暴露特種
마루타를 아는가!
生體實驗에서 죽은
우리의 兄弟들을 !
日王 「히로히토」는 今世紀 最大의 殺人犯이었다. 그에 의해서 저질러진 우리 民族의 抹殺陰謀는 가히 典律을 느끼게 한다. 「마루타」란 이름으로 죽어갔던 3천여 亡靈들의 넋을 누가 위로해 줄 것인가? 그리고 꽃다운 나이에 「情身代」란 허울좋은 이름으로 끌려가 生體實驗의 첫 結果를 테스트 당해야 했던
이 땅의 處女들은!!
因果應報 격 히로히토의 死亡
천황의 이름으로 세계 최장의 황제로 군림해 오던 히로히토가 넉 달 동안의 고통 끝에 눈을 감고 역사의 장으로 그 이름을 묻었다.
히로히토의 사망은 일본에 있어서 마지막 소화시대의 막을 내리는 애통의 눈물을 흘리게 했지만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 있어서는 피맺힌 한을 되살린, 절규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
약 2백여 만 명에 이르는 ‘청년 징용대’의 한과 약 20만 명에 이르는 ‘여자 정신대’의 지울 수 없는 기억.
갖은 고문과 수탈로 민족의 가슴을 도려내 온 그때 그 감옥, 그리고 지금까지도 재일 동포에 대한 지문날인의 악법 관행을 남겨놓고 떠난 히로히토의 사망 소식이 식민지 시대를 살아왔던 고령 세대들에게는 인과응보 격 죽음이라는 당연한 귀결로 생각될 것이다.
침략과 압제의 대명사로, 식민지 고문정치의 대부로, 남북분단의 원인제공자로 그 숱한 죄상을 뉘우치고 용서를 빌지도 않은 채 87세 동안 왕궁에 안주해 있던 히로히토.
과거 폴란드의 침공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던 과거 어느 서독 수상의 용기에 비해서 비뚤어진 일본 왕궁의 대표적인 양심을 우리 민족에게 비춰주고 떠나갔다. 게다가 전쟁을 싫어했던 평화주의자로까지 이제껏 각색시켜온 히로히토의 전과, 세상에 무슨 미련이 있어 두 번 죽을 무덤을 스스로가 만들어 왔단 말인가?
용서하기 잘 하고 까짓 잊기를 잘 하는 우리 국민성을 그가 잘 이용해 왔었다고 말하면 지나친 발상일까? 아니면 차라리 히로히토의 꿋꿋한 배짱에 찬사를 보내야 할까?
生物學이 傳功인 히로히토
히로히토는 상당수의 일본인들에게 추앙 받는 천황이었던 반면 한국과 그 밖의 피해 당사자국들에게는 제국주의 군국주의의 대표적인 표상이었다.
큰 것으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군국주의 일본 세를 더욱 증가시켰던 장본인이었고 그 구체적인 것으로는 우리를 비롯한 피해 국들의 일반에 아직까지 널리 알려지지 앓은 더 이상 참담할 수 없는 만행을 극비리에 추진시켰던 배후 인물이기도 하다.
그 사례로는 1940년대 북만주 빙파오(平房)의 731 세균부대에 의해 자행된 생체실험이 그것이다.
생물학이 전공이었던 히로히토는 그만큼 그의 전공에 비상한 조예와 관심이 깊었다.
軍國主義의 表象으로 87세를 살아 온 히로히토는 우리 韓民族의 피맺힌 絶叫만을 남겨놓고 떠나갔다. 그러나 生物學이 전공이었던 히로히토의 生體實驗場, 저 멀리 북만주 731 細菌部隊에서 아무도 몰래 죽어가야 했던 3,000여 마루타 亡靈들의 恨은 어찌 달래야 하는가?
1938년에 1945년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 관동군에 의해 한국인, 중국인, 만주인, 몽고인, 러시아인 등 포로 3000명을 그의 생체실험 독무대로 이용한 기록은 독일의 아우슈비츠 가스 학살과 생체해부를 주도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에 못지 않은 배후인물이 히로히토였다.
듣기만 해도 닭살이 돋는 그 무지막한 단어, 생체실험이 살아 숨쉬는 인간을 대상으로 각종 세균실험과 약물실험, 병기성능 실험 등을 가리키며 여기에서 그 실험 대상자를 일어로 ‘마루타’라고 한다. 마루타란 ‘통나무’란 뜻이다.
일본이 수 년 전 세균전을 준비하기 위해 살아있는 사람에게 페스트나 콜레라 생균을 주사한 적이 있었다는 것은 대게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중에도 이 사실은 실험에 직접 가담했던 실험관, 그 하수인들과 일본 관동군 고위층과 일본 본토 고위층들 몇몇 뿐이 알지 못 했고 실험 당사자였던 포로들조차 거의 모르고 있던 사실이다.
북만주 731부대 생체실험장에서 자행된 실례는 그야말로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실험했다.
特設監獄의 生體實驗 現場
생체실험 현장의 실례를 들어보면 대형 원심분리기를 이용해 사람의 생피를 짜내는 착혈 실험, 진공실에 넣고 압력의 변화속도에 따라 인체의 반응과 생존실험을 해서 입, 귀, 항문, 눈이 찢어지고 장기와 내장이 튀어나오는 것을 16mm 기록영화로 촬영을 했고 여성 포로들을 대상으로 매독실험과 강제로 체위 성교실험, 여성의 생식기를 중심으로 한 각종 해부와 성교 횟수 실험을 했다.
여기에서 얻은 성교 횟수실험은 여자의 남자처리 능력이 하루에 29명이라는 한계를 얻어냈고 이러한 결론은 위안부였던 여자 정신대에서 직접 이용을 했다.
細菌들로 하여금 人間 生體를 飽食시키고, 생피를 빨아내고, 步兵 銃 性能實驗을 위해 一列縱隊 마루타를 관통시키고 심지어 男性을 받아들이는 女性 生殖器의 限界數値를 强制 實驗하고, 人間을 비누로까지 活用해 보고자 했던 生體實驗의 阿鼻叫喚!
이밖에도 동상실험을 하여 동상이 된 상태의 산 사람을 도끼로 찍어 과연 출혈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출혈실험을 관찰했고 여자 마루타의 팔을 동상시켜 막대기로 그곳을 내리쳐 뼈만 남기고 살점이 얼음 조각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나이 어린 소년 의학병들로 하여금 관찰, 실증해 보이기까지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인간이 상상해 낼 수 있는 최악의 실험이 어디까지인지……
인간의 피와 말의 피나 원숭이의 피를 교환해 보는 대체수혈실험, 임신한 여자 포로에게 약물을 투여해 기형아가 생성되는 과정을 실험해 그 결과 얻어낸 기형아를 알콜 표본으로 만들어 보관했고 공기 정맥주사실험, 고통에 대한 한계실험, 화학가스 실험, 음식물이나 물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생명 한계실험, 고온이나 저온에 견디는 항력실험을 했다.
또한 각종 세균을 주사하거나 만두에 섞어 먹인 다음 일어나는 반응을 실험했고 해부하면서 장기를 교환해 보는 등 인간 마루타는 그들에게 있어 하나의 살아있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사람에게서 기름을 짜내어 비누를 만들어 보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들의 전쟁 수행을 위한 갖가지 실험도구로 마루타들은 하나하나가 아니면 무더기로 쓰러져 갔다. 36식 보병 총 성능실험을 위해 여러 명의 포로들을 일렬종대로 세워놓고 쏘아 그 관통력과 치명치를 측정했고 마루타 포로들을 전차 속에 넣고 화염방사기를 쏘아 내열실험을 했다.
지금까지 증언되고 확인된 이러한 사례들, 하나 같이 인간 최대의 말살방법이었고 죄악의 원천이었다.
亡靈이 된 그 이름 마루타여!
인간의 피가 거꾸로 돌고 피 맛을 안 착혈 인간이 아닌 이상 그 같은 피의 잔치를 벌일 수 있었을까?
이와 같은 실제 생지옥 현장은 소설 ‘마루타’에 적나라하게 파헤쳐져 있다. 2년여에 걸쳐 추적, 집필, 출간을 함에 있어서 더 이상 사악할 수 없었던 당시의 생존자 증언을 듣고는 집필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은 실험 내용으로 대신했다.
더 이상 人間이 殘忍해 질 수 없었던 피의 잔치-
只今도 當時의 몇몇 證言들은 생생히 들려지고 있는데 정작 마루타란 이름으로 쓰러져야 했던 3,000여 捕虜들은 말이 없고 이제는 그 當事者마저 주검이 되어 말이 없다.
“사방의 벽이 투명한 유리로 된 진공실에 서 너 살 된 딸과 어머니가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체념한 듯 딸을 살려달라던 애원마저 더 이상 하지 못하고 딸애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딸애는 어미새에 얼굴을 묻은 새끼처럼 얌전히 있었다. 곧 이 진공실에 푸르디 푸른 독가스가 퍼지기 시작했다. 뿜어지는 청산가스로부터 조금이라도 자기 자식을 보호하려 하려는 모성애로 어머니는 안간힘을 다 쓰며 단발마의 비명과 경련 속에서도 자식을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다. 여아는 독가스를 마시며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지만 어머니를 끌어안고 놓지 않은 채 죽어갔다.”
이 말은 당시 부대원이었던 사람이 훗날 취재한 사람에게 들려준 말이었다. 거의 사실에 입각해 쓰여진 소설 ‘마루타’는 이러한 역사적 잔혹성을 집필함에 있어서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내용을 요시다 대위와 간호원인 후미코와 미요코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남녀간의 사랑인 삼각관계로 유화시키고 승화시킴으로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깨닫도록 작가의 역량을 살려 나가갔다.
현재 도서계에 거센 돌풍을 일으키며 과거 히로히토의 대표적인 죄상을 낱낱히 파헤친 ‘마루타’는 무려 25만 부나 되는 판매 부수로 올라서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100만 부에 이르는 판매 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증인이자 죄인인 히로히토는 이제 말이 없다. 그러나 그가 저 멀리 북만주에서 저질렀던 인간 최대의 악행은 3,000여 마루타의 넋에 원한으로 맺혀 있다.
당시 ‘마루타’란 이름으로 죽어가야 했던 3,000여 명의 원혼들과 이제 싸늘히 식은 히로히토의 주검은 시대를 초월한 역사적 만남으로 사라져 갔다.
한 쪽은 마루타란 이름으로, 다른 한 쪽은 천황이란 이름으로……
기사 끝 1989년 3월 호 月刊 歷史와 實話 4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