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아마도 학교를 다니지 않았을 때인것 같다. 우리집은 만화가게를 했었다. 만화가게 아들이었던 나는 만화를 엄청 읽었셨던것 같다. 학교갈일도 없었고 눈을 뜨고 일어나면 아무도 없는 가게에서 실컷 만화를 보았다. 그것이 내가 책을 좋아하는 계기가 된것도 같다. 우리집은 가난했었고, 아버지는 무슨일을 하시는지 몰랐지만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나는 7번째 중 5번째였는데, 기억나는 것은 밑에 여동생이 많이 아파 새벽녘에 엄마가 동생을 들처업고 병원으로 뛰어가는 모습이다. 형제중 5명은 죽고 두번째형과 나만 살았다. 형과 나는 9살 차이가 났다. 형에게 흘러가는 얘기로 들은 바로는 모두 어려서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하는데 기억은 없고 내 밑에 동생이 갑자기 아파 병원에 갔지만 그 다음엔 보이지 않았던 기억밖엔 없다. 그 시절엔 모두 그랬던 것인지 우리 가족만 그런일이 벌어진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두번째 결혼을 하셔 우리를 낳았다. 전쟁통에 만나셔서 같이 살게 된 결과다. 아버지는 무척 잘생신것 같다. 키도 크시고 얼굴도 핸섬하셨다. 아버지는 미장기술자였다고 한다. 한 때는 일본에 건너가서 돈을 리쿠사쿠에 가득 지고 다니셨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집에 한동안 안들어 오실 때 엄마가 내 손을 잡고 아버지를 찾아 갔던 기억이다. 우리가 살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지 엄마와 나는 골목길을 돌고 돌고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가 있는 집에 도착해보니 디딤돌위에 여러 켤레 신발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고 창호문을 통해 어른들의 말이 두런두런 들리고 있었다. 엄마는 나에게 어서 아빠를 부르렴 하고 재촉했다. 나는 주뼛주뼛하며 조그맣게 "아빠, 아빠"하고 불렸다. 다행히 그 소리를 들었는지 누군가가 방문을 벌컷 열었다. 아버지는 방 중앙에 앉아 화투패를 보고 계셨다. 옆에는 알지 못하는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분홍 저고리를 입고 있어 화사하게 보였다. 방안은 담배연기로 가득차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본척도 안하고 엄마를 향해 "아니 이런데를 얘기 까지 데려 왔어" 라며 핀잔을 주었다. 엄마는 얼굴이 벌개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 계셨다. 옆에 있는 여자에게 돈을 쥐어 주며 가져다 주라고 했다. 여자는 사뿐이 걸어와 엄마에게 돈을 건넸다. 그 기억이 너무 진해 아버지 생각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일이다. 엄마는 어릴적 서울시내에 넓은 땅을 지니고 있던 부자집 딸이었다고 한다. 집안의 기둥이었던 친정 오라비는 신문사에 국장이었던 인테리였다고 한다. 엄마는 중학교까지 다니셨고 잠깐 간호사일을 하다. 월계동에 있는 광릉집으로 시집을 갔다. 그런데 전쟁이 터졌고 친정오라비와 남편이 북으로 끌려가게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아버지를 많났느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때는 전쟁통이었고 피난길에 우연히 만나 정을 통하신게 아닌가 생각했다. 엄마는 얼굴이 달덩어리 같아 미인이셨던것 같다. 그러나 어려서 곱게만 자라 전쟁이란 시련을 혼자 이겨내시기가 어려웠던것 같다. 아버지는 시골 고향에 이혼하지도 않은 첫번째 부인이 살아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태어나기전 부모님은 아버지의 고향에서 한동안 거주하셨었다. 시골생활도 해보지 않았던 엄마, 첫번째 부인이 있었던 아빠의 사정을 모르고 시댁이라고 찾아갔을 때 황당했을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전쟁이 막 끝난 때였고 내 부모뿐만 아니라 비슷한 사정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아버지는 방랑벽이 있었던것 같다. 여기저기 산지사방을 떠돌아 다니면서 일을 하셨다. 물론 공사판 일이라는 것이 한 곳에서 일하는 경우보단 떠돌며 일하는 경우가 많은것도 사실이다. 아버지는 미장기술을 가지고 있었기에 다른 공사판 사람들보단 대우도 좋고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러나 집에는 3개월, 6개월에 한번 정도 오셨고, 오실때는 겨우 한달정도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는 돈을 가져다 주셨다. 엄마는 남편도 없는 시골 시집에서 살기가 너무 힘들어 친정인 서울 정릉으로 이사 하셨고 어디서 돈이 생기셨는지 모르겠지만 만화방을 내셨던것이다. 어쩌면 그때가 내 어린시절 가장 행복했었던 때가 이닌가 생각해본다. 만화방 앞엔 개울물이 흘렀다. 지금은 복개해서 도로가 되었지만, 북한산에서 내려와 청계천까지 흐르던 정릉천이 집 앞에 있었다. 나는 여름이면 친구들과 외사촌들과 그 천에서 멱을 감고 놀았다. 먹고 자고 싸고 놀고, 만화책을 보면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그 때가 어린시절의 황금기였다. 만화방은 1년도 안되 문을 닫았던것 같다. 아버지는 집에 안들어 오는 날이 점점 길어지고 우리 식구는 언덕배기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다. 엄마는 소금이나 달걀을 팔러 다닌는 행상을 했다. 국민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외가집에 맡겨졌다. 외가집은 우리집에서 서너 집만 건너면 있었다. 학교도 가지전에 엄마는 없었고,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외가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놀았다.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외사촌 누나와 동생들 그들은 나의 가족이었다. 엄마가 행상을 나가면 나는 혼자 집에서 엄마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외가집이 옆에 있어 나는 쥐방울 드나들듯이 외가집을 드나들었다. 다른사람들은 철부지인 나를 귀여워했지만 외할머니는 핀잔을 주었다. "아이고, 이런 철부지야 밥은 니그 집에 가서 먹어야지" 그럴때면 눈물이 찔끔 나올 때도 있었다. 저녁 어스름 나는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렸다. 땅거미는 점점 짙어지고 껌껌해 지는데 엄마는 콧배기도 보이지 않았다. 저녁을 먹지 못해 배도 너무 고팠다. 그러다 엄마가 보이면 나는 엄마품에 안겨 울며 할머니를 욕했다. "할머니가 모라모라 해서 밥도 목먹고,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나는 징징거리며 엄마 치맛단을 붑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외가가 옆에 있어 즐거운 날이 더 많았다. 외사촌은 모두 여자였고, 캍은 또래였다. 나만 남자라 외숙모도 나를 좋아했던것 같다. 나는 여름날 수돗가에서 빨개 벗고 호수로 물을 뿌리며 물놀이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힘들고 외로웠지만, 외가가 있어 견딜 수 있었던 같다. 외갓집엔 동화책도 여러권 있었다. 소공녀, 소공자, 장발장, 암굴왕, 괴도 루팡 등 어린시절 내가 읽었던 동화책들이 어떤 내용인지 기억은 없지만 지금 내가 책을 즐겁게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하고, 삶의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길을 잡아준 것이 어릴적 읽었던 만화와 동화가 아닌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