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3 째 토요일 성지순례와 성지 주변 자연을 찾아 걷는 순례단을 몇년 전 만들었다. 작은자 몫 만으로 걷겠다는 약속을 자신과 맺은 후 쉼 없이 지금껏 달려 왔고 앞으로도 계속 진행할 계획이다. 처음 실행을 하면서 3가지 약속을 만들었다.도보순례를 한다.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한다. 도시락을 준비한다 가 바로 세가지 약속이다.서울 성지와 경기권역 성지는 지킬 수 있었지만 경기권역 성지순례와 그 주면 걸음여행을 완성한 이후에는 그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다. 순례의 외연이 넓어질수록 순도보순례는 힘들었다. 그래서 약속을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 버스를 빌려 오고 가는 동선을 해결한 후 순례지역내에 있는 성지와 성지를 잇는 도보순례를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든다면 내포지방에 있는 여사울성지 - 신리성지- 무명순교자 무덤 참례- 합덕성당- 솔뫼성지를 연결하여 걸어 순례하였다. 우선 성지를 찾으면 무명순교자 묘역을 찾아 참배하며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드리며 순교선조님들에게 마땅한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성지내 성전을 찾아 미사를 봉헌, 성지내 식당을 빌려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참가한 형제들과 형제적 친교를 나누며 점심을 해결했다. 그리고 주변 숲, 들, 산, 강, 바닷길을 찾아 하느님의 반영 담긴 자연을 걸었다. 그렇게 순례와 걸음여행을 해온지 벌써 4년째다. 지금은 충북성지를 끝낸 후 내포지방 성지를 순례중이다. 내포도 3-4 성지만 순례하면 끝난다. 그럼 전북으로 참례를 옯길 것이다. 금년 9월에는 해미성지를 참례한 후 안면도 해변길을 트레킹 하였다. 트레킹이란 표현 마땅하지 않아 나는 걸음여행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걸어서 여행 한다는 뜻이다. 해미성지는 원래 8월 계획이었으나 교황님 방문으로 연기 되었다. 아시아 청녀대회 관계로 방문을 불허 받고 연기를 하게 되어 9월에 다녀 왔다.
해미의 원래 지명은 해뫼었다. 왜구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읍성을 쌓고 병마절도사가 병권과 행정을 관리하였다. 그러나 병마절도사가 청주로 옮겨간 후 마을의 직급은 떨어졌지만 천주교 박해시기에는 생사여탈권을 갖고 무수한 천주학쟁이들을 죽였다.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죽였다. 몇가지만 소개 한다면 수장, 장사, 백지사, 생매장, 교수형 등등.. 권철신 형제로부터 서학과 천주교리를 배운 내포 여사울출신 이존창은 중인이었으나 내포일대에 살던 민초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버렸다. 김대건, 최양업신부의 윗대분들과 이런저런 인연을 맺어 천주를 믿게 한 이는 바로 이존창이다. 내포 천주교도들은 대부분 민초들로 구성된 관계로 관아에서 눈치도 보지 않고 심하게 형벌가해 순교에 길로 나서게 만들었다. 해미읍성은 한티고개를 넘어 줄줄이 포박을 당한채 끌려온 천주학쟁이들을 옥사에 가두고 심문하며 배교를 하지 않는다며 회화나무에 메달아 자진하여 죽게하거나 지근거리에 있던 덤벙으로 끌고가 수장시키고 생매장하여 죽였다. 이런 순교의 현장을 발굴하여 성전을 건립한 곳이 바로 해미성지성당이다.
해미읍성 옥사 바로 앞에 있는 회화나무다. 이 나무에 천주학쟁이들을 매달아 놓았던 곳이다. 원래 회화나무는 중국이 원산지로 중국황제가 선물하여 우리나라에 들어 왔다. 학명과는 달리 내포지방에서는 호야나무라 부른다. 학문적 품위를 지닌 학자가 탄생한다는 뜻으로 받아 들인 왕은 올바른 신하가 있으면 나누 묘목을 하사하여 집안 뜨락에 심도록 하였다. 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교목은 민가에서 소중하게 여기며 심고 정성을 다해 키웠다. 가문의 영광을 바라며 지극정성을 다 한 것이다.
나라의 나랏님도 삼정승(영의정, 우의정, 좌의정)들이 국가운영에 최선을 다해 국운을 번성시키라는 의미에서 삼정승들이 자주 머무는 곳에 회화나무를 심었다. 이토록 좋은 의미를 지닌 회화나무가 교수목으로 바뀐 것이다. 지금이야 해미성지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도로가 많이 개설되었지만 80년대초만 하더라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장항선 열차를 이용하거나 서산 터마널을 이용하여 접급하였다. 승용차를 이용하더라도 천안IC를 빠져 나와 이곳저곳의 마을을 거치면서 많은 시간을 소비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았던 시기는 80년대초였다. 현지인을 통하여 천주학쟁이들의 수난사와 순교사를 청취할 수 있었다. 당시 해미읍성에는 여러채의 민가가 있어 사람들이 실재로 생활하고 있었다. 당시 민가를 지나 찾았던 회화나무 그곳에서 설명을 듣는 순간 경악했다. 사람에게 제일 잔인한 존재는 역시 사람이다. 사람을 사람이 이토록 참혹하게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우리나라에는 각지에 순교성지가 존재하지만 생매장 하고 나무에 사람을 철사줄이나 끈으로 상투를 묶은 후 나무에 메달이 죽이고 생매장 시킨 곳은 거의없다. 1935년경 서산본당에 부임하신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님은 해미에 사는 농부에게 밭갈이 중 뼈와 고상, 묵주가 발견되었다는 제보를 받고 발굴을 시작하게 된다. 뼈가 서서 발견된 모습에서 생매장의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다들 경악했다.지금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는 150여명 뿐이다. 나머지는 거의 무명순교자다 그 숫자도 1000기에서 3000기로 추정하고 있다. 역사에 기록된 숫자는 1000명이다. 내포에서 순교한 사람들의 신분은 거의 백성이었다. 그래서 거침없이 죽였다는 판단이 든다. 내포지방 여사울에서 시작된 이존창의 전교는 내포 곳곳에 신앙의 씨를 뿌리고 세 소년의 신학생을 만든다.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이 그들이다. 최방제는 병사로 사제로 나가는 길이 멈춰지만 김대건과 최양업은 사제의 꿈을 실현하고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는 중국을 다녀 오다 백령도 부근 순위도에서 잡혀 해주로 압송된 후 한양으로 재압송 되어 갖은 고초를 겪다 순교를 한다.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충북 백곡 배티 아래 초막을 짓고 성당을 만들어 기거하며 성사를 주기위하여 삼남지방을 순회하다. 문경새재 아랫동내 진안리 주막거리에서 장티프스로 선종하시게 된다. 그래 우리는 신부님을 땀의 순교자라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종교의 역사의 시발점은 바로 이존창이 씨앗을 뿌린 내포지방이었다. 이토록 중요한 역활을 했던 내포지방과 그 안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만든 해미읍성과 해미성지에서 아시아 청년대회를 갖고 교황님게서 방문하신 것은 바로 순교자들의 부활이었으며 당연한 일이었다.
신자들이 끌려가 옥사를 당하고 온갖 형벌에 가혹한 죽음을 당한 해미읍성 모습을 차입해와 화강암으로 신축한 건물이 바로 해미성지 성전이다. 열두사도를 기억하려고 주춧돌 12개를 놓고 그를 반석으로 12개의 기둥을 세운 후 성전안에는 나무로 기둥 12개를 세웠으며 각 기둥마다 당시 신축자금 50억을 봉헌한 봉헌자들의 이름을 기둥에 새겨 두었다. 그리고 옥상에는 천국의 형태인 원형의 쉼터를 만들어 이곳에서 순교한 선조들을 위로하고 있다.
35명으로 구성된 오늘 순례단을 이끌고 우선 해미음성을 찾아 교황님께서 아시아청소년대회 미사를 집전하셨던 장소로 갔다. 기념으로 설치한 교황님 모형물 앞에서 기념촬영을 갖은 후 호야나무와 옥사를 참관하고 다시 동헌을 둘러 보며 당시 끔찍했던 역사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옥사에 모여 다시 기념촬영을 갖고 성지성전으로 가 입당한 후 11시 미사를 봉헌하였다.
미사참례를 마친 일행은 박물관 견학을 통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친견하고 순교의 역사물을 보며 하느님의 영광에 대하여 깊은 침잠에 빠졌다.
그리고 다시 무명순교자들의 묘를 찾아 간소한 제물을 올린 후 기도와 성가를 배알과 함께 드렸다. 순교자들은 내포지방 곳곳에서 붙잡힌 후 오랏줄에 묶여 한티고개를 넘어 해미읍성 서문으로 들어와 옥사에 갇혔다. 그리고 매일 반복되는 심문과 고문은 그들을 지지게 하였지만 그들은 배교를 하지 않았다. 어떤 고통도 예수마리아만 있으면 견딜만 했던 것이다. 종교와 이해관계가 없던 사람들에 귀에는 예수 마리아가 여수 무엇이라 들려 그들은 순교자가 처형을 당했던 현재성지 부근을 여숫골이라 부르며 접근하지 않았다.
나는 천주교 3대 교란(敎亂)에 대하여 설명한 후 서학의 강학과 신앙으로의 발전사와 이존창선조이 권일신 형제수하에서 천주에 대한 배움과 전교활동에 대하여 정리하여 설명 나눔을 갖았다. 모든 성지순례를 끝내고 하느님의 반영인 자연의 길을 걷기 위하여 안면도로 차로 이동하였다. 이동중에 해미에서의 순교역사를 다시 간추려 설명을 하였다. 그리고 내린 안면도 장정교, 이곳에서 남쪽 꽃지까지 걸음여행을 시작하였다. 송림과 갯벌과 사구를 연결하며 걸으며 프란치스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사려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걸음여행계획을 나는 꽃지 일몰시간에 맞춰 계획을 세웠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 떨어졌다. 길고 긴 해변길의 걸음여행, 9km의 걸음여행이었지만 순교의 길만 할까 하는 생각으로 걷다보면 금새 도착이다. 이런 생각은 결국 대관령 선자령 일출, 덕유산 정상, 태백산 일출 맞이를 성공시켰었다. 그것도 70의 고령 형제, 자매님들 까지.... 그들은 아니 순교자님들은 죽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배교를 끝으로 곤장 수십대 맞고 다시 이승으로 돌아 올 것이지..... 당신들의 생각은 달랐다. 하느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죽어갈 용기를 얻은 것이다. 참혹했던 조선시대의 계급사회의 모순 속에서 평등이 아니라 박해와 억압속에서 연명했던 민초들은 이존창선조에 의하여 전교된 천주의 사랑은 평등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선교사도 없는 가운데 들불처럼 퍼져나간 천주학은 양심을 앞세운 의식있는 지식인들의 고뇌찬 반성의 시작이었다. 그 고뇌가 서학을 끌어 드렸고 진보적 성향의 이벽, 권철신, 권일신, 정약용형제들, 이승훈 등에게 믿음으로 전향되어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노을을 보면서 나는 천주의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환경을 생각하고 있었다.( 성지순례, 걸음여행기를 보시려면 다음카페에 들어 가셔서 세베리노 트레킹을 치시면 접근 하실 수 있습니다. 누구나 환영합니다. 회원으로 가입해 주시면 많은 정보와 안내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동참도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