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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친구, 서광 서기호 회장
김 석 철
전 한국문인협회 이사
내가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낸 영원한 고향이 부안이다. 부안, 부안!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고향 부안은, 산과 들과 바다가 알맞게 어우러져 경치가 좋고 또 어염시초가 고루 갖추어져 예부터 생거부안이라고 일컬어지며 정말 인심 좋고 살기 좋은 고장이다, 특히 국립공원 변산반도가 있고, 요즘에는 세계 최장(33.9Km)의 방조제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새만금방조제까지 우리 부안의 자랑이 되고 있다.
이렇듯 좋은 자연환경에서 배우고 자란 우리 친구 중에 서광(瑞光) 서기호 회장이 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는데 그는 나와 부안중학교, 전주고등학교 6년 동안을 함께 다녔으니 보통 관계는 아닌 것이다. 서 회장은 이렇게 나와 동창이며 친구이지만 나는 늘상 ‘서 회장’으로 불러왔다. 서 회장은 우리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회장도 역임했지만 대학에서도 학생회장, 자치회장 등을 맡아 왔고, 대외적으로도 부사회 회장, 노인대학연합회 회장, 한국종자협회 회장, 또 무슨 회장 등 여러 단체와 조직의 회장직을 맡아오고 있어 그냥 ‘서 회장’으로 부르는 게 나에게는 익숙하고 편해진 것이다.
서 회장에 대하여 말하자면 크게 성장기, 절정기, 노년기 세 단계로 나누어 보는 게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성장기는 학창시절이 되겠고, 절정기는 그의 종자인생 40여 년이 해당되며, 노년기는 공직에서 퇴직한 이후가 될 것이다. 다만 나의 이 이야기가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어서 다소 정확성이 떨어질 수 있음에 미리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서 회장은 초등학교 시절에도 두뇌가 명석하고 발표력이 좋아 웅변도 잘했다고 하며, 운동회 때 응원부장도 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어 ‘똑똑한 학생’이란 별칭으로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칭찬을 많이 받아 왔다고 한다.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시절에도 곁에서 지켜볼 때 교우관계도 비교적 많았고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공부도 잘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중학교 때 사실 나는 부안읍에 사는 친구들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니었다. 그들은 학교가 코앞이었지만 나는 농촌에서 태어나 약 십 리 길을 걸어서 등하교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살던 마을은 당시 버스노선도 없었던 시골이라서 특히 눈이 내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 시절에 서 회장은 부안읍에 살았으며 나보다는 키도 비교적 큰 편이어서 특별히 어울려 놀았던 기억은 생각이 잘 안 나는데, 기억력이 워낙 좋은 서 회장은 재미스런 세세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중학교 때는 같은 반이었기 때문에 서로 가깝게 지낸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는 함께 중학교를 졸업하고 자랑스럽게 전주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서 회장은 고등학교 재학시절에도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좋아했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특별반에서 공부하는 혜택을 누렸던 모범생이었다.
대개 고등학교 3학년 때가 되면 누구든 진로를 결정하게 되는데, 서 회장은 나와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는 당시 유명한 사상가이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였던 류달영 박사의 저서를 탐독하고서, 크게 감명을 받아 농촌사회 개혁과 농업개발을 하고자 류 교수님이 재직하고 계시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지원하여 입학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서 회장은 고3 시절에도 이미 우리의 현실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뜻한 바를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집념을 발휘했던 것 같았다.
사실 류달영 박사는 당시 많은 젊은이들에게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는 사상가이며 대학교수로서, 우리 폐허의 땅에 부흥의 길을 제시한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셨다. 20여 년 동안 ‘덴마크 부흥사’를 연구한 후 6·25 전쟁의 피난지에서『새 역사를 위하여』라는 책을 펴냈으며, 함께 펴낸『유토피아의 원시림』이라는 저서로도 널리 알려졌던 분이라서 나로서도 익히 알고 마음속으로 존경하던 분이셨다. 그 당시 일제의 ‘가난’과 ‘무식’이란 식민지 정책 속에서 교육 기회를 빼앗기고 굶주림에 허덕이던 90%가 농민인 우리나라에서, 한국 전쟁의 피해까지 겹쳐 절망 속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국가 재건의 불씨를 당겨 주신 분이 바로 류달영 박사이셨다. 이 분이야 말로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새마을 운동의 선구자요 자랑스런 한국인이셨다.
서 회장은 그런 훌륭한 분을 존경하고 흠모하여 목표대로 서울대 농과대학에 입학을 했고, 입학한 후엔 전공과목도 류 교수님이 직접 지도하는 농학과를 선택하여 연구하고 공부하게 됐으며, 뜻을 같이하는 20여 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동아리 모임인 ‘농사단’ 멤버들과 함께 매주 한 번씩 류 교수님 댁에 모여 농촌문제를 토의하고 연구하며 농촌의 개혁자가 되자는 다짐을 했다고도 하니, 당시의 현실 상황에서 그런 분을 롤모델로 삼아 진로를 결정한 것은 일생의 획기적인 일로써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예사롭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천 의지가 남달리 두드러졌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서 회장은 단체생활에서도 특출함을 발휘하였으니 대학생활 중에도 학생회장에 선출되어 왕성한 활동을 하였는가 하면, 기숙사에 생활하면서 자치위원장의 직책을 맡아 식사대를 면제받는 혜택을 누리기도 하여 지방의 부모님께도 큰 감동을 드렸다는 일화도 있다.
1950년대는 우리가 대부분 중고등학교 학생시절이었고, 1960년대는 대학교육을 받거나 군복무를 하던 시절이었다. 회고하건대 당시 일제 수탈과 6·25 전쟁의 상흔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농촌 현실은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낙후되어 정말 어려웠던 시기였다. 우리 세대는 그 어려운 시절을 체험하며 살아왔기에 당시에 서 회장의 농촌에 대한 청운의 꿈은 자신의 삶을 위해서나 사회와 국가를 위한 면에서도 아주 잘 선택한 길이었다고 재삼 방점을 찍고 싶다. 그렇게 비교적 좋은 환경의 대학에서 원하던 훌륭한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보람된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으니, 서 회장의 진정한 삶의 바탕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서 탄탄하게 이루어졌으며, 당시 전공분야 연구도 연구였지만 삶의 정신적인 바탕을 굳게 다지는 소중한 시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 회장의 확고한 가치관의 삶은 대학을 졸업한 후 제대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졸업 후 곧바로 전공을 살려 농림부에 들어가 근무하게 되면서 ‘종자 인생 40년’의 인생 2막을 열게 된 것이다. 사실 운이 따르지 않으면 대학에서 전공과목을 이수하고도 사회에 진출하게 되면 전공과는 거리가 먼 엉뚱한 분야의 직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허다한데 서 회장은 첫 직장을 전공에 잘 맞추어 근무하게 되는 행운을 얻은 것이었다.
당시 1970년대 초엔 우리의 주곡 작물의 생산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므로 식량증산을 위한 우량 종자 생산 공급 업무는 아주 중요할 수밖에 없었는데 서 회장이 바로 그 일을 맡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중요한 종자 업무를 숙명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여 담당하고 있었는데, 곧이어 행운까지 찾아왔으니 정말 저절로 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농업분야 전문성 제고를 위해 록펠러 재단의 후원을 받아 세계 녹색혁명의 산실인 멕시코에 있는 CIMMYT(국제 밀⸱옥수수 종자개량연구소)에 1년간 교육을 받을 당사자로 선발된 것이었다. 나도 공직에서 근무를 해봐서 짐작되는 일이지만 그렇게 선정되기까지엔 우수한 업무능력과 기량이 인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후배와 동료간의 화합에도 공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서 회장은 드디어 국제무대로 안목을 넓힐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얻은 것이었다. 공직에 재직 중이면서 1년 동안이나 국비로 전문성 제고를 위한 해외 국제 전문기관에서의 교육연수라니, 정말 그의 집념과 행운이 겹친 일이었다. 서 회장은 멕시코에서의 이 CIMMYT 교육 기간을 통해서 세계적 안목을 넓힐 수 있었고, 또 많은 외국인 과학자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종자의 중요성과 신비성을 더욱 크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종자만이 우리의 식량 문제와 우리 식탁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멕시코에서 소정의 교육과정을 이수하였고, 귀국한 후에 크고 작은 대내외 업무를 추진하고 시행하는 데 있어서 그 동안의 교육연수의 효과로 인한 많은 도움을 얻었다고 한다.
그 뿐인가, 그 후 근무에 열중하던 중 또 직장에서의 추천으로 미국 국무부 장학생 선발 테스트에 응시하게 되었는데, 결국 무난히 합격하여 미국 대학에서 종자생산기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었다고 하니 역시 서 회장은 직장에 근무하면서, 동시에 미국의 전문대학원에서 장학금으로 전문연구도 하게 되는 거듭된 행운을 획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시피주립대학에서 종자생산기술학 전문과정을 장학금으로 공부하게 되어, 실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꼭 배우고 싶었고 꼭 배워야 할 분야였을 뿐만 아니라, 공부도 재미가 있어서 열심히 하게 됐고, 실력도 크게 향상되었던 기간이라고 했다. 사실 욕심껏 과목 신청을 하다 보니 연구하고 공부해야 할 분량이 너무 많아 거의 쉴 틈도 없이 강의실과 연구실, 식당과 기숙사만 오가며 새벽 2시까지 연구실에서 공부하고 연구하였으며, 20여 명의 연구생 중에 유일한 공부벌레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당시 그렇게 대학원 연구에 몰두하면서도 우리 농림부의 IBRD(세계은행) 종자차관사업의 협상팀으로도 합류하여 국가적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하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으며, 결국 전문대학원 과정을 충실하게 이수하고 석사학위까지 수여 받았으니, 서 회장이 그만큼 적극적이고도 진취적인 노력의 성과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서 회장은 그렇게 멕시코에서 종자 전문교육을 받았고, 미국에서 대학원 전공과정을 거쳐 학문적 배경지식을 갖추었으며, IBRD 종자 차관사업을 수행하면서 많은 외국 종자 전문가들을 만날 수 있었기에 농림부에서의 여러 국제적 종자 업무를 담당하며 비교적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서 회장의 해외 활동은 계속되었으니, 곧이어 FAO(UN식량농업기구)에 발탁되어 종자사업책임관 등을 맡아 약 6년 동안이나 국제무대에서 농업 전문가로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임무를 성공리에 수행하는 영광의 시기도 겪었다고 한다. 당시 쌀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며 종자개량과 종자보급을 위해 실무진으로서 동분서주하며 온몸을 바쳐 일하면서도 마음만은 즐거웠다고 회고한다. 서 회장이 그렇게 농림부에 근무하는 동안 여러 주요 업무처리의 효과와 국제무대에서의 활동의 성과는 당시 낙후된 우리 농촌 개혁과 나라 살림에도 대단한 보탬을 주었던 것이다.
서 회장은 UN식량농업기구를 끝으로 해외 근무를 마무리하고 농림부로 복귀하였으며 농업공무원교육원, 국립식물검역소 등에 근무하기도 했고, 국립종자공급소장, 한국종자사업관리원장 등의 직책을 맡아 계속 종자업무에 심혈을 기우리며 굵직한 국내외 현안을 수많이 처리하게 되었는데, 특히 우르과이라운드 협상실무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일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중요한 협상이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런가 하면 그 당시 주위의 여건이 조성되었고 또 친지들의 권유에 힘입어 종자분야의 박사과정을 공부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알아보던 중 직장과 학업 병행이 가능한 동국대학교에서 본격적인 연구에 몰입하여 결국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됨으로써 전문가로서의 자긍심과 함께 종자 업무 수행에 보다 더 좋은 여건을 만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서 회장은 농림부에서 국립식물검역소장직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이후 한국농기계협동조합 전무이사직을 맡고 있으면서 2003년도부터는 (사)한국종자협회장에 선출되어 우리나라 종자협회의 막중한 임무를 총괄하게 되었는데, 특히 글로벌 시대에 대처하기 위한 세계시장 확대를 위해서 새로운 품종육성과 수출 및 판매에 집중하여 자타가 공인하는 지대한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돌이켜 보면 서 회장은 1967년도부터 종자 사업과 인연을 맺어 약 40여 년 동안 꾸준히 종자 산업 분야에만 투신해 온 것이다. 80인생을 살아오면서 어찌 굴곡이 없었겠는가. 사실 한순간 한순간이 고비였을 터인데 그런 어려움을 슬기롭게 잘 헤쳐 왔던 것이다. 오로지 ‘한 알의 종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라는 신념으로 불철주야 종자의 중요성을 한시도 잊지 않고 한결같이 종자 산업 발전을 위해서 노력해 왔다는 종자박사 서 회장! 지혜와 경륜의 내공으로 똘똘 뭉쳐져, 하고자 하는 일에는 어떠한 난관도 가리지 않고 과감히 전진만 하여온 보람된 삶이라고 여겨진다. 오로지 지적인 호기심과 비전을 갖고 철저한 자기 관리와 배움에 대한 열정, 은근과 끈기의 노력과 집념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자랑스런 친구, 서 회장은 우리 동창생 중에서도 나이가 두어 살 아래이다. 그런 데도 리더십 면이나 기억력은 단연 두드러지는 편이다. 그가 맡고 있거나 지금까지 맡아 온 대표 격인 여러 ‘회장직’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 일례로 우리 부안중학교 출신으로 전주고등학교에 함께 진학했던 친구들이 모여 ‘부전회’라는 이름의 부부 동반 모임이 있는데, 서 회장이 1980년대에 직접 창설하여 지금까지 회장을 맡아 이끌어 오고 있으며, 모임 때 중고시절의 추억담이나 에피소드가 화제에 오르기라도 하면 서 회장의 월등한 기억력에 모두들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지면관계상 상세한 내용을 여기서 다 열거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서 회장의 기억력이 남달리 특출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서 회장은 언제 어디서나 리더의 역할을 하는 창조적 사고방식의 소유자다. 파도치는 삶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남다른 집념과 추진력으로 삶의 격랑을 헤쳐온 자랑스런 동창 중의 한 사람인 것이다.
서 회장은 이제 그 바쁜 공직에서 자유로운 몸이 되었고, 대부분의 단체나 조직에서도 손을 뗀 것으로 알고 있다. 정기적인 출퇴근의 일상에서는 완전히 해방된 것이다. 흔히 말하는 노년기에 접어든 것이다. 하지만 평생을 긍정적, 진취적인 정신으로 삶을 즐기며 살아온 그는 이제 아름다운 노년을 가꾸기 위해서 ‘부전회’ 중고시절의 동창모임, ‘송백회’ 고교시절의 등산모임, ‘농사단’ 대학교시절의 동아리모임, 가족끼리의 골프모임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이끌어 오고 있는가 하면, 매일같이 조석으로 부부가 함께 인근에 있는 우면산 갓길 산책도 하고 틈나는 대로 단지 내 체육관에서 요가, 수영, 헬스 등 건강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운동도 하며, 관내 노인종합복지관의 취미 프로그램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보람된 일상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더불어, 천주교 신자로서 신앙심까지 돈독하여 수시로 성당 봉사활동에도 보람과 재미를 느끼고 있다니 그 부지런함은 아직도 식을 줄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여가를 선용하고 건강한 체력을 유지하며 후회 없는 인생을 즐겁게 디자인하고 있는 서 회장! 누가 보아도 산수(傘壽)를 맞는 분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젊은 모습과 매사에 열정이 넘쳐흐르는 적극적인 성품을 볼 때, 그는 분명 멋진 인생을 누리고 있는 축복 받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전공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농업이나 종자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잘 모른다. 서 회장의 삶에 대해서는 나보다는 더 잘 알고 더 가까운 친구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 알고 있는 서 회장은 학창시절을 제외하고도 전공 분야는 물론 여러 조직의 감투(?)를 역임하였는데, 그것은 강한 집념과 리더십의 품격으로 인한 인덕의 소산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80평생의 삶을 건강하게 누리는 것도 신의 축복이지만 잠재적 소질을 찾아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쳐 보이는 것 또한 흔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비전 있는 도전정신과 남다른 스케일의 폭넓은 삶, 가열찬 집념으로 무슨 일이든 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감과 신념을 갖고 적극적으로 젊은이 못지않게 추진해 나가는 친구, 서 회장에게는 어쩌면 ‘인생은 70부터’란 말이 어울릴 것 같은 정렬적인 사나이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안으로는 평안하고 단란한 행복가정을 이루어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노년에 꼭 필요한 건강과 경제력도 든든히 갖추고 있으면서, 미인이신 사모님과 훌륭하게 성장한 아들 딸, 며느리, 사위, 그리고 귀여운 손주들까지 다 모이면 화목하고 다복한 대가족이니 누가 봐도 여한이 없는 어르신의 삶이다.
나는 서 회장에 비하면 그 근처에도 못 미치는 졸장부이지만, 나 스스로는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으니 뭐가 모자라는 것일까 아니면 교만의 소치일까. 나의 젊은 시절은 그야말로 꿈 많은 문학청년이었고, 평생직장은 오로지 교직이었다. 흔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망하며 좋은 직업이라고 말하는 판사나 검사는 범인이나 죄수들을 상대해야 되고, 의사는 병든 환자를 상대해야 하지만, 나는 학교에서 순수한 천사(?)들을 가르친다는 신념으로 자위하며 살아왔다. 나는 대학에서 시인 서정주, 박목월, 소설가 김동리, 염상섭 교수님들의 문학강의를 들으며 공부하였고, 졸업 후에는 문단에 데뷔하여 한국시조시인협회 부이사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직을 거치며, 시와 시조문학에 40여 년 몸담아 왔으며, 동시에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직에서 40여 년을 지냈으니 나는 애초부터 문단활동과 교직생활을 병행해 왔던 것이다. 어쩌면 이 두 가지가 다 돈도 명예도 보잘 것 없는 하찮은 일에 불과하지만 나로선 내가 좋아서 택한 일이기에 후회 없이 그야말로 만족하게 즐기는 삶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원래 ‘호기심’이 많아서 평생을 호기심으로 살아왔고 지금까지도 호기심으로 살고 있는 게 나의 행복이다. 눈만 뜨면 알아보고 싶은 것도 많고 직접 해보고 싶은 것도 많고 많아서, 요즈음도 날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이 철없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나의 호기심은 다람쥐 쳇바퀴가 아니라 날마다 순간순간 변화되는 새로움을 동반한다는 면에서 미래지향적이다. 호기심으로 인하여 계속해서 새로운 순간을 맞게 되니 어찌 재미가 없겠는가! 남이 보기엔 가엾을 것 같은 팔순 노인네가 뭐가 그리 바쁘고 즐겁다는 말인가라고 의아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얼핏 생각해 보면 웃기는 얘기일 터이니 말이다. 나는 이 ‘호기심’ 덕분에 계속 공부하고 또 연구하다 보니 운전면허증 이외에 열두어 가지의 재미있는 자격증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요즘엔 ‘한국진로적성연구원’을 개설하여 특허까지 신청, 새로운 연구과제를 붙잡고 있으니, 사실 나의 일상은 오로지 나밖에 모르는 미묘한 구석이 있다고 하겠다. 조용히 서재에 앉아 있을 땐 서가에 꽂혀있는 나의 다섯 권의 시조시집이 나를 바라보며 무언의 메시지를 건네주기도 한다. 나는 틈틈이 청탁원고를 창작하기도 하지만, 이미 발표한 작품은 전문가와 함께 곡을 붙여 재탄생시키기도 하고, 영어나 일어, 또는 스페인어나 아랍어로 번역하여 문우들과 공저 편찬에도 참여하며 나름의 보람을 얻고 있다. 요즘은 생각지도 못한 코로나19 확산으로 모임이나 나들이가 여의치 못하지만, 나로선 더 연구하고 싶은 일에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유용한 기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행정안전부가 제공하는 통계에 의하면, 2021년 6월 현재 우리나라의 65세 노인 인구는 약 800만 명이고, 75세 이상은 약 350만 명으로 노인인구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라는 것이다.
올해로 연세가 101세인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액티브 시니어'의 대명사이다. 인생은 모든 연령대가 나름의 행복을 가지고 있다는 김 교수의 충고가 상기된다. 10대는 10대의 즐거움이, 50대는 50대의 즐거움이, 70대는 70대의 즐거움이 있고, 현재의 나이는 과거를 보면 가장 많은 연령이고 미래를 보면 가장 어린 연령이라는 것이다. 어느 연령대에 있든지 그 나이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유쾌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보니 80대 중반까지는 남성성을 유지한다고 털어놓으면서 90세가 되면 그마저 잃게 된다고 덧붙였다.
늙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늙어간다는 것은 슬픈 것이 아니라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지나간 과거는 헛된 것이 아니다. 과거에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오늘이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과거가 아쉽다면 오늘의 삶과 미래의 삶을 더욱 잘 가꾸어야 한다. 오늘도 열심히 살고 남아 있는 인생도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노년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될까? 궁리하며 살아가는 삶도 그 재미가 꽤 쏠쏠하다. 시간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만이 멋진 황혼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사실 우리들은 젊은 날을 너무 어렵게 살아왔다.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입을 것도 제대로 못 입으면서 힘겹게 살아 온 세월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청춘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에 못다한 아쉬움이 밀려온다. 그러나 지난날이 어려웠다고 해서 앞으로 남아 있는 날들마저 어설프게 보내면 되겠는가?
이제 100세 시대가 되었지만 나이 여든 내외이면 노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아직도 연장전 20년이 남았다. 그동안 우리는 대부분이 나이를 잊어버린 채 지금까지 너무너무 바쁘게 살아왔다. 쫒기듯 살아오다 보니 삶을 되돌아 볼 여유조차 없었고 친구의 소중함도 실감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여기까지 당도한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친구에 대하여 깊이 있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친구, 서광(瑞光) 서기호 회장! 아직은 맑은 정신 건강한 몸이므로 앞으로도 국가와 사회와 농업계에 더 많은 공헌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믿으며, 가정의 만복과 건강을 기원하면서 이만 무사(蕪辭)를 접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