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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어둠 속에서 바둑 두기
두 사람이 거리로 나서자 행인들이 놀란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중과 서생이 손을 잡고 넓은 임안 거리를 희희낙락 걸어가고 있으니 괴상한 일이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둘은 한참 걷다가 한 주루(酒樓)로 들어갔다.
황약사는 큰소리로 심부름꾼을 불러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를 가져 오게 하여 일속 대사와 마시기 시작했다. 일속 대사도 소탈하고 시원시원한 사람인지라 황약사와 호흡이 잘 맞았다.
정오 무렵 주루에 앉은 두 사람은 야밤이 될 때까지 취하도록 마셔 댔다.
도화도 얘기가 나오자 황약사는 신명이 나서 떠들었다. 청음동(淸音洞)이 어떻고 녹죽림(綠竹林)이 어떻고 시검지(試劍池)는 여차여차하고 탄지봉(彈指峰)은 또 여차여차하고…….도화도 자랑에 입에 침이 마르는 줄도 몰랐다.
"황 도주님, 이젠 도화도 자랑은 그만하는 게 어떻소? 더 말씀하시면 이 일속이 이름을 바꿔야 하니 말이오."
"이름을 바꾸다니요?"
황약사가 놀라는 기색으로 물으니 일속 대사가 웃으며 말했다.
"도화도가 그렇게 좋다니 소승의 마음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불일듯 하는구려. 그러니 속념이 더 많아질 게 아니오? 속념이 그렇듯 많으면 다속(多俗)이라고 해야지 어찌 일속(一俗)이라고 하겠습니까?"
둘은 함께 박장대소하고는 은자를 놓고 주루에서 나왔다.
주홍이 도도한 채 달빛이 흐르는 길을 걸어 산 고개에 이른 그들은 마주앉아 한담을 나누었다. 인적이라곤 없는 울창한 숲에 푸르스름한 달빛과 이따금 스치는 맑은 바람뿐, 참으로 호젓한 밤이었다.
"일속 대사님, 대리 단씨네 일양지를 보았으니 저로선 평생의 행운입니다."
황약사의 말이었다.
"과찬입니다. 우리 대리의 일양지공이 어찌 도주님의 난화불혈수를 당해 내겠습니까?"
둘이 이렇듯 서로 겸손을 차리며 이야기를 하는데 느닷없이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개방귀 뀌는 소리 하고 있네! 천하에 개방귀 소리 잘하는 사람이 몇 있다는 건 알았지만, 오늘 밤 여기에도 있을 줄은 몰랐는데."
황약사와 일속 대사의 무술 실력으로 보아 가까이 에서 토끼 한 마리가 달아나는 건 물론이고 낙엽만 져도 당장 알련만,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달빛 아래 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굵게 뻗친 곁가지에 사람 하나가 비스듬히 걸치고 누워 그들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루한 옷에다 헝클어진 머리에는 지푸라기들이 붙어 있고 몸에서는 역한 냄새까지 풍겼다.
그는 원숭이처럼 나뭇가지 위에 앉아 둘을 향해 소리쳤다.
"천하와 바보 둘이 웬일로 여기까지 왔소? 황약사가 제 자랑밖에 모른다는 걸 누가 모르는 줄 아우? 제딴에 고고한 척하지만 염불이나 아는 중과 마주앉아 서로 칭찬하느라고 입에 침이 마르는군……. 한편에서는 대리 단씨네 '일양지'가 천하 무적이라 추켜올리고, 다른 한편에선 황 도주의 무술이야말로 천하 제일이라고 엄지 손가락을 내밀고. 허 참! 나 기가 막혀. 다행히 나 같은 거렁뱅이 귀에 들렸으니 망정이지, 영웅들 귀에 들어갔다면 그 꼴이 어쨌겠소?"
"아니, 대관절 당신은 누군데 그런 험담을 하는 거요?"
자존심이 강한 황약사는 누추한 거렁뱅이가 자기와 일속 대사를 조소하는 소리를 듣고 화가 났다. 하지만 거렁뱅이는 황약사의 말에는 아랑곳없이 느릿느릿 말했다.
"내가 잠을 자는데 말이오, 코 한 번 안 골고 잠이 푹 들었는데 갑자기 무슨 냄새가 나서……."
"냄새라니? 여태껏 앉아 있어도 우리는 아무 냄새도 못 맡았는데."
일속 대사가 이상하여 묻자 거렁뱅이는 좋아라고 크게 웃어댔다.
"핫하하, 냄새를 못 맡았다고? 핫하하! 그럴 수도 있겠지. 원래 제 방귀 구린 줄은 모르는 법이니까. 하지만 난 둘이 마주앉아서 너 한 번 나 한 번 개방귀를 뀌는 통에 구려서 숨이 막혀 죽을 뻔했거든……. 핫하하!"
황약사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거렁뱅이 녀석, 그따위 소리 말고 냉큼 내려와!"
거렁뱅이는 서슴지 않고 황약사와 일속 대사 앞에 뛰어내렸다.
"화상 한 사람과 속인 하나, 이렇게 둘만 앉아서야 재미가 덜하지 않소? 이런 데는 나 같은 거렁뱅이까지 끼어야 재미가 무진한 법이오."
이 거렁뱅이가 범상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내심 경탄하고 있던 황약사와 일속 대사는 한동안 말없이 거렁뱅이의 모습만 훑어보았다.
서른 안팎의 젊은 거지였다. 겉모양은 더럽기 짝이 없지만 거짓 없고 소탈한 인간인 듯싶었다.
"할 일이 없으면 집에서 술 먹고 잠이나 잘 것이지, 이런 후미진 곳에 앉아 나발들을 불고 있으니 미친 사람들 취급을 당하잖소?"
황약사는 잠자코 있었고 일속 대사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한 마디 건넸다.
"당신은 우리에게 미치광이라지만 우리가 보기엔 당신이 미친 것 같으니, 안개같이 몽롱한 세상사 시비곡절을 어떻게 밝히겠소?"
그러자 거렁뱅이는 그따위 선문답(禪問答)은 하기 싫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설교는 그만두시오! 난 그런 절간의 넋두리는 딱 질색이오. 백마는 말이 아니라느니, 세상 모든 것이 공허하다느니, 그런 허튼 소리는 딱 질색이란 말이오."
황약사와 일속 대사는 서로 눈길을 나누었다. 두 사람 다 이 거렁뱅이가 범상한 인간이 아니고 무예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짐작하면서도 개방( 幇 ; 거지 무리) 중에 어느 정도 위치인지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 거지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한창 흥이 올랐던 황약사와 일속 대사는 흥이 깨지고 말았다. 그러나 거렁뱅이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고는 말했다.
"아이고, 그 잘난 자화자찬을 누가 듣고 싶다고 이 밤중에 떠들어? 난 날이 저물자 입궁하여 황제 폐하께서 잡수시던 진수성찬을 잔뜩 먹고 왔소. 주육으로 배가 부르면 단잠에 빠지는 게 당연하지요. 그런데 당신들이 와서 떠드는 통에 깨어나서 이렇게 뛰어내린 거요. 뭐, 당신들과 한담이나 하자고 나섰는 줄 아오? 그따위 잡소리만 없었어도 지금 이 나으리는 한창 달게 잘 텐데……."
황약사는 비위가 거슬렸다. 새파랗게 젊은 거지 녀석이 누구 앞에서 나으리가 어쩌구저쩌구 떠들어? 황약사가 녀석의 버릇을 좀 고쳐 주겠다고 눈을 부릅뜨자 일속 대사가 눈짓으로 그를 막았다. 그리고는 점잖게 한마디 했다.
"시주님, 그렇게 포식을 하셨다면 제자리에 올라가서 다시 주무시는 게 좋겠소이다. 나와 황 시주는 상관 마시고."
거지는 또 한 번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그야 좋지요. 떠들 사람은 떠들고 잠잘 분은 잠자고. 이젠 무슨 허튼소리를 해도 이 나으리는 상관 않고 잠만 잘 테니까."
그는 땅 위에 네 활개를 뻗고 드러누웠다. 그러더니 금방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기 시작했다.
달빛은 아름답고 바람은 맑고 신선했다.
일속 대사와 황약사는 한동안 말없이 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 일속 대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황 도주께선 아직 우리 불가에 입적하지 않았으나 내가 보기엔 조만간 불가의 사람이 될 거외다. 오늘 이 달 밝고 바람 잔 고요한 밤에 선법이나 담론해 보면 어떨까요?"
황약사는 내심 이렇게 생각했다.
'낮에 무술로 이길 수 없었으니, 이 화상이 이제 와서 불가의 학식으로 날 이겨 보려는 속셈이군 그래, 내가 선법을 담론하면 질 줄 아는가?'
이처럼 그는 일속 대사의 뜻을 오해하고 있었다. 일속 대사는, 황약사가 오기가 대단하고 승부 근성이 강하여 임안에서 사람을 상하게 할까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부처의 마음으로 그의 인애지심(仁愛之心)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화도에서 처음 나온 황약사는 일속 대사의 고심(苦心)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그와 겨루어 볼 생각만 잔뜩 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대사께 그런 흥이 계시다면 저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황약사는 껄껄 웃으며 말하긴 했으나 내심 근심이 없지 않았다. 그 역시 불가의 학문을 연구하기는 했지만 불가에 입적한 중은 아니요, 도를 닦은 고승은 더욱 아니었다. 그러니 일속 대사 같은 고승을 정말 이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황약사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도화도에서 온 황약사가 아니냐. 어떻게 해서라도 이겨야 한다. 임기응변을 해서라도 이겨야지. 암, 이겨야 하고말고.'
둘은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일속 대사가 말을 꺼냈으니 먼저 제목을 내야 했다. 일속 대사는 황약사의 눈에 열기가 번득이는 것을 보고 그의 가슴에 승부욕이 불붙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낭랑한 목소리로 읊었다.
도화도, 온 섬은 도화 천지
봄이면 유화무인 (有花無人)인지 무화유인(無花有人)인지
일속 대사가 불경에 대하여 말할 줄 알았던 황약사는 그가 도화도에 관한 시를 읊자 은근히 기뻤다.
'일속 대사가 불경을 논하자고 하면 혹시 내가 질 수도 있겠지만, 매일 절간에서 삼재칠계(三齋七戒)나 하는 화상이 도화도를 논의하려는 데야 내가 질 수 없지.'
황약사는 기쁜 내색을 하지 않고 점잖게 화답했다.
도화도는 해마다 의구하고 사람도 해마다 춘풍이로세.
일속 대사가 황약사에게 말하려는 뜻은, 인생이 꿈 같으니 무슨 일이나 너그럽게 처사하면 마음도 편해지고 재앙도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약사가 화답하는 뜻은 온통 자신에 관련되는 일이었다.
벙어리 노복 몇을 거느리고 꽃에 파묻힌 채 도화도에서만 살아온 황약사는 사람들의 그윽한 정취나 인정을 느껴 보지 못했다. 그러다 지금 일속 대사의 시를 듣자 불쑥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여행길에 나에게도 예쁜 홍안의 지기가 생기는 행운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일속 대사에게 드러낼 수는 없어서 퍼뜩 떠오른 생각을 스쳐 보내었다.
일속 대사는 그런 황약사의 심중을 헤아리고 있었다.
'황약사, 그대에게도 행운이 올 것이다. 이 여행에서 어여쁜 홍안의 지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번 중원길이 순조롭지 못할지라도 기쁜 일이 생길 것이다.'
일속 대사는 이렇게 축원에 가까운 생각을 하며 서서히 또 시를 읊었다.
하늘이 내려 준 명(命)
어이 이리 짧은가
검은 머리로 이 세상 하직하고
한 가지 고통 끝나기도 전에
새 재앙이 덮치누나
아침 이슬 햇빛에 사라지듯
그 밝던 햇빛 저녁이면 사라지듯
쫓아가도 쫓아가도 붙잡지 못하고
애절한 마음 이를 데 없어
하늘 바라보니 높고 끝없는데
이 한을 도대체 어디에 하소연하랴.
일속 대사와 초면이었는데도 황약사는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내심 탄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낭랑하게 읊는 시를 들으니 자연 마음이 처량하고 구슬퍼졌다. 그 애절한 시구는 한동안 황약사의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비록 나이는 많지 않지만 이 일속 대사도 인생에 역경이 많았던 모양이구나. 그러니 저렇듯 감개가 많지. 나마저 공연히 마음이 구슬퍼지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황약사는 솟구치는 애수를 누르지 못하여 끝내 눈물을 흘렸다.
"황 도주께서도 동감이신 모양입니다 그려."
일속 대사가 탄식을 했다.
"대사께서 읊으신 시에 동감을 했습니다. 심중에 북받쳐 오르는 애수를 누를 길이 없어 눈물까지 흘리게 되었군요."
황약사의 구슬픈 목소리에 일속 대사는 빙그레 웃고는 다시 그런 말은 꺼내지 않았다. 감회에 젖은 황약사는 옥으로 만든 퉁소를 만지작거리며 깊은 상념에 젖었다.
티없이 맑은 백옥으로 만든 그 옥소는 참으로 보기 드문 보물이었다.
"황 도주님, 이왕 꺼내셨으니 옥소 소리나 좀 들려주시오."
일속 대사가 요청했다.
황약사는 대답 없이 옥소를 입에 가져갔다. 옥소 소리가 밝고 조용하게 흘러 나오다가 점차 구성지게 울리기 시작했다. 때로는 폭풍우가 쏟아지고 격랑이 솟구치듯 세차졌고, 때로는 인생의 무한한 고뇌를 하소연하듯 애처롭고 침울하게 울렸다. 일속 대사는 그 소리에 완전히 빠져들어가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앉아 있었다.
옥소를 부는 황약사의 눈앞에는 자기의 태를 묻은 땅 도화도가 떠올랐다.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땅, 아버님의 시신이 묻혀 있는 땅, 그곳에서 그와 어머니는 벙어리 노복들과 더불어 무술을 익히며 살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다음에도 그는 10년을 도화도에서 살아왔다. 이 10년 동안 그는 바다의 조수를 바라보며 옥소를 불고 무술을 익혔다.
그는 이미 천하에 드문 고수가 되었건만 그래도 무술을 닦고 또 닦았다. 마치 자신이 사는 보람은 이것밖에 없다는 듯이.
황약사의 눈앞에 매일 올라가 경공(經功)과 검술을 닦던 탄지봉이 떠오르더니 이어 부모님의 산소를 모신 청음동도 떠올랐다.
그곳에 올라 온종일 돌처럼 앉아서 밀려오고 밀려가는 조수 소리만 듣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런가 하면 녹죽림과 시검지도 보였다.
72식 난화불혈수를 그는 녹죽림에서 익혔다. 황약사는 날아 떨어지는 무수한 대잎으로 그만의 절세신기(絶世神技)를 닦으며, 시검지에 서서 바다를 향해 긴 고함을 내지르곤 했다.
고함소리는 바다의 파도 소리와 서로 호응하면서 멀리멀리 비껴가곤 했다. 이럴 때면 그의 벙어리 노복들은 감히 그 앞에 얼씬거리지 못했다. 그가 고함을 내지르면 가까이 있는 벙어리 노복들의 귀에서 피가 나오곤 했는데, 고함소리에 더 힘을 넣었다면 그들은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다. 벙어리 노복들은 중원에서 큰 죄를 지어서 그의 부친이 데리고 온 자들로, 지금은 도화도의 식구들이었다.
지금 옥소를 부는 황약사의 눈앞에는 이런 도화도의 사람들, 도화도의 일들이 삼삼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퉁소를 그치니 일속 대사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황 도주님은 향수에 젖어 버리셨군요. 황 도주님은 일속(一俗)이 아니라 다념(多念)이라고 해야 알맞겠습니다."
"글쎄요, 내가 이 중원에 무얼 하러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황약사의 대답에 일속대사는 다시 한 번 준수하게 생긴 그를 바라보고는 '제법 큰 인물이다!' 하고 감탄했다.
"소승이 보건대 장차 황 도주께 기쁜 일이 있을 겁니다."
그 말에 황약사는 귀가 솔깃해졌다.
'일속 대사가 말하는 기쁜 일이란 도대체 무슨 일일까?'
그러나 황약사는 궁금증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글쎄,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와 바둑이나 한 판 둡시다."
그즈음 달빛이 빛을 잃어 지척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황약사는 일속 대사가 이 어둠 속에서 어떻게 바둑을 두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에라, 일속 대사가 두면 나도 두지. 내가 못 둘 이유가 있나? 반드시 일속 대사를 이겨야지.'
황약사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일속 대사는 손가락으로 땅에다 바둑판을 그렸다. 비뚤어지는 줄이 하나도 없이 가로 세로 척척 그어 나가는 품이 대단히 익숙한 솜씨였다.
"두어 볼까요?"
바둑판을 그린 일속 대사는 황약사와 함께 각기 팔을 앞으로 뻗어 손바닥을 위를 향해 펼치고는, 마치 물 속에서 무엇을 건져내는 모양을 했다. 그러자 일속 대사와 황약사의 손에 각각 잡히는 것이 있었다. 두 사람은 그것들을 바둑판 앞에 내려놓았다.
일속 대사가 쥔 것은 나뭇가지였는데 잔 토막들로 잘려져서 임시 바둑알로 쓸 만했다. 그리고 황약사가 내놓은 것은 나뭇잎이었는데 그것 역시 바둑알만큼씩 조각나 있었다. 둘은 물론 내력을 쓴 것이었다. 달빛이 어두워 바둑판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들은 바둑알을 놓았다. 속으로 헤아리고 가늠하면서 두는 이른바 맹기(盲棋)였다.
얼마를 이렇게 바둑을 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동쪽 하늘에 새벽빛이 어리기 시작했으나 그들 둘은 여전히 바둑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자던 거렁뱅이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정말 미쳤군! 올빼미같이 한 잠도 안 자고 이따위 짓만 하기요? 이까짓 바둑이 점잖은 놀음인 줄 아시오? 구린내도 아주 몹쓸 구린내가 나는 짓인데."
거렁뱅이가 무슨 소리를 해도 바둑에 정신이 팔린 두 사람은 제 바둑 수를 생각하느라 일언반구 대꾸가 없었다.
거렁뱅이는 봉두난발이 된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또 한마디 뱉었다.
"황제의 밥을 차리는 어선방(御膳房)에 가면 맛좋은 성찬들이 그득하다오. 우리 함께 가 보겠소?"
그래도 황약사와 일속 대사는 여전히 바둑판만 내려다보며 거렁뱅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거렁뱅이는 발을 탕탕 구르며 외쳤다.
"망측도 하지! 세상에 이따위 기괴망측한 인간들이 다 있담? 천하에 둘도 없는 진수성찬인데 먹을 생각을 안 하다니?"
거렁뱅이가 별의별 소리를 해도 황약사와 일속 대사는 귀머거리가 된 듯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여전히 바둑판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제기랄! 속에서 불이 나 죽겠네."
거렁뱅이는 발을 마구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갑자기 번개같이 손을 뻗어 바둑판을 마구 휘저어 놓았다.
"어디 또 바둑을 둬 봐. 이거 벨이 꼬여 살겠나. 잘들 놀아 보란 말이야!"
그리고는 몸을 돌려 나는 듯이 사라져 버렸다.
바둑판이 흩어지자 황약사와 일속 대사는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윽고 황약사가 물었다.
"대사께서 어제 밤에 읊은 자건의 시는 무슨 뜻입니까?"
황약사는 아주 총명한 사람이었다. 범속하지 않은 일속 대사가 딸의 죽음을 애달파 하는 조자건(曹子建)의 시를 읊은 데는 심상찮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속 대사는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황약사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는 진지함이 가득했다. 그러자 눈치 빠른 황약사도 더 묻지 않았다.
"황 도주님, 이젠 소승도 길을 떠나야겠습니다. 앞으로 만날 날이 꼭 있을 겁니다."
일속 대사는 말을 마치고 몸을 솟구쳐 날아올랐다. 넓은 소맷자락이 공중에 날리더니 눈 깜짝할 새에 보이지 않았다.
홀로 남은 황약사는 임안 시내를 며칠 돌아다녔다.
하루는 경성의 취원(翠苑)을 찾아갔다. 그곳은 지난날 송나라의 명기 이사사(李師師)가 거처하던 곳이었다.
밤이면 휘종(徵宗)이 이리 통하는 지하 통로로 나와 이사사를 만나곤 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찾아오는 구경꾼들의 탄식만 자아낼 뿐이었다. 휘종은 비록 혼용한 임금이었지만 그림과 서예만은 천하에 보기 드문 솜씨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새를 그리는 솜씨와 수금체(瘦金體) 법서(法書)는 실로 천하의 명화, 명필이었다. 명기 이사사의 거처에 휘종의 그림과 글이 몇 폭 있었는데, 그 중에도 <학명구천도(鶴鳴丸天圖)>는 보는 사람의 절찬을 자아내게 했다.
금빛이 휘황한 황궁과 그 위를 구성지게 울며 날아오르는 백학들. 그로 하여 황궁이 더욱 깊이 있고 위엄 있게 보여 그 그림을 보는 이들을 숙연하게 했다. 그림의 변두리에는 도종(道宗) 황제가 친필로 쓴 제사(題詞)가 있었다. 글은 그림을 돋보이게 하고 그림은 글을 돋보이게 했다. 황약사는 자기도 모르게 아, 하고 장탄식을 터뜨렸다.
"손님께선 무슨 탄식을 그렇게 하시오?"
누군가 옆에서 말하는데, 목소리가 우렁찬 게 범상한 사람이 아닌 듯했다. 돌아보니 그 사람의 모습이 참으로 이상했다. 가죽으로 만든 쭈글쭈글한 옷을 입었는데 더운 날씨에 입고 다니느라 한 쪽 어깨를 드러내 놓고 있어 이역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안에 입은 긴 속옷도 횐색에 아무 무늬도 없는 것이 역시 오랑캐 복색이었고, 발에 신고 있는 가죽장화도 무겁고 둔하게 생긴 것으로 보아 오랑캐 장화가 틀림없었다.
그는 고집스럽고 형형하게 빛나는 눈길로 황약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황약사는 이 사람이 분명 경성 사람이 아니라고 짐작했다. 경성 사람이라면 적대감부터 앞서는 그였으므로 이역 사람을 만나니 자연 호감이 느껴졌다. 황약사는 얼굴에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이 황제께서 글도 명필이고 그림도 훌륭하니 아예 글이나 쓰고 그림이나 그리며 지내는 것이 황제로 계시는 것보다 더 좋았을 걸, 공연히 황제 노릇을 하신 게 안타까워 탄식한 거요."
"정사를 잘못 보는 황제가 퇴위하여 서예를 하면 얼마나 잘하겠소? 제위에 있으면서 정사는 되는대로 보고, 시간이 남으니 글씨도 늘고 그림도 늘어 명필이 되었을 뿐이지요. 세인들은 저 황제께서 붓글씨와 그림에 능함을 알아야 하지만, 그보다도 제위에 앉았기에 글씨와 그림에 시간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요."
그 말에 황약사는 이 사람에 대한 인상이 대번 좋아졌다. 중원이라는 이 장룡와호지지(藏龍臥虎之地)에서 어제는 천외기인(天外奇人) 같은 일속 대사를 만나더니 오늘은 언변이 범상치 않은 이역 사람을 또 만났지 않는가? 황약사는 동해에서 나오자마자 이런 사람들을 만나 보니 지금까지 가졌던 자기의 견식이 실로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느낌이 더해졌다. 일속 대사와 눈앞의 이 이역 사람만 해도 자기보다 무술이 약한 사람 같지 않았다.
이 사람은 용맹할 뿐만 아니라 오기도 제법 있어 보였다. 황약사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원래 예의 같은 것을 가볍게 보는 사람이었다. 선현 성인의 글을 수없이 본 그였다. 도화도에서 심심풀이로 책을 읽다가 '성인의 말도 엉터리구나' 라고 적은 쪽지를 책에 끼워 두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 만난 이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같은지라 불현듯 친구로 사귀고 싶어 가까이 다가서며 읍을 했다.
"선생께서도 여기서 휘종 황제의 그림을 관람하고 계셨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왜 여기 서 있겠소. 황제질은 잘 못했지만 글씨와 그림이 그만하면 제법인데다가 미녀와 풍류를 즐겼으니, 사람이 세상에 한번 나서 그렇게 살아 보면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그는 껄껄 웃어댔다. 호방하고 거리낌 없는 웃음이었다.
황약사는 그 말과 태도에 이 인간이 심성이 바르지 않은 사파(邪派)의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황약사는 무엇보다 겉과 속이 다른 군자들을 더럽게 보는 소탈한 사람이었으므로 그에게 그다지 큰 반감은 가지지 않았다.
황약사는 빙긋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선생의 주옥 같은 말씀을 들으니 깨우치는 바가 많은데, 선생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경성엔 무슨 용건이 계십니까?"
"나는 이역 사람입니다. 서역(西城) 백타산(白陀山) 아래 사는 평민으로 이름은 구양봉(歐陽鋒)이라고 합니다."
백타산 사람이라는 말에 황약사는 적이 놀랐다. 서역에 한 파의 무공이 있는데 그 술수가 신비하고 교묘하기 그지없어 중원 무림이 모두 혀를 내두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것이다. 그 사파(邪派)의 무술이 극히 음험하고 악독하여 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구양봉이라는 사람이 무림의 인사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사파의 고수란 말인가?
황약사는 이 사람과 자웅을 겨루어 보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고향을 떠나 임안에 당도하자마자 일속 대사를 만난 그는 중원 무림을 얕잡아 보지 않게 되었는데, 오늘 구양봉을 대하니 더욱 그를 경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구양봉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황약사는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구양봉에게 말했다.
"구양 선생의 주옥 같은 말씀에 제 가슴이 다 후련합니다. 소생과 함께 이 취원을 한번 돌아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구양봉은 통쾌하게 껄껄 웃으면서 대꾸했다.
"소인의 말을 탓하지 않으니 고맙습니다. 함께 이 취원을 돌아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지요. 그럼 가 봅시다."
구양봉은 황약사를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황약사가 수평을 혼내 주고 일속 대사와 겨루던 그 자리에 그도 있었던 것이다.
취원 이사사의 거처에 들어가니 단청을 새긴 들보와 기둥, 수놓은 비단으로 드리운 휘장, 그리고 주보옥기(珠寶玉器)들이 그 사치와 호화로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침상 위에는 옥으로 정교하게 만든 아름다운 머리 장식품들이 있었다. 정성들여 가지런히 진열한 품이 마치 금방 일어난 미인은 봄빛 무르익은 들로 나가고 없고, 미인의 향기로운 체취만 남아 떠도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름다운 머리 장식품들을 보던 구양봉은 부지중에 큰소리로 탄식했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휘종 황제처럼 살면 무슨 여한이 있으랴."
그 소리에 곁에 있던 사람들은 사뭇 놀란 얼굴로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심경은 구양봉과 달랐다. 휘종 황제는 이사사와 치정을 벌인 방탕한 황제였다. 몇 대를 훑어봐도 휘종같이 음탕한 황제는 없었다.
일국의 황제로서 미인 후궁들도 몇 백은 있었을 텐데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기생 이사사에게 내왕하는 비밀 통로까지 만들었다니 그야말로 천하에 보기 드문 음탕한 황제가 아닌가.
이런 황당한 황제가 있으니 송의 두 황제가 금에 잡혀 가는 수치스러운 일이 생겼으며, 금에게 송의 금수강산을 빼앗긴 것이다.
비록 입으로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백성들 모두가 이렇게 휘종 황제를 욕하고 있었다.
그런데 구양봉이 휘종 황제를 부러워하는 소리를 했으니 사람들이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런 심경을 눈치 채지 못한 구양봉은 마음대로 떠벌렸다.
"황 형, 황 형도 황제가 되면 휘종처럼 마음껏 재미를 볼 게 아니오? 다른 바보 황제들처럼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종일 상소장들을 보고 공문을 결재하느라 고생할 게 뭐요? 한평생 그렇게 고생만 하다가 늙어 빠지는 황제라면 난 시켜 줘도 안 하겠소."
황약사 역시 구양봉의 말에 동감이었다. 그는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구양봉을 비범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무공 실력을 겨루어 보고 싶은 생각이 불일 듯하는 것을 느끼며 황약사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과연 고견이오. 소생은 정말 탄복했습니다."
황약사는 슬그머니 구양봉 앞으로 다가가 몸을 교묘하게 접근시키면서 돌연 내력을 썼다. 이 느닷없는 공격을 받은 구양봉은 단번에 저만큼 밀려갔다.
"황 형, 왜 이러는 거요?"
구양봉은 소리쳤다.
황약사는 내심 우스웠다. 구양봉은 무공이 전혀 없는 사람이 분명했다. 고수라면 즉각 반응해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의 내력을 막아 버릴 것이 아닌가?
구양봉은 황약사를 바라보며 미심쩍은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황 형이 비틀거리는 바람에 내가 밀린 것 같지는 않은데?"
"정말 미안하오. 취원 구경에 정신을 팔다 그만 실수를 했소.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오."
구양봉은 눈을 껌벅거리며 황약사를 바라볼 뿐 더 말이 없었다.
취원을 돌아보고 나서 그들은 혜인루(慧人樓)라는 주루를 찾아 갔다. 혜인루라고 이름하였으니 이 주루에 올라 술을 먹는 사람은 모두 총명한 사람이어야 할 터인데, 주루의 손님들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고주망태가 된 취객 몇이 여기저기 쓰러져 혀 꼬부라진 소리로 뭐라고 지껄여 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한 곳에선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 하나가 술친구 서넛을 데리고 개구리 세기 장난을 하고 있었다.
술에 흠뻑 취한 탓에 혀가 꼬부라져서 내뱉는 소리가 웅왈웅왈 개구리 소리처럼 똑똑히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두 눈을 개구리처럼 부릅뜨고 '개구리 세기'를 한다고 야단이었다.
"개구리 하나 입 하나, 눈 두 개에 다리 넷, 풍덩 소리 한 번에 물속으로 뛰어든다. 개구리 둘 입 둘, 눈 네 개에 다리 여덟 개, 풍덩풍덩 물에 뛰어든다. 개구리 셋 입 셋……, 개구리 셋이면 눈이 몇 개지?"
그러자 고주망태가 된 취객들이 멋대로 지껄였다.
"개구리 세 마리면 눈이 다섯 개."
"다섯 개? 왜 다섯 개냐?"
"개구리 한 마리는 외눈이니 다섯 개지. 하하하!"
그러자 다른 자가 말했다.
"틀려, 틀리다니까. 개구리 세 마리면 눈이 일곱 개야. 믿지 못하겠으면 이걸 봐. 이 놈 개구리도 눈이 하나, 둘……."
그는 손가락까지 꼽아 가며 제 술 동무들의 눈을 하나하나 세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취태만상이었다.
황약사와 구양봉은 껄껄 웃었다.
"틀림없는 술 미치광이들인데 혜인(慧人)이 뭔가, 혜인이……."
그런데 그 말을 취객들이 들었다. 그들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뭘 하는 것들인데 그따위 소리야! 그래, 우리가 혜인이 아니면 네가 혜인이란 말이냐?"
그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두 사람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황약사가 손만 한번 들면 그들은 무리로 쓰러지고 말 것이지만 그는 가만있었다. 구양봉의 솜씨를 좀 구경하려는 속셈이었다. 어쩌면 구양봉이 자기 무술을 감추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황약사는 이번 기회에 구양봉의 실력을 보고 싶었다.
취객들이 치고 박는 대상은 황약사와 구양봉 둘이었으나 황약사는 잘 피했으므로 얻어맞는 사람은 구양봉뿐이었다.
"이것들이 왜 이러나, 이 미친놈들아!"
구양봉은 팔뚝을 마구 내저으며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취객들은 구양봉과 황약사를 두드려 패느라 정신이 없었다.
황약사는 내공을 쓸 줄 아는 사람이므로 취객들의 주먹이나 발길이 그의 몸에 부딪치면 얼음에 부딪쳐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 같아, 그들이 아무리 힘을 주어도 제대로 때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구양봉에게 가해지는 주먹질과 발길질은 그렇지 않았다. 살갗이 툭툭 터지는 듯한 아픔을 참지 못해 구양봉은 아우성을 쳤다.
"개자식들! 왜 죄 없는 사람한테 이 지랄들이야!"
구양봉은 소리를 지르며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무술 밑천을 다 긁어 내어 마구 치고 박았다. 하지만 구양봉의 무술이라야 별로 신통한 것이 못 되었으므로 상대방의 급소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그러자 험상궂게 생긴 작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 자식, 내가 본때 좀 보여 줘야겠다."
그가 후닥닥 달려들더니 구양봉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그 주먹이 얼마나 셌던지 구양봉은 그만 "으악!" 하고 쓰러져 버렸다.
"날 죽여라, 이 놈아! 차라리 날 죽여!"
"죽이라면 못 죽일 줄 알고! 이 놈아, 개구리 세 마리 눈이 몇이냐?"
놈들은 정말 구양봉을 죽일 듯이 덤벼들어 주먹들을 휘둘렀다.
"개자식들, 네 에미 눈깔이 일곱 개다."
구양봉은 얻어맞으면서도 욕을 퍼부었다.
"이 놈, 네 에미 눈깔이 일곱 개라고 해라. 눈깔이 일곱 개면 칠목(七目) 승냥이다. 네 에미가 칠목 승냥이지."
험상궂게 생긴 자가 눈알을 번득이며 구양봉에게 을러댔다.
그 말에 취객들은 껄껄 웃으며 재차 달려들었다.
술집 주인은 마음이 다급했으나 자기 재주로는 싸움을 말릴 수가 없으므로 그저 한켠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제발 이러지들 말라고 애원을 했다.
이윽고 취객들도 어지간히 맥이 빠졌고 황약사와 구양봉도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얼굴에는 멍이 들어 엉망이었다. 취객들은 기고만장하여 마지막으로 따져 물었다.
"항복할래? 안 할래?"
"항복? 항복은 무슨 개떡 같은 항복이냐? 네 놈을 박살내고 말테다."
구양봉은 벌떡 일어나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주먹을 한 번 날리니 구양봉은 그만 허깨비같이 나뒹굴며 "아이고, 아이고." 하는 신음만 연발했다.
황약사는 구양봉이 당하는 꼴이 은근히 재미있었다. 그는 갑자기 공손하게 취객들에게 읍을 했다.
"소생 황약사는 동해 도화도 사람이올시다. 섬은 비록 황량하나 금이 많이 나지요. 여러분께서 소생의 안면을 봐서 저 구양 동생을 용서해 준다면 가지고 온 금을 모두 여러분께 드리겠습니다."
황약사가 금을 갖고 있다는 말에 취객들은 술이 번쩍 깼다.
"거 참 듣던 중 반가운 말이다. 정말 그렇다면 너희들 목숨은 살려 주지. 그러나 이 나으리를 속였다간 이 주먹에 네 놈들 목숨이 남아 있지 못할 줄 알렷다!"
누군가 이렇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 말에 황약사는 무서워 부들부들 떠는 척하며 굽신거렸다.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제 명에 죽지 못해 환장해서 그런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 말에 취객들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술판에 뒹굴다가 병신같은 놈들을 실컷 패주고 횡재까지 했으니 이런 복이 어디 있는가? 속에서는 웃음이 끓어올랐으나 험상궂게 생긴 자는 짐짓 사나운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잔말 말고 금을 이리 내놔. 금만 주면 살려 주겠다."
'더러운 놈들, 어디 죽어 봐라. 저승에 가서도 이 황약사 소리만 들으면 벌벌 떨게 만들어 놓을 테니.'
속으로는 이렇게 벼르면서도 황약사는 무서워 오금을 못 쓰는 것처럼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제발 때리지 마세요. 더 맞으면 목숨이 끊어진다구요. 그저 우리 두 사람 입에 풀칠이나 하게 한 조각만 남겨 주시면 됩니다."
금을 내놓기도 전에 조금만 남겨 달라고 애걸하는 꼴만 보아도 거짓은 아니겠다 싶어 취객들은 그만한 사정을 보아 주기로 했다.
"그럼 요만큼 남겨 주겠다."
그들은 황약사의 품에 지닌 금덩어리가 이미 자기 것이 된 것처럼 벌써 선심을 썼다.
황약사는 손을 후들후들 떨며 보따리를 펼쳤다. 목을 늘이고 들여다보던 취객들은 놀라서 환호성을 질렀다. 보따리에는 정말 금엽자(金葉子)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 이 혜인루를 통째로 사고도 남을 것 같았다.
금을 본 취객들은 가슴이 뛰고 눈에는 핏발이 섰다. 험상궂은 자가 다급히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가만있거라!"
취객들은 흠칫 놀라 모든 동작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험상궂은 사나이는 갑자기 껄껄 웃었다.
"우리가 심하게 다루었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 말게. 우리가 자네들 금을 빼앗을 수야 없지. 우린 강도가 아니니까, 싸움 끝에 정이 든다는데, 어디 조용한 데로 가서 얘기나 하며 우정을 쌓는 게 어떻겠나."
황약사는 이 험상궂은 사나이의 말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두려운 기색을 보이며 말문을 열었다.
"노형과 교분을 갖는 영광을 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일견여고(一見如故)라는 말도 있잖나. 만나고 보니 친구인데 뭘 그리 고마워 하는가? 자, 어서 가세."
그런 다음 험상궂은 사내는 그의 일행에게 눈짓을 보냈다. 취객들은 그 뜻을 알아채고 둘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구양봉은 황약사가 그렇게 선선히 금을 내줄 위인이 아니라는 것과 놈들에게 당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순순히 끌려갔다.
그들은 두 사람을 끌고 마차에 올랐다.
"빨리 성문을 벗어나라."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눈을 부라리며 마부에게 소리쳤다.
말이 뛰기 시작하자 마차는 금방 성문을 벗어나더니 이윽고 한적한 교외로 나갔다.
"됐어, 됐어. 여기가 조용하구나. 내려라."
모두들 마차에서 내렸다. 주위를 둘러본 황약사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조용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집도 한 채 없고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멀리 호수 위에 떠 있는 돛단배 몇 척뿐이었다.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는 마차가 멀리 사라지자 한바탕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의 떨거지들도 좋다고 히히덕거렸다.
"그 금을 이리 내라."
험상궂게 생긴 자가 본색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제기랄, 다 가져가요."
황약사가 보따리를 땅에 내려놓자 취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앞을 다투어 금을 손에 쥔 놈들 중에는 그것을 급히 품에 넣는 자도 있었고 입에 넣고 깨물어 보는 자도 있었다.
"이 자식들, 못 내려놔?"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꽥 소리를 내질렀다.
그 바람에 움찔 놀란 떨거지들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할 수 없이 그 금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래도 당신 마음이 좋군요. 남들은 금을 보자 욕심이 동해서 야단인데 노형은 진짜 군자군요. 소생은 진짜로 탄복했습니다."
황약사가 기뻐하는 꼴을 보고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그를 비웃었다.
'이 바보야, 남들은 물욕이 동해서 그러지만 난 살기가 동해서 그런다. 소문이 나기 전에 네 놈들 둘을 죽이고 볼 일이다. 금이야 이젠 떼어 논 당상이니 날아가지야 않겠지.'
득의양양해진 놈은 또 너털웃음을 웃었다.
"난 물욕이 아니라 살기가 동해서 그런다. 이 놈들, 어디 내 손에 죽어 봐라."
"이……이러지 마십쇼. 제발 이러지 마세요. 금을 몽땅 드릴 테니 목숨만 살려 주세요. 절대 고발은 안 할게요. 경조윤(京兆尹)한테도 지휘사(指揮使)한테도 고발을 안 할게요. 난 당신들을 몰라요……. 당신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난 기억도 못해요."
황약사가 벌벌 떨며 이런 소리를 하자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와 그의 떨거지들은 더욱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놈 말하는 꼴 좀 보게. 어디다가 고발해야 한다는 것도 빤히 아는 걸 보니 놔 두면 제꺼덕 고발할 놈이군 그래. 당장 죽여 버려야지.'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난 자넬 죽여야겠네. 고발은 놔두었다가 염라부에 가서 하게."
험상궂게 생긴 놈은 대뜸 시퍼런 칼을 들더니 두 사람의 가슴팍을 겨누었다. 황약사는 언뜻 구양봉을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구양봉은 태연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저 사람이 정말 무술이 있어 저러는 건가? 무공이 높지 않으면 저렇듯 침착할 수가 없지. 나야 물론 두려울 것이 없지만 구양봉도 그렇단 말인가? 그럼 내가 구양봉을 잘못 보았단 말인가? 어쨌든 구양봉도 이번엔 본색을 드러내게 되었군.'
그런 생각을 하다가 황약사가 소리쳤다.
"잠깐!"
"왜 소리쳐? 소리친다고 살려 줄 줄 아느냐?"
"한 가지 요청이 있습니다. 저 사람을 먼저 죽이시오. 그 다음에 내가 죽겠소."
"그럼 그러지. 금을 내놓은 공을 봐서 네 놈은 조금 있다가 죽이고 우선 저 놈부터 요절을 내자."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는 구양봉의 머리에 칼을 내리치려 들었다. 만약 구양봉에게 무공이 없으면 영락없이 머리가 쪼개질 판이었다. 황약사는 손에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를 들고 있었다. 구양봉이 움직이든가 놈의 칼이 구양봉의 머리 위에 내리쳐지는 찰나에 손을 써서 그를 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구양봉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제발 살려 주세요!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이라도 있느냐?"
구양봉이 험상궂은 자를 보고 눈을 빛내며 물었다.
"우리 둘 중에 누가 금을 가졌지요?"
"금이야 저 녀석이 내놨지."
"그러니 저 사람 보따리에 금이 없었다면 이런 변이 생겼겠어요? 금이 없었다면 당신이 우리를 죽일 생각은 안 했을걸요."
구양봉의 말에 누군가 말했다.
"금만 지니지 않았다면야 너희 같은 놈들은 비린내가 나서도 칼을 안 대지. 밥 먹고 할 짓이 없어 그런 헛일을 하겠느냐!"
"저 사람의 금이 이런 판국을 만들었으니 저 사람부터 죽이는 것이 이치에 맞잖아요. 저 금만 없었다면 난 고작해야 매나 몇 대 맞고 끝났을 텐데, 재수 없게 곁달아 죽게 되었으니 이렇게 억울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지옥에 가도 난 애매하게 죽은 원귀가 될 거라구요. 그렇잖아요? 먼저 죽을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보라구요."
취객들은 그 말을 듣고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황약사가 돌연 늠름하게 외쳤다.
"그래, 정말 나를 죽일 셈이냐?"
"그렇다. 네 놈도 죽일 테다!"
험상궂은 자는 그렇게 부르짖으며 황약사에게 덤벼들었다.
그 순간 황약사의 손길이 한 번 번뜩하더니 험상궂은 자는 소리도 미처 못 지르고 종잇조각처럼 날아가 호숫물에 풍덩 머리를 처박았다. 그 뒤로는 호수의 파문만 보일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취객들은 걸려도 대단히 잘못 걸렸다는 것을 깨닫고 뿔뿔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황약사가 손길 한 번 번뜩일 때마다 놈들은 차례로 호숫물에 머리를 박았다. 순식간에 일이 끝나고 넓은 들판엔 황약사와 구양봉만 남았다.
"서역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의 무술은 주먹질 한 번이나 발길질 한 번이면 사람 목숨을 끊는다는 말을 들었지만, 오늘 황 형의 무공을 눈으로 보고서야 그것을 믿게 되었소."
구양봉의 말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왜 나 먼저 죽이라고 했소?"
황약사의 기색이 험악했다. 구양봉의 대답이 조금만 시원치 않아도 대번에 그를 죽여 버릴 기세였다. 구양봉 하나 죽이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손 한 번 움직여 혈도를 막아 버리고 호수에 처넣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구양봉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놈들 손에 죽을 황 형이 아니어서 그랬소."
"만일 놈들이 나를 죽였다면 어쩔 뻔했소?"
"나도 따라서 죽었겠지요."
황약사는 마음이 꿈틀했다.
'보통 인물이 아니군. 비록 지금은 이렇다 할 무술을 지니고 있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두각을 나타낼 인물임에 틀림이 없어. 어쩔까? 아예 여기서 죽여 버려?'
그런데 구양봉이 황약사를 보고 갑자기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오? 날 죽일 생각을 하고 있소?"
"그렇소. 당신을 죽여야 내가 살인범으로 쫓기지 않지."
느릿느릿한 황약사의 말에 구양봉은 가슴이 섬뜩했다. 하지만 그는 예사스럽게 대꾸했다.
"누군가 황 형이 천하의 영웅이라고 한다면 나는 즉시 반대할 것이오."
"그건 왜 그렇소."
"그렇게 여러 번 내 무술을 시험해 보려고 한 걸 내가 모르는 줄 아시오? 나에게 무공이 있으면 놈들이 내 털끝 하나 못 다치게 했지, 수치스럽게 얻어맞았겠소? 장차 나도 무술을 배우면 꼭 황 형과 겨루어 보고야 말겠소."
구양봉을 바라보던 황약사가 화를 내기는커녕 갑자기 껄껄 웃어댔다.
"구 형, 그 꼴 참 좋군."
그러자 구양봉도 황약사를 보고 박장대소했다.
"황 형 몰골은 다른 줄 아우?"
구양봉은 두 눈이 감길 정도로 유쾌하게 웃어젖혔다.
그러다가 눈을 떠보니 황약사가 보이지 않았다. 호수와 들판은 보였으나 사람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호수는 잠잠했다. 물 위에 떠오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황약사가 손길 한 번 움직이는 바람에 모두 수중고혼이 된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면 황약사처럼 살아야지. 그래야 사내대장부지."
구양봉은 주먹을 움켜쥐며 결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천하 무쌍의 무술을 익히고 말 테다. 두고 보자, 황약사. 언젠가 너와 자웅을 겨루어 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