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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단법인한국시조시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덕남
[有山原稿49:권두 대담] - 《화중련 》 2022. 하반기호
시조정신을 강조하는 문학평론가 윤재근 선생님
김복근
“나-너가 하나 되는 ‘우리’가 시조정신의 뿌리입니다.”
김복근 : 역병으로 오랜 기간 세상이 어수선합니다. 이런 때일수록 인문학이 중심을 잡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특히 대한불교조계종 성파 종정예하의 지원으로 만들어지는 시조전문지 《화중련》의 역할은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지난 해(2021년) 《화중련》에서는 시조와 음악의 새로운 만남을 위해 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 기능 보유자 조순자 명인과 시조를 노래하는 국민 테너 엄정행 성악가를 만나 대담을 했습니다. 이 기획 특집의 마무리를 위해 선생님을 모시고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근간에 시조에 대한 평론을 여러 차례 발표하셨습니다. 먼저 현대의 시조인들이 가져야 할 ‘시조와 시조정신’에 대한 말씀으로 말머리를 풀어 나갔으면 합니다.
윤재근 : 시조는 우리말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데서 시조정신은 비롯합니다. 조선시조는 시조정신을 앞세우지 않아도 괜찮았을 터입니다. 먼 옛날부터 우리말로 이어져왔고 다른 것에 위협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선시조는 조선말로 읊어지고 불렸기에 조선한시(朝鮮漢詩)에 곁눈 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시조는 시조정신을 앞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시조와 한국현대시는 우리말-우리글을 함께 누리고 있는 까닭입니다. 시조와 현대시는 모두 우리 시문학이지만 시조와 현대시가 비롯된 본래本來의 입장에서 보면 같을 수 없습니다. 우리시조의 본래는 예부터 오로지 우리네 것이지만 한국현대시의 본래는 서양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1920년대 전만 해도 우리에게 현대시(Mordern poetry)란 없었습니다.
우리 시문학에 들어온 현대시는 여조(麗朝)에 풍미했던 한시(漢詩)와는 다릅니다. 한시는 우리 스스로 들여온 것이지만 현대시는 일제(日帝)가 조선말을 없애려는 술책의 일환으로 우리에게 접붙인 것입니다. 우리말을 없애는 지름길이란 우리말이 일구어온 노래 특히 시조를 없애야 함을 일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시조와 현대시의 세계가 판이함도 알았습니다. 현대시에는 일본말로 지은 <카페 프란스>나 <오감도> 등이 생길 수 있지만 시조에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시조를 지으면 탄압하고 현대시를 방임했던 일제의 속뜻이 숨어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노산 이은상은 일제가 감춘 속셈을 뼈저리게 간파했던 시조인이었습니다.
우리말로만 지을 수 있는 시조란 곧 우리 얼을 담아내는 가시(歌詩)임을 뼈저리고, 1930년대부터 넘쳐나기 시작한 현대시 시류에 휩쓸리지 않던 시조정신이 노산 시조인께는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조정신은 오늘날 시조인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산의 시조정신을 지금 그대로 본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우리말을 없애려는 일제는 없지만 현대시를 추종하려는 시류가 해일(海溢)처럼 한국시조를 덮치고 있기 때문에 새삼 시조정신을 앞세워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는 시조인에게 시조와 현대시는 같은 뿌리가 아니라는 문학정신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입니다. 시조정신이란 무엇인가? 무엇보다 먼저 시조는 현대시와 다르다는 확신입니다. 조선시조까지는 <가(歌)>로 지어졌지만 한국시조는 <가시(歌詩)>로 지어야 한다는 창작정신을 요구합니다. 시조는 우리말 소리가락을 타면서 절로 이루어진 정형시가지만 현대시는 우리말 소리 가락을 무시하고도 있을 수 있는 서양의 자유시를 본받았습니다. 시조는 우리를 우리말 가락(韻)에 실어 <우리-흥(興)→자연(興)>으로 유구한 세월 담아왔고, 현대시는 <우리-흥(興)→자연(興)>이란 없이 <나>를 중심에 두고 삶을 치열하게 마주하는 서양현대문학관을 따릅니다. 그러므로 시조와 현대시는 서로 판이함을 확신하고 시조를 창작하는 마음가짐이 곧 시조정신의 핵심입니다.
김복근 : “현대시는 일제가 조선말을 없애려는 술책의 일환으로 우리에게 접을 붙인 것이다. 우리말을 없애는 지름길이란 우리말이 일구어온 노래 특히 시조를 없애야 함을 일제는 잘 알고 있었다.”는 말씀에 큰 울림이 있습니다.
요즘 발표되는 시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윤재근 : 요즘 발표되는 시조들을 보면 시조 음수율을 맞추어 삼행(三行)으로 짓기만 하면 곧 시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시조가 마치 바람 앞에 촛불 같다는 심정입니다. 아마도 시조율격이 곧 시조정형이라고 여겨서 비롯된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청구영언』이나 『해동가요』에 수록된 평시조를 살펴보면 1930년 조윤제선생의 [시조자수고(時調字數考)]에서 밝힌 <초장 3-4 4-4(3) 중장 3-4 4-4(3) 종장 3-5 4-3> 음수율을 만족시키는 평시조는 10%가 채 되지 않습니다. 10%라면 전체의 정형(定型)이 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조윤제선생은 <시조는 삼장육구>라는 말씀을 남겨 시조정형을 정언(正言)했습니다. 이를 천착하고 시조정형으로 삼아 시조를 창작하는 시조정신이 구축되었다면 오늘날 시조가 자수만 맞춘 삼행시(三行詩)로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장구(章句)에 관해서는 뒤에서 말하려 합니다.) 우리말과 함께 해온 시조는 초장-중장-종장 하여 삼장(三章) 시가이지 초행-중행-종행 삼행(三行) 시일 수 없습니다. 시조는 장구의 시가이지 행(行)의 시가 아닌 까닭입니다. 시행(詩行)이란 서양으로부터 유입된 것일 뿐 우리에게는 본래 없었습니다. 요즘 발표되는 시조가 대부분 삼장의 시가로 짓지 않고 삼행시로 창작되는 현실이야말로 한국시조가 현대시를 따르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게 합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은 있지만 이류상종(異類相從)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시조와 현대시는 둘 다 시(詩)이되 서로 근본이 다른 이류(異類) 입니다. 요즈음 한국시조가 거의 다 현대시를 닮아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이는 시조문학의 절망일 수 있습니다.
김복근 :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시조와 현대시를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시조가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연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현대의 시조인들은 시조를 배우거나 제대로 익히기가 어렵습니다. 시조를 가르치는 대학이 없고 시조 강좌조차도 거의 없습니다. 독학을 하거나 선배 시조인들에게 도제방식으로 배우다보니 제대로 된 시조학이 정립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언젠가 학술발표회에서 국문과나 문창과에 시조 강좌라도 개설하자는 제의를 해봤지만,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습니다. 초중등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육과정에서 시조가 홀대 받고 있고, 시조를 제대로 가르치는 교사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된 시조를 배울 기회가 없습니다. 시조를 배우지 않고 쓰다 보니 시조가 제대로 전승되지 않고 있습니다. 절주는 말할 것 없고, 구수율까지 무너지고 있습니다. 먼저 3장시조와 3행시의 다른 점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윤재근 : 시조를 바르게 알고 써야 합니다. 삼장시조와 3행시에 같은 점이 있다면 자수(字數) 밖에 없습니다. 한 장(章)의 자수가 <34-44>로 시조의 한 장이 됩니다. 여기 <34의 3>이란 홀소리 셋이 모이고 <34의 4>란 홀소리 넷이 모임을 말하고, <44의 4> 역시 홀소리의 모임을 말합니다. 홀소리의 모임을 운(韻) 즉 가락(韻)이라고 합니다. 시조의 한 장은 홀소리의 모임 즉 가락을 바탕으로 두 시상(詩想)의 엮음을 요구하여 정형시가가 되게 합니다. 현대시의 행에는 이러한 엮음의 요구가 없기에 현대시를 자유시라 합니다. 장구의 엮음을 떠나서 시조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에 다음 사항을 경청했으면 합니다. 한 행(行)의 자수가 <34-44>라 할지라도 시조의 한 장(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시조의 장은 절주(節奏)의 구(句)들로 시상(詩想)을 제약하지만 현대시의 행은 시인이 원하는 대로 시상을 자유롭게 끊어 시행(詩行)을 펼치는 까닭입니다. 시조의 장은 절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상상을 제약하지만 시조를 정형시가가 되게 합니다. 현대시의 행(行)은 시인의 상상을 자유롭게 펼치게 하여 자유시라 합니다. 삼장시조에서 삼장이란 절주로 두 구(句)를 세 번 엮음으로 시조 한수를 창작하는 시조의 정형을 말합니다. 현대시의 시행은 절주 없이 시인이 원하는 대로 시상을 행(行)으로 쌓아 창작합니다. 이처럼 시조의 장(章)과 현대시의 행(行)은 판이합니다. (서양시의 문학관(Modern Poetry)에 바탕을 두는 한국현대시에는 장(章)이란 것은 없고 행(line)만이 쌓여 연(聯)을 이루어 현대시가 됩니다. 그러므로 시조라면서 발표되고 있는 삼행시는 현대시를 따름이고 삼행시조 연작은 삼행시 하나가 한 연이 되는 편이라 삼행시와 삼행시의 연작은 삼장시조라 할 수 없습니다.
김복근 : 절주와 구수율에 대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윤재근 : 절주(節奏)란 장(章)의 엮음을 말합니다. 구(句) 둘로 한 장(章)이 됩니다. 장의 앞 구를 절(節)이라 하고 뒤 구를 주(奏)라 합니다. 절은 멈춤을 뜻하고 주는 나아감을 뜻합니다. 이에 시조 장구(章句)의 절주란 시조에서 한 시상(詩想) 멈추고 또 한 시상이 나아감을 말합니다. 한편의 시조는 시상의 멈춤과 나아감이 세 번 이루어져 한 편이 창작되므로 삼장시조라고 합니다. 시조인은 <장(章)의 절주란 천명(天命)을 따름>이란 말씀을 반명(盤銘)으로 삼아 시조를 창작해야 합니다. 반명이란 한 순간도 잊지 말라는 말씀이고, 천명(天命)은 자연의(天) 시킴을(命) 본받아 따름을 말합니다. 1950년대 전만해도 문장이란 천명을 본받아 따름이란 상식이 통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영문법이 <sentence>를 문장(文章)이라 번역하고 <phrase>를 구(句)라 번역한 탓으로 문장(文章)이란 말이 고유의 뜻을 내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4살에 서당을 가면 맨 먼저『추구(推句)』를 가르쳤습니다. 『추구』는 장(章)의 절주(節奏)를 익히게 하는 서당의 교재입니다. 『추구』는 <天高日月明>으로 시작합니다. <天高> 즉 <하늘은(天) 높다(高)>는 절구(節句)이고 <해달은(日月) 밝다(明)>는 주구(奏句)입니다. 한 생각 멈추고(節) 또 한 생각 나아가라(奏) 함이 한 장(章)입니다. 장(章)이 이러함은 곧 천명(天命)을 따름입니다. 계속 멈춤도 없고 계속 나아감도 없어 멈추고 나아감이 반복되는 것이 천명(天命)입니다. 그래서 옛날 서당 훈장께서는 대나무를 들어 천명을 풀이했었습니다. 대나무 마디마디가 천명을 새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장(章)은 천명(天命)을 따른다고 믿었기에 문장을 천명이라 새겼습니다. 이런 장(章) 교육은 없어지고 <sentence>가 문장이라 가르칩니다. 중국의 『영한사전(英漢辭典)』을 보면 <sentence>가 <구(句)>로 되어 있습니다. 천명(天命)이란 용어는 서양문학관에 함몰되면서 문학정신이나 이론에서 밀쳐졌습니다. 서양문학관에는 천명이란 생각자체가 없지만 우리에게는 천명사상이 사유(思惟)의 바탕입니다. 자연의 명(命)을 본받아 따르기란 <상생(相生)-상성(相成)-상형(相形)-상경(相傾)-상화(相和)-상수(相隨)>가 상식인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시조인은 천명을 본받아 따름으로 시조의 장구(章句)가 있음을 깨닫고 시조를 창작해야 합니다. 서양사조 탓으로 천명이란 말씀이 잊힌 셈이지만 시상을 절주한다 함은 시조인에게 시조의 한 장(章)은 두 시상이 서로(相) 생기게(生) 하거나-서로 이루게(成) 하거나-서로 드러나게(形) 하거나-서로 기대게(傾) 하거나-서로 어울리게(和) 하거나-서로 따르게 하거나(髓) 하여 절구(節句)와 주구(奏句)를 엮어가야 함을 말합니다. 시조인들이 장(章)의 이러한 요구를 외면한 탓으로 삼행시를 시조라 여기는 셈입니다. 현대시의 행(行)은 장(章)의 이러한 요구를 하지 않고 시인 마음대로 연속해 행(行)을 쌓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시조는 한 장에 두 시상을 상생-상성-상형-상경-상화-상수 등의 어느 한 관계로 절주(節奏)하는 두 구(句)로 엮고, 세 장(章)으로 시조 하나를 창작하여 삶의 <희로애락애오구(喜怒哀樂愛惡懼)>를 풀어내는 <흥(興)>으로 심중을 풀어버립니다. 이러한 장(章)의 절주로써 심중에 맺힌(結) 온갖 것들을 다 풀어줌이(解) 우리 시조가 갖춘 본래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한 시상(詩想) 멈추고(節) 또한 한 시상 나아감이(奏)> 장의 절주입니다. 아래의 조선시조를 잘 살펴보면 세 절구와 세 주구로 삼장이 이루어져 시상(詩想) 여섯이 어울려 삼장육구의 정형시조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나뷔야 청산가자(節句) 범나뷔 너도가쟈(奏句)
가다가 져무려든(節句) 곳듸들어 자고가자(奏句)
곳에서 푸대접하가든(節句) 닙헤셔나 자고가자(奏句)>.
위 조선시조는 지은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시조인일수록 지은이가 없음에도 『청구영언』 등에 채록된 조선시조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 시조는 한시를 짓는 부류가 아니라 초야백성이 우리말로만 불렀던 산노래-들노래가 곧 시조였던 까닭입니다. 이런 시조노래를 서포 김만중 선생은 <이아(咿啞)>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아(咿啞)라 하고 중국은 민가(民歌)라 하며 일본은 민요(民謠)라 한다고 시조인들이 알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육자배기나 아라리 같은 들노래-산노래가 이아입니다. 우리 이아는 선창(先唱) 즉 앞소리와 후창(後唱) 즉 뒷소리로 이루어집니다. 앞소리는 시조의 초-중장을 이루는 기경(起景)에 해당되고 뒷소리는 시조의 종장을 이루는 결해(結解)에 해당합니다. (시조와 기경결해(起景結解)는 나중에 말하려 합니다.) 육자배기의 앞소리꾼은 요새로 말하면 시조인과 같습니다. 육자배기의 가사를 노래할 때마다 스스로 장(章)을 창작하여 육자배기토리에 얹어 시김새-가락으로 부르면 뒷소리꾼들은 <허나 헤> 같은 떼창으로 흥을 누렸습니다. 이아는 반드시 뒷소리가 앞소리를 따랐습니다. 뒷소리는 말뜻은 없고 시김새의 가락만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앞소리꾼이 소리할 때면 초-중장만 노래하지 종장은 뒷소리 꾼들의 떼창에 맡겨 버립니다. 이아에선 시조의 종장을 시김새가락만 있는 떼창이 대신합니다. 육자배기나 아라리의 앞소리는 2장(章)으로 엮어서 뒷소리가 따르면서 우리의 산노래-들노래인 이아(咿啞)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세세연년 통성(通聲)으로 불러 이어 왔습니다. 물론 아라리 즉 아리랑은 앞소리 1장에 뒷소리가 따라 불리기도 합니다. 초야백성이 부르는 이아는 자수야 다양하지만 장(章)으로 짜이지 행(行)으로 짜이지는 않습니다. 요즈음의 대중가요 노랫말은 모두 행으로 만들어지고 서양식 발성으로 부른다는 사실 또한 시조인은 주목해야 합니다. 시조장구란 음(吟) 즉 읊다가(吟) 흥얼거리다(詠) 흥에 겨워 창(唱) 즉 목청껏 노래하기로(唱) 이어지는 가락이 시김새로 어우러지는 가락으로 우리에게만 있는 말소리가락이라고 확신해도 됩니다. 가락의 시김새는 가야금 같은 현악기의 농현(弄絃)만이 아닙니다. 장단고저를 시김새(꺾거나-떨거나-누르거나-늘리거나)로 뽑아내는 육자배기 같은 산노래-들노래의 우리말가락(韻)은 우리말 홀소리가 갖는 본래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에 시조장구란 운(韻) 즉 가락을(韻) 타고 노래가 되기에 운(韻)을 타는 장을 이루는 두 구를 일러 절주라 합니다. 이에 절주는 우리말가락(韻)을 타야하므로 절주를 그냥 운(韻)이라고도 합니다. 절구의 시상(詩想)과 주구의 시상 둘이 하나의 장(章)을 이루어 시상 여섯을 화합한 삼장(三章)이 시조정형을 이루지 자수로만 시조정형이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삼장정형은 시조의 본성인지라 시대가 변해도 바뀔 수 없습니다.
구수율(句數律)이란 시조평론이 만들어낸 용어라고 여기면 될 것입니다. 시조인은 평론이나 시조학자들이 쓰는 이런 용어나 지식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조인은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에서 정인지(鄭麟趾) 선생이 밝혀둔 말씀은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운성요재중성용(韻成要在中聲用). <운을(韻) 이루는(成) 요체는(要) 홀소리를(中聲) 씀에(用) 있다(有)>는 말은 우리말의 운(韻) 즉 가락이 이루어지는 이치를 더없이 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 <중성용中聲用의 용用>은 <홀소리의 모음>을 뜻합니다. 우리말의 운(韻) 즉 가락은 <중성용(中聲用)> 이 삼자(三字)를 새겨 장단고저의 시김새가 엮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구수율>에 관해서 저 나름 풀어보겠습니다. <구수율>의 구(句)는 시조의 육구(六句)를 말하고, 수(數)는 구마다의 홀소리 개수를 말하며, 율(律)은 홀소리모임이 갖는 장단고저가 일궈주는 가락을 뜻하는 용어가 <구수율>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허나 이런 용어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구수율의 율(律)은 운(韻)과 같은 말입니다.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에 운률(韻律)이란 말은 없습니다. 일제전(日帝前) 우리 선대는 운(韻) 또는 율(律)이라 했지 운율(韻律)이란 말은 쓰지 않았습니다. 운율이란 말은 <meter(metre)>를 옮긴 일식조어(日式造語)로 운(韻) 또는 율(律)이라 쓰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시조에서 초-중장의 절구(節句)는 홀소리 셋이 모인 가락(韻)과 홀소리 넷이 모인 가락으로 짜이고 초-중장의 주구(奏句)는 홀소리 넷이 모인 두 가락으로 짜이며, 종장의 절구는 홀소리 셋이 모인 가락(韻)과 홀소리 다섯이 모인 가락이고, 주구(奏句)는 홀소리 넷이 모인 가락과 홀소리 셋이 모인 가락으로 정형시조 한 수(首)가 창작됨을 나타내는 용어가 구수율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수를 맞춰야 정형시조가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시조정형은 삼장육구로써 짜인다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말에서 홀소리 하나-둘-셋-넷-다섯이 모여 내는 가락(韻)은 숨결과 어우러져 흥겹지만 홀소리 모임이 여섯이나 일곱을 넘어가면 숨차게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숨을 참게 하는 가락이 창(唱)이고 숨 따라 술술 나오는 가락이 음(吟)-영(詠)입니다. 시조는 음(吟) 즉 읊기의 가락을 반드시 타야하지만 흥얼거리다(詠) 흥에 겨워 창(唱) 즉 목청껏 질러대기로(唱) 꼭 이어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조는 그냥 시(詩)가 아니라 반드시 음(吟)의 운(韻) 즉 가락을 타야(韻) 하는 가시(歌詩)임을 지금 시조인들은 외면하는 편입니다. 요즈음 한국시조는 한국문단이 걷는 <산문의 길>을 따라 가고 있는 현실 탓입니다. 그러므로 구수율이란 현대시조와는 상관없을 용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한국문학에서 운문(韻文)의 말하기는 없고 산문(散文)의 글짓기만 있습니다. 소설은 산문이고 시는 운문이란 나누기는 한국문학 현실에는 폐기된 상태입니다. 지금 시조인은 모두 산문으로 시조를 짓습니다. 산문이란 눈으로 읽으라는 글짓기이고, 운문은 입으로 읽고 숨결과 더불어 가락을 누리게 하는 말하기입니다. 한국현대시는 산문으로 글짓기해도 될 것입니다. Modern poetry는 강약 또는 약강의 정형구속을 떠나 자유시를 표방했고 한국현대시 역시 이를 본받아 시작된 것이라 율격이니 음보니 고저장단을 운운할 필요가 없는 쪽입니다. 그러나 우리시조는 태생부터 우리말의 가락을 얹어 초야백성의 입을 타고 전해왔습니다. 이런 믿음이 확고하다면 아래 (C)는 시조의 말하기가 아닌 산문의 글짓기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뷔야청산가자범나뷔너도가쟈> (A)
<나뷔야 청산가자 범나뷔 너도가쟈> (B)
<나뷔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C)
『韓國時調大事典』朴乙洙著 1992年
(A)는 조선시조의 운문입니다. 조선시조의 운문은 모음들의 떨어짐이 없어 눈으로는 읽지 못하게 한 줄로 내리이어 『청구영언』등에 적혀있습니다. 눈으로 읽을 수는 없고 반드시 입으로 숨결 따라 읽으며 귀로 들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조의 한줄-운문 (A)입니다. (A)를 숨결 따라 읽다보면 절로 홀소리들이 말하기로 모여 운(韻) 즉 가락이 생겨나 (B)가 됩니다. (B)는 (A)를 입으로 읽으면 절로 비롯되는 운문인 절주의 구(句) 즉 한 장(章)입니다. 그러나 (C)처럼 띄어쓰기를 해놓으면 입으로 읽지 않고 눈으로 읽어버려 말소리 없이 낱말 뜻을 얻을 수 있는 산문 글짓기가 됩니다. 시조는 가시이므로 운문의 육구로 존재함이 본성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시조들은 거의 다 (C)로 행(行)을 잡아 3행시로 창작됩니다. 시상 하나를 잡아 거미줄처럼 풀어내어 삼행으로 자수만 맞춰 짓고 있으니 현대시 본뜨기란 비판을 받습니다. 시조인은 (A-B)는 말하기이고 (C)는 글짓기임을 엄히 분별해야 합니다. 이어서 우리 시조는 음(吟)-영(詠)→창(唱)으로 이어져 시상(詩想)마저도 가락 속에 녹아들고 흥(興)으로 풀어내어 유구한 세월에 걸쳐 갈고닦아온 운문의 가시(歌詩)임을 각인(刻印)해야 합니다. 물론 조선시조 역시 음영(吟詠)만은 반드시 따랐지만 창(唱)을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B)로 시조의 음영은 만끽됩니다. 이에 시조를 (C)의 글짓기로 행을 잡아 산문으로 지을 것이 아니라 (B)로 절주의 구(句)를 여섯 번에 걸쳐 짜는 운문으로 지어야 함이 시조의 본성이고 시조창작의 숙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김복근 : 절주와 음영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포 김만중 선생은 우리말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우리글로 표현해야 진정한 문학이라 주창하면서 새로운 비평 문학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 문자의 번역, 절주節奏를 가진 말이 가시문부를 이룬다는 혁신적인 논리를 펴기도 했습니다. 우리말의 가치를 중시한 서포 선생의 이런 생각은 시조, 들노래-산노래(민요), 가사와 같이 진솔한 생활 감정을 담아내는 우리말 우리글 문학이 참 문학임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막대기로 땅을 쳐서 절節을 만들어...새로운 음악의 절주를 했다”〔新樂節奏...以柱杖擊地爲節〕는 기록이 나옵니다. 『세종실록』, 『세조실록』, 『악학궤범』, 『서포만필』, 『청구영언』 등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말로 쓰인 시조와 음조를 살린 절주는 현대 시조에도 계승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운용방법이 제대로 전수되지 않고 있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절주가 승계되면 자연히 음영하게 되고, 구수율 문제는 절로 해결될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문화말살정책에 의해 조선의 말과 글, 민요와 시조가 크게 위축됐습니다. 이 시기에 시조가 겪은 어려움을 알고 싶습니다.
윤재근 : 일제강점기 시조가 겪은 수난은 바로 시조가 조선말 노래였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조선말을 없애는 것이 식민문화정책의 바탕이었지요. 조선백성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없애버려야 조선문화가 일본문화로 탈바꿈한다는 것이 일제의 식민문화정책의 음모였습니다. 먼저 방방곡곡 골짝과 마을의 조선말 이름부터 한자로 고쳐 일본식으로 부르게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자밭골>을 <백전(柏田)>으로 고치고 <백전>이 아니라 <바이자느>로 읽게 했습니다. 우리 고을이름이 일본말로 바뀌어 수백 년 흐르면 우리 땅은 없어지고 일본 땅이 된다는 것이 일제의 생각이었지요. 아울러 조선토종이면 무엇이든 일본 종(種)으로 바꾸고 조선백성이 누려온 민속을 미신이라 비하하여 왜속(倭俗)으로 옮겨가라 했습니다. 마지막 과정이 조선말 즉 우리말 없애기였습니다. 조선을 찬탈한지 30년 만에 일제는 드디어 조선말 없애기 마발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1940년 미나미 총독이 조선말-조선어를 없애고 일본말-일본글만을 써야한다는 국어령(國語令)을 내리면서 모든 분야에서 조선말-조선어는 철폐되었습니다. 따라서 조선 문인들은 일본말-일본어로 문학해야 했습니다. 붓을 꺾고 한양에서 초야로 내려간 조선문인은 없었다고 보아도 됩니다. 일본말-일본어로 시-소설-수필-평론 등을 계속했습니다. 이런 암흑기에 지하로 잠복한 몇몇 문인층(文人層)이 있었습니다. 바로 시조를 짓는 문인들이지요. 일제 강점기 시조를 짓는 문인들은 이미 1920년대 시조부흥운동을 외쳤습니다. 그로부터 노산, 위당, 가람의 출현과 뒤를 이어 김상옥, 조훈, 이호우, 이태극 등의 활약이 이어졌고 이를 계기로 일제는 공개적으로 시조 짓는 문인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조인의 수는 적었지만 창작을 멈추지 않고 어렵사리 시조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1940년 미니미의 조선말철폐령 이후 지하로 들어가 우리말-우리글로 시조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심해지는 핍박 탓으로 노산은 마산에서 살 수 없었고 초정은 통영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드러내놓고 저항한 대표적인 분이 노산 이은상 시조인입니다. 1931년 3월 『삼국사화집三國詞華集』을, 1932년 3월 『노산시조집』을 낸 숨은 뜻을 시조인들은 음미해 보아야 합니다. 『삼국사화집』의 <삼국>은 신라-고려-조선을 말함으로 우리민족이 누려온 이아(咿啞)의 바탕인 이야기들을 실지답사로 채집해 담은 것입니다. 답사하면서 노산시조인은 산야에서 불리는 이아(咿啞)가 시조의 초-중장이나 초장이 된다는 사실을 마주했을 터입니다. 전국을 떠돈 다음 세상에 내놓은 『삼국사화집』으로 노산은 일제의 눈에 가시였습니다. 연이어 일제가 탄압했던 백성의 노래인 시조를 창작하여 『노산시조집』을 발표했으니 더 심한 탄압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광복 때까지 내내 탄압을 받다가 일경의 유치장에서 광복을 맞아 풀려난 유일한 문인입니다. 노산이 맨 처음으로 <시조집>이란 서명을 썼습니다. 시조문단이나 국문학 쪽에서 현대시조집의 효시를 육당(六堂)의 『백팔번뇌百八煩惱』라고 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는 결코 온당치 않습니다. 1930년대 이후 육당의 행적은 일제의 하수인이었습니다. 그런 당사자의 『백팔번뇌』를 (노산의 것보다 전에 지었기로서니) 한국 현대시조의 효시로 삼자니 부끄럽습니다. 시조문단에서 만큼은 『노산시조집』을 현대시조집의 효시로 보아야 당당하리란 생각입니다. 노산시조인은 시조집 서문에서 1920~30년 동안 740여 수 중에서 300수를 골라 묶었음을 밝히고, <서러운 노력努力>이라고 술회했습니다. 육당의 「海에게서 少年에게」를 필두로 1920~30년대 일제하 조선 현대시인들은 일본의 신시를 학습하여 이른바 7-5조 시형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시조인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오로지 우리말 가락으로 삼장 정형 시조를 창작했으니 노산께서 『노산시조집』의 서문에서 실토한 <서러운 노력>이란 <조선말을 없애려면 시조부터 없애야 한다>는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는 항일이며 저항이었음을 말합니다. 일제하 시조인의 이러한 고통과 저항을 오늘날 시조인들은 명심하고 자부해야 합니다.
김복근 : 일제강점기에 일본어로 시조를 쓴 시조인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시조인들의 민족정신이 유난했다는 시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마해송이 펴낸 《모던 일본과 조선 1939》라는 일본어 잡지에 조선 문인들이 앞 다투어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시조는 단 한 편도 없습니다. 당대 시조인들의 결기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선어 수난 사건에 연루된 학자들의 시조를 채록하여 연구해 봤으면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시조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윤재근 : 1909~1910년 사이 대한매일신보와 대한민보 지면에 거의 매일 시조가 발표되었습니다. 물론 조선일보-동아일보도 간간이 시조를 게재했습니다. 그러나 1909~10년 8월까지 대한매일신보와 대한민보에는 매일 시조가 게재되어 800여수 발표되다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시조 게재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물론 두 신문에 게재된 시조는 대부분 항일의식을 담은 모방작품이라 현대시조라 평가할 수는 없지만 시조로 항일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초야백성의 시조가 신문지면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큰 의미를 갖는 동시에 조선시조가 백성들에게 젖어들어 있었음을 말합니다. 게재된 거의 모든 시조가 조선시조의 초장-중장을 그대로 받은 다음 종장에 저마다의 우국충정을 담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를 보겠습니다: <잘잇거라 三角山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우리강토 떠나가니 참아엇지 안젓스리 도처에 무수한 뎌魔鬼를 다자고야> 이 저항시조는 착마경(搾磨經)이란 이름으로 1909.4.15.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전만해도 조선백성 사이에 시조는 종장만 슬쩍 바꾸어 노래하기가 생활 속에 젖어 있었다고 믿어도 됩니다. 조선백성이 즐긴 시조창이란 김월하 명인이 가성(假聲)으로 뽑는 시조창과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초야백성의 시조창이란 가성이 아닌 육성으로 산노래-들노래 토리에 시조를 자유롭게 얹어 목청껏 질러대는 것입니다. 산야에서 산일들일 하며 시조창을 하는 풍속이 널리 퍼져 있었지요. 시조인은 서포 선생의 용어인 이아(咿啞)로 두메산골 나무꾼-풀꾼들이 골짝마다 육성으로 고래고래 뽑았던 시조창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산노래-들노래가 6.25전까지는 두메산골이라면 풍성했습니다. 6.25이후 농촌사회가 점점 붕괴하고 도시로 옮겨가면서 두메산골에 울려 퍼졌던 이아가락은 사라져가고 말았습니다. 이아는 요새말로 민요입니다. 민요는 일본용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조선백성이 산노래-들노래에 조선시조를 얹어 산야에서 불러대다 일경(日警)에 들키면 치도고니를 당했습니다. 그렇게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조선시조가 초야백성의 생활 속에 녹아있던 풍속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일제는 조선시조가 조선말의 가락을 넘치게 하여 조선정신을 강화한다는 뜻을 알아 시조 자체를 멸제(滅除)시키려 했습니다. 1940년 미나미총독의 치하에서 조선말-조선글은 철퇴를 당했고 1940년 2월 창씨개명은 조선인의 성명(姓名)마저 없애기가 절정에 달했습니다. 이런 절명의 상황에서 가야마미쓰오(香山光郞)라 창씨개명한 춘원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조선인 문인 내지 문화인의 심적 신체제의 목적은 첫째로 자기를 일본화하고 둘째로는 조선인 전부를 일본화하는 일에 전 심력을 바치고 셋째로는 일본의 문화를 앙양하고 세계에 발양하는 문화 전선의 병사가 됨에 있다. 조선문화의 장래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우리들의 천황이 사용하시는 말을 우리 국어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고 설파하여 조선말 철폐를 주장했습니다. 이에 1940~45년 사이 붓을 꺾지 않고 일본말-일본어로 시를 짓고 소설을 썼던 이른바 한양의 조선문인들은 춘원과 한통속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절망의 순간 지하로 들어가 잠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일제강점기 시조의 수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조인들은 시조 짓기를 단념하지는 않았습니다. 1948년 출간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시조인의 『담원시조(薝園時調)』 312수를 보면 내내 시조인들은 시조 짓기를 단념하지 않고 지속했음이 증명됩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시조보다 일제의 마수를 피해 지하에서 묵묵히 시조 짓기를 멈추지 않아 노산의 말씀대로 광주리에 수북이 쌓이고 있었던 시조들이 시조인들의 항일 저항정신을 보여주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김복근 : 일제강점기에는 초야에 묻혀있는 백성들이 시조를 발표했다는 말씀은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지하에서 시조를 쓴 선인들의 저항정신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표준어로 문학을 표기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문인은 어머니에게서 배운 말과 제 고장말로 자기 문학의 본분’을 삼아야 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시조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셨으면 합니다.
윤재근 : ‘표준어로 문학을 표기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는 말을 1990년대까지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제 심정을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조인들은 우리문학이 표준어의 길로 접어든 곡절을 1940~45년 자행되었던 미나미총독 치하 조선말-조선글 철폐령을 되짚어 보면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1940~45년 사이 일본말-일본글로 문학했던 조선 문인들은 갑자기 닥친 광복 이후 한국문인으로 변신하여 문단의 주도권을 잡고 한국 현대문학 1세대로 군림했습니다. 이 한국문학 1세대들이 현대문학의 진로를 결정했다는 서글픈 사실을 새긴다면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현대문학 1세대들은 거의 다 조선말-조선글 철폐령에 따라 일본말-일본글로 문학을 계속하고, <조선말을 없애고 일본 표준어인 도오꾜벤으로 문학해야 한다>는 춘원의 주장을 추종했기에 조선말이란 자체가 그들에게 가위눌림이었습니다. 도오꾜벤이란 일본 표준어를 말합니다. 춘원의 주장을 따랐던 한양의 조선문인들은 갑자기 조선말로 문학할 면목이 없었지요. 그들이 한국문학을 표준어로 유도했던 숨은 까닭을 지금 문인들은 아예 모르는 지경입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도 조선문학은 줄곧 문인의 출생지에 따른 제 지방 말 즉 사투리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왜 광복이후 한국문학이 표준어로 이루어지게 되었느냐 하면 현대문학 1세대들에게 조선말 즉 각 지방의 사투리란 것이 자괴(自愧)의 공포 자체였던 까닭이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일제 미나미 치하 5년 동안 조선말을 없애고 도오꾜벤으로 문학하자고 했던 현대문학 1세대들에겐 조선어학회가 사정(査定)한 표준어가 구세주였다고 짚어보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조선말 없애자고 했던 과오를 피할 수 있는 샛길을 표준어(표준말)가 제공해 주었다고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본래 표준어란 자연어(自然語)가 아닙니다. 다른 나라에도 표준어가 있지만 문학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표준어는 관공서-신문사-방송국 등에서 사용하는 뜻만을 전하는 공용어 매체일 뿐입니다. 서양문학관에는 ‘포에틱 라이센스(poetic license)란 용어(term)가 있습니다. 시적허용이라 변역할 수 있는 ‘포에틱 라이센스’란 시인이 문법에는 물론 사실이나 학문 등등의 지식에 결코 구속받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에 특히 시는 시인의 <마더텅(Mother tongue)> 즉 어머니에게서 듣고 배운 말로 지어야 합니다. ‘마더텅’이란 3살에서 여섯 살까지 어머니로부터 듣고 배운 말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모국어란 번역보다 <어머니말(Mother tongue)>이라고 하는 편이 알맞습니다. 어머니말은 표준어일 수 없고, 어머니가 사는 고을 사투리입니다. 그런데 한국문학은 모조리 표준어로 창작되고 있습니다. 이런 문학현실은 세계에서 우리밖에 없다고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이에 우리 시조문학에는 말수와 시김새 가락의 다채로움이 없어졌습니다. 특히 시조인이나 현대시인은 시상으로 보다 새로운 말씨를 만들어 내놓아야 후세에 영영 남을 수 있습니다. 노산은 ‘가고파라 가고파’로, 소월은 ‘영변에 약산 진달래’로 지훈은 ‘고이접어 나빌레라’로 영원히 사라질 리 없습니다. 이런 새말이 가락을 얻자면 표준어로는 안 됩니다. 문인은 저마다 제 목소리로 제 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표준어로 문학할 수는 없는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제목소리의 원천은 사투리이지 표준어가 아닙니다. 표준어란 모두에게 한 뜻을 전달해야 하는 공용어일 뿐, 표준말이 곧 우리말(조선말)이 될 수도 없습니다. 표준말은 우리말의 하나일 뿐입니다. 방방곡곡 산천 따라 사투리가 있었고 그 사투리를 합친 것이 한국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새길수록 새로운 맛이 나는 말수가 어머니말이란 방방곡곡 사투리입니다. 사투리를 없애버리고 표준어 일색으로 언어교육을 이끌어가는 언어정책은 일제의 조선말철폐령이란 악령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합니다. 다른 나라들은 사투리는 사투리대로 살리고 표준어교육을 하여 표준어를 사회소통 수단으로만 이용합니다. 공문서나 신문이나 방송은 표준어로 행하지요. 백보양보해서 소설이나 수필은 산문이니 표준어로 지을 수 있고 현대시 역시 서양시문학을 본받아 시작된 자유시인지라 표준어로 짓는다 하더라도 시비 걸 것 없겠습니다. 그러나 시조만큼은 표준어 띄어쓰기 따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까닭을 시조인은 깊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광복이후 줄곧 우리문단은 시조든 현대시든 표준어에 띄어쓰기를 철저히 지키고 있는 중입니다. 표준어와 띄어쓰기로는 산문일 뿐 운문이 될 수 없습니다. 내재율(內在律)이란 말은 멋진 말이지만 실언(實言)일 수 없습니다. 우리말을 글짓기로 띄어써놓고 말하기로 읽어달라고 억지 부리는 짓에 불과합니다. 띄어쓰기 해놓으면 그냥 눈으로 읽고 운(韻)은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시조에도 현대시에도 운문은 없고 산문만 있으니 말의 가락은(韻) 소멸되고 말았음을 시조인은 참담해야 합니다. 현대시조는 우리말소리의 일품인 시김새-가락이 없어져 삭막합니다. 현대시조 문학에서 우리말 운율이 떠난 것은 일제 때 조선말 없애자는데 동조했던 현대문학 1세대들이 그 죄과를 모면하려 표준어의 길로 유도했던 탓과 더불어 국문법 띄어쓰기를 철저하게 추종하여 운문 부재의 산문화 결과입니다. 현대시야 제쳐두고라도 시조만큼은 산문화되어선 안 됩니다. 표준말 산문은 시조의 본성을 송두리 째로 유린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서양의 문학관을 모조리 따라하는 시류이지만 ‘포에틱 라이센스’만은 외면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국 현대문학 1세들에 의해서 문학의 길이기에 이‘포에틱 라이센스’를 결코 따라할 수 없는 조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시지탄일지라도 시조인들 만큼은 ‘포에틱 라이센스’를 떠올려 시적허용을 발휘하여 표준어 띄어쓰기 국어정책에 결연히 저항하고 나아가 출판사의 교정원들이 고쳐버리는 시류를 부정하고 자신만의 운문을 창조해 사수하려는 저항에 나섰으면 합니다.
김복근 : 표준어와 제 고장 말을 함께 사용하면 훨씬 풍요롭고 다채로운 시조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표준어와 띄어쓰기가 고착화되는 데는 컴퓨터도 한 몫 하는 것 같습니다. 시조인이 토박이말로 글을 써놓아도 표준어로 자동 변환되어 버리고, 출판사의 교정원들이 고쳐버리니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시조는 흥興이 대단히 중요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 시가詩歌와 가시歌詩의 차이를 알고 싶습니다.
윤재근 : 시가(詩歌)는 시여가(詩與歌) 즉 노래(歌)와(與) 시(詩)의 줄임입니다. 시가는 본래부터 노래가(歌) 먼저고 시가(詩) 뒤라는 말입니다. 노래는 말로 생겨났지만 시는 문자로써 생겨났기 때문에 시가는 선가후시(先歌後詩)란 말을 품고 있습니다. 또한 시가는 시즉가(詩卽歌)의 줄임도 됩니다. 시는(詩) 곧(卽) 노래(歌)이다. 물론 중국 쪽에서는 시가-가시를 두루 다 쓰니까 시가와 가시는 같은 뜻을 지닌 용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시가는 주로 한시(漢詩)를 두고 하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고려초 최행귀(崔行歸) 선생께서 『균여전』제팔(第八)에 남긴 <시구당사(詩構唐辭) 마탁어오언칠자(磨琢於五言七字) 가배향어(歌排鄕語) 절차어삼구육명(切磋於三句六名): 어오언칠자(於五言七字)로 갈고닦아(磨琢) 시(詩)는 당나라(唐) 말로(辭) 구조하고(構), 삼구육명으로(於三句六名) 갈고닦아(切磋) 노래는(歌) 우리말로(鄕語) 배열한다(排)>는 지적으로 미루어 최행귀께서 쓴 <가시(歌詩)>는 가와 시를 둘로 나누어 가시(歌詩)의 가는 여요(麗謠)를 말하고 시는 당시(唐詩)를 구별 짓는 용어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중국에서도 가시(歌詩)란 말을 썼기 때문에 최행귀가 <가시(歌詩)>란 용어를 처음 조어(造語)하여 썼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행귀께서 남겨준 가시란 용어는 지금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서로 말이 다르니 중국의 시와 우리의 가가 구별되어야 함을 밝히고 내용으로 보면 신라-고려의 가와 중국의 시와 서로 대등함을 지적하기 위한 용어가 <가시(歌詩)>입니다. 이에 지금 우리의 시조와 현대시를 가시란 용어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행귀께서 남겨준 <가시>가 시조는 장구(章句)로 짓고 현대시는 행(行)으로 짓는다고 분별하게 해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시가(詩歌)는 현대시를 앞세우고 시조를 뒤로 한다는 용어일 수 있지만 가시(歌詩)는 시조가 앞이고 현대시는 뒤라는 문화차서(文化次序)를 분명하게 해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서양 것이 앞이고 우리 것을 뒤로 함이 지당한 것처럼 된 시류보다 더 적나라한 문화사대는 없습니다. 이러한 문화사대를 불식해버리는 차원에서도 시조인은 시가란 용어 대신에 가시란 용어를 써야 자문화(自文化) 우선이란 문화보편성이 이루어집니다. 한시(漢詩) 쪽에서만 보면 시가든 가시든 동의어이지만 시조와 현대시를 나란히 대지워 본다면 시가가 아니라 가시라 말하는 편이 당연합니다. 특히 시조와 현대시를 두고 시가란 용어는 현대시를 앞세우고 시조를 뒤로 한다는 함의가 비롯하니 문화사대 용어가 될 수 있습니다. 가시는 시조가 앞이고 현대시는 뒤라는 문화차서(文化次序)가 분명해짐과 아울러 시조에는 현대시와 동행할 수 없는 본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문화차서란 자문화가 우선이고 타문화는 뒤라는 용어입니다. 시조의 본성은 <우리>를 앞세우지 <나>를 앞세우지 않고, 경물(景物)을 앞세워 심중(心中)을 뒤로 합니다. 이를 일러 우리는 대대로 기경결해(起景結解)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시조인들은 기경결해란 용어를 무시하고 기승전결(起承轉結)이란 말에 익숙한 실정입니다. 기승전결은 당송시(唐宋詩)의 구조(構造)입니다. 시조장구의 배열은(排) 기경결해로 풀이하는 쪽이 알맞습니다. 판소리 쪽에서는 지금도 기경결해를 우리말로 풀이한 “매고 달고 맺고 푼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 시조의 장구정형을 살피면 “초장-중장은 기경(起景) 즉 “매고 달고” 하는 장이고 종장은 결해(結解) 즉 심중에 맺힌 것을(結) 푸는(解) 장입니다. 그래서 조선시조의 끝말은 “~하리라”로 후련하게 맺힌 것을 풀어 <우리-흥→자연>에 젖어들게 하여 음→영→창(吟→詠→唱)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시나 시가란 용어보다 그냥 시(詩)라 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는 글로 짓는 시를 앞세워 높이고, 말로 음(吟)하다 겨워 흥얼거리고(詠) 영(詠)하다 겨워 불러대는(唱) 노래를 뒤로 밀쳐 멀리하려는 잘못된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행귀께서 밝힌 가시(歌詩)란 향어(鄕語) 즉 우리말로 지어 읊다가 흥얼거리고 흥얼거리다 부르는 노래인 가(歌)야말로 당사(唐辭) 즉 당나라 말을 글로 구조하는 당시(唐詩)보다 우선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왜 서포선생께서 우리에게 시부(詩賦)는 가짜이고 이아(咿啞)는 진짜라는 진언(眞言)을 남겼겠습니까? 오늘에 돌이켜 시조인들이 서포선생의 말씀을 새기고 새겨보기 바랍니다. 우리문학에서 시조가 선(先)이고 현대시(現代詩)는 후(後)이며 시조가 본(本)이고 현대시는 말(末)이란 믿음을 가진 용어가 바로 가시(歌詩)입니다.
김복근 : 5년 전 《화중련》에 발표하신 선생님의 ‘시조인과 호고’라는 글을 읽고 공감을 했습니다. 《월간문학》과 《문단실록》에 발표하신 글도 감명이 깊었습니다. 시조가 영언임을 망각하는데서 오는 폐해가 큼에도 시조인들은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조가 자연을 외면하고 인위를 추종함으로써 독자와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시조인들이 올바른 자연관과 시조의 형식을 알고, 시조를 읊조릴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윤재근 : 시조가 본래 음영(吟詠)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창(唱)으로 초야백성 속에 무르녹았던 조선시조를 천착하며 창작을 하도록 이끌어주는 선배 시조인이 광복직후 문단에 없었던 점이 무엇보다 아쉽지요. 시조 창작은 현대시와 판이함을 지적해주는 환경도 마련되지 않았음을 지적해야 합니다. 한국시조 1세대라면 노산 위당 가람 세 분이 먼저 떠오르고 뒤이어 김상옥 조운 이호우 이태극 등이 이어집니다. 이분들이 시조인이 되려는 후배들에게 시조창작이 현대시와는 다름을 알려줄 수 있는 환경이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마련되지 못했습니다. 일제 치하 마지막 10여 년 동안 도꾜오벤으로 문학했던 조선문인들이 광복직후 한국 현대문학 1세대로 부상하면서 시조문학 1세대들이 주변으로 밀려나고 시조는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광복직후 한국문학정신이 어떻게 형성되었던가를 유추해보는데 아래의 (가)-(나)를 곱씹어보면 충분할 것입니다. (나)는 (가)의 <일본화>를 <서구화>로 바꿔치기한 내용입니다. 아래 (가)-(나)는 문인협회 발간 『문단실록』에 실렸던「우리문학을 멍들게 하는 것들」이란 졸고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가) 조선인 문인 내지 문화인의 심적(心的) 신체적의 목적은 첫째로 자기를 일본화하고 둘째로는 조선인 전부를 일본화하는 일에 전 심력(心力)을 바치고, 셋째로는 일본의 문화를 앙양하고 세계에 발양하는 문화 전선의 병사가 됨에 있다. 조선 문화의 장래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춘원의 「心的 新體制와 朝鮮文化의 進路」『親日文學論』280면)
(나) 한국인 문인 내지 문화인의 심적(心的) 신체적의 목적은 첫째로 자기를 서구화하고 둘째로는 한국인 전부를 서구화하는 일에 전 심력(心力)을 바치고, 셋째로는 서구의 문화를 앙양하고 세계에 발양하는 문화 전선의 병사가 됨에 있다. 한국 문화의 장래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위의 (가)를 (나)로 바꾸면 광복이후 우리문학이 서양문학의 아류로 진로를 잡게 된 저의를 알 수 있다. 우리 자신의 문화정신으로 돌아가 우리문학을 전개하자고 해방공간에서 주장할 면목이 없었던 한국문학 1세대들이 문학정신 및 문학관을 일본화 대신에 서구화로 바꾸고 일본문화 대신에 서구문화로 바꾸어야 한국문인이 된다는 듯 온갖 서양문예사조를 직수입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문학이 서양문예사조의 소비처가 되게 이끈 것 역시 그들이 일제강점기에 범했던 죄업을 덮고 빠져날 수 있는 빌미로 삼았던 것임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가)에 물들었던 일제치하에서 각계 조선문화인들은 갑자기 닥친 광복 앞에 살아날 구멍을 찾아야 했던 차에 (나)를 앞세워 살아날 길을 찾아 나섰었다고 믿어도 됩니다. 한양에서 일본말-일본글로 문학했던 조선문인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광복 후에 초야백성마저도 조선왕조시대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반상(班常) 두 쪽으로 나뉘어 양반이 상민을 머슴으로 삼았던 조선왕조를 초야백성이 그리워할 리가 없었습니다. 서양을 본받아 민주국가를 세워야한다는 쪽이 시대의 대세였습니다. 그렇다고 초야백성이 이 산천에서 누려왔던 탈바꿈해버리자는 (나) 쪽을 택하자고 했을 리는 없습니다. 어느 나라 백성이든 온고지신(溫故知新)에서 온고(溫故)를 편듦이 문화근성입니다. 그러나 광복후 우리문화를 이끌어갈 문화계가 (가)에서 (나)로 탈바꿈한 문화계인사들로 고스란히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광복 후 문단환경에서 주도권을 잡은 현대문학 1세대들에게 시조문학은 자신들의 과오를 떠올리는 눈에 가시였습니다. 한국문학의 주류가 되었어야 할 시조문학이 지류도 못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1955년 창간된 『현대문학』 창간호에 추천원고모집 난에 시詩(시조포함時調包含) 심사위원審査委員 - 서정주徐廷柱, 박두진朴斗鎭, 유치환柳致環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시조를 포함한다면서 시조 심사위원이 없으니 현대시인이 시조를 심사하여 추천한다는 오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문학 창간호 필진이 64명인데 시조인은 딱 한분 이호우(李鎬雨)께서 시조시인(詩調詩人)이란 호칭으로 「신년도의 문화적 구상(新年度의 文化的構想)」이란 설문에 끼여 있고, 그의 설문응답은 시조문학이 무시된 문단현실이 서글픔을 암시하는 의미심장한 내용을 남겼습니다: “지난날 일제(日帝)때에 우리의 선배들은 일본당국이 이백성을 위한 문화정책이 있기를 믿고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여기 <우리의 선배들>이란 주로 일제하 시조인을 말합니다. 이호우의 설문응답은 항일했던 시조인들과 더불어 몇몇 현대시인들을 비춰서 춘원의 망언을 뒤따랐던 현대문학 1세대들을 꼬집고 있습니다. 시조를 현대시 속에 넣겠다는 시류 속에서 당시 시조문학 지망생들에게도 최재서(崔載瑞)의 『문학개론(文學槪論)』은 필독서였습니다. 그 『문학개론』은 영문학개론이라 보아도 됩니다. 광복 이후 문학 지망생들은 최재서의 『문학개론』을 탐독하면서 문학을 연마했습니다. 이런 문단현실에서 우리 전통문학인 시조가 서양문학관을 추종하는 현대시와 다른 창작정신을 갖기는 불가능했다고 봅니다. 이런 참담한 현실과 시조의 본성을 따라 창작하도록 신진 시조인을 학습시킬 여건을 마련할 수 없는 지경에서 시조인을 등단시켜 왔습니다. 그 결과 올바로 시조창작법을 알고, 시조를 음영(吟詠)하다 창(唱)하게 되는 우리만의 가시를 가르쳐 창작하도록 이끌어줄 환경이 마련되지 못한 시조문학 현실이 못내 아쉬울 뿐입니다.
김복근 : 전통가곡 국가무형문화재 30호 조순자 명인은 노산 선생의 ‘가고파’를 가곡으로 편곡하여 연주하기도 하고, 테너 엄정행 성악가는 창작가곡 ‘가고파’를 오랫동안 열창했습니다. 저는 우리 시조사에서 노산 이은상 선생의 시조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시조인들은 노산 시조의 우수성을 외면하고, 이미지 중심의 시조에 경도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바로 잡을 수 있을까요.
윤재근 : 현대시조가 현대시를 따라간다고 지적하는 까닭이 바로 ‘이미지’를 중첩시키고 하나의 시상을 연장하여 행의 자수만 맞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산문 글짓기를 하다 보면 시조의 본성인 음영의 가락을 외면하게 됩니다. 이래서 현대시조는 거의 다 삼행만 있고 삼장이 없는 지경입니다. 시조의 삼장은 기경결해(起景結解)로 짜임을 이미 말했습니다. 기경의 경(景)이란 경물(景物)의 줄임으로 현대시의 시상(詩象:image)에 해당합니다. 현대시는 자유롭게 시상을 쌓아 예기(銳己) 즉 나를(己) 날카롭게(銳) 하므로 현대시에는 오로지 <나>만 있을 뿐 <우리>는 없다고 앞에서 말했습니다. 현대시는 <나>를 중심으로 삶을 바라보고 자신의 의식을 끝없이 긴장시켜 날카롭고 뾰족한 송곳 같이 <나> 홀로만 있게 합니다. 따라서 현대시에는 기경결해의 결해(結解)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조는 심중(心中)을 넷 이하의 경(景) 즉 시상(詩象)으로 매고-달아둔(起) 다음 그것에 맺힌 마음속을 맺어두었다가(結) 풀고(解) <우리>가 되게 합니다. 앞서 말했지만 경(景)이란 요새말로 시상(詩象)입니다. 시조의 본성에는 예기(銳己) 즉 나를(己) 날카롭게(銳)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기(銳己)는 너와 나를 우리가 되지 못하게 하는 까닭입니다. 현대시는 개성(individuality-personality)에 얽매이라 하지만 시조는 그 개성을 뿌리칩니다. 시조의 본성은 <나>를 뿌리치고 <우리>가 되게 합니다. 지금 시조인들은 기경결해(起景結解)로 누리는 <우리>를 가볍게 여기고 외면하는 탓으로 현대시가 하듯 <나>를 향해 시상(詩象:image)들을 쌓아 시상(詩想)을 이어갑니다. 자수만 맞춰 예기(銳己)의 삼행을 지으면 시조가 된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먼저 시조창작에 이러한 착각을 없애고 <우리>를 누리게 하는 시조본성을 따라 창작하면 현대시조가 외면하는 음영의 가락을 되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크고 <나>는 작다는 것이 누천년 우리 선대가 가꾸어온 한겨레붙이 정신입니다. 한겨레붙이 정신의 핵이 곧 <우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마음뿐 아니라 몸으로 무르녹게 함이 <흥(興)>입니다. 흥이란 인간 저마다의 오욕칠정(五欲七情)을 녹여 없애버리는 용광로와 같습니다. 흥에 감수성이니 감각 따위는 별것이 아닙니다. 흥은 너-나 둘을 훌훌 날려버리고 너-나가 하나 되는 우리를 누리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 문단에서 이러한 <흥>을 없인 여기는 시류가 팽배해 있습니다. 오늘날 나만 앞세우는 상쟁(相爭)의 삶속에서 시조는 너-나를 하나로 어울리게 하여 <우리>를 삼장(三章)의 우리말 시김새-가락(韻)의 흥으로 풀어주는 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금 시조인들은 바로 시조가 간직한 이 <흥의 힘>를 되살려내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음영창(吟詠唱)의 흥(興)을 풀어내고 <자연>을 누리게 함이 현대시조의 소명이라 믿고 따른다면 우리시조문학은 앞으로 더욱더 시대를 따라 창성하리라 확신합니다.
김복근 : 저는 평소에 시조가 현대시 흉내 내기를 하다가 현대시에 종속될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시조와 현대시가 다른 점이 있다면 형식과 율려 외에 또 어떤 점을 들 수 있을까요.
윤재근 : 시조와 현대시가 다름은 정형의 유무뿐만 아니라 시조가 기경결해(起景結解)의 장구(章句)로 <우리>를 일구고 <흥(興)>으로 온갖 삶의 칠정(七情: 喜怒哀樂愛惡懼)을 풀어버리게 하는 점에서 현대시와 판이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현대시에는 <나>만 있고 <우리>가 없습니다. 시조에서 <나>는 <우리>로 녹아듭니다. 시조의 <우리>가 초야백성으로 하여금 한(恨)을 극복하게 하였듯 오늘날 대중이 너-나의 상쟁을 부추기는 삶에서 혹독하게 겪는 한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을 현대시조가 주어야 합니다. 심중이 맺히면 맺힐수록(結) 나는 나 너는 너로 멀어져 <우리>가 사라지고 세상은 험악해집니다. 한 많은 세상을 극복하자면 나는 나를 버리고 너는 너를 버려 <우리>가 되자는 것이 결해의 <해(解)>입니다. 시조가 우리말을 함께하며 먼먼 예부터 이어져 온 것은 너와 나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우리>를 누리게 하는 <결해(結解)의 흥(興)> 즉 맺힘을(結) 풀어주는(解) 흥겨움(興) 때문입니다. 흥겨움(興)이란 오욕칠정(五欲七情)을 홀홀 털어버려 홀가분하고 후련한 경지이니 요즈음 말로 몰개성(沒個性)입니다. 현대시는 몰개성을 죽임처럼 여깁니다. 이러한 결해(結解)가 시조의 본성임을 시조인들이 외면하여 누란의 상황에 처한 셈입니다. <나>가 됨은 작고(小) <우리>가 됨이 크다(大) 함이 옛 초야백성을 하나 되게 하는 겨레붙이임을 현대시조는 외면하고 있습니다. 『노산시조집』과 『담원시조』는 시조의 본성이 시대 따라 넓혀져야 함을 보여줍니다. 현대시조가 시상을 마음대로 쌓는 삼행시로 현대시를 따르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현대시처럼 <나>만 있고 <우리>가 없음을 거듭 말하고 싶습니다. 삶의 한(恨)이 과거의 것이라 여기면 안 됩니다. 이제나 예나 삶이란 늘 한스러우니, 우리가 욕망을 버릴 수 없는 까닭입니다. 지금은 더욱더 한스러운 삶이 엉켜드는 세상입니다. 현대시조가 현대시를 따라가고 있는 잘못을 깨닫는데는 『노산시조집』이 시조인들에게 길잡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노산은 한국시조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고 있으니 『청구영언』이나 『해동가요』 못지않게 시조창작의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시조의 잘못은 시조의 본성을 외면한 탓이므로 먼저 노산이 저술한 『삼국사화집』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전국을 답사하며 초야백성의 들노래 산노래와 이야기를 들었음을 암시해주는 저서가 『삼국사화집』입니다. 그렇게 답사하면서 시조를 창작하여 『삼국사화집』을 낸 바로 다음해 『노산시조집』이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노산께서 처음부터 시조인으로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노산은 서양비평을 따라 평론도 했고 현대시도 지었습니다. 그러다 시조로 돌아온 까닭이 『노산시조집』서문 첫머리에 있습니다.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시조는 할아버지나 아버지 등에서 듣고 배우는 노래였습니다. 저도 그렇게 시조와 친해졌지요. 일제치하에서 평론이나 현대시는 서양에서 온 것이고 시조가 세세연년 대를 이어 내려온 우리의 노래(歌)임을 자각하고 시조를 지어야 했던 심중을 시조인 노산은 서문 첫머리에서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산께서 삼장시조-이장시조-일장시조 등을 지은 것을 두고 현대시조의 실험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글을 몰랐던 초야백성의 산노래-들노래 즉 서포(西浦)선생의 용어인 이아(咿啞)는 육자배기면 두 장(章)으로 짜이거나 아라리면 한 장(章)으로 짜인다는 사실을 노산이 목격했음을 『삼국사화집』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선인(先人)들이 남긴 시조가 삼장임을 따라 『노산시조집』은 삼장시조로 마련되었습니다. 노산시조는 조선시조처럼 기경결해(起景結解), 우리말가락을 삼장육구로 짜여 있으니 자연스럽게 음(吟)하다가 영(詠)하게 되고 이아(咿啞:folksongs)에 얹어 시김새 가락으로 부를(唱) 수 있어 맺힌 심중을 풀어줍니다. 물론 노산시조는 육자배기토리에 얹혀 불린 적은 없지만 가곡으로 널리 불려져 「가고파」외 여럿이 있습니다. 『노산시조집』은 현대 시조인들에게 『청구영언』이나 『해동가요』의 조선시조를 자주자주 만나보았느냐고 묻는 듯 합니다. 동시에 초야백성의 산노래-들노래(咿啞) 가락이 우리말 자질임을 깨닫게 하여 현대시조는 음영을 떠날 수 없음을 일깨웁니다. 『청구영언』이나 『해동가요』가 아니더라도 『노산시조집』이나『담원시조(薝園時調)』에 담긴 시조를 음영(吟詠)해본다면 시조가 현대시를 따라서는 안 되는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시조에는 <우리>가 있지만 현대시에는 <나>만 있고 <우리>가 없음을 시조인들은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김복근 : 시조가 절주와 율려를 살려 영언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많은 시조가 음영되고 음악으로 연주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통 가곡과 시조창의 만남도 필요하지만, ‘가고파’처럼 창작가곡과의 만남도 필요합니다.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을 융합한 제나탱고에서 ‘제나 아리랑’과 ‘제나 애국가’를 창작하여 연주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너무 신선하게 들려 ‘제나 가고파’도 창작하여 연주하여 주기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이달균의 ‘말뚝이 가라사대’가 오페라로 창작되어 무대에 오르기도 하고, 유튜브에서는 젊은이들이 ‘하여가’와 ‘단심가’를 랩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아직은 실험적이어서 장르화 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시조가 다양한 형식의 음악과 접목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선생님께서 웅산의 재즈를 들어보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시조가 전통가곡, 시조창, 창작가곡, 재즈, 오페라, 탱고, 대중가요까지 다양한 음악으로 연주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윤재근 : 시조인은 문인입니다. 문인은 학문(學問)이 내놓는 지식(知識)에 얽매이지 않는 창초(創草)의 창인(創人)입니다. 예를 들면 시조인은 국문학 쪽에서 『삼대목(三代目)』을 두고 내놓은 여러 설(說)을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시조인에게는 『삼대목』을 『세대목』으로 읽고 『세대목』의 <대목>을 <가락>으로 여겨 『세가락』으로 읽어도 되는 권능이 있습니다. 『중문대사전』에 <三代目>이란 말이나 <代目>이란 용어는 없습니다. 다만 <三代>란 용어가 있는데 이는 <하은주(夏殷周)> 삼조(三朝)를 뜻하는 고유명사입니다. 시조인에게 학식이란 창작하는 마음을 여위게 할 뿐, 스스로 확신할수록 창작하는 힘이 샘솟습니다. 시조정신이 확고한 시조인이라면 『삼대목』은 바로 시조집의 효시라 확신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 <수집향가위지삼대목(修集鄕歌謂之三代目)> 즉 향가를 수집하여(修集) 그것을(之) 삼대목이라(三代目) 하였다(謂)>는 기록이 있으니 『삼대목』을 시조집의 효시라고 믿어도 맹신이 될 리 없습니다. 6.25전 지리산 서북쪽 두메산골 산야에선 <노래>를 <대목> 또는 <가락>이라 하여 “육자배기 한 대목 뽑자”고 질러대는 소리를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삼대목』을 『세대목』또는 『세가락』이라 읽습니다. 그 시절 두메산골에서 육자배기 대목에 자주 올랐던 조선시조 중 대표적인 것이 ‘나비야 청산가자 범나비야 너도가자’거나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로 제고장 산 이름과 강 이름으로 바꿔 불렀습니다. 제 어린 시절 기억으로 노인들은 시조 여러 수를 틈만 나면 읊기도(吟) 하고 흥얼거리기도(咏) 하였지만 김월하 명인의 시조창을 따라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습니다. 산자락에서 목청대로 질러대는 육자배기에는 시조가 자주 얹혔지요. 음영은 작은 소리로 장단고저의 가락을 시김새 없이 숨결 따라 즐기지만 창(唱)이란 목청껏 시김새에 얹어 질러야 하기에 노인들은 즐길 수 없었습니다. 판소리처럼 우리 산노래-들노래는 육성으로 부를 뿐 김월하 명인의 시조창처럼 가성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먼먼 예부터 시조 창(唱)이란 초야백성이 몸통으로부터 뽑아내는 생소리(通聲)이지 꾸민 소리(假聲)는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명인의 시조창 같은 것은 이아(咿啞) 부르기(唱)가 아닙니다. 가성의 시조창은 조선조 식자(識者)들이 즐긴 것이지 초야백성은 몰랐습니다. 물론 시조의 노래하기(唱)를 이제는 이아(咿啞)로 국한 시킬 것은 없다고 봅니다. 일제 탄압으로 두메산골 이아가 억압되면서도 시조가 얹혔던 이아들이 농촌사회가 붕괴되면서 이제 두메산골에서조차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말 시김새 가락은 그 원형이 이아가락을 타고 왔음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삼장시조가 가성의 시조창, 가곡, 재즈, 오페라의 아리아, 대중가요 등으로 다양하게 확대되어 대중의 노래 속으로 다가갈수록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노래현실은 서양성조(西洋聲調)로 부르는 노래가 거의 전부이기 때문에 예부터 누려온 시김새에 얹혔던 말소리가락(韻)이 잊히고 있는 상황을 외면해선 안 됩니다. 국문학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6.25전 지리산 두메산골에서 땔나무꾼들이나 풀꾼들이 육자배기토리에 시조를 얹어 시김새-가락으로 불렀던 이아의 기억을 빌려 말하는 것입니다. 시조가 육자배기에 얹히면 초장-중장의 기경(起景) 쪽만 얹히고 결해(結解)인 종장은 뒷소리 떼창이 대신합니다. 이는 결해 즉 한풀이만큼은 시조인에게 의탁치 않고 스스로 풀어 흥을 누린다는 뜻을 암시하는 중요한 사항입니다. 여요(麗謠)인 「청산별곡」의 뒷소리인 <얄리얄리 얄량셩 얄라리 얄라>처럼 육자배기 뒷소리 떼창에는 <허나 헤 허나 헤> 말소리가락이 시김새로 어우러져 뜻은 없고 족지도지(足之蹈之) 즉 온몸을 흔들어 춤추는(足之蹈之) 노래-힘의 끝장으로 흥겨울 뿐입니다. 후렴(後斂)이란 용어보다 뒷소리 떼창이라 합니다. 뒷소리 떼창이 짓는 가락은 우리말가락의 진면목을 들려주기 때문에 시조인에게는 중요합니다. <강강술래> 홀소리 네 개의 모음을 근 20초 동안 시김새-가락으로 떼창하는 뒷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한번만 들어도 우리말가락 장단고저가 시김새로 어우러짐이 얼마나 감미롭고 흥겨운지 실감합니다. 저는 행이 아니라 장으로 시조를 짓고자하는 시조인을 만나면 째즈싱어(Jazz singer) 나윤선의 아리랑을 들어보라고 권합니다. 우리 산노래-들노래로서 아리랑과는 사뭇 다르게 들리는 까닭도 있지만 ‘Jazz'는 같은 노래로 두 번 불리지 않기에 들어보라고 권합니다. 우리 초야백성이 불렀던 이아(咿啞)는 때와 곳에 따라 자유자재로 시김새가락에 얹혀 열창되었으니 ‘Jazz'풍의 선배란 생각이 들기고 합니다. 육자배기 선창(先唱) 즉 앞소리는 그날그날 선창하는 이의 시김새-가락이 달라지기 때문에 시조창이나 가곡처럼 정간보(井間譜)나 오선지에 채록할 수 없습니다. 창자가 슬픈 날이면 육자배기는 슬프게 들리고 기쁜 날이면 육자배기가 기쁘게 됩니다. 이는 그날그날 선창의 시김새가 창자의 숨결을 따라 어울리는 까닭입니다. 우리말가락이 갖는 시김새 즉 홀소리를 <꺾거나-떨거나-늘리거나-눌려서> 장단고저를 홀리는 육성으로 부르는 산노래-들노래를 자주 들어볼수록 시조는 산문이 아니라 운문으로 지어야 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말 가락은(韻) 음영으로 이어지다가 흥에 겨우면 시김새 창(唱)으로 고양됨을 터득한다면 싱거운 산문으로 시조를 지을 수 없을 터입니다. 사실 김월하 명인이 하는 시조창은 단조로운 가락이 느리고 느린 한배(tempo)로 하염없이 흘러 정적으로 끌어가지만 육자배기 토리에 얹힌 시조는 정이 넘쳐나 동적으로 끌어감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대중은 동적인 열창을 환호합니다. 그러니 시조를 창작가곡, 재즈, 오페라, 대중가요 등 다양한 음악에 얹어 부른다 한들 안 될 것이 없지만 시조가 시김새가락을 타는 이아에 얹힌다면 청중을 사로잡는 떼창의 원조(元祖)로 재탄생할 것입니다. 시조인이 이런 확신을 갖자면 먼저 시조는 <우리-흥→자연>을 누리게 하는 삼장(三章)의 정형(定型)을 우리말가락의 원형(原形)을 싣는 시김새 가락을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 이아에 살아 있는 시김새가락은 서양음악에 사로잡힌 대중을 훨씬 더 강렬하고 흥겹게 끌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시김새-가락의 인자(因子)가 사라질 리 없습니다. 시김새가락은 우리말운(韻)의 ’DNA‘인 까닭입니다. 88올림픽 개막식에서 울려 퍼졌던 <강강술레>의 시김새가락을 기억할 시조인이 있을 터입니다. 세계가 그 가락에 감동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시가 추구하는 너-나가 둘이 되게 하는 예기(銳己)를 물리치고 현대시조는 너-나가 하나인 <우리>가 되게 하여 한 많은 삶이 빚어내는 희로애락애오구(喜怒哀樂愛惡懼)를 녹여버리는 <흥(興)>을 누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나를 하나가 되게 하고 <흥>은 현대시가 주장하는 온갖 감수성을 풀어버리는 자유(自遊)입니다. 이러한 <흥>은 자연을 누리게 합니다. 자연이란 ’nature'를 옮긴 말이 아닙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말하는 자연은 경물(景物)인 산천초목이지만 우리 선대는 함부로 자연이란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도법자연(道法自然) 즉 변함없는 도가(道) 본받아 다스리는(法) 자연(自然)을 모시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대가 두려하고 섬겼던 자연이란 말씀은 <만물을 하나이게 함(萬物一齊)>을 뜻합니다. 시조인은 현대시에는 없는 <자연>이란 시조가 <우리-흥>을 일구어 음영창(吟詠唱)의 노래가 됨으로 이루는 숭고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흥겨운 노래는 어느 시대나 환영받습니다. 왜 대중가요를 환호합니까? 한 순간일지라도 세상의 온갖 한을 잊게 하는 까닭입니다. 현대시는 대중을 얕보려하지만 시조는 예부터 초야백성이란 군중 속에서 동고동락했습니다. 시조에는 오늘날 대중을 흡입할 수 있는 열광의 근성이 있습니다. 시조를 음영하다 자신도 모르게 창(唱)하면 온갖 시름을 떨쳐버릴 수 있는 열광의 매장량이 시조에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성조 탓으로 음영하여 누리는 우리말소리 시김새가락의 흥겨움을 현대인은 잊어버린 꼴입니다. 이런 불행은 시조가 마주한 산문시대 탓이라고 믿어도 됩니다. 거듭 밝히지만 국문학자들의 이런저런 논란이나 이론에 해박해야 시조를 잘 창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이론들을 모르는 편이 좋습니다. <삼대목(三代目)-<삼구육명(三句六名)>-<삼장육구(三章六句)> 등 <삼(三)>이란 숫자가 시조정형의 운명이라 확신하는 편이 시조창작의 원력(願力)이 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말이 갖는 운율자질의 원형(原形)은 홀소리를 모와 시김새에 얹고 장단고저를 일구어냄이라 믿습니다. 시김새의 말소리가락은(韻) 서양식 발성(發聲)에는 없으니 시조가 재즈로 불리든 아리아나, 랩이나, 트롯으로 불여도 해가 될 리는 없습니다. 오히려 삼장시조를 대중속으로 가져간다는 자신감을 간직하면 됩니다. 시조인이 시조를 운문으로 삼장육구(三章六句)의 정형을 짜서 음영도 하고 시김새가락에 얹어 창(唱)의 노래감이 되게 함이 시조의 본래임을 확신한디면 현대시조는 영원히 우리의 가시(歌詩)로서 창성할 것입니다.
(끝으로 시조인만은 표준말 띄어쓰기 어문정책에 저항하여 산문의 글짓기가 아니라 운문의 말하기로 삼장시조를 창작하여 ‘입으로 읽고 귀로 들어 우리말가락-시김새’가 살아나는 운문으로 귀향하기를 갈망합니다. <나비야 청산가자>는 홀소리를 모아 운문의 말하기라 가락이 생겨나지만 <나비야 청산 가자>라고 <청상가자>의 홀소리모임을 갈라놓으면 산문의 글짓기라 뜻만 남고 가락이 사라지고 맒을 살펴주기 바랍니다. 오늘날 산문시조가 시조를 소멸의 길로 끌어가고 있다는 절박함을 느끼기 바랍니다. 그리고 시나위 합주를 자주 들어보기 권합니다. 시나위는 사뇌가(詞腦歌) 같은 우리 토속노래들 즉 이아에 연계되는 속악(俗樂)으로 특히 남도(南道) 쪽 이아(咿啞)는 이 시나위를 떠날 수 없습니다. 시나위는 즉흥적인 가락이나 기교로 합주하는 방식이 특징이라 들을 때마다 그 맛이 다릅니다. 가성의 시조창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죽 육성의 시조창이 초야백성의 이아(咿啞)에 얹혀 창성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특히 넋을 달래거나 심한(深恨)을 풀어 진정시키는 구음시나위에 시조가 자유롭게 얹혔고 그 얹힘이 시조창의 원형을 되짚어보게 함을 시조인들이 헤아려보기 바라고 자주자주 구음시나위를 들어보기 바랍니다.)
김복근 : 선생님의 금과옥조와 같은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나-너가 하나 되는 ‘우리’가 시조의 뿌리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시조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써야 하며 어떤 정신으로 써야 할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시조는 당연히 시조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시를 닮은 시조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알기 쉽게 풀이해주신 절주를 제대로 배우고 익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시조는 일제강점기 그 엄혹한 시기에도 우리의 민족정신을 제대로 승계하여 당당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창초創草의 창인創人이 되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시조인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바르게 체득했으면 좋겠습니다. 한류 문화의 중심이 되어 많은 이들이 시조를 읊조리고 사랑하기를 기대하면서 긴 대담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선생님, 늘 안강하시고 시조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유산 윤재근 선생님 약력
*경남 함양 출생(1936).
*마산고, 서울대 영문학과, 서울대 대학원 미학과, 경희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주요저서 시론, 악론, 가론, 계사전, 문화전쟁, 문예미학, 東洋의 美學, 萬海詩와 주제적 詩論, 萬海詩 ‘님의 침묵’ 연구, 莊子 철학 우화>(전3권), 論語, 愛人과 知人의 길>(전3권), 孟子 바른 삶에 이르는 길(전3권), 古典語錄選(전2권), 생활 속의 禪, 빛나되 눈부시지 않기를, 뜻이 크다면 한 칸의 방도 넓다, 먼 길을 가려는 사람은 신발을 고쳐 신는다, 어두울 때는 등불을 켜라, 나는 나의 미래를 본다, 살아가는 지혜는 가정에서 배운다 등 40여 권이 있으며, 최근 《주역》을 완역하여 출간 중에 있음
*월탄문학상, 한국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수상
*계간 『문화비평』, 월간 『현대문학』 편집인 겸 주간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정년, 2002년 월드컵 문화행사 전문위원회 위원장, 한양대학교 한양문예상 운영위원회 위원장 등 역임. (현재)한양대학교 명예교수
편집자 주
시조전문지 《화중련》에서는 2021년 시조의 음악의 행복한 만남을 위해 가곡무형문화재 조순자 명인과 테너 엄정행 성악가와 대담하면서 시조가 음악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에 대해서 담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기획 연재의 마무리를 위해 문학평론가 윤재근 교수님을 만나뵙고 시조의 뿌리와 시조의 길, 시조의 속성을 진단하는 대담을 하였습니다. 시조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문학 담론입니다. 필독을 권합니다.
- 《화중련》 2022. 하반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