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분쉬 박사의 북한산 산행기(1902년 6월 8일)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인 1901년, 고종황제의 시의(주치의)로 부임한 독일인 리하르트 분쉬(Richard Wunsch 1869년~1911년) 박사.
의대를 갓 졸업한 장래가 촉망되는 의사가 먼나라 조선의 황제의 시의가 되어 조선에 들어왔으나 완고한 대신들과 내시에 둘러싸여 황제에게 접근하기 어려운 명분뿐인 시의역이었다.
분쉬 박사는 낮선 문화에 적응하며 일반인과 서울에 체류중인 외국인들을 치료하며 자리를 잡아갔고 각국 외교관들과 교류하나 독일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안내하며 생활하였다.
1901년부터 1905년까지 4년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외부의 정치적 압력만 없다면 아름답고 편안한 이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뜻을 부모에게 쓴 편지에 비칠 정도로 한국에 정이 들었으나 청일전쟁 승리로 조선을 지배하게된 일본의 강요로 정든 조선을 떠나야만 했다.
분쉬 박사는 조선체류중 부모, 스승, 애인에게 쓴 편지와 일기로 조선에서의 생활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1983년 그의 딸이 아버지의 체험담을 정리하여 출판하였다.
그중 일부가 '조선왕국이야기, 김영자 편저(서문당)'에 번역되어 있는데, 분쉬 박사가 1902년 6월 8일 일기에 북한산을 방문하여 백운대를 등반한 기록이 있다.
Ein Viertelliter Medizin für den Kaiser von Korea : Dr. med. Richard Wunsch : 1901 bis 1905 Hofarzt des letzten Kaisers in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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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에 일어나서 5시에 가터만씨와 나는 ‘오성금’이라는 하인을 대동하고 궁을 지나 북서문 밖으로 나섰다. 상쾌한 아침, 말 할 수 없이 아름다운 식물들을 보면서 계속 들어간 골짜기에는 천을 풀에 먹이고 표백하는 공장(아마 가공처리장)과 종이를 만드는 곳 이었다. 언젠가 또 한 번 사진을 찍으러 와야겠다. 이 골짜기를 ‘용창’(저자:평총=평창)이라고 했다.
계곡에는 물이 흐르고 물속에는 넓고 큼직한 화강석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바위에는 크게 한자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물은 아주 맑았다. 거기서 몇몇의 아낙네들이 빠래를 하기도 하고 남정네들은 아직도 김이 무럭무럭 나고 있는 누리끼리한 남자 저고리감을 표백하기 위해서 집 주위에 마련된 빨래대에 널고 있다.
등산길은 동네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두 번 오른쪽으로 돌아서 좁고 불그스레한 모래 언덕으로 뻗어 있었다. 우리를 앞질러 나무꾼 3명이 올라간 이 등산길은 승가사로 가는 길로 올라가기에는 별로 힘이 들지 않는다. 올라가는 주변에는 나무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갈라진 쑥돌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앞에는 북한산 북서쪽 부분의 거대한 봉우리들이 펼쳐져 있었다. 승가사에 도착할 즈음부터는 여기저기 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낙엽송이 많았다. 자그마한 뜰을 지나 몇 개 계단을 올라가니 소규모 절들이 나타났다. 절 맨 위에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 건물이 있었고 아래에는 약간 씁쓸한 맛이 나는 시원한 약수가 흘렀다.
그 곳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가지고 온 통조림을 따느라고 재주를 부리고 있는 참에 전에 내게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 한 사람이 옆을 지나다가 나를 보고는 무척 뜻밖이라는 듯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과 함께 입상 부처 뒤에 흐르는 약수터에 가서 물을 마셨는데 그 물은 아주 시원했다.
우리가 서울을 출발한 시각은 새벽 5시였고 승가사에 도착한 때는 7시20분이었다. 여기서 약 5분쯤 올라가면 화강암으로 된 절벽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돌로 만든 보관(저자:석조천개)을 쓴 불상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보관 네 귀퉁이는 작은 청동 종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여기서는 서울이 아주 잘 보이고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은 프랑스 공관이 더욱 돋보였다.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우리 주위를 에워싼 승려들은 예쁘장하고 마음씨가 고운 얼굴로 보였고 짧게 깍은 머리에 조선 사람들이 주로 입는 평복차림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8시 30분에 절을 출발할 때 한 젊은 승려가 우리 앞길을 안내하겠다고 따라나섰다.
파란 난꽃들, 예쁘장한 보라색 아카시아꽃, 조그마한 잎사귀가 달린 떡갈나무와 산머루(야생포도)로 어우러진 너무나도 아름다운 식물세계! 올라가는 주변에는 나무라고는 별로 보이지 않았으나 여기저기에는 지게를 멘 나무꾼들이 보이고 이 나무꾼들이 지르는 묘한 소리가 건너편 바위에 부딪쳐 아름다운 메아리로 들리는 것이 마치 우리에게는 스위스 요들처럼 들렸다.
갈수록 가파른 바위를 옆에 끼고 올라가야 되는 산길이었지만, 북쪽 계곡에서 부드럽고 싱그럽게 불어오는 미풍 덕분에 비교적 상쾌한 기분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남쪽 저 멀리 보이는 시내에는 엷은 안개(저자:연기)가 덮여 있었고 더 멀리 남쪽으로는 한강변의 널따란 누런색 모래사장이 굽이굽이 돌아가면서 펼쳐 있었다. 강줄기는 해안에 널려 있는 수많은 섬들을 향하고 있었고, 저 멀리 수평선 너머 푸른 나무로 덮힌 섬들사이로 햇빛이 반사되고 있어 그 곳이 바다임을 짐작하게 했다. 잦은 뻐꾸기 울음소리, 비둘기의 구구소리가 뒤석인 산천의 경치가 거무칙칙한 암벽과 어울려서 펼쳐지는 모습이 마치 푸른 하늘색을 배경으로 특색을 나타내는 우리나라의 화가 뵈클린의 그림을 연상하게 했다.
북한산 계곡은 천상 거대한 자연요새로서 이 산등성이에는 성곽이 둘러쳐져 있었다. 동북쪽 최고봉은 험하게 갈라진 거무스름한 잿빛 화강암이었고, 북서쪽 좁은 계곡에서는 물이 흘렀으며, 진달래와 자스민, 목련꽃들의 싱그러운 향기가 우리를 매혹했다.
가까이 있는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담장만 남고 문은 사라지고 없는 성곽에 도달했다. 우리는 이 성문을 지나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화강암벽으로 둘러싸인 계곡으로 나왔다. 검푸른 숲속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흰 옷을 입은 나무꾼들이 큰 소리로 아름다운 산울림을 만들었다.
바로 오른쪽 문수봉 아래로 찾아간 ‘문수사’에서 스님들은 우리를 위해서 길이가 10미터, 입구의 낣이가 4미터쯤 되어 보이는 석굴안에 돗자리를 깔아주고 맑고 시원한 약수를 권하면서 융숭하게 대접해 주었다. 바깥은 찌는 듯 더웠으나 이 곳은 아주 서늘해서 좋았다. 좀 쉬고 난 뒤 우리들은 하인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부황사’를 찾아 ‘인개스님’의 안내로 좁고 험한 산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바로 그때가 정오 독경시간이었다. 계단에는 쌀과 물잔이 놓여 있고 짙은 향내음이 감돌고 있었으며, 연달아 울이는 목탁소리는 마치 천주교 미사 때 울리는 소방울소리 같았다. 벽에는 아름다운 탱화가 걸려 있었다.
머리를 짧게 깍은 승려는 약 30세쯤 되어 보였고 회색 승복을 입고 있었으며 그 위에는 또다시 뒷면에 노란색으로 작은 무늬 두 점을 수놓은 널따란 주홍색 띠를 드르고 있었다. 절 마당에는 바람개비가 있고, 그옆 쑥돌 받침대위에는 아주 유치하게 보이는 해시계가 놓여 있었다.
거기서 다시 ‘중흥사’로 갔는데 이 절은 예쁜 개울이 흐르고 있는 작은 마을 안에 있었다. 개울가에서 여인들이 빨래를 하다가 우리가 오는 것을 보고 질겁을 하면서 숨었다.
저쪽 더 아래 개울위에 정자가 보이고 이 옆에는 판판하고 희끄무레한 화강암 벽에 덮개가 있는 비석 26개가 서 있는 게 흡사 서양 교회의 마당에 세워진 묘비같아 보였지만 실은 북한산성의 성주 이름이 새겨진 것이었다.
시험삼아 조선 신(짚신?)으로 바꿔 신고 1시 30분경 출발하였다. 지겹게도 찌는 더위, 그늘은 전혀 없는데 앞에서는 회색 화강암 덩어리가 우리를 위협하는 듯했다. 부황사의 보배스님이 불경을 마친 뒤 우리를 백운대로 가는 길까지 안내해주었다.
무더위에다가 길은 가파르고 우리는 모두 기진맥진해서 올라가면서 두번이나 쉬어야 했는데 이 스님은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을뿐 아니라 오히려 내 옆에 서서 종이부채로 시원하게 부쳐주기까지 했다.
약 45분 동안 계속 올라갔더니 드디어 좀 그늘진 곳에 쉴 곳이 있었다. 여기서부터 북서쪽 벽을 따라 아주 험한 낭떠러지길을 올라가서 최고봉사이에 있는 성문에 이르렀다. 잠시 휴식 후 마지막 여정인 등산길로 올랐다.
보배스님과 하인 오씨가 나를 위해서 산 아래 20미터 지점에 가로질러 나무다리를 놓아주었는데 어지러워서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었다. 부황사에서 백운대까지는 1시간 30분이 걸렸다. 오후 3시 15분에 백운대에서 하산, 4시 20분에 부황사에 되돌아왔다.
5시에 개천을 따라 서울까지 걸었고, 저녁 8시경에 집에 도착했다. 어찌나 힘들었던지 목이 마르고 가슴이 뜨끔거린다. 가터만씨는 그래도 잘 견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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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 말 당시 의료수준이 열악했던 이 땅에 서양의학을 전파한 최초의 독일인 의사 리하르트 분쉬 (Richard Wunsch) 박사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 서 대한의학회는 "분쉬의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한국의 독일계 제약회사 한국베링거인겔하임은 한국과 독일 양국의 친선 증진과 학술연구 발전 도모를 위해 1990년 4월 대한의학회와 공동으로 ‘분쉬의학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첫댓글 세검정 너럭 바위에 글씨, 백운대에 나무다리.
참조하겠슴다.ㅋㅋ
오늘 김영자 선생님을 만나고 왔는데요...ㅎㅎㅎ
독일에 50년 사셨는데, 10월 한달 국내에 계셔서...11.3일 다시 독일로...(거기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