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라면 먹는 남자>
냉이
혀 같은 새순 나와
톱니가 되기까지
한 생을 엎드린 채
푸른 별을 동경했다
서릿발
밀어 올리는
조선의 저 무명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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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먹는 남자
새벽별 보는 사내 인력시장 찾는다
막노동 삼십 년에 이력이 날만한 데
늘어난 이자만큼이나 졸아든 어깻죽지
팍팍한 건설현장 새파란 감독 앞에
헛딛지 않으려고 버팅기는 두 다리로
땡초를 화끈하게 푼
콧물까지 들이켠다
알바를 끝낸 자정 꼬불꼬불 끓인 속을
맵짠 생 후후 불며 희망 몇 올 건지려다
면발에 구르는 눈물 고명으로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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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 생각
함부로 벗기지마라, 최루성 속내란다
동심원 퍼져가듯 그리움에 닿기 위해
한겨울 땅속에서도 달달한 향 지켰으니
화농을 도려낼 날〔刀〕하나 내게 없고
성냥불 확 댕겨 타오를 눈빛도 없어
살 속에 살을 감추어 매운 눈물 담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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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이야기
고니는 굵은 갈필, 물떼새는 세모필로
사초를 쓰고 가는 모래톱 가장자리
예서체 발자국마다 생의 어록 담는다
콩게 달랑게가 지하 성전 짓고 있다
달빛을 걸어놓고 꺾으며 내지르며
판소리, 파도의 완창 유장하게 듣는다
누군가의 꿈을 위해 날마다 솟는 빌딩
그 속에 뼈를 묻어 십자가 지고 섰다
불길도 꾹 참아내는
된바람도 막아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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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와 소주
유혹이 불을 켜면 바닷물도 흔들렸어
바깥이 궁금할 땐 줄낚시 타는 거야
술잔 속 생을 찢는다
칼칼한 저녁 한 때
까짓것, 살다보면 씹히고 씹는 거야
시든 청춘 메들리에 추임새를 넣다보면
저 쪽배 하늘을 건넌다
그림자를 등에 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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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 일기
거울 속 분칠하는 한 여자가 그를 본다
웃자란 눈썹 자르다 송두리째 파낸 기억
흐릿한 눈동자에 갇힌
새 한 마리 파닥인다
외계인이 찾아왔나, 어느 별을 헤맸더냐
눈시울에 얹혀있는 낯선 자식 바라보다
기억 속 창밖을 향해 더듬더듬 읊는다
꽃신을 신던 발이 자꾸만 재촉한다
뒷산의 뻐꾹새가 저리 운지 오래라고
철침대 난간을 잡고
허물 벗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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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달팽이
젖은 땅 혀로 핥으며 어둠을 더듬는다
세상을 떠돈다는 건 뿔 하나 세우는 일
나선형 등짐을 지고
천리 먼 길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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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동백
- 소록도 수탄장愁嘆場*에서
오 미터 사이 두고 하염없이 타는 핏줄
사발동백 뚝뚝 진다 너울이 섬을 친다
아가야 모가지 꺾지 마라
이건 죄가 아니야
갈매기 울어울어 종소리 밀어낸다
콧등이 내려앉아 너의 냄새 맡을 수 없네
손가락 다 떨어지기 전
널 한번 안았으면
* 소록도 수탄장愁嘆場 : 한센병 부모와 미감아동이 5m 거리에서 일렬로 마주 서서 한 달에 한 번 면회를 하며 탄식하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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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지하철 계단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동전을 기다리는 두 손이 얼어 있다
치솟는 빌딩에 가려 빛을 본 지 오래인 듯
하이힐 찍는 소리 서둘러 멀어진다
단속반 툭 건드리자 통째로 구르는
오늘을 그리는 촉수 화석으로 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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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과 여자
- 오릉에서
뉘 고르듯 잡풀 뽑는 왕릉 위의 저 여자
켜켜이 쌓인 시간 호미질로 불러낸다
한 생이 소금꽃 피어 속살이 내비치는
솔 향 담뿍 풀어 어질머리 앓는 한낮
베이고 뜯겨져도 깨무는 파란 하늘
비바람 끌어안는다면 다시 천년 못 가랴
굽 높은 접시 가득 제단에 올리는 땀
스란치마 한 자락을 찰찰 끄는 그날 바라
덩두렷 봉분에 앉아 알 하나를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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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
봉인을 뜯는 순간 내장이 쏟아진다
질주의 본능 뒤로 풍경은 사라지고
당신의 검은 음모가 꼬리 물고 재생된다
삿대질 맞고함에 꽁꽁 막힌 여의도 길
출구는 오리무중 비상구도 막혔는데
의사당 철문을 걸고 종이꽃만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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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
부르르 몸을 떠는 노숙의 젖은 어깨
온천천 벤치에서 밀린 기도 하고 있다
한사코 매달리는 천식 뿌리치지 못하고
가솔도 아랫목도 묻어둔 가슴 한켠
숭숭 뚫린 구멍마다 파고드는 숨비소리
시치미 딱 떼고 가는 애완견의 옷이 곱다
갈 길 놓친 왜가리의 구불텅한 목덜미
지루한 목숨 하나 버짐처럼 붙어있다
외발로 버티는 하루 빌딩숲이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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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매
색 바랜 단청 아래
묵언이 고여 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물방울 터지는 소리
선홍빛
해산을 한다
산자락이 눈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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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 벗다
담장 밑 길게 누운 투명한 빈집 한 채
머리에서 꼬리까지 계절을 벗어놓고
내면을 응시하는가
눈빛이 서늘하다
껍질을 벗는다면 오욕도 벗어날까
숨가쁜 오르막도 헛짚는 내리막도
날마다 똬리를 틀며 사족에 매달리던
별자리 사모하여 배밀이로 넘본 세상
분 냄새 짙게 피운 깜깜한 거울 앞에
난태생 부활을 꿈꾼다
어둠을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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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맛보세요, 케밥이랑 미고랭 짜요*까지
저들의 땀방울이 스며드는 보도블록
부평동 깡통야시장 포장마차 줄을 선다
생업의 수레바퀴 깃발을 펄럭이며
어눌한 말씨에도 씨눈을 틔워보려
불빛이 야근을 한다, 대낮 같은 밤거리
* 케밥 : 터키의 전통 육류 요리, 미고랭 : 인도네시아 전통 면 요리, 짜요 : 베트남 튀김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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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돌목에 서다
거침없이 달려온다 휘돌아 내리꽂는다
오늘은 죽으리라 너희 베고 죽으리라
울음을 토하는 바다 제 가슴을 치고 있다
시위 떠난 살이 운다, 과녁 찾아 저리 운다
긴 칼 휘두르자 튕겨나는 햇살 아래
터지는 충혈의 불꽃, 수守와 공攻이 부딪는다
모함의 수렁에도 일자진 활짝 펼쳐
물목에 쇠줄 놓아 산더미로 솟구친다
저 깊은 절망을 부순다, 아수라를 삼킨다
솜이불 물을 적셔 뱃전 두른 하얀 풀꽃
속가슴 피멍 들어 북소리도 목이 쉬고
시퍼런 목숨의 무늬 노을 속에 굽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