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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철학(2)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 : 결핍의 불완전성
에로스의 의미가 성적 사랑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성적 사랑으로만 이해하는 태도를 바꿔야 한다고 해도, 여기에는 아직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이 남아 있다. 즉, "왜 인간은 사랑을 하는가?" "죽을 때까지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면 되지 않는가?" "그런데 왜 인간들은 그렇지 못하는가?"라는 문제들이며, 더 나아가 "사랑을 의미하는 에로스가 결핍감과, 결핍을 해소하려고 하는 욕구라면, 왜 모든 인간이 결합을 요구하는 결핍을 느끼고, 왜 철학자는 무지에 대해 자각하면서 지식에 대한 열정을 지녀야 하는가?" 등이다.
에로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왜 누구나 에로스에 휩싸이는지에 대해 설명했던 플라톤의 신화를 잘 살펴보면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앞의 궁금증을 좀더 분명하게 해소하기 위해 플라톤이 제시한 또 다른 신화를 살펴보자. 그러면 성적 사랑으로 특화되는 남녀 간의 운명적 사랑 또한 자연스럽게 해명될 수 있다.
플라톤은 인간의 본성과 내력에 관한 신화1)를 언급하면서, 신들이 처음에 인간을 만들 때는 남녀가 하나의 몸으로 태어나도록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본래의 인간은 '한 사람의 온전한 남성'과 '한 사람의 온전한 여성'이 '한 몸'으로 붙어서 태어났다. 이는 마치 오늘날 온전한 두 몸이 하나로 붙어서 태어나는 샴쌍둥이와 같은 모습이다. 신들의 세계나 신화적 설명방식과 달리, 유사 이래 인간은 하나의 몸만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어느 사회에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샴쌍둥이는 기형으로 간주되어왔다. 몸이 붙어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여러 가지로 불편을 겪는다. 그들은 분리되어야만 정상인이며, 따라서 샴쌍둥이가 살아가면서 겪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의학적 기술들이 계속해서 개발되어왔다.
그러나 플라톤의 신화에 따르면, 두 개의 몸이 하나로 붙어서 태어나는 것이 인간의 온전한 모습이며 본래의 모습이다. 그리고 붙어서 태어나는 인간은 그렇지 않은 인간보다도 유리한 점을 더 많이 지니는 것으로 간주된다. 신화 속의 인간은 한 몸으로 붙어서 태어나기 때문에, 분리되어 태어나는 인간보다도 두 몸 간의 교호작용이 더 활발하게 일어난다.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쌍둥이에게 상대방의 몸은 곧 자신의 몸의 일부라서, 각각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서로에게 즉각적으로 전달된다. 그래서 두 인간은 감정의 교감이 그 어느 존재보다도 더 긴밀하고 활발하게 일어나며, 두 개의 머리가 낳는 '지성적 교감' 또한 '감정적 교감'만큼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지성적 교감 때문에 두뇌 회전이 빠르고 지력도 상당히 뛰어나다보니 인간들은 그 결과, 자신들이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은 세상에 대한 야심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인간은 자신을 탄생시킨 신들을 우습게 여기게 되고, 어느 날 신들에게 저항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일을 지켜보던 신들은 인간을 괘씸하게 여긴다. 그래서 인간의 감정적 교감 및 지성적 교감뿐만 아니라 지력과 야심 그리고 신에 대한 저항을 무력화시킬 방법을 강구한다. 그러나 그 일이 쉽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신들은 인간의 지력을 저하시키려면 '지력의 교호작용'과 '감정의 교감'을 약화시키는 방법이 가장 좋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고, 이를 위해 급기야 인간의 몸을 둘로 나누는 방법을 단행한다.
둘로 나뉜 인간은, 자신의 반쪽 몸이 어디론가 떨어져나갔기 때문에, 당연히 지력과 체력이 저하되며, 이와 동시에 항상 허전함을 느낀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상실했기 때문에, 인간은 상실된 부분에 대한 결핍을 느끼며, 독신일 때는 '무언가가 부족하고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무언가가 부족하고 불완전하다면 부족함을 메우고 완전하게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인간은 '온전하고 완전한 것'이 되려는 욕망에 휩싸인다. 그것은 곧 완전하지 못하다는 데서 오는 '결핍감'과 '결핍을 해소하려는 욕구'로 나타난다. 에로스에 휩싸이는 인간은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며, 그러다가 반쪽을 발견하면 어떻게든 한 몸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이것이 육체적–성적 결합 욕구이며, 성적 사랑으로 일컬어지는 '감각적 에로스'이다.
'원래는 두 개의 몸이 한 몸으로 붙어 있었다'는 신화를 만약 사실인 것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인간이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 - 이성이든 동성이든 관계없이 자기 짝을 그리워하고, 그 짝을 찾아 헤매는 것-은 '자웅동체'처럼 원래 한 몸이었다는 데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의 짝을 찾아 헤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짝을 찾은 후에는 그 짝과 육체적으로 결합하고자 하는 성적 욕구의 에로스를 발휘하는 것 또한 운명이다.
성적 사랑의 에로스가 인간의 운명일 수밖에 없다면, 철학자가 지식에 대해 갖는 에로스 또한 운명적인가? 그렇게 주장할 만한 정당성이 있는가? 인간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무지를 거부하고 결핍을 느끼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신화적 설명방식에 따르면, 인간이 '무지와 결핍을 자각하는 것' 또한 '운명적'이다. 인간 중에서 알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지 않은 이가 있는가를 생각해보라.
입신양명을 위해서는 고등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한 한국사회에서, 학생들은 누구나 대학을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 입시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반항을 하거나, 때로는 가출을 하거나, 아예 학교를 그만두거나, 자살을 하는 극단적인 학생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모두가 알고자 하는 욕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입시와 공부에 대해 거부 반응을 나타내는 학생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와 관련해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리고 하지 말라고 말려도– 많은 지식을 얻고자 노력하는 지적 호기심을 보여준다. 자신이 선호하는 것과 관련된 분야에 대해서라도 무지하다는 자각을 하고 있다면, 결국 어떤 차원에서이든지 간에 '무지와 결핍에 대한 자각'을 하고 있는 것이고, 이러한 자각은 인간에게 지식에 대한 에로스는 '운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 근거를 플라톤의 설명방식을 통해서 재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다. 영혼의 본질적 측면과 육체의 본질적 측면은 다르다. 두 측면 간의 '다름' 때문에, 인간은 에로스를 지닐 수밖에 없게 된다. 즉, 영혼은 지식과 지식체계인 이데아 세계를 볼 수 있는-파악할 수 있는-정신적 능력을 지니지만, 육체는 지식체계인 이데아 세계를 볼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이 없다는 '다름'을 지닌다. 이 때문에 정신과 육체는 크나큰 차이점을 지닌다.
인간이 탄생하려면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있어야 하는데, 영혼은 육체와 결합하기 이전의 순수한 상태에서 '지식의 원형'인 '이데아 세계'에 머물고 그 이데아를 본다. 그러나 육체와 결합하기 위해 이데아 세계를 떠나면서 영혼은 이데아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는 망각의 강물(레떼의 강)을 마시게 된다. 이데아를 보고 이데아를 망각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한국인이 생각하는 저승길을 떠올려보자. 「전설의 고향」이라는 TV드라마에서 자주 사용하는 수법은, 죽은 영혼이 저승사자를 따라갈 때 맨 먼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그리고 나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험한 길을 가다가 너무도 목이 말라 우물에서 물 한 바가지를 마시면서 이승의 기억을 잊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플라톤의 영혼은 태어날 때 저승의 기억을 잊는다. 플라톤에게 육체와 결합하는 영혼은, 순수한 영혼 상태에서는 이데아를 볼 수 있지만, 육체의 옷을 입기 전에 망각의 강물을 마시기 때문에 이데아에 대한 기억을 상실한 '일종의 기억 상실자'로서 삶을 출발한다.
순수한 영혼의 상태에서 이미 보았지만 육체의 옷을 입으면서 망각하는 '지식체계'인 '이데아 세계'에 대한 경험은 인간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데아 세계를 그리워하고, 이와 더불어 무지를 자각하면서 지식에 대한 결핍을 느끼고, 지식체계로 향하는 사랑과 열정을 산출하는 '에로스'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학교 공부를 싫어하는 학생이든 아니면 좋아하는 학생이든 간에 상관없이, 누구나 이데아를 이미 보았고 그리고 망각했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지의 원형으로 지칭되는 이데아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선 이데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이전에, 지식을 망각한 상태에서 지식을 어떻게 획득하는가를 상기해보자. 어떻게 지식을 배우느냐고 묻는다면, 흔히들 "부모님과 선생님에게서 배우잖아!"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님이나 선생님은 지식을 누구에게서 배웠는가? 또, 부모님의 부모님은, 부모님의 부모님의 부모님은······? 그리고 선생님의 선생님은, 선생님의 선생님의 선생님은······?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가르쳐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인간은 지식을 어떻게 획득했을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플라톤은 인간이 지식을 획득하는 계기는 가정교육이나 학교교육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육체가 지닌 '감각 능력'이라고 한다. 우리 눈앞에는 감각적으로 펼쳐져 있는 개별적 대상, 특수한 대상이 있다. 가령 나무, 돌, 새, 인간과 같은 수많은 자연물과, 이 자연물을 인위적으로 가공하여 만든 책상, 분필, 건물, 예술품과 같은 수많은 인공물 등. 이것들 모두는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들이고 '존재하는 것들'이다. 인간은 이렇게 존재하는 것들을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는 감각적 장치를 통해 경험한다. 존재자 전체에 대한 일차적 파악은 무엇보다도 존재자를 눈으로 보는 '시각 경험'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른이든 아이든 관계없이, '존재하는 사물들'은 각각 독자성이 있으며,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특수성과 개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대상들 모두에게– 마치 인간 하나하나에게 철수, 순이와 같은 고유한 이름을 지어주듯이– 고유한 이름을 지어줄 수는 없다. 가령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개들이 있는데, 그 개들 모두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그 각각의 이름을 모두 알아서 부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모든 개에게 고유한 이름을 지어줄 수 없을 만큼, 각각의 개들은 독자적이고 특수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그것들을 동일하게 개라고 부르는가? 개라고 일컬어지는 A, B, C, D 등은 각각 서로로부터 구분되는 독자성과 개별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 B, C, D 등을 잘 살펴보면 그들끼리의 공통성, 유사성이 발견된다. 이것은 철수, 순이라 일컬어지는 인간에게서도 발견되지 않고, 장미, 개나리라 일컬어지는 꽃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 '개들만의 공통의 성질'이다. 그 성질은 A, B, C, D 등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본질적이고 고유한 특징'이다. 그것들을 동일한 영역으로 묶을 수 있는 '유사한 모양'과 '고유한 특징'을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한, 우리는 그것들 모두를 보통 명사 '개'라고 부르게 된다.
이러한 본질적이고 고유한 특징, 본질적 속성에 해당하는 것은 각각의 특수한 개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보편성'이다. 인간이 '지식'을 갖게 되고 지식을 알아나가는 것은 바로 이 '보편성'을 파악하고, 보편성을 지니는 '지식들 간의 유기적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지식의 원형에 해당하는 이데아는 바로 사유를 통해서, 즉 인간의 정신 능력인 이성을 통해서 파악되는 '보편성'을 의미한다. 보편성은 각각의 사물을 그것이라 인식하고, 그것을 다른 종류로부터 구분할 수 있도록 하는 '본질'이다. 이러한 본질을 지칭하는 것이 바로 '철학적 개념들'이다.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개념에 상응하는 이 보편성, 이 본질이 이데아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데아'를 파악하는 것은 바로 '지식'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데아는 인간들의 모든 지식의 원형이다. 이데아는 망각의 강물을 마시면서 잊혀졌던 '보편성'이며 잊혀졌던 '지식'이다. 보편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망각을 극복하는 사유활동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데아에 대한 파악은 감각활동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렇듯 보편성으로서 이데아를 파악하고 그리고 상기해내려면, 상기의 자극제가 되는 '감각 경험'이 필요하다.
인간의 이성은 감각에 의해 경험한 내용들이 지닌 '차이'와 '특수성'을 지우고, 그 속에서 '공통성'을 걸러내고 도출해내는 과정에서 '보편성'을 형성한다. 공통성에 해당되는 개념을 도출해내는 것은 감각 능력이 아니라 '사유 능력'이다. 즉, 육체가 아닌 '영혼의 이성 능력'이다. 사유에 의해 파악되는 지식의 원형이 보편성으로서 이데아이며, 보편성들 간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이데아들의 체계이다. 이러한 이데아가 존재하는 세계를 플라톤은 '이데아계'라 부른다. 이데아계는 감각이 아니라 사유에 의해 파악되는 '보편적 개념'과 '개념들의 지식체계'이다.
순수한 영혼이 보편 개념과 지식체계인 이데아계를 이미 보았다면, 감각 경험을 하기 이전에 그리고 공통성을 도출해내기 이전에 이데아는 이미 존재한다. 즉, 보편 개념과 지식들의 체계는 경험 이전에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감각적 이승으로 환생하기 전에 누구나 망각의 강물을 마시기 때문에, 육체의 옷을 입은 영혼은, 순수한 영혼이 보았던 이데아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고서 태어난다. 플라톤이 보기에 신생아가 순진무구하며 아무런 지식도 갖지 않은 완전한 백지 상태인 것은 바로 망각의 강물을 마셔서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탓이다.
그런데 이데아를 이미 보았고 그리고 망각했다면, 육체의 몸을 입은 영혼이라고 해도 부단히 노력하면-아니면 어느 날 우연한 충격에 의해-망각된 내용을 상기할 수 있다.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을 떠올리면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은 자신이 예전에 누구였고 어디서 살았고 어떤 공부를 했는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자극에 의해 옛 기억을 되돌리면 그런 부분들을 모두 상기해낼 수 있다. 단, 만약 그가 되돌릴 수 있는 기억 내용을 애초부터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아무리 노력해도-벼락이라도 맞아서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면서 강력한 충격을 가해도-애초에 없던 기억을 떠올릴 수는 없다. 이와 달리 인간 영혼은 누구나 이미 이데아계를 경험했기 때문에 영혼의 사유능력을 잘 발휘하면, 엄청난 지식 내용을 회복할 수 있다.
이때 망각한 내용을 상기해내는 계기는 무엇보다도 '감각'이다. 인간이 대상들을 시각적으로 감각할 때, 그것은 특수하고 개별적인 대상에 대한 감각 경험에 불과하지만, 특수한 감각과 감각 경험은 그것의 근거가 되는 보편적 지식인 이데아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감각계에 존재하는 대상들은 이데아는 아니지만 이데아를 모방하여 만들어졌고, 그래서 이데아를 분유(分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감각적 대상들은 보편성인 이데아의 모습과 유사하다. 앞에서 서로 다른 대상을 모두 '개'라고 일컬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개들이 각기 다르더라도 그것들을 동일하게 개라고 일컬을 수 있는 보편성(이데아)이 각각의 개에게 공통적 모양과 공통적 성질로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개별적 개는 개의 본성 내지 본질에 해당하는 보편성을 모방하고 분유하고 있다.
순수한 영혼은 육체의 옷을 입기 이전에 이데아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기 때문에, '육체'는 영혼과 영혼의 사유 능력, 즉 이성 능력의 순수성을 침해하는 '불순한 것'이다. 그것은 곧 감각계의 대상들이 아무리 이데아를 모방하고 있어도 불순하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혼은 불순함에 물들어 있는 불완전한 자신을 한탄하면서 순수성을 회복하려고 한다.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욕구는 지식, 곧 지식의 원형인 이데아를 파악하려는 열정이며, 그 열정이 바로 '에로스'이다.
막 태어난 인간은 순진무구하며 아무런 지식도 갖고 있지 않지만, 사실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거대한 지식체계를 보았기 때문에– 비록 그 지식체계를 망각했다고 해도– 망각된 어떤 부분을 무의식중에라도 자꾸 의심하게 되는 것이고 자기에게 무언가가 결핍되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태어나기 전에 알았던 보편적 지식체계에 대한 보고가 기억 저편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언제나 지식 그리고 진리와 관련하여 '결핍감'을 느끼는 것이고, 인간 누구나 본원적으로 그 '결핍감을 해소하려고 하는 욕구'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핍에 대한 감정도 운명적이고, 결핍을 해소하려고 하는 에로스, 즉 지에 대한 사랑도 운명적이다. 성적 욕구를 느끼는 인간이 2세를 생산하고 싶어하듯이, 지적 욕구를 느끼는 인간은 지식을 생산하고 싶어하는 에로스와 운명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각주
1 Platon, Symposion, 189a-e 참조.
사랑의 철학(3) 누가 나의 반쪽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