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30년대 문인♥기생 러브스토리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문인과 기생 사이의 연정은 낯선 소재가 아니다. 하물며 ‘연애’라는 말이 처음 수입, 번역되고 사용되기 시작했던 1910년대에는 ‘로망’을 타고 각종 연애담이 봇물을 터뜨린다. 혹자는 본격 연애의 시대가 열리기에 앞서 스타일은 있으나 소통 문법이 아직 개발되지 않은 ‘여학생’의 전초전으로 기생이 연애 도마에 먼저 뛰어든 셈이라는데, 이치상으로 따져 들어가려들면 사랑이야 비듬도 안 날리는 신기루 같은 것. 자신의 기생 ‘여친’에 대해 뒷담화부터 순정 바친 예찬 및 열띤 스토커 행각까지 문인, 기생간 애정 구걸이 이러저러했으니.
박녹주와 김유정_ <봄봄>의 천재작가 김유정은 기생 박녹주를 열렬히 짝사랑했다. 명기명창으로 송만갑의 사사를 받고 각종 레코드사에서 음반을 취입하는 유명인이었던 박녹주는 자신보다 연하인데다 학생인 김유정을 받아주지 않았다. 김유정은 매일 한통씩 편지를 보내며 안달했다. ‘간혹 길가에서 나는 당신을 보았소…’, ‘목욕을 하고 오는 자태는 정말 이쁘게 보였노라…’,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결국 김유정은 33살의 나이에 결핵으로 죽게 됐고 박녹주에게는 부음과 함께 ‘니가 죽였지’라는 김유정 친구들의 저주가 전해졌다.
왕수복과 이효석_ 기생 왕수복은 본명 ‘왕성실’이라는 이름값을 하느라, 평양 기생학교에서 부지런히 노래 연습을 한 끝에 16살에 직업 가수가 되더니, 서른장이 넘는 음반을 내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하나 요란한 언론과 세인의 주목에도 불구하고 그의 꿈은 시인이나 소설가 남편을 만나 낭만적인 살림을 내어보는 것이었다. 훗날 그는 평양 ‘방가로’ 다방 마담이 되는데, 이때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을 만나 연인으로서 그의 임종을 지켰다고 하니… 약간 허탈하긴 해도 반쯤 소원성취한 셈.
금홍이와 이상_ “십팔가구에 각기 밸너들은 송이송이 꽃들 가운데서도 내 안해는 특히 아름다운 한 딸기의 꽃으로 이 함석 지붕 밑 볓 안드는 지역에서 어디까지든지 찬란하였다.” - 이상의 <지주회시>
1935년 초 금홍이의 두 번째 가출 이전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에서 이상이 금홍이를 염두해둔 묘사다. 배천온천에서 만난 이상과 기생 금홍이의 관계는 2년 반 정도로 추정된다. 금홍이는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이상이 본격 교제한 첫 여인이자 가장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여인이었으며, 이상이 유일하게 ‘안해’라는 표현을 쓰면서, “내 의지대로 작용하지 안”아 속을 태웠던 요부로서의 여성상을 그의 작품에 드리웠다.
자야와 백석, 그리고 길상사_ 이상과 금홍이가 종로 우미관 뒤편에서 동거를 하고 있던 즈음 시인 백석과 기생 진향이 명륜동에 살림을 차렸다. 백석은 어느 날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 ‘자야’라는 이름을 그녀에게 지어주는데, 훗날 연인 백석과의 회고담을 그린 책 <내 사랑 백석>(1995년, 문학동네 펴냄)의 필명 ‘김자야’가 이때 탄생한 것이다. 백석 부모의 반대로 혼인을 치르지는 못했지만 백석은 자야와 살던 이 3년 동안 그 사랑에 기대어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쓴다.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던 그가 이북에 가 있는 사이에 분단이 되면서 자야는 백석을 잃는다.
자야는 이후, 3공화국 시절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의 주인으로 기세를 날리다가 1999년 여든세살로 숨지기 전 1천억원대의 부지와 건물을 길상사 회주이자 <무소유>의 저자 법정 스님에게 시주한다. 지금의 길상사다. 성북동 고즈넉한 언덕에 자리한 길상사 한켠에는 성모 마리아와 관세음보살의 영성, 영상을 합친 자애로운 불상이 연인을 잃었지만 영원보다 깊은 사랑을 간직해온 자야, 기생 진향의 마음을 닮고 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