 못 마시는 일행이 더러 있다.
운남 지방에서는 차가 많이 생산 되고 있기 때문에 물대신 차를 내 놓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시는 차는 조차(早茶)라 하여 정신을 맑게 해 주고, 정오에 마시는 차는 휴식차라 하여 휴식을 취하면서 갈증을 해소 해준다.
이렇듯 이 곳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차를 즐겨 마신다.
전통의상을 입은 남녀 8명이 무대에서 춤을 추고 설명을 하는데 중국말이라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고, 그냥 춤 구경만 해야 한다.
▶ 숭성사 삼탑(崇聖寺 三塔)
대리고성에서 북쪽으로 약1km떨어져 있는 숭성사 입구에 도착한다.
먼저 전동카를 타고 숭성사 맨 위쪽으로 올라간다.
비가 많이 내리는데도 관광객이 붐빈다.
붉은 기와로 된 건물이 즐비하다. 지금도 사찰 증축이 계속 되고 있다.
신도들은 숭성사 대웅전 앞에 있는 향로에 길이가 1m가량 되는 굵은 향 다발에 불을 붙여 자욱한 연기를 내며 연신 절을 한다.
사찰 중앙 계단으로 내려오면 숭성사 앞에 탑이 세 개 있다. 이것이 삼탑 이다.
삼탑은 중국의 유명한 불탑으로 1961년에 국가중점 문물로 지정 된 곳으로 천심탑(千尋塔)으로도 불린다.
가운데 있는 주탑은 사각으로 높이 70m에 16층으로 7세기경인 당나라때 만들어진 것으로 노예들을 동원하여 모래와 생석회, 흙을 혼합하여 산더미 같이 쌓아 돌과 같이 단단하게 굳혀서 위에서부터 깎아 내려 만들어서 기초가 없다고 한다.
남쪽과 북쪽에서 주탑을 모시는 듯 높이40m에 10층 규모로 2개의 소탑은 8세기경인 송나라 대리국이었던 시기에 만들었다.
주탑은 400년 전부터 약간 기울었으며, 1925년 대 지진으로 탑 1층에 20cm가량 벌어졌다가 10일 후에 다시 이어졌다.
오후5시경 대리의 관광이 마무리 되고 버스를 이용하여 여강으로 향한다.
저녁식사는 여강에서 한식으로 할 예정이었으나 너무 늦을 것 같아 가는 도중에 어느 식당으로 들어갔다.
농촌지역인 듯한데 식당이 꽤 커 보인다.
손님은 우리 일행뿐이다.
식탁에 여러 가지 음식이 있으나 향료냄새 때문에 식욕이 없어진다.
저녁식사를 마치자 바로 버스는 여강을 향하여 달린다.
도로는 왕복 4차선으로 포장 된지 오래되어 갈라지고 패여서 요철이 심하다. 버스가 흔들리며 춤을 춘다. 이 도로는 최고 시속60km다.
버스가 빨리 달렸으면 좋겠는데 최고속도를 넘지 않고 천천히 달린다.
어둠이 오고 비가 내린다. 차량 외에는 불빛이 없다.
농촌마을에는 가로등조차 없고 가끔 창문사이로 불빛이 보일 뿐이다.
2시간여를 달리다가 농촌의 어느 상점 앞에 버스가 멈추고 휴식을 취한다.
지붕이 없는 화장실에서 비를 맞으며 볼일을 보는데도 사용료를 줘야한다.
☐ 여강(麗江 리장)
대리에서 4시간여를 달려 여강에 도착한다.
쭉 뻗은 도로와 도로 옆의 꽃길이 아름답다.
이곳은 새로 조성된 신도시다.
관방호텔(官房酒店 GUAN FANG HOTEL)에 여장을 푼 시간이 밤11시경. 호텔은 주 건물을 중심으로 옆과 뒤에 콘도식 건물이 수십 채 이어져 보기에도 아담하고 운치가 있다.
우리일행이 묵는 곳은 콘도 4채인데 각각의 건물은 1층은 로비이고 2~3층은 4개의 객실이 있다. 각 건물마다 안내하는 여자 1명이 배치되어 있다.
운남의 베니스라 불리는 여강은 대리에서 북쪽으로 약 200km 떨어지고, 곤명에서 서북쪽으로 약 560km 떨어진 곳의 해발 2,500m의 고원도시다. 여강이라는 이름은 큰 강이 굽이굽이 도는 풍성하고 아름다운 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양자강의 상류에 위치 해 있다.
여강의 인구는 112만 명으로 22개 소수민족이 사는데 대부분 나시족(納西族)과 이족이 거주한다.
나시족은 모계사회로 그들만의 언어와 상형문자를 사용한다.
나시는 검다는 뜻으로 얼굴이 조금 검은 편이다.
나시족은 가사 일에서 부터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여자들이 도맡아 하고, 남자들은 한가롭게 시간을 보낸다.
이처럼 나시족은 ‘남자의 천당, 여자의 세계’라 일컫는다.
나시족의 남자들이 평생 해야 할 3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공부하기, 애낳기, 햇볕쬐기 등이다.
그래서인지 남자들이 모여서 마작을 즐기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지금은 그러한 관습이 점차 사라지는 것 같다.
남자들이 물건을 팔거나 들에서 일하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다.
이곳 여강에는 나시족에서 갈라져 나온 모수족이 있는데 13세가 넘으면 성년식을 하고 남녀 교제가 가능하다.
여자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버지, 할아버지란 단어가 없다. 모계사회로 양육은 엄마나 외삼촌이 한다. 이모도 엄마로 부른다.
모수족들은 휏불 오락을 즐기는데 춤을 추면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손바닥을 긁는다. 밤에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 집에 찾아가는데 갈 때는 고기, 칼, 모자를 가져간다. 먼저 고기 뼈나 솔방울 속에 고기를 꼭꼭 넣은 것을 가져가 개에게 던지면 짖지 않고 오래 먹도록 하고, 다음은 칼로 여자의 방문을 연다. 그리고 방문위에 모자를 걸어 두는데 이것은 남자가 있으니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이다. 남자는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 나와야 한다.
근친 등으로 기형아가 태어나면 신(神)으로 생각하고 성인식을 할 수 없다.
▶ 옥룡설산(玉龍雪山)
곤명에서의 호텔방은 추웠는데 여기서는 따뜻하게 잘 잤다.
4일째(4.11) 상쾌한 아침 일찍 일어났다.
호텔에서도 멀리 눈 덮인 옥룡설산이 보인다.
비는 내리지 않으나 잔뜩 흐린 날씨다.
버스는 여강 신도시를 지나 평원 한가운데로 곧게 뻗은 도로를 따라 달린다.
넓은 평원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 드문드문 보일 뿐 황무지이다.
20km를 달려 옥룡설산아래 주차장이다.
여기서 옥룡설산 가는 셔틀버스를 갈아 타야한다.
옥룡설산은 고지대로서 산소가 부족하다. 그래서 건강에 이상이 있거나 호흡이 곤란한 사람들은 산소통(5천원)을 사 간다. 현재도 머리가 띵한 것 같다.
많은 관광객이 쇼핑을 하면서 옥룡설산행 버스를 기다린다.
셔틀버스에 올라 산모퉁이를 몇 번 돌아 옥룡설산으로 달린다.
옥룡설산은 여강에서 보라보면 산맥이 마치 은색의 용이 춤을 추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옥룡(玉龍)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옥룡선산은 이름 그대로 1년 내내 눈이 녹지 않은 설산이다. 주봉은 해발5,596m 로 만년설이 쌓여 있고 빙하가 13군데나 분포되어 있어 적도에서 제일 가까운 빙하지대로, 아직 어느 누구에게도 정복 된 적이 없는 처녀 산이다.
결국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옥룡설산 기슭에서 리프트를 타고 해발4,400m 정도 올라간다.
리프트에서 내리니 올라오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사라고 한다.
리프트 앞에 카메라를 설치하여 사진을 찍어 컴퓨터에서 바로 뽑아낸다. 1장에 2천원이나 안 산다고 버티면 1천원 또는 5백 원에도 살 수 있다.
나무계단 길을 걸어가면 울창한 원시림에서 눈 뭉치가 머리에 떨어져 깜짝 놀라게 한다. 1km쯤 가면 운삼평(云杉坪 원샨핑)이 나온다.
해발 4,506m에 위치한 운삼평은 호수와 같은 넓은 평원으로 원시림과 만년설, 푸른 하늘이 어울려 환상적이고도 이국적인 풍치를 보여 준다.
이 곳에는 소수민족인 이족이 살고 있는데 사냥으로 생활 해 왔기 때문에 양가죽으로 만든 전통 의상을 입는다. 문화 수준은 중국에서 가장 낮은 민족이다.
그러나 비가 와서 멀리 옥룡설산은 볼 수 없고 눈이 쌓인 평원과 원시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리프트로 내려오니 인천공항에서 같은 비행기를 탄 서울의 관광객이 올라온다. 반가워서 “서울 손님 안녕 하세요” 하며 인사를 나눈다.
버스로 이동한다. 옥룡설산아래 백수하(白水河)라는 계곡에 보인다. 이 곳은 옥룡설산에서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곳으로 하천이 다락논 같이 생겼으며 하얀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 백사벽화(白沙壁畵)
백사는 여강에서 북쪽으로 8km거리에 있는 마을로 나시족 최초의 집거지 이면서 여강 목(木)씨의 거주지이다.
명나라때 건축물로 대보적궁, 유리전, 문창궁등이 이곳에 위치해 있다.
대보적궁에는 백사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하나의 벽화 안에 불교를 비롯하여 도교, 라마교의 불상이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는 약소민족으로서 살아남기 위하여 한족, 티베트족, 나시족이 보아도 다 흡족하고 치우침이 없이 공존공생하기 위하여서다. 그래서 전쟁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모택동의 문화혁명 시 홍위병이 들이 닥쳤을 때는 흰 천으로 벽화를 가리고 모택동 사진을 걸어 놓아 파손을 면했다고 한다.
관광을 마치고 뒤쪽으로 나오니 관광객을 상대로 한 상가가 이어져 있다.
서양인 몇 명과 우리 일행뿐이다.
상점 앞 몇 군데에서는 찌든 옷을 입고 꾀째째한 남자들이 마작을 하고 있다.
여기 백사마을은 우리의 옛 농촌 모습과 비슷하다.
공원 출입문은 고 건축물로 우아하고 화려하다. 그리고 앞에는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세 마리의 사자상이 버티고 앉아 있다. 보통 숫사자가 암사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양쪽에 있어야 하나 이 곳의 사자상은 그 반대다.
나시족은 여자가 남자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원 안으로 들어간다.
맑은 물이 호수에 가득하다. 이 물은 어디에서 흘러드는 것이 아니라 호수 밑에서 솟아난다고 한다. 그러나 북쪽에 계곡이 있던데.... ?
호수에는 많은 종류의 물고기가 서식하는데 사람들은 그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용이 잡아먹으라고 .....
연못가운데는 아름다운 정자가 물 속에서 웃뚝 솟아 있으며 산쪽으로는 오봉루(五鳳樓)라는 누각과 옥수룡굴(玉水龍窟)이란 사찰이 호수를 내려다 보고 있는데 동파교(東巴敎 원시적 종교)를 믿는 나시족의 보호신을 모시는 곳이다.
일부 건물은 고성구의 문화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흑룡담이란 중국 팔선(八仙)중의 하나인 여동빈이 악(惡)한 열 마리의 용 가운데 아홉 마리는 잡고 나머지 한 마리인 흑룡은 이 곳에 가두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나 중국이나 전설은 참 많다.....
▶ 여강고성(麗江古城)
여강고성은 해발2,400m인 운귀고원에 위치하며 여강시내와 붙어있다.
송나라 말기 원나라 초기인 13세기후반부터 건설 되었으며, 나시족(納西族) 자치현으로 성(城)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나시족의 대부분의 성(姓)이 목(木)씨와 화(和)씨 성을 가졌는데 이 곳의 목씨가 많이 살아 木에 성을 만들면(口) 곤란 곤(困)이 되어 목씨가 살 수 없다하여 성(城)을 만들지 않았다.
이 곳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은 맑은 물에 금붕어가 떼를 지어 다니는 수로다. 옥룡설산에서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이다. 성내에는 수로가 잘 발달 되어 있다. 길마다 수로가 통하고 집집마다 홍등이 달려 있고, 문 앞에는 맑은 물이 흐른다.
빼곡히 들어선 상점에는 온갖 물건들이 손님을 기다린다. 담벼락에 나시족의 상형문자도 보인다.
사람들이 많아 도떼기시장 같다.
길바닥은 잘 다듬어진 돌들이 깔려 있는데 비가 와서 미끄럽다.
가이드가 깃발을 들고 앞장서 길을 간다.
자칫하면 길을 잃는다.
구경이고 뭐고 길을 잃을까 싶어 깃발만 보고 다닌다.
미로 같은 길을 얼마나 돌아 다녔는지 모른다.
광장에 나오니 다리가 뻐근하다.
이 곳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적인 문화 명승지로 중국에서 특별히 관리한다.
많이 걸어 다녀 다리의 피로를 풀기 위하여 발 맛사지를 받아야지
여강 시내에서 발 맛자지를 받는다. 뜨거운 약수에 발을 담근다.
젊은 남여 21명이 한꺼번에 들어와 일행 앞에서 맛사지를 한다.
어께부터 주무르는데 손아귀의 힘이 어찌나 센지 아프다.
맛사지 요금이 1인당2만원에 팁이 5천원이지만, 1시간의 맛사지를 받고 나니 피로가 많이 풀린다.
여강의 관광을 모두 마치고 560km떨어진 곤명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한다.
버스를 타고 고산지대의 산길을 따라 여강 공항으로 1시간가량 달린다.
도로변의 비탈진 밭에는 누렇게 익은 보리밭과 밤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23시에 여강공항을 출발한 국내선 동방항공기는 40여분 컴컴한 밤 하늘을 날아와 곤명공항에 도착하여 새벽 1시쯤에 호라이즌 호텔(大恒大酒店)에서 하루를 마감 한다.
□ 다시 곤명으로 돌아오다
▶ 석림(石林)
석림은 곤명에서 89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버스로 2시간 정도 걸린다.
석림 초입부터 낮은 산에 작은 바윗돌들이 떼를 지어 모여 있는 것 같다.
대석림과 소석림 등으로 분류하여 국가 중점 명승풍경구로 지정하여 보호되고 있다.
주차장에서 전동카로 소석림으로 향한다.
소석림 입구에 맑은 호수가 있고 주변에 기암괴석의 바위들이 솟아나 있다.
전동카를 타고 달려도 모두 구경하기가 어려울 만큼 모든 산이 석림으로 이어져 있다. 너무 많아 지루함 마져 든다.
이곳은 2억7,000만 년전에 망망대해의 바다 밑바닥이었다. 석회암으로 된 지층이 솟아오르고 바닷물이 빠지면서 서서히 육지로 나타나 7천만 년전에 현재와 같이 해발 1,760m 로 융기했다. 특이한 것은 기기묘묘한 형상을 갖춘 석림은 대부분 중간에 띠를 두른 듯 갈라져 있다.
다시 대석림으로 이동한다. 기기묘묘한 큰 바위들이 우뚝 솟아 직접 보지 않고는 모를정도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많은 관광객이 바위위에 있는 전망대로 오른다. 매우 복잡하다. 그냥 밀려서 올라간다. 와~! 탄성이 나온다.
이곳의 석림은 보이는 것은 겨우5%정도이고 나머지 95%는 땅속에 묻혀 있다.
▶ 구향동굴(九鄕洞窟)
구향동굴은 곤명에서 약 100km 떨어진 곳으로 석림에서 곤명으로 향하다가 중간 쯤에서 오른쪽으로 달린다.
구향동굴은 면적이 약 200㎢ 에 달하며 길이가 2km정도 된다.
동굴입구 주차장에는 대형버스들이 즐비하다.
매표소 입구에는 꽃으로 잘 단장 되어있다.
동굴에 갈려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30m가량 내려간다. 이 곳에 계곡물을 막아 작은 호수를 만들어 10여척의 자그마한 배를 이용한다. 8명이 타고 노를 저어 10여 분간을 상류로 올라갔다 돌아오는데, 마치 동굴을 탐험하는 듯 하다.
양쪽 옆에는 종유석들이 자라고 있다.
배에서 내려 물이 넘쳐흐르는 계곡을 따라 동굴로 들어간다.
동굴과 계곡이 같이 이어진다. 계곡물 소리가 요란하다.
동굴은 계곡을 따라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오르막 내리막이 심하여 가마꾼들이 관광객을 태워 나르기도 한다.
중간쯤에 왔을까? 넓이가 수백 평정도 되는 광장이 나온다. 여기에서 연주회도 한단다. 광장 가장자리에는 상점과 전시물이 이어져 있다.
특이한 것은 구향동굴에만 서식하는 맹어(盲魚)라는 물고기가 있는데 어두운 곳에서 살다보니 눈이 퇴화 되어 눈이 없는 물고기들이 어항에서 놀고 있다.
조금 더 들어가면 폭포를 만나는데 높이가 약 10m 정도로 동굴속의 폭포 중에서 제일 크다. 그래서인지 흐르는 물소리가 굴속을 진동한다.
이 동굴에는 다락논 같은 것이 있는데 신이 만들었다하여 신전(神田)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석순과 석주가 형형색색의 불빛을 받으며 버티고 있다.
캠코더를 찍어 대느라 정신이 없고 어떻게 돌아 왔는지 모르겠다.
바깥에 나오니 시원한 바람이 분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리프트를 타고 1,000m 정도로 올라가면 주차장이 나오는데 하필이면 우리 일행이 탑승 할 때 소나기가 어찌나 많이 내리는지? 옷이 다 젖었다.
이제 모든 관광일정은 끝났다.
곤명시내로 달린다.
라택스 판매장, 실크 매장, 보이차 매장등을 쇼핑하고 시음도 해 본다.
저녁은 곤명 특산인 자연산 버섯 샤브샤브가 특선으로 나오는데 대부분 좋아 하는 듯 하다.
나는 중국음식이라면 아예 먹지를 못 하겠다. 한국에서 가져간 반찬으로 모든 식사를 해결 할 수밖에 없었다.
곤명 국제공항 출국은 새벽2시30분인데 지금시간은 저녁9시.
공항대기실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공항 바깥에는 젊은 엄마들이 아기를 업고 꼬마아이들을 시켜서 구걸 행위를 계속한다. 공항관리자가 나타나면 도망갔다가 다시오고를 반복하는데 밤12시가 넘어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드디어 새벽2시30분 중국동방항공 여객기는 곤명의 밤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른다. 모두가 관광으로 지쳐 잠들어 있다.
2007년 4월 13일 오전8시경에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한다.
야~ 살았다!
서해 대교를 타고 삽교호에서 맛있는 회를 먹고 대구로 향하는데 모두가 잠에 빠져있다. 도착한 시각은 오후3시경.
일행님들이여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이 있어야 추억이 오래 남습니다.
내년에도 좋은 해외관광 모두 같이 갑시다.
바쁘게 쓰다가 보니 표현이나 문맥이 잘못된 곳이 많을 줄 압니다만
이해 해 주시고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