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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구간 (춘향, 운봉고원 그리고 바래봉)
픽션(fiction)의 힘
평양에 대동강은
우리나라에
곱기로 으뜸가는 가람이지요
삼천리 가다 가다 한가운데는
우뚝한 삼각산(三角山)이
솟기도 했소
그래 옳소 내 누님, 오오 누이님
우리나라 섬기던 한 옛적에는
춘향과 이도령도 살았다지요
이편(便)에는 함양, 저편(便)에 담양,
꿈에는 가끔가끔 산을 넘어
오작교를 찾아 찾아가기도 했소
그래 옳소 누이님 오오 내 누님
해 돋고 달 돋아 남원(南原) 땅에는
성춘향(成春香) 아가씨가 살았다지요
이 시는 ‘춘향과 이도령’이라는 김소월의 시이다.
김소월은 이 시에서 우리나라 삼천리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북쪽의 평양 대동강과 한가운데의 한양 삼각산, 그리고 남쪽 남원 땅의 춘향을 나열하고 있다.
대동강과 삼각산은 현실의 사물(object)인 데 반해 춘향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fiction)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병렬적으로 대비하면서, 오히려 남원 ‘땅’의 춘향을 주제(subject)로 잡아 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김소월은 남원의 춘향이가 아닌 남원 ‘땅’에 살았던 춘향이라는 구도적 반전을 통하여 은근슬쩍 실재적 인물로 설정하고 있었다.
이 시에서 그는 삼천리강산에서 대표할 수 있는 강과 산과 사람을 평양과 한양, 그리고 남원으로 설정하면서 오히려 무게중심을 춘향이라는 인물과 그 배경인 남원으로 돌려놓았다.
사실 남원이 춘향전의 배경이 되면서부터 남쪽의 어느 이름 없는 고을이 삼천리강산에서 모르는 이 없는 고을로 격상된 것이다.
춘향이라는 허구의 인물이 남원을 유명하게 만든 스토리텔링이 된 것이다.
춘향과 이몽룡이 데이트하던 오작교는 ‘이편의 함양, 저편의 담양’을 사이에 두고 그 중심에 자리하면서 남원 ‘땅’을 이야기한다.
이렇듯 남원은 춘향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곳이 되었으며, 픽션의 인물 춘향이가 실존의 고을 남원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실재 남원을 가보지 않은 사람도 춘향전의 배경이 된 광한루와 오작교를 모르는 이 없을 정도로 전국적인 명소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원시에서는 4월 말 전후로 하여 ‘춘향제’라는 축제를 해마다 개최하면서 5월 5일엔 춘향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허구의 인물 춘향의 제삿날이 5월 5일로 된 이유인즉 이도령과 춘향이가 처음 만났던 날이 오월 단오이기 때문이란다.
춘향전 이야기의 시발점인 날을 제삿날로 정하였다는 것은 파격적인 픽션, 픽션에 다시 픽션을 가미한 격이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은 또 다른 픽션의 픽션이 있었으니 그것은 춘향의 묘가 버젓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구룡계곡 초입의 육모정 주차장 부근에는 춘향묘가 있는데, 그 규모가 어지간한 유적지 급이다.
커다란 자연석에 춘향묘라고 각자(刻字)한 표지석 옆의 높다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잘 단장된 묘소 옆에 ‘만고열녀성춘향지묘(萬古烈女成春香之墓)’라고 새겨진 갓비석이 서 있는데, 1962년 ‘성옥녀지묘’라고 새겨진 지석이 발견되면서 남원시에서는 이곳을 춘향 묘역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성옥녀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허구의 인물 춘향에 대한 남원시의 눈물겨운 노력과 정성이 이쯤 되면 그 누구도 거짓부렁의 사기극이라고 항변할 수 없을 것이다.
남원에 실존하였던 인물들 전부 합해도 허구의 춘향이 하나를 당해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담론의 끝은 픽션의 힘(fiction's power)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춘향이와 함께 지리산 둘레길을 시작하고자 한다.
지리산 둘레길의 시작
지리산 둘레길의 첫 번째 들머리는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외평마을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교통 요충지였다.
이곳은 고려조 이래 조선 말기까지 구례 사람들이 산동면 원달리, 숙성치, 용궁마을, 이곳 외평마을, 그리고 내송 고개(솔고개)를 넘고 응양(현재 이백면 효기리)을 거쳐서 서울로 다니던 길목이었는데, 반대로 서울에서 내려오려면 응양에서 말을 갈아타고 솔고개를 넘어 이곳의 현 파출소 앞에서 쉬어가는 곳이어서 원터 거리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중요한 물길의 경유지이다.
백두대간의 만복대 북사면과 정령치・고리봉의 서・남사면에서 발원한 원천천(元川川)이 구룡계곡을 거쳐 이곳 들판을 적시고 남원에서 요천을 만나 섬진강으로 흐르는 물길의 길목이기도 하다.
한때는 이 물길의 원래 이름인 원천(元川)에서 상류인 회덕・노치 등의 마을을 상원천면으로, 하류인 이곳을 하원천면으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구룡계곡은 1구간의 또 다른 지구간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구룡계곡 코스는 춘향묘가 있는 육모정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면 구시소, 챙이소, 유선대, 지주대, 비폭동 등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하나같이 비경이다.
그리고 계곡 상단에는 남원 제1경이라는 구룡폭포가 대미를 장식하는데, 이곳에서 구룡치를 넘어 1구간의 역방향으로 솔정지, 개미정지를 거치는 원점회귀길도 많은 사람이 애용하고 있다.
외평에서 출발한 둘레길은 곧바로 내송마을로 이어진다.
내송마을 이름의 변천 과정이 재미있다.
이곳은 고려말・조선초기에 설촌되었다고 전해지는데, 풍수지리적으로 마을 뒷산 고개가 풀밭에 누워있는 소(平原臥牛,평원와우)의 형국이라 하여 설촌 당시의 마을 이름은 소고개(牛峙洞,우치동)였다고 한다.
그 후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소고개가 솔고개로 바뀌면서 마을 주변에 소나무가 무성하다는 의미로 바뀌었고 이를 한자화하여 내송(內松)으로 되었다고 하며 현재의 이곳 사람들은 한글과 한자를 섞어 솔치(峙)라 부르기도 한다.
그 옛날 원터 거리(외평)에서 응양(이백면)으로 넘어가던 한양길의 고개가 현재는 4차선의 신작로로 시원하게 뚫렸다.
그리하여 소(牛)와 솔(松)의 구분도 의미 없는 것이 되었고, 어디가 그 옛날의 소고개인지 솔고개인지 분간도 할 수 없으나, 우리 둘레객들에게는 구룡고개 초입의 평화롭고 소박한 마을로 기억될 것이다.
아무튼 예로부터 교통 요충지이자 물길의 경유지인 이곳이 지리산 둘레길의 첫 출발지가 된 것이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 출신 조경남(趙慶南)은 의병을 일으켜 이 근방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따라서 이 구간에서 장군의 이야기를 빼놓고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장군의 체취가 진하게 묻어 있는 곳이다.
마을 후면의 구룡고개 초입에는 개미정지라는 곳이 있다.
정지는 쉼터를 말하는데, 이곳은 그 옛날 지나가던 나그네들이 잠시 숨을 고르면서 쉬어갔을 터이며, 지금도 둘레꾼들이 기꺼이 쉬어가는 쉼터로서 애용되고 있다.
물론 조경남의 이야기도 묻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당시 조경남 의병장이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개미 떼가 나타나 의병장의 뒤꿈치를 깨물어 깨어나 보니 왜군이 내송마을 개서어나무숲까지 밀고 올라오고 있었다.
개미들 덕택에 왜군의 진입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라 해서 개미정지라 불렸다고 한다.
개미정지에서 구룡치를 향하는 고갯길의 중간에 있는 솔정지 역시 조경남의 이야기가 묻어 있는 곳이다.
정유재란 당시에 숙성치를 넘어 남원성을 향하는 왜군을 향해 조경남이 활시위를 당겼던 곳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해발 525m에 위치한 구룡치는 남원장・운봉장을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길목으로 조경남은 이곳에서 군사들을 조련하다가 소나무에 활을 걸어두고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조경남과 이몽룡
이쯤 하여 이곳 출신의 실존 인물인 조경남 장군을 잠시 살펴보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산서(山西) 조경남(趙慶南 1570~1641)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널리 의병을 모으고 의병대장이 되어 운봉・남원에서 왜구들과 격돌하면서 연전연승하여 이름을 떨쳤다.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와 비교되는 ‘난중잡록(亂中雜錄)’의 저자이기도 하다.
난중잡록은 조경남이 13세인 1582년(선조 15)부터 돌아가시기 3년 전인 1639년(인조 15)까지 57년간의 사적을 일기체로 기술한 것으로서 ‘산서야사(山西野史)’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대한 부분은 이순신의 ‘난중일기’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다루어져 있으며, 이 밖에도 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 등 중요 전란과 당시의 풍속 및 조정에서 일어난 사실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그 사료적 가치가 대단하다고 평가되고 있다(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7호).
최근 작자 미상으로 알려진 ‘춘향전’을 지은 작가가 바로 조경남이라는 연세대 국문과 설성경 교수의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새롭게 부각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설 교수는 조경남이 춘향전의 저자가 확실하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이몽룡의 실제 모델이었던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의 남원 시절 스승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성이성(1595년~1664년)은 경상도 봉화 출신으로 강직한 간관이자 청백리였으며, 춘향전에 나온 ‘준중미주 천인혈(樽中美酒 千人血)’은 그가 지은 한시였다.
호서⋅호남 암행어사로 활동, 감찰하며 부패 수령을 봉고파직 시켰던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였다.
13세(1607년, 선조 40) 때 성이성은 남원 부사로 부임하였던 아버지 성안의를 따라 남원에 왔다가 18세(1612년 광해군 3)에 아버지가 참의로 발령되면서 서울로 돌아갔다.
실재 성이성이 남원에 있으면서 기생을 만나 사랑을 나눈 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남원에서 과거시험을 공부하였던 것과 과거 합격 후에 호남지방 암행어사를 한 것은 사실이다.
준중미주천인혈 (樽中美酒千人血, 동이의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반상가효만성고 (盤上佳肴萬姓膏, 소반의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촉루낙시민루락 (燭淚落時民淚落, 촛불의 눈물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가성고처원성고 (歌聲高處怨聲高,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성 소리 높더라)
이 시는 성이성이 지은 시인데, 춘향전에 나오는 ‘어사출도 시’와는 준중미주(樽中美酒)가 금준미주(金樽美酒)로, 반상가효(盤上佳肴)가 옥반가효(玉盤佳肴)로 한 글자씩만 바뀌었을 뿐 똑같다.
그런 이유로 성이성이 이몽룡의 실제 모델이라는 것이 통설적 입장이다.
그리고 조경남은 당시 남원 부사로 부임하였던 성안의의 부탁으로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 온 아들 성이성을 가르쳤고, 성이성은 과거 급제 후 1639년 암행어사로 남원에 몰래 내려와 스승 조경남과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는 내용이 성이성이 직접 쓴 ‘호남암행록’에 자세히 적혀있다.
이 모두는 픽션이 아닌 사실(fact)임이 분명하나 조경남이 성이성의 스승이라는 팩트를 가지고 픽션인 춘향전의 저자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조경남은 남원에 머물던 성이성을 가르친 스승으로서 10대의 사춘기 시절 성이성을 가장 가까이 지켜본 사람 중의 한 사람일 것이리라.
설 교수는 춘향전의 이몽룡이 성이성의 남원 시절과 거의 일치하고, 위에서 적시한 ‘준중미주천인혈’이라는 시가 조경남의 논픽션인 ‘난중잡록’에도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조경남이 춘향전의 저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한다.
만약 조경남이 춘향전의 저자라고 가정한다면, 그는 성이성의 사춘기 시절인 남원에서의 스승으로서 성이성의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엮고자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부패한 관리를 응징하고 하잘것없는 퇴기의 딸이 신분의 수직 상승하는 플롯(plot)으로 전후 민초들의 힘든 삶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주면서 권력자들에게 맺혀있던 응어리를 시원하게 풀어 주려는 카타르시스적 의도를 깔고 있는 것이라 생각을 해본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춘향전에서 춘향이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이몽룡은 실존의 성이성을 모델로 한 것이라는 점과 조경남이 성이성의 스승이라는 점이다.
사무락다무락
구룡치를 지나고 솔향 가득한 소나무 숲길의 고즈넉함을 만끽하면서 걷다 보면 길가에 ‘사랑은 하나이어라’는 제목을 붙인 푯말을 만나게 된다.
푯말 바로 뒤에 서 있는 용소나무를 알리기 위한 것이다.
두 소나무가 아래에서 힘차게 감겼다가 위에서도 또 한 번 감겨 있어 용트림하는 용의 모습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원래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줄기가 닿은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서 서로 합쳐져 한 나무가 된 것을 연리목(連理木)이라 하고, 한 나무에서 그 가지들이 서로 이어진 것을 연리지(連理枝)라 한다.
연리(連理)란 화목한 부부나 남녀의 사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서, 연리목이나 연리지는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을 나타낸 것이라 하여 ‘사랑나무’라고도 한다.
남원의 둘레길에서 만난 이 나무에서 나는 또다시 춘향과 이도령의 간절한 사랑을 떠올려 보게 되었다.
한참을 또다시 걷다 보면 길가의 돌무더기와 돌탑을 만나게 된다.
운봉 쪽에서 남원장을 가던 사람이나 주천 쪽에서 운봉장을 가던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돌을 얹혀 놓고 바램과 안녕을 기원했다고 해서 ‘사무락다무락’이라 부르는 곳이다.
‘사무락’은 어떤 일을 바란다는 뜻의 사망(事望 또는 所望)의 남원 방언을 풀어 놓은 것이고, ‘다무락’ 은 담벼락 또는 돌무더기라는 뜻의 남원 말이라 한다.
이곳은 지나던 나그네들이 돌을 올려놓으면서 자신의 안녕과 소원이 성취되기를 비는 곳이었다.
따라서 기냥저냥 의미 없이 흩어져 있는 돌무더기가 아니라 간절한 바람을 기원하는 신성한 의식(儀式)을 치르는 ‘사망(事望)의 돌무더기’였던 것이다.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지만, 이곳의 돌 하나하나에는 간절함의 바램이 각인된 신물(神物)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심장한 의미와는 사뭇 동떨어져 있는 듯한 어감의 ‘사무락다무락’ 이란 이름과의 연결고리가 무엇일까?
쉽게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어쨌든 나는 이렇게 서정성 짙은 표현의 전라도, 특히 남원골 사투리의 아름다운 어감과 운율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간절함의 민초적 의미
숲길이 끝나면서 첫 번째로 만나는 마을이 덕치리 회덕(會德)마을이다.
덕치리(德峙里)에는 회덕마을과 노치마을이 있는데 회덕과 노치의 이름을 한자씩 취하여 덕치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회덕마을은 임진왜란 때 밀양 박씨(密陽朴氏)가 피난하여 살게 된 것이 마을을 이룬 시초라고 한다.
6.25 전쟁 때는 국군이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이웃 노치마을과 함께 소개 작전을 벌이면서 주민들은 주천면의 서쪽 낮은 지역으로 집단으로 이주하였으며 지리산 공비가 완전히 소탕된 뒤 다시 마을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원래의 마을 이름은 ‘모데기’인데, 풍수지리적으로 덕두산(德頭山), 덕산(德山), 덕음산(德陰山)의 덕(德)이 이곳에 모여 있다고 하여 ‘모덕’이라 하였고 이를 한자어로 바꾸어 회덕(會德)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회덕마을에서 노치마을로 가는 길은 제법 너른 들판의 신작로이다.
부드러운 산들로 둘러싸인, 협소하지도 광활하지도 않은 평탄한 분지의 이곳이 과연 500m 이상의 고원지대일까라는 의문을 들게 할 정도로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다.
노치(蘆峙) 마을의 본래 이름은 ‘갈재’인데 이는 갈대로 덮여 있는 고개라는 뜻이다.
지나온 회덕마을에는 지금도 억새를 베어 지붕을 했던 셋집 두 가구가 그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6.25 전쟁 때는 국군이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마을의 소개 작전을 벌이면서, 심지어 마을 가까이 있는 마을 숲에도 불을 질렀다.
그런 와중에 마을 앞에 있던 당산나무숲이 불에 타 없어졌으나, 다행히 느티나무 한 그루가 남아 할머니 당산이라 불리며 마을을 지키고 있다.
노치마을에는 음력 정월 그믐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신령스러운 물로 여기는 노치샘에 금줄을 치고 샘굿을 지낸 다음, 마을 뒷산에 할아버지 당산으로 불리는 노송 4그루 밑의 토석단(檀)에서 제를 지내고, 마지막으로 마을로 내려와 할머니 당산에서 제를 마친다고 한다.
이곳 노송나무가 마을의 당산나무로 된 연유가 있단다.
옛날 이 마을에 짚신을 만들어 팔았던 찢어지게 가난한 민 씨라는 사람이 어느 추운 겨울에 죽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마을 뒷산에 묻어주기로 하고 뒷산에 올랐으나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묻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 유난히 한 곳에 관이 하나 들어갈 정도로 눈이 녹아 있는 땅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짚신 장수 민 씨를 묻어주었는데, 바로 그 자리가 용은 용인데 주인이 없다는 황룡무주(黃龍無主)의 명당이었다.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은 이 명당에 당산제를 지내게 되었고, 그 자리에 있던 소나무가 당산나무가 된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노치 당산제는 약 300여 년의 역사를 가지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왔고, 당산 소나무 역시 그 세월 동안 이곳 주민들의 지극하고도 간절한 기원을 받으면서 기품 있는 자태로 성숙한 것이다.
원래 당산제란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에 마을의 태평과 풍요를 기원하고 병마나 재액(災厄)을 막아 달라는 바람을 제사와 굿의 형태로 마을 공동으로 치르는 의식이다.
나는 노치 당산제 역시 이 범주에 벗어나지 않는 의식이라 생각하면서도 짚신 장수 민 씨처럼 당산의 도움으로 명당에 묻혀 자손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 역시 없지 않았으리라 생각해 본다.
당산제의 뒤풀이는 언제나 굿이나 풍물놀이가 따르게 된다.
당산제 풍물놀이의 신명 난 춤사위는 바램의 의식이 탈 없이 치러졌다는 안도감과 그래서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낙관적 간절함을 표현하는 것이리라.
힘없고 가난한 민초들은 자신의 바람이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므로 더욱 간절하다.
그런데 기원하면서 숭배하는 대상, 즉 당산은 위엄과 신성(神聖)이 있는 엄숙한 대상물이 아닌 평범하고 소박한 자연물이다.
그것이 나무이든 돌이든 간에. 다만 간절함의 영성(靈性)을 부여한 것이다.
가난한 민초들에게 자신들이 기댈 수 있는 바람의 대상은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주변의 사물들일 수밖에 없다.
지나왔던 사무락다무락의 돌무더기 역시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본다.
그곳에서는 길가의 보잘것없는 돌이라도 그것을 돌무더기 위에 간절한 바람으로 얹어 놓고는 그 바람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하거나 엄숙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으로 있는 것이며, 그 이름 또한 서정성의 외피로 간절함을 내면 깊숙이 숨겨 둔 것이다.
힘 있는 자들의 바람은 간절함이 없다.
손만 뻗으면 취할 수 있다는 욕망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변사또가 춘향을 취하려는 욕망이 바로 그렇다.
오죽하면 ‘종년 타는 것은 누운 소 타기’라는 말이 있을까.
그들은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권력자들이다.
때문에 간절함이라는 감정이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힘없는 춘향이의 감정을 우리는 간절함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힘없는 민초들의 바램은 간절할 수밖에 없다.
사무락다무락, 노치당산 그리고 춘향에게서 민초들의 내면 깊숙이 숨겨둔 간절함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운봉(雲峰) - 백두대간, 운봉고원
덕치리 노치마을은 행정구역상 주천면이지만 운봉 들판이 시작되는 곳이다.
이곳에서부터 운봉 들판을 만나면서 운봉의 범상치 아니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구간이 된다.
운봉은 동으로 함양, 서쪽의 남원, 북으로 장수, 남으로 심원・달궁의 내지리를 접하는데, 각각 팔랑치, 여원치, 유치(재), 정령치가 동서남북의 길목이 된다.(함양과 접하는 팔랑치는 현재의 인월면에 속해있지만, 고려조 이래 일제강점기까지 인월면, 아영면, 산내면 모두 운봉에 속해있었다.)
하나같이 외부에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관문이지만 반대로 운봉에서는 비교적 수월한 외부의 통로가 된다.
밖에서 볼 때는 거대한 산악이 가로막고 있는 험준한 곳이지만 운봉골 자체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들이 아늑하게 둘러싼 포근한 분지가 선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지리산 서쪽, 이른바 외(外)지리의 운봉골은 이렇듯 범상치 않은 별천지의 형승을 가진 곳이다.
오죽하면 골 이름마저 구름이 봉우리를 감싸 안은 곳일까.
백두대간
백두대간이란 백두산에서부터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진 거대한 산줄기로서 우리 국토의 중추적 골간(骨幹)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인 신경준이 정리한 산경표(山經表)에서 우리 땅의 산줄기(山經) 체계를 따라붙어 진 이름이다.
이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중심으로 물길은 동ㆍ서로 갈라져 바다로 흘러간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 했던가.
백두대간은 ‘산은 스스로 물길을 가른다’라는 우리 전통적 지리 인식에서 출발하여 우리 땅의 자연 지리적 상징이면서 우리 민족의 인문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개념이다.
이러한 백두대간이 남덕유산, 봉화산을 거쳐 시리봉에 이르면서 운봉을 만나게 되고 유치, 고남산, 여원치,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연맥들은 운봉 고을을 감싸 안았다가 지리산으로 건너간다.
수정봉에서 노치마을로 내려서면서 백두대간은 숨바꼭질하듯 잠깐 숨었다가 지리산의 (큰)고리봉으로 오르면서 다시 능선의 실체를 드러내게 되는데 이곳이 운봉 분지이다.
한때는 노치마을에 비가 내려 그 빗물이 운봉 쪽으로 흐르면 람천과 남강을 거쳐 낙동강이 되고, 남원 쪽으로 흐르면 구룡계곡과 원천천을 거쳐 섬진강이 되어 바다로 나가게 된다.
이러한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중심으로 하여 행정구역이 주천면 회덕리・고기리와 운봉읍 주촌리로 나누어졌지만, 지금도 회덕리 덕치마을에는 백두대간이 고샅길을 가르는 바람에 심지어 어떤 집에서는 주천(덕치)의 부엌에서 밥을 짓고 운봉(주촌)의 안방에서 밥을 먹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노치마을에서 운봉 들녘을 가로지른 농로와 지방도(60번)를 따라 고기 삼거리의 큰고리봉 초입까지의 이 구간은 백두대간에서 유일하게 평지로 연결된 곳이다.
이곳은 산자분수령이라는 능선 분수계의 예외로 분지의 바닥에서 물길이 갈라지는 곡중분수계(谷中分水界)를 이루고 있다.
행정마을 이야기
노치마을을 지나면 고즈넉한 덕산저수지가 나온다.
그 끝자락에서 만나는 마을이 운봉읍 덕산리 가장 마을이고, 이어서 행정리이다.
행정리(杏亭里)라는 지명은 은행나무숲의 풍치가 아름다워 은행 마을, 은행몰이라고 불렀는데 이를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 은행리(銀杏里)이었으며 이를 다시 바꾸어 행정(杏亭)으로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그런데 행정마을의 끝자락에서 반기는 것은 은행나무가 아닌 개서어나무숲 군락지이다.
100년이 넘었을 듯한 아름드리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데 2000년 생명의 숲과 산림청이 공동 주최한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 대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하였고,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였다.
나는 그 ‘춘향뎐’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몽룡이가 춘향이의 그네 타는 자태를 보고 첫눈에 반한 곳으로 이곳 개서어나무 숲을 선택하고 화면에 담았다는 임권택 감독의 탁월한 감각을 존경해 본다.
아무튼, 이 아름다운 풍취의 개서어나무숲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자연림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인위적으로 조성한 인공림이란다.
풍수지리적으로 마을의 허한 기운을 보하기 위해 조성한 비보림(裨補林)이라는 것이다.
비보란 사람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자연환경을 인위적으로 보완하여 바꾸려는 것으로 대개 지기(地氣)가 허한 곳을 실하게 채우려는 방법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러한 인위적인 비보책으로 장승 또는 솟대를 세우거나 돌탑을 쌓기도 하는데, 인공적으로 숲을 조성하여 나쁜 기운을 막는 것도 그 방법의 하나다.
이곳의 개서어나무 숲은 수정봉・덕산저수지를 거쳐 흐르는 주촌천과 세걸산・공안저수지를 거쳐 흐르는 람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따라서 이 숲은 하천 범람 시 마을의 침수를 방지하는 역할과 트여있는 마을의 북쪽을 막아주는 방풍림의 기능도 함께 고려하여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애초에 풍수지리적 비보의 개념에서 출발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의 이 숲은 행정마을의 아름다운 상징물로써 전국적 명성을 얻고 있다.
행정마을 어귀인 둘레길의 노변에는 창녕조씨 효자비가 있다.
이 마을에 살았던 효자 조석상(曹錫祥)의 정려비인데 정려문이나 정려각 없이 심하게 마모된 비석만 뎅그러니 서 있다.
다만 근래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 울타리가 그나마 정려비의 대접을 하는 듯 나그네의 눈길을 끌게 한다.
아무튼, 조석상은 모친이 고질병에 걸리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인육 봉양으로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고종 23년(1886)에 정려를 받게 되었는데 현재의 이 비석은 그때 세워진 것이라 한다.
이 비석에 대하여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비석을 건립한 후 창녕조씨 가문에서는 풍우로 인한 비문의 마모를 막기 위해 이 자리에 비각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자 마을에 재앙이 일기 시작하였다.
원인 모를 이유로 친족들이 연이어 비명횡사하고, 마을에 있단 화재가 발생하여 가옥들이 불타는가 하면, 밥을 지으려 마루에 내어놓은 쌀바가지에서 쌀이 벌레처럼 기어나가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다.
병든 아이의 병이 낫기를 빌던 떡시루가 날아가 처마 밑에 붙었다가 떨어지고, 저녁밥을 푸기 위해 솥뚜껑을 열려고 하자 솥뚜껑이 밑으로 빠져 밥을 푸지 못하게 되는 등 온갖 해괴한 일들이 꼬리를 물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영험 있는 무당을 불렀다.
무당은 효자비를 세운 자리가 도깨비 혈인데 그곳에 집을 지었으니 도깨비가 노하여 마을의 변고가 발생하였다 하면서 당장 비각을 헐지 않으면 더 큰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라 하였다.
과연 비각을 뜯어 불태우고 나자 마을에는 더 이상의 변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행정마을에서는 마을 어귀의 도로를 경계로 하여 효자비가 서 있는 도로의 동쪽에 집을 짓지 않는다고 한다.
운봉고원
운봉(雲峰). 구름 덮인 봉우리란 이름처럼 지리산의 준봉들이 구름에 머리를 내밀면서 선경(仙境)을 펼쳐놓은 곳.
그런 연유인지 정감록에는 ‘운봉 동점촌(銅店村) 주변 100리’를 십승지(十勝地)로 꼽고 있다.
승지(勝地)란 경치가 빼어난 곳 또는 지형이 뛰어난 곳을 일컫는 말인데, 운봉은 예로부터 이러한 형승(形勝)을 구비한 열 곳 중의 하나로 인정받은 길지이다.
운봉은 참으로 범상치 아니한 곳이다.
동쪽에서부터 남쪽까지 지리산의 준봉(소위 지리산 서북능으로 일컬어지는 덕두봉・바래봉・세걸산・큰고리봉)들이, 남쪽에서 서쪽을 거쳐 북쪽까지는 수정봉・고남산・시리봉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의 신령스러운 영봉(靈峰)들이 감싸고 있는 천혜의 분지가 운봉이다.
이곳에서 이곳을 에워싸고 있는 지리산 서북능과 백두대간의 연봉들을 보노라면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아주 평범하고 야트막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수정봉이나 고남산의 야트막한 산등성이는 전형적인 동네 뒷산이다.
그러나 운봉에서의 소박한 수정봉의 모습이 반대편 너머 이백면에서 바라보면 위엄 서린 준봉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음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이백에서 운봉으로 이어지는 여원치의 고갯길에서도 판이한 변화를 느낄 수가 있는데 이백에서 고갯마루까지는 중경사의 오름길이지만 여원치 고갯마루에서 운봉길은 평로에 가까운 완만한 내림길이다.
주천에서 출발한 1구간 구룡치까지의 급경사 고갯길이 운봉 분지를 접하면서 온순한 길로 변화하듯이.
이곳은 해발 400~500m의 고원 분지이다.
그래서 해발 800여m의 수정봉이 이곳에서는 300m의 동산으로, 1,200m 전후의 지리산 서북능 역시 6~700m에 불과한 산으로 투영되는 것이다.
분수(分水) 마루금인 백두대간이 운봉 평원을 가로지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운봉고원.
구름 아래의 속계에서 쉽게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곳, 구름 봉우리 속의 별유천지의 서기(瑞氣)가 서려 있을 것 같은 곳, 그래서 운봉은 속과 비속을 경계 짓는 십승지의 골이 된 것이다.
바래봉 철쭉 이야기
지리산 서북능선은 전라남도 구례군의 노고단에서 종석대・성삼재를 거치고 (작은)고리봉・묘봉치・만복대에서 그 경계를 전라북도 남원시에 인계한다.
그리고 정령치・(큰)고리봉을 거치면서 북동향으로 세걸산・부운치・팔랑치・바래봉・덕두산으로 이어진다.
이 중 (큰)고리봉에서 바래봉까지의 능선은 전라북도 남원시의 산내면과 운봉읍의 경계가 된다.
한편으로는 내(內)지리의 달궁・반선과 외(外)지리의 운봉고원으로 구분 짓는 지리능선이 되기도 한다.
지리산 둘레길의 운봉 구간에서의 이 능선은 둘레꾼들과 보조를 맞추는 동행자가 되는데 오른쪽의 시야에는 언제나 이 능선이 함께하는 것이다.
이 능선은 한겨울의 눈꽃 산행으로도 유명하지만, 5월의 철쭉 산행으로도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곳이다.
특히 바래봉의 철쭉은 영주 소백산과 합천 황매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철쭉 명소로 꼽힌다.
바래봉은 이 능선을 대표하는 봉우리이다.
바래봉은 스님들의 밥그릇인 발우(鉢盂,바리때)를 엎어 놓은 모양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또한, 운봉 사람들은 산 모양새가 마치 승려들이 쓰고 다니던 ‘삿갓’처럼 보인다고 하여 삿갓봉으로 부르기도 한다.
아무튼, 바래봉 철쭉은 해마다 5월이면 둥그스름한 산자락을 타고 빽빽하게 군락을 이루면서 선명한 진홍빛으로 어우러져 핀다.
특히 몽글몽글한 형태로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 모습이 마치 누군가 일부러 가꾼 꽃 정원을 연상케 한다.
실제 이곳은 원래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근래에 들어 철쭉의 군락지로 변모되었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호주와 뉴질랜드를 방문하면서 면양 사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일환으로 1972년 운봉에 689㏊의 규모에 2,500두의 면양 시범농장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 면양들을 바래봉 일대에 방목하였다.
면양 수천 마리가 바래봉 일대를 휘저으며 나무와 풀을 모조리 뜯어 먹고 독성이 있는 철쭉은 먹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철쭉만 남아서 군락지가 형성된 것이었다.
이후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90년대 초 면양 사육은 중단되었지만, 남아있는 철쭉이 군락을 이루며 장관을 펼치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바래봉의 철쭉은 면양들에 의해 잘 가꾸어진 명소가 된 것이었다.
후기 (전 구간 : 14.7km) 2017. 5. 6
(외평 ⇨ 개미정지 : 1.6km)
지난달 21구간을 마지막으로 지리산 둘레길을 완주하였지만, 다시 1구간부터 시작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오늘은 지리산 둘레길 2회독의 첫 페이지를 펼치는 날이다.
지리산 둘레길 첫 들머리인 외평마을은 세월이 멈춘 듯, 4년 전의 지리산 둘레길 첫 시작 때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혹시 볼썽사납게 변하였으면 어쩌나 염려하였는데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 정겨웠다.
외평에서 내송 마을을 거쳐 개미정지에 이르는 길 역시 변함이 없다.
원천천의 징검다리를 건너고 신작로를 가로지르면서 이어지는 산자락의 들길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나그네를 반긴다.
그리고 개미정지이다.
개미정지는 산기슭 밭이 끝나는 개어서나무 숲길의 초입에 자리하고 있는데 1구간 둘레길의 첫 번째 쉼터이다.
이곳은 주천 외평의 출발점에서 금방 도달할 수 있는 위치 때문에 굳이 쉬어갈 필요성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곳이다.
이는 운봉에서 출발하여 주천을 도착점으로 하는 1구간의 역코스의 경우에도 반대의 이유가 해당하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이곳은 둘레꾼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묘한 기운을 풍기는 곳이다.
걸터앉기에 적당한 높이의 너럭바위와 밑둥치에 구멍이 커다랗게 뚫려있는 개어서나무의 호젓한 분위기는 둘레꾼들의 발걸음을 묶을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또한, 외평에서 출발한 경우에는 구룡치를 오르기에 앞서 마음을 다잡고 잠시 숨울 고르는 곳으로, 역코스 운봉에서 출발한 경우에는 구간의 종착지를 앞두고 노정(路程)을 정리하는 곳으로의 최적의 장소이다.
과거 이곳에서 간단한 음료와 차를 팔던 할머니의 길다방(?)은 흔적이 없고, 대신 벤치 옆에 무인 스탬프가 둘레꾼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개미정지 ⇨ 솔정지 ⇨ 구룡치 : 2km)
개미정지에서 솔정지까지의 오름길은 가파른 된비알이다.
숨이 막힐 정도의 중경사로 어지간한 등산로 뺨친다.
그러한 된비알 길에서 만나는 쉼터가 솔정지이다.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서 거친 숨을 잠시 돌려본다.
간혹 이곳을 솔정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일반인들에게 익숙한 ‘정자’라는 용어로 바꾼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정자(亭子)란 경치 좋은 곳에 놀거나 쉬기 위하여 지은 집을 가리키는 용어이며 자연 쉼터인 이곳을 일컫는 말로는 어딘가 어색하고 적합하지 않은 용어라 생각된다.
어차피 이곳 말로 정지란 쉼터를 의미한다고 하면 솔정지라고 부르는 것이 이곳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한다.
솔정지에서 구룡치에 이르는 길 역시 어지간한 등산로 수준의 된비알 오름길이나 솔숲의 청량감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구간이다.
(구룡치 ⇨ 회덕마을 ⇨ 노치마을 : 3.6km)
구룡치에서 용소나무・사무락다무락을 거치는 길은 아늑하고 한적한 완경사의 숲길로 둘레길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명품 길이다.
언뜻언뜻 운봉 분지의 들판이 눈에 들어오고 숲길의 고즈넉함에 취해 걷다 보면 어느새 시야 가득 평화로운 운봉 들녘이 눈앞에 다가선다.
숲길이 끝나고 운봉고원을 들판 길이 열리는 곳이다.
이곳에는 비닐하우스로 만든 주막이 둘레꾼들을 유혹한다.
있어야 할 것이 당연히 있는 듯, 참으로 절묘한 지점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 역시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마음 같았으면 비닐하우스 주막에 들러 동동주 한 사발씩 마시면서 갈증을 풀고 싶지만, 점심 자리를 잡기 위해 발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음이 못내 아쉬웠다.
작은 내울을 건너면 곧바로 회덕마을 앞 포장도로를 만나게 되는데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1구간의 또 다른 둘레길인 구룡계곡 길이다.
이 길은 구룡폭포가 있는 구룡계곡을 따라 걷다가 육모정과 춘향묘를 둘러보고 1구간의 출발점 외평으로 원점 회귀할 수 있는 코스이다.
우리는 그대로 직진하여 회덕마을 앞을 지나고, 우측의 농로로 접어들어 노치마을로 향한다.
모내기하기 위해 물을 가두어 둔 논두락들은 수정봉이나 고리봉・세걸산의 물그림자를 담으면서 아스라한 산상 호수들을 만들고 있었다.
참으로 경이로운 풍광이다.
아무튼, 우리는 노치마을의 할머니 당산 앞의 쉼터 정자를 접수하고 점심 준비를 하였다.
오늘 점심은 양관수 회원이 공수해 온 삼천포 바지락과 그 육수로 끓인 라면이다.
이 또한 환상적이다.
(노치마을 ⇨ 가장마을 : 2.2km)
노치마을은 백두대간이 거치는 곳이다.
이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과 운봉읍 주촌리 원평 마을로 나누어지는데, 마을 안길이 그 경계가 된다.
그래서 이곳의 주민들에게는 주천면민이라든지 운봉읍민이라든지의 구별은 아무 의미가 없다.
서로의 길흉을 함께하는 가장 가까운 이웃의 사촌이다.
둘레길은 노치마을을 거쳐 원평마을 앞을 거친다.
원평마을 앞의 논길을 지나면서 만나는 덕산저수지의 물빛은 하늘을 담아 그윽하고, 그 너머 운봉 들녘의 풀빛은 싱그럽다.
아름답고 고즈넉한 덕산저수지를 끼고도는 숲길과 논길을 거치면 청신한 솔숲길인데 이 구간 역시 명품의 둘레길이다.
그리고 덕산저수지와 작별을 고하면서 운봉 들녘으로 내려서면 가장 마을이다.
가장 마을을 지나고 마을 어귀의 정자나무 쉼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해본다.
예전 지리산 둘레길의 첫 순례 때 이곳에서 점심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세월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났다.
(가장마을 ⇨ 행정마을 ⇨양모장 ⇨ 운봉읍 : 5.3km)
둘레길은 가장 마을 입구의 60번 지방도를 잠시 따르다 덕산 마을 입구에서 덕산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주촌천의 둑방길로 이어진다.
그리고 행정마을까지는 둑방길이다.
행정마을 어귀의 도깨비혈 전설이 있는 창녕 조씨 효자비를 거치고 람천을 건너면 다시 둑방길이다.
둑방길에서 건너편 개서어나무 숲은 지난 순례 때와 마찬가지로 쳐다만 보고
지나쳤다.
행정마을의 비보림인 개서어나무 숲과 마주하는 삼산 마을의 비보림인 소나무 숲은 다음 기회에 함께 둘러보리라는 미련만을 남기고 발길을 재촉하였다.
따지고 보면 그리 급한 것도 없는데, 쫓기듯 서두르는 행보의 근저는 습관화된 조급함이었다.
둘레길은 빨리 가야 할 이유가 없는 길이다.
오히려 둘레길은 알피니즘의 정복적 사고와는 반대로 ‘물도 보고 산도 보고, 그리고 사람도 보고 세상도 본다(看水看山 看人看世)’라는 명제를 깔고 걷는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조율되지 않은 조급증 때문에 지리산 둘레길 2회독의 첫 길에서 벌써 우를 범하고 있다.
지리산을 찾아 나선 발심한 수행자로서 심우(尋牛), 아니 심지리(尋智異)의 단계를 거치고 발자국이라도 찾으려는 견적(見跡)의 단계에 진입하려면 이러한 습성을 버리지 않고는 결코 견지리(見智異)에 입문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람천의 둑방길을 버리고 양모사업장의 들길로 접어들면 곧이어 60번 지방도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곧이어 운봉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