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후반 동북아 국제정세는 200년간 중국대륙에 군림해오던 한족의 명나라가 북쪽 만주지방에서 세력을 모아 강성해지기 시작한 여진족에의해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남쪽의 일본은 150여년간 고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같이 수십여개의 크고 작은 소국으로 분열되어 전쟁과 전쟁을 계속하며 패권을 잡기위해 싸워 왔습니다. 16세기 중반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대부분 점령당하지만 노부나가도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이 직접적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입니다. 이 시기를 일본의 전국시대라고 합니다.
한반도의 조선은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던 우리나라가 200년이라는 비교적 긴 시간동안 평화를 유지해왔습니다. 따라서 전쟁방비에 소홀했습니다. 또 명종이후 완전히 권력을 독점해온 사림이 서로 당파를 형성하여 대립하면서 지도층에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성장하고 힘이 비대해진 무사계급이 권력이 상층부에 있었습니다. 헌데 이들은 원래 전쟁에 종사하던 사람이고 아무리 도요토미에 의해 통일이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불만세력들이 기회를 옅보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히데요시는 그 불만세력의 불만 표출구로 당시 군사력이 많이 약화되어있던 조선침공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임진왜란 발발의 직접적인원인이자 숨겨진 원인입니다.
그럼 표면적인 원인은 ? '정명가도(征明가道)' 즉 명나라라를 정벌하기위해 길을 빌린다‘ 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 이유고 명분을 만들기 위한 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제독의 숭리가 없었다면 동북아 지도가 어떻게 변했을 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역사의 가설입니다. 10만명의 왜군이 서해로 도착하면 명나라도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수년여에 거친 전쟁준비를 마친 일본은 병력은 쓰시마에 집결하게됩니다. 그 병력이 20만여명에 달했다고 하니 일본의 국력을 모두 쏟아 부은 것입니다. 1592년 4월 13일 고니시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제 1군이 쓰시마를 출발합니다. 4월 13일 당일 부산포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다음날 4월 14일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부산진을 공격하는데 그때 부산진을 지키던 장군(부산첨사)인 정발장군, 그리고 동래성부사였던 송상현 장군이 순직 합니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 각은 도주하나 동래성을 반나절동안 수성한 송상현을 왜군이 존경하여 관을 짜서 정중하게 장례를 치루고 묘비까지 세워 줍니다.
그 후 왜군은 상륙한지 10일만에 상주에 도착하나 신립은 조령(지금의 문경세재)을 포기하고 충주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다 패하면서 20여일 뒤 한강에 도착 합니다. 이때 도원수 김명원은 무기를 한강에 버리고 상복을 입고 도망을 갑니다. 만약 천혜의 요새인 조령과 한강에서만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버터었어도 채 한달이 안된 5월 3일 한성이 적에게 함락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한편 소식을 들은 선조는 몽진(임금이 수도를 버리고 피난함)을 결정하고 북으로 북으로 도망칩니다. 신의주까지요. 그 후 조정은 분조(조정을 둘로나눔)를 택하여 본조정은 선조와 영의정,우의정이 신의주에서 맡고, 분조는 광해군의 지휘하에 좌의정이 함경도등 북쪽지방에서 근왕병을 모집하여 대항하게 됩니다. 여기서 광해군이 백성들의 신임을 얻었죠.
상승세를 타던 일본군은 고니시유키나카의 지휘하에 평양까지 진군하게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죠. 애시당초 일본의 조선침공 전략은 '수륙병진(水陸騈進)'이었습니다. 즉 육군이 북쪽으로 진격해나가면 해군이 서해안을따라 식량과 무기를 지원해준다는 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남해 올돌목을 전세계 해군역사에서도 이름높은 이순신 장군이 버티고 서서 그것을 차단합니다. 따라서 평양까지 진군한 왜군은 보급품이 부족해 더이상 북쪽으로 진격하지 못합니다. 거기에다가 곽재우의병장을 시작으로 벌때처럼 일어난 의병들의 활약때문에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합니다.
이 상황에서 조선의 종주국임을 주장하던 명국의 조선의 요청을 받아들여 지원을 하면서 전세가 180도 전환하게 됩니다. 유성룡은 명군과 힘을 합쳐 평양을 탈환하고 김시민 장군은 왜군으로부터 조선의 곡창지대이며 임진왜란을 지속시켜줄 수 있게한 호남평야를 진주에서 지켜내며(진주대첩),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에서 수만의 적을 격퇴시키게됩니다.(행주대첩) 이러한 성과로 1596년에는 적들은 남해지방으로 내려가서 왜성을 쌓고 지키기만 하며 명과 왜의 교섭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는 결렬됬고 왜가 이듬해 다시 침략해오면서 정유재란이 시작됩니다. 이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흔히들 임진왜란을 1592년~ 1598년까지로 잘못 알고 계시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합쳐서 1598년까지 입니다.
그 후 동북아 정세는 크게 변하게 됩니다. 북쪽의 여진족은 더욱 강성해져 누르하치에 의해 통일되고 후금을 세워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마지막 왕조인 청나라를 세우게됩니다. 이에 우리나라의 광해군임금은 후금과 명사이에서 적절한 중립외교로 평화를 유지시키죠.
남쪽의 왜는 전쟁 중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죽음으로써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파와 임진왜란에 참가하지 않아 군사력이 줄어들이 않은 도쿠가와이에야스의 세력으로 갈라집니다. 두 세력은 결국 세키가하라전투라는 역사적 전투를 치르고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의 승리로 끝납니다. 후에 19세기 메이지 유신때까지 명맥을 이어가는 ‘에도막부’가 열리게 됩니다.
이순신 일대기
- 1545. 3. 8 : 서울 건천동에서 탄생 (양력 4.28)
- 1565. ; 전 보성군수 방진의 딸과 혼인
- 1576. 2월 : 식년 무과 병과(4위) 합격
- 1579.10.: 충청도 병영 해미로 군관으로 부임 (현 주사보 직급)
- 1582. 1 월 : 서익의 모함으로 수군만호에서 파직
5 월 훈련원 봉사로 복직.
- 1583. 10. : 함경도 경원에서 40리쯤 남쪽 변방 건원보의 군관이 되다.
- 1587. :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다.
녹둔도에 기습한 여진을 물리쳤으나 북병사 이 일의 모함으로 백의종군
- 1588. : 전공을 세워 백의종군 해제. 특사로 향리 아산으로 돌아옴.
- 1589. : 전라관찰사 이 광의 군관으로 선전관을 겸, 12월 정읍 현감 제수,.
- 1591, 2.13 : 전라좌수사 (정 3품)
- 1592. : 4월. 임진란 발발, 5월 옥포,함포,적진포 및 율포 해전에서 승리.
- 1592. 7.8 : 한산도 대첩. 학익진 전법 구사. 13척의 전함으로 적군함 133척 침몰.
- 1593. : 한산도 전진기지 설치. 삼도수군 통제사 임명
- 1594. : 당항포 해전. 적선 30척 격침.
- 1597.2 ~4 :무고로 하옥. 백의종군 길에 모친 별세
- 1598.8.19 : 삼도수군 통제사 재임명
- 1598.9.18 : 명량대첩 (12척으로 200여척을 이기다)
- 1598. : 명나라 수군 합동작전. 절이도해전에서 적선 50 여척 격침
노량 관은포에서 적선 200 여척 격침.
-1598. 11. 19 :노량해전에서 전사 (54세), (양력-12월16일)
-- 글 :해송 박 종 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