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밤공기가 눈에 띄게 차가워졌습니다. 옷차림을 정하기도 곤란하고 감기에 허덕이는 사람도 많을 때지요. 재작년만 해도 수험생이었던 저는 9월 모의평가 성적표를 받아들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급박함에 열심히 책을 팠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석류알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입시제도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2013년 대한민국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24만원이 조금 안 되며 전체 사교육비 총액은 18조원이 넘습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대학 하나만을 바라보고 학교와 학원을 오가면서 수행에 정진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누가 뭐래도 학벌 사회입니다. 어떤 대학을 가느냐가 한 개인의 사회적 인식과 일자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저토록 대학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예전부터 대학 입시제도는 교육당국이 내세우는 공공성과 대학이 내세우는 자율성이 대립하는 치열한 각축장이었습니다. 입시의 공정함을 위해 국가가 주도하는 시험의 성적으로 일률적으로 학생을 뽑으라는 교육당국과 대학별 고사를 통해 우수 인재를 선발하려는 대학의 입장이 엇갈리는 과정에서 입시제도는 천변만화해왔습니다. 그 와중에 사교육은 카멜레온 같은 적응력으로 끊임없이 입시제도에 발맞춰 진화했고 학생, 학부모, 교사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으로 고생해야 했지요.
이제부터 입학시험 제도의 큰 변화를 기준으로 4시기로 나누어 입시제도의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1) 정착기(해방 ~ 1968학년도)
해방을 맞이한 뒤로 1953학년도까지는 대학들이 자체적으로 입학시험을 실시했습니다. 초기엔 지원자가 부족해서 정원미달 사태가 속출했는데요.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 대학생들에게 징집을 연기시키자 징집을 회피하기 위해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급증했고 자율권을 악용한 입시부정이 난무하게 됩니다.
그래서 1954학년도에 이러한 병폐를 막기 위해 대학별 고사 전에 일종의 자격시험인 국가 연합고사를 실시했습니다. 연합고사를 통해 정원의 140%를 선발해서 이들만 대학별 고사에 응시할 수 있도록 했지만 시험을 두 번 치른다는 부담과 관리 문제로 인해 한 해만에 폐지되고 맙니다. 향간에는 일부 권력층 자녀가 탈락해서 폐지됐다는 소문도 돌았다고 하네요. 1955학년도에서 1961학년도까지는 다시 대학별 단독시험제를 실시했는데요. 고교 내신을 통한 무시험 전형으로 일부를 선발하여 교육정상화의 효과는 있었지만 초과 모집과 입시부정은 여전했습니다.
5·16 정변으로 들어선 군사정부는 고등교육의 질적 저하와 입시부정을 막기 위해 1962학년도에 대학별 고사를 폐지하고 대학입학자격 국가고사를 실시합니다. 하지만 수험생이 인기대학에 몰려서 정원 미달인 대학이 속출했고 객관식으로만 구성되어 암기위주의 교육이라는 비판에 직면합니다. 그리하여 1964학년도에 다시 대학별 고사가 부활됩니다.
이 시기는 대학 입시뿐만 아니라 중고교 입시도 치열했습니다. 학생들은 명문 중고교 입학을 위해서 재수도 불사했습니다. 문제 하나에 합격과 불합격이 좌우되었기에 웃지 못할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는데요. 1964년 전기 중학입시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주관식 시험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정답은 디아스타제였는데 학부모들이 무즙도 정답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디아스타제는 무즙 안에 든 성분인데요. 무즙을 정답이라고 했다가 낙방한 학생의 학부모들은 소송을 제기했고 심지어는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서 먹어보라는 시위까지 벌였습니다. 결국 학부모들이 재판에서 승리해 해당 학생들은 다니던 중학교에서 명문인 경기 중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이 와중에 부유층 자녀들의 부정입학 논란까지 빚어져서 서울시 교육감, 문교부(현재 교육부) 차관 등이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이 사건은 ‘무즙 파동’이라고 불리며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는데요. 1968년 중학입시에서도 미술 문제에서 ‘창칼 파동’이라는 복수 정답 사건이 터졌습니다.
사교육 열풍으로 인한 폐해도 상당했습니다. 학원과 과외가 국민학생에게까지 성행했으며 현직 교사의 30%가 부업으로 과외를 한다는 통계도 나왔으며 1967년에는 밤 10시에 과외를 마치고 돌아오던 국민학교 5학년 어린이가 피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부작용이 속출하자 결국 1969년 입학생부터 중학교 무시험 추첨제가 실시되었는데요. 은행알을 넣은 수동식 추첨기를 돌려서 학교를 배정받은 학생들은 뺑뺑이 세대로 불렸습니다.
(2) 예비고사(1969학년도 ~ 1981학년도)
1969학년도부터는 대학입학 예비고사를 실시해서 대학 정원을 기준으로 일정한 수를 선발해 합격자에게 대학별 본고사의 응시 자격을 주었습니다. 사립대학들이 정원 외의 청강생 선발로 부당 이득을 거둬들이고 있었기에 이를 막으려는 의도에서 도입되었습니다. 1973학년도부터는 대학입시에 예비고사 성적, 본고사 성적, 고교 내신이 모두 반영되었습니다. 예비고사는 암기 위주의 객관식인데 본고사는 고교 수준을 뛰어 넘는 주관식 시험이어서 고액과외가 성행하고 재수생이 급증하는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1974년에는 고교 입시의 폐단을 막고자 고교 평준화가 시행되었습니다. 중학교 무시험제와 고교 평준화는 당시 대통령의 아들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진실은 저 너머에 있겠지요?
당시의 과열된 입시로 인해 과외비가 가정 경제에 지장을 줄 정도였으며 과외망국론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1980년에 신군부가 집권합니다. 신군부는 교육 정상화를 목표로 과외를 금지하고 대학 본고사를 폐지했습니다. 예비고사와 내신만으로 대학에 입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외를 대체할 목적으로 1981년에 EBS의 전신인 KBS 3TV를 개국하여 유명 입시 강사의 강의를 방송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지에서 다양한 형태의 사교육이 성행했습니다.
예비고사 입시과목을 살펴보면 공통필수과목은 국어Ⅰ, 한문Ⅰ, 국사, 국민윤리, 정치·경제, 수학Ⅰ, 기술·가정의 7개 과목이며, 공통선택과목은 외국어(영어, 독어, 불어, 일어, 중국어, 일본어 중 선택)와 실업(농업, 공업, 상업, 수산, 가사 중 선택)의 2개 과목입니다. 인문계 선택과목(자연계는 4과목 필수)은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중 1개 과목 선택이며, 자연계 선택과목(인문계는 4과목 필수)은 사회문화, 세계사, 국토지리, 인문지리 중 1개 과목을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총 14과목을 치는 셈입니다.
(3) 학력고사(1982학년도 ~ 1993학년도)
1982학년도부터는 예비고사 대신 학력고사가 실시되었습니다. 본고사가 사라진 영향으로 원서를 쓸 때 배짱지원과 눈치작전이 성행했으며 객관식 일변도의 시험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86학년도부터 논술고사가 시행되고 인문계 17과목, 자연계 16과목이던 시험 과목이 1987학년도에는 9과목으로 축소됩니다. 하지만 논술고사도 채점의 객관성 문제가 제기되었고 사교육 감소에 별 효과가 없어서 1988학년도부터는 면접고사로 대체됩니다.
1988학년도부터 1993학년도까지는 희대의 ‘선지원, 후시험’ 제도가 도입됩니다. 학력고사를 보기 전에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원서를 접수한 뒤 시험 당일 해당 학교에서 시험을 봤습니다. 학력고사에 주관식 문항이 도입된 것도 이때입니다. 입시 과열은 여전해서 무한경쟁의 살벌한 분위기가 만연했으며 수험생들의 자살이 잇따랐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와 같은 영화들이 그러한 세태를 드러내어 화제가 되었고 1989년에는 전교조가 사학비리와 입시지옥에 맞서 참교육을 지향하며 만들어졌습니다.
(4) 대학수학능력시험(1994학년도 ~ 현재)
1994학년도 입시부터 학력고사가 폐지되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이 실시되어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암기식이 아니라 통합적 사고력을 측정하기 위해 범교과적인 출제가 이루어졌고 첫 해에는 수능을 8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치르기도 했지만 1995학년도부터는 연 1회 실시로 정착합니다. 대학별 본고사가 부활했으며 수능 성적만을 반영하는 전형인 특차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언어, 수탐 1, 수탐 2, 외국어(영어) 등 총 4과목에 200점 만점이었는데 1997학년도부터 본고사가 폐지되면서 수능 변별력 확보를 위해 문항수가 늘어나고 총점이 400점 만점으로 변경됩니다.
실제로 1997학년도 수능은 400점 만점에 300점만 넘어도 서울대를 노릴 수 있을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국영수 위주의 본고사는 폐지되었지만 다양한 형태의 대학별 고사는 허용되었습니다. 그리고 1997학년도 입시부터 고교 내신 대신에 학생의 성적만이 아닌 다양한 부분을 평가하는 종합생활기록부(현재 학생생활기록부)가 도입됩니다. 1999학년도부터는 선택과목제와 더불어 선택과목간 유불리를 조정하기 위한 표준점수제가 도입되었습니다.
한편 90년대부터는 외국어고 열풍이 불어서 고교 입시의 부활 논란을 불렀습니다. 외국어고는 비인가 외국어학교로 출발했으나 1992년에 특목고로 인정되었고 우수한 학생들을 사전 선발하여 입시에서 좋은 실적을 보였습니다. 특히 인문계열을 중심으로 외국어고가 강세를 보였고 1996학년도 입시에서 모 외고는 서울대에 200명을 넘게 보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1998년에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고 이해찬 씨가 교육부 장관 자리에 앉는데 그 해 2002 대입제도 개선안이 발표됩니다. 수능을 자격고사화하고 다양한 수시 전형을 통해 적성, 소질, 봉사활동 등 비교과를 크게 중시하겠다는 안이었는데요. 그로 인해 학교에서는 학습량이 줄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하지만 2002학년도 수능은 유난히 쉬웠던 2001학년도 수능에 비해 1997학년도에 버금가게 어려워서 학생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아직도 회자되는 이해찬 세대의 등장입니다. 그들에게는 단군 이래 최저 학력이라는 조롱 섞인 낙인이 붙었습니다.
2003학년도 입시에서는 수능의 소수점 배점 문제가 성적표에 반올림 되어 표시되는 바람에 당락이 갈리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수능에서 소수점 배점 문제가 사라졌습니다. 2004학년도 수능 언어영역은 복수정답이 인정되어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2005학년도 수능에는 학생의 선택권을 중시하는 7차 교육과정이 반영되었습니다. 확대된 수시 전형은 객관성 문제와 사교육을 조장한다는 논란을 가져왔습니다. 2008학년도 수능은 자격고사화를 이유로 성적표에 과목별 표준점수와 백분위가 표시되지 않고 등급만 표시되는 수능 등급제가 실시되었는데요. 입시에 혼란을 가져왔다는 비판과 함께 곧바로 폐지되었습니다.
이후 입학사정관제가 확대되었고 수시 비중은 2007학년도에 51.5%로 정시 비중을 역전한 이래 2014학년도에는 66.2%까지 증가했습니다. 2012학년도 수능에는 인문계열 수리 영역에 미적분이 추가되었고 2014학년도 수능에는 국영수에 A/B 선택제가 도입되었다가 올해 치러질 수능에서는 영어에 한해 선택제가 폐지됩니다. 그리고 2017학년도 수능부터는 문이과 통합을 염두에 두고 세부안을 정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좌충우돌 입시제도 변천사를 살펴봤습니다. 새로 도입하는 시점에는 좋은 결과를 기대했을 제도들이 단점을 노출하며 폐지되는 모습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 학생들의 고통은 끝날 줄을 모릅니다. 대학만을 보고 달리는 그들이 대학에도 별다를 게 없다는 걸 알면 얼마나 슬퍼할까요? 입시의 무간지옥에서 신음하는 학생들에게 건투를 빌며 글을 끝맺을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