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매운 눈물 담다>
양파 생각
함부로 벗기지마라, 최루성 속내란다
동심원 퍼져가듯 그리움에 닿기 위해
한겨울 땅속에서도 달달한 향 지켰으니
화농을 도려낼 날[刀]하나 내게 없고
성냥불 확 댕겨 타오를 눈빛도 없어
살 속에 살을 감추어 매운 눈물 담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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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지 왕버들
몇 백 년 순례의 길 마침내 돌아와
바람에 먹을 갈아 물 위에 선시를 쓴다
뼛속을 텅 비운 소리,
새들도 잠잠하다
저렇듯 하늘 품어 몸통 내린 물속이다
손발이야 짓물러도 날마다 빗는 머리
한세월 삭여낸 가슴 구멍마다 화엄이다
눈비도 달게 받고 달빛도 고이 받아
향기는 나비에게 뿌리는 버들치에게
마지막 남은 한 획에 물잠자리 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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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랑숟가락
여름엔 감자 등을
겨울엔 호박 속을
쓱쓱 긁다 제 살 깎아
껍데기만 남은 당신
한평생
닳은 손끝엔
반달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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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竹]의 기원
나 죽어 한 필부의 젓대로나 태어나리
노래로 한세상을 달래어 살다가도
그리움 지는 달밤엔 가슴으로 울리라
그 다음 생 또 있다면 빗자루로 태어나리
티끌 먼지 쓸어내어 이 세상을 맑히다가
해 지면 거꾸로 서서 면벽수행 하리라
화살이나 죽창은 내 뜻이 아닌 것을
속 비워 어깨 서로 기대며 다독이다
생애에 단 한 번 꽃으로 경전 피워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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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와 소주
유혹이 불을 켜면 바닷물도 흔들렸어
바깥이 궁금할 땐 줄낚시 타는 거야
술잔 속 생을 찢는다
칼칼한 저녁 한 때
까짓것, 살다보면 씹히고 씹는 거야
시든 청춘 메들리에 추임새를 넣다보면
저 쪽배 하늘을 건넌다
그림자를 등에 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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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 일기
거울 속 분칠하는 한 여자가 그를 본다
웃자란 눈썹 자르다 송두리째 파낸 기억
흐릿한 눈동자에 갇힌
새 한 마리 파닥인다
외계인이 찾아왔나, 어느 별을 헤맸더냐
눈시울에 얹혀있는 낯선 자식 바라보다
기억 속 창밖을 향해 더듬더듬 읊는다
꽃신을 신던 발이 자꾸만 재촉한다
뒷산의 뻐꾹새가 저리 운지 오래라고
철침대 난간을 잡고
허물 벗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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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허기진 황조롱이 발톱 세워 내려본다
쫑긋한 다람쥐가 손 부비며 올려본다
두 눈길 부딪는 순간 똑또그르 똑 똑 똑
골기와에 앉은 바람 먹구름 훌훌 걷고
스치듯 마른 붓이 하늘 한 필 풀고 있다
허공에 먹물을 찍는 깊디깊은 저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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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광대
굳은살 잔재비가 하얏차! 날아오른다
진창길 벗어날까 외돌아 무릎 굽혀
밑바닥 튕겨오른다, 낮달이 휘청한다
바늘구멍 면접으로 겨우 잡은 밥줄 하나
날자날자 주문 외는 외줄 위의 넥타이
동살의 가풀막 따라 출근길을 달린다
팽팽한 줄 위에선 사람도 새가 된다
바람의 숨결 타듯 허공을 걸어가듯
뼛속도 속내도 비워
죽지 펴는 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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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
울음낭 터뜨리고
나 대신 누가 우는가
가을을 끌어안고
밤새워 누가 우는가
그믐달
새벽이슬 밟으며
한 사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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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천장날
보소 보소 그기 뭐라꼬! 하나 더 얹어주꾸마
건천장 난전에서 호객하는 고란댁
반시도 엉덩짝 들썩
단물을 뿜어댄다
첨부터 줄끼지 와그라요 할매도 참,
뭐라카노 밀고 땡기는 이 맛에 사는 기라
장바닥 질펀한 웃음
꼬인 매듭 다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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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표 혹은 코뚜레
그대 귀에 달린 것은 귀고리가 아니다
노예의 상징일 뿐 그 무엇도 아니다
한 끼의 입맛을 위한 이력서일 뿐이다
그대 코 뚫은 것은 피어싱이 아니다
유혹의 허방일 뿐 그 무엇도 아니다
살가죽 벗겨지도록 짐 지우기 위함이다
엉덩짝 불도장은 비정규의 주홍글씨
빌딩이 높을수록 그늘은 더욱 깊어
지상의 모든 고삐로 생채기는 덧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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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지하철 계단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동전을 기다리는 두 손이 얼어 있다
치솟는 빌딩에 가려 빛을 본 지 오래인 듯
하이힐 찍는 소리 서둘러 멀어진다
단속반 툭 건드리자 통째로 구르는
오늘을 그리는 촉수 화석으로 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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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꼬리
호륵 호륵
호로리요우
숲속의 초록 방언
분수가 솟구치듯
실로폰을 딛고 간다
온 산이
가슴을 푸는
탱탱한
오월 한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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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분에 드는 길
청보리 마늘밭 지나 유채꽃 환한 세상
돌담길 북장단에 슬렁슬렁 떠납니다
흰 물결 만장이 되어 너울너울 앞섭니다
물 막은 구들장논 손끝이 다 닳도록
허리 한번 펴지 못한 다랭이 돌아돌아
아리랑 가락에 맞춰 육탈의 길 갑니다
빙 두른 이엉 위에 용마름 가볍게 얹어
이생의 업이야 손 흔들면 그만인 것
잔별이 내리는 그곳 하얀 뼈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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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탐하다
제 멋대로 자라나도 때 되면 연지 찍는다
엉덩이와 엉덩이가 춘화를 그리는데
노린재 더듬어간다
발칙한 더듬이
도화살 뻗쳤는가 단내 폴폴 풍겨댄다
풋고추 약오르는 칠월 땡볕 열기 속
풍뎅이 헉헉거린다
속살을 파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