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주당들의 짤막한 이야기 모음
문성(文星) 그리고 주성(酒星) - 윤회
윤회(尹淮, 1380 ∼1436)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윤회는 당대의 주당으로 세종이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하루에 술 석잔 이상을 마시지 말라고 명령했을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술 석 잔은 그에게 너무나 적은 양이었다. 윤회는 꾀를 냈다.
술을 먹을 때마다 반드시 가장 큰 그릇으로 석 잔씩을 마시기로 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은 웃으며, "내가 술을 적게 먹게 하려고 한 것이 오히려 술을 많이 먹게 한 꼴이 되었구나."라고 탄식했다 한다.
어느 날 윤회는 술에 만취되어 부축을 받고 왕 앞에 불리어 나갔다.
그러나 윤회는 만취한 가운데서도 왕의 명대로 글을 써 내려갔다.
붓대가 나는 듯이 움직이자 세종은 참으로 천재라고 탄복하였다고 한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문성(文星)과 주성(酒星)의 정기가 합하여 윤회와 같은 현인을 낳았다'
고 말했다고 한다.
풍류를 사랑한 왕자 - 양녕대군
양녕대군 (讓寧大君, 1394∼1462)은 이름은 이제, 자는 후백(厚伯)으로 태종의 장남이자 세종의 형이다.
태종 4년(1404)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일을 많이 했다.
양녕대군은 공부는 뒷전으로 두고 여색을 탐하며 궁궐 담을 뛰어넘어 잡인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즐겼다. 그의 곁에는 항상 술이 끊이지 않았고 술과 더불어 기생들과 질펀하게 놀기를 즐겼다고도 한다.
그러나 시(詩)와 서(書)에 능하였고, 세자 자리에서 물러난 후 방방곡곡을 유람하며 풍류객들과 어울려 사귀다가 일생을 마쳤다.
충녕, 즉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의 기행은 그치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술과 풍류를 즐겼다.
그의 술잔은 말가죽신 - 이사철
이사철
이사철(李思哲, 1405∼1456)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역사가는 이사철이 종친이었으므로 일찍부터 현달했으나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가부를 명백히 결단하지 못하는 결점이 있었다고 평한다. 또 술을 무척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이사철이 젊은 시절 여러 벗들과 삼각산으로 놀러갔다. 그런데 산으로 올라가서 보니 모두가 술은 가지고 왔으나 술잔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 함께 온 사람 가운데 새로 만든 말가죽신을 신은 이가 있었다. 이것을 본 이사철이 그 신을 벗게 한 후 그 신에 술을 담아 먼저 마셨다. 이것을 본 다른 친구들도 그 신에 술을 담아 차례로 술을 마셨다. 서로 보며 크게 웃고 말하기를,
"가죽신 술잔의 고사를 우리가 지어도 괜찮겠소." 라고 했다.
대식가(大食家)이자 대주가(大酒家) - 홍일동
홍일동(洪逸童, ?∼1464)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호는 마천(麻川)이다.
세조 10년(1464) 행상호군(行上護軍) 선위사(宣慰使)로 홍주에 갔다가 거기서 과음으로 죽었다. 그는 사부(詞賦)를 잘 짓고 술을 즐겨 마셨다 한다.
홍일동은 홍길동의 실제 형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홍일동은 술을 잘 마셨고 취하면 풀피리를 만들어 즐겨 불었다고 한다.
그는 엄청난 대식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진관사로 놀러갔을 때 떡 한 그릇, 국수 세 그릇, 밥 세 그릇, 두부, 청포 아홉 그릇을 먹고 내려오다가 산 아래서 다시 삶은 닭 두 마리, 생선국 세 그릇, 어회 한 그릇, 그리고 막걸리 40여 잔을 비워 주위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술 정치의 대가 - 세조
세조
세조(世祖, 1417~1468)는 조선 제 7대 왕으로 세종의 둘 째 아들이다. 세조는 무예에 능하고 병서에 밝았다. 세종 승하 후 왕위를 계승한 문종이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고 12세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3년 만에 단종이 선위(禪位: 임금의 자리를 물려줌)하게 하고 왕위에 오른다.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국방력 신장에 힘쓰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으나,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이유로 많은 저항을 받았다.
세조는 신하들과 술자리를 자주 가졌다. 이는 세조의 왕위 계승이 정당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초기부터 왕위에서 물러날 때까지 자주 종친이나 공신, 다른 여러 신하들에게 술자리를 마련하여 친화의 계기로 삼았다. 정치적 목적으로 술을 사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역시 술을 좋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세조가 집권하던 시절 많은 신하들이 술병에 걸려서 일찍 죽기도 했다고 한다.
한 말이 들어가는 술잔 - 손순효
손순효(孫舜孝, 1427~1497)는 조선시대 문인으로 옛 사람의 고사에서 삼휴(三休: 쉴 수 있는 세 가지 이유)와 사휴(四休: 자기 처지가 좋은 네 가지 이유)를 인용해 자신의 호를 칠휴거사(七休居士)라고 지었다.
성종은 손순효의 재주를 매우 사랑하여 그가 술을 자주 마시는 것을 늘 염려했다. 그래서 성종은 손순효에게 부분적인 금주령을 내렸다.
“경은 이제부터 하루에 석 잔 이상을 마시지 말라.”라고 했다.
그 후 임금이 손순효를 불렀다. 그런데 손순효는 술에 취해 흐트러진 차림새로 나타났다. 호통을 치는 임금에게 손순효는 술을 권하는 바람에 반주로 술 석 잔을 마셨을 뿐이라고 둘러댔다. 그러나 그 잔은 한 잔에 한 말이 들어갈 정도로 큰 잔이었다.
임금은 손순효가 술에 취해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을 부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손순효는 정신을 가다듬더니 한 번에 표문을 완성하였다.
이에 성종은 감탄하여 그에게 술상을 내렸다. 그리고 그가 마음껏 먹도록 허락하였다. 이에 술을 마음 놓고 마신 손순효는 너무 취하여 일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임금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에게 덮어주고 내전으로 들어갔다.
노여움과 슬픔을 달래준 술 - 김시습
김시습(金時習, 1453~1493)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3살 때부터 시를 지었으며 신동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김시습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겪으며 가치관의 혼란과 인생살이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그 이후, 벼슬길에 대한 꿈을 접게 된다. 김시습의 짙은 노여움과 슬픔을 달래주었던 것은 바로 술이었다. 그는 지조를 팔아 목숨을 부지했던 당시 사람들과 절개를 꺾은 변절자들을 질타하며 통렬한 풍자의 시를 지었다.
김시습의 옛 글벗 신숙주는 항상 떠돌아다니는 김시습이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하루는 사람을 시켜 김시습을 대취하게 만든 뒤에 그를 집으로 데려오게 하여 좋은 옷으로 갈아입히고 비단이불을 덮어 재웠다.
술에서 때어난 김시습은 깜짝 놀랐다. 그는 곧 자신이 변절자 신숙주의 집에 있음을 깨달았다. 자기에게 입혀진 좋은 옷을 보더니, 그 좋은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집을 나섰다. 신숙주가 급히 와서는 나가는 그의 손을 잡았다.
“이왕 온 거, 밥이라도 먹고 가게. 제발.”
그러나 김시습은 잡힌 손을 뿌리친 채 한바탕 욕설을 그에게 퍼부었다.
“이 손 놔라 놔! 니가 입은 좋은 옷과 신발은 백성의 가죽이요, 니가 먹는 맛있는 음식은 백성의 살과 피라는 사실을 알기나 하느냐?
난 그런 것에 조금도 미련이 없다. 너나 백성의 가죽과 피를 먹고 배불리 살아라!”
이처럼 조정 대신들 치고 길거리에서든지 집에서든지 김시습에게 한두 번 망신당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왕위와 바꾼 평생의 친구, 술 - 월산대군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의 본명은 이정(李정), 호는 풍월정(風月亭)이다.
조선 전기의 종실로 성종의 형이다.
사실상 왕위계승권을 성종에게 넘겨준 월산대군은 이후 현실을 떠나 자연 속에 은둔하여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후에 양화도 북쪽 언덕에 망원정(望遠亭)을 짓고 서적을 쌓아둔 채 시문을 읊으면서 풍류 넘치는 생활을 한다. 그의 시는 중국에서도 널리 애송되었다.
성품은 침착하고 깨끗했으며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하였다. 성종의 형이었기 때문에 월산대군은 함부로 처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연 속에 은둔하며 조용히 사는 삶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조를 보면 유유자적하고 한가로운 삶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들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역으로 그가 외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운데 그의 벗이 되어 준 것이 술이었다. 그가 쓴 술에 관한 시조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창밖에 국화를 심고 국화 밑에 술을 빚어 놓니
술 익자 국화 피자 벗님오자 달이 솟네
아희야 거문고 청처라 밤새도록 놀아보리라.
유유자적한 그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시조다. 그러나 왕위를 동생에게 내주고 은둔해야 했던 심정을 월산대군 외에 또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술이 월산대군의 마음을 달래주는 친구요, 위로였음은 자명한 일이다.
국화와의 대작 - 신용개
신용개(申用漑, 1463∼1519)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신숙주의 손자이다. 신용개는 글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성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성품이 호탕하고 술을 좋아했다고 한다. 때로는 늙은 계집종을 불러 서로 큰 잔을 기울여 취하여 쓰러져야 그만두기도 하였다.
국화를 좋아해, 여덟 분(盆)을 길렀는데, 하루는 그가 집안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오늘은 좋은 손님 여덟 분이 오실 것이니 술과 안주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라.”
그러나 해가 저물어 가는데도 손님은 오지 않았다.
이윽고 밤이 됐고, 달이 떠오르자 국화의 꽃빛과 달빛이 흐드러져 희고 깨끗하였다. 그제서야 그는 술을 내오라 이르고, 여덟 개의 국화 분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것이 내 좋은 손님들이다.”
하고는 화분마다 각각 두 잔씩을 따라 주고 끝냈는데, 신용개도 또한 취하였다.
기생의 소매 자락에 시를 쓴 사대부 - 강혼
강혼(姜渾, 1464~1519)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도량이 크고, 작은 일에 거리낌이 없는 호방한 사람으로 특히 시문에 능한 풍류객이었다.
강혼은 젊은 시절 진주에서 살았다. 관직에 나아가지도 못한 때였지만, 그는 진주의 관기와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기녀가 진주목사의 수청을 들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관기의 신분으로 관의 명령을 거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청을 들러 가는 기생을 보며, 강혼은 그 기녀의 소매에 시 한수를 적어 준다. 미처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기녀는 진주목사에게 갔다.
그런데, 기녀의 소맷자락에 쓰인 시를 발견한 진주목사가, 이 글을 지은 사람을 빨리 찾아오라며 엄명을 내렸다. 모두들 진주목사가 강혼에게 큰 벌을 내리리라 여겼다. 그러나 진주목사는 불려온 강혼에게 오히려 술상을 대접했다.
목사는 강혼에게 글이 매우 좋으니 좀 더 공부하여 과거를 보고 벼슬에 나아갈 것을 권고했다. 좋은 시를 알아보는 진주목사의 혜안 덕에, 강혼은 진주기생과의 인연을 이후에도 지켜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파격의 주선(酒仙) - 연산군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은 성종의 맏아들로 조선조 제 10대 왕이다.
재위 초기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죽음을 알고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이고, 또 조모인 인수대비를 구타하기도 하며 윤씨가 폐비가 되는데 찬성한 사람들 수 십 명을 죽였다.
또한 각 도마다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를 파견해서 아름다운 여인과 좋은 말을 구해 오게 해, 춤과 술과 노래를 즐겼다. 미녀라면 다른 사람의 아내를 뺏는 일도 서슴지 않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쫓아내 그곳을 놀이터로 삼기도 했다.
결국 중종반정(1506)으로 폐왕이 되며 연산군으로 강봉되고 그 해 병으로 죽었다.
연산군은 폭군이라 불리운다. 자신의 퇴폐와 향락 때문에 스스로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혹자는 연산군을 파격적인 주선이라고도 한다.
권력이 두렵지 않은 주당 - 박은
박은(朴誾, 1479∼1504)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학자로 호는 읍취헌(읍翠軒)이다.
15세에 이미 문장이 능하여 그를 기특하게 여긴 대제학 신용개(申用漑)가 사위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박은은 당대를 주름잡던 권력자 남곤과 친분이 있었다. 그는 이색과 함께 늘 술을 들고 남곤의 집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나 남곤이 벼슬길에 오른 후에는 그를 만나기가 무척 어려워졌다. 어느 날 박은이 남곤의 집에 갔다가 역시나 남곤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남곤의 집 뒤에는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박은은 그 바위를 만나기 어려운 남곤에 빗대 대은암(大隱岩·크게 숨어있는 바위)이라 불렀다. 또한 그 밑을 흐르는 시내를 만 리 밖에 있는 여울과 같다는 뜻으로 만리뢰(萬里瀨)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풍류객다운 호기이다.
첫댓글 좋은정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