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봄 탓이로다>
봄 탓이로다
- 신윤복의 그림 ‘손목’을 감상하다
으슥한 후원 안에 백일홍 다퉈 핀다
허물어진 담장 위로 잡풀이 적적한데
저, 저런!
덥석 잡는 손, 수염 아직 없구나
꿈틀하며 놀란 괴석 게슴츠레 치켜 뜬 눈
사방관 쓴 사내의 은근한 조바심에
엉덩이 잔뜩 뒤로 빼는 짚신 속의 저 여인
향기 푼 낮달이 살짝 걷은 구름자락
까무룩 몸을 떠는 나비의 날갯짓에
농익은 꽃잎 하나가
토옥!
하고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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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한 방울 핏물 튕겨 뿌리박은 그대 모습
격랑을 가로 막고 응시하는 눈빛이여
붉은 해 홰치는 자리
팔을 걷고 섰는가
열원熱願은 바위 녹여 바닷물도 식혀내고
동백꽃 봄불 태워 소지燒紙하는 기도 앞에
내 조국 아리는 사랑
그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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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竹]의 기원
나 죽어 한 필부의 젓대로나 태어나리
노래로 한세상을 달래어 살다가도
그리움 지는 달밤엔 가슴으로 울리라
그 다음 생 또 있다면 빗자루로 태어나리
티끌 먼지 쓸어내어 이 세상을 맑히다가
해 지면 거꾸로 서서 면벽수행 하리라
화살이나 죽창은 내 뜻이 아닌 것을
속 비워 어깨 서로 기대며 다독이다
생애에 단 한 번 꽃으로 경전 피워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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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법
무덤 속 머리맡에 두고 읽던 편지 한 통*
모처럼 햇빛 만나 가루분 톡 톡 치며
초음파 봉합처리로 이승 사람 부른다
오백 년 지나도록 아려오는 사랑 두고
한두 줄 카카오톡 핑퐁을 치고 있다
천 년쯤 잠자고 나면 어떤 색깔 그릴까
2012년 5월 대전 유성구 안정 나 씨 분묘 이장 중 500년 전의 편지가 발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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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새*의 증언
천적 따윈 없었어, 꿀잠 자는 안태의 집
발톱도 날갯죽지도 기억 속에 감추었지
창공을 가르던 소리 전설 하나 만들고
걸음새 뒤뚱해도 보금자린 넉넉했어
눈을 가린 먹구름이 발끝으로 다가와도
총부리 심장을 향해 겨누는 줄 몰랐어
앙가슴 내려치며 가시 삼킨 저 목구멍
푸드덕 날아오른 산맥 넘는 꿈의 비행
날갯짓 화석으로 남아 오늘을 증언한다
* 인도양 모리셔스 섬에 살던 새. 도도새 보다 강자가 없던 무인도에서 살다 점차 날개가 퇴화되어 섬을 점령한 자에 의해 멸종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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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플란트
오백 년
영욕 딛고
버텨 온 저 팽나무
금가고 부러진 뼈
시멘트 기둥 박아
해묵은
아집을 털고
새떼 불러 젖 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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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그래
자시子時를 앞당겨서 술시戌時에 차린 제상
햇과일 올리시며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梨枾
입 속에 뇌던 울 엄마, 영정 속서 나를 본다
청상에 하나 된 딸 꾸지람은 준열해도
도꼬마리 달라붙듯 매달리던 치맛자락
무쇠솥 누룽지 뭉쳐 달래주던 그 손길
저승 안부 묻기 전에 이승 기원 먼저 해도
깨꽃같이 웃으시며 그래그래 하는 말씀
재배로 보낼 수 없어 사배하며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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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뿔
무방비로 강타 당한 목구멍이 흠칫한다
적의 동태 알려주는 전령사 다녀간 뒤
곤죽 속 허우적허우적
깊이 모를 늪이다
바람구멍 사방으로 침범한 바이러스
삭신을 훑어 내린 상사병 든 그날처럼
몽환을 헤매는 심장 어질머리 도진다
함부로 내돌린 죄
가슴을 들끓인 죄
백지 위에 토설하면 노루귀 꽃잎 열고
한 번쯤 살얼음판을 건너야만 오는 봄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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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
잊지 않고 낡은 몸이 혼자서 울고 있다
속속들이 다 쏟아낸 껍데기의 적막강산
하나씩 떠나간 자리 약봉지만 늘어나고
산맥을 넘을 때도 끄떡없던 허벅지에
뼛속을 훑는 바람
여든 해의 저 나이테
내일은 눈발이 치려나 삭신 먼저 기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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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똑바로 선다는 건 누군가의 힘이다
저 땅속 서로를 끌어안고 버텨 온 사랑
무성한 숲을 이루려 아래로만 뻗는다
문명의 허공 딛고 빌딩 숲 올라간다
김 오른 밥상 앞에 내일 향해 기도하면
낮춰라 흙내음 맡아라
엄마 말씀 들린다
별자리 딛고 섰는 지구는 안전하다
저들끼리 소통하여 모판으로 얽어매면
꽃피고 열매 맺는다
유성비가 내린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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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피랑 이야기
놋양푼 수제비국 서로 간을 보아주며
방문을 대문삼아 살아가는 높바람 속
된비알 빼곡한 궁기에도 포도송이 영글어
비둘기 집 외기둥엔 나란한 부부 이름
갓 피운 봉숭아꽃 아미 숙인 물색으로
주름꽃 가득한 신발 댓돌 위서 도란거려
갯내 끌고 가는 벽화에 생을 묻고
굽은 허리 펴고 서서 통영바다 다 안는다
내사 마 “오글티리고 살아도 내 구석이 좋은 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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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보살반가상*
천 길 낭떠러지 아득한 바위 절벽
신라 석공 정을 쪼아 우주를 빚고 있다
보관을 씌우는 손길
떨려오는 저 법열
얼비치는 옷 주름이 무릎 아래 흘러내려
구름 위 걸터앉아 받쳐 든 꽃 금세 벌어
향기로 감싸는 사유思惟
지그시 눈 감는다
검버섯 피었어도 자비는 넘쳐흘러
나부끼는 법의 자락 이 몸을 싸고돌아
홀연한 천상의 노래
마음귀를 맑힌다
*경주 남산에 있는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보물 제1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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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그 누가 읽을 건가 외계인의 저 메시지
먹나비 날갯자락에 붓으로 쓴 암호무늬
방부제 분칠한 꿈이 천년 잠에 들었다
나비원* 건너가서 봉서 한 통 받아들고
그대 행간 해독하려 가로세로 뜯어보다
차라리 나비 되리라, 장자 내편을 펼친다
* 울산대공원에 있는 나비식물원, 러시아 사진작가 Kjell Sandved는 나비 날개의 문자 등 여러 문양이 외계인이 지구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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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타는 남자
외줄에 매달리며 말을 잃은 낯선 사내
잊혔던 고향 길이 구름 속에 어른거려
발아래 아득한 세상
두 눈썹이 떨린다
한 끼 밥을 위해 맴돌던 인력시장
햇살이 퍼졌어도 호명 않는 작업복에
된바람 둥지를 뚫어
허기만이 가득하다
잔술을 건네주는 길가의 포장마차
한두 줄 국숫발이 목줄을 타고 내려
얼룩진 하루살이가
알전구에 엉겨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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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주
마음의
핵을 모아
붉은 뜻 펼칠 때에
인감도
국새도
나의 몸을 빌렸는데
단 한번
더블클릭이
세상을
확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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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제비
-런던 올림픽 도마의 신 양학선
1
뜨겁게 팽창한 무한의 에너지가
껍질을 훌훌 벗고 끌고 온 삶 녹여내며
청옥빛 가락을 타고 자유롭게 날고 있다
2
하늘로 솟구치며 우주를 유영하다
세 바퀴 길을 열며 활공하는 한 마리 학
나비로 내려앉으며 온몸으로 시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