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화장실부터 시작하는 탐방로
함양 선비문화탐방로의 특징 중 하나가 화장실이 중간중간 많아서 편리하다는 점이다.
함양군 선비문화탐방로는 화림동계곡의 비경을 엮어 만든 길이다. 풍류를 즐기던 옛 선비들이 특별히 사랑했던 곳으로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 등 정자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여덟 개의 못과 여덟 개의 정자가 있다 해서 ‘팔담팔정(八潭八亭)’으로 불리기도 한다. 화림동계곡은 짙은 숲과 맑은 계곡, 단아한 정자가 어우러져 걸음마다 한 폭의 산수화가 펼쳐지며, 물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꽃향기가 가득한 곳이다. 화림동계곡을 따라 선비문화탐방로를 유유자적 걸으며 옛 선비들의 풍류를 느낄 수 있다.
** 탐방로의 시작에는 화림동계곡이란 붉은 글씨를 새겨놓은 입석으로부터 시작된다. (거연정으로 바로 출발하면 군자정을 놓칠 수 있다).다리를 건너면 계곡 한가운데 세워진 거연정을 마주한다. 거연정은 누각으로 하단에는 가공하지 않는 나무의 원형을 살렸다. 누에는 조그만 판자로 만든 방 한 칸이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정자로 암반 위에 바로 세웠다. 주변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기품을 더하고 있다. 계곡을 넘어 참나무, 낙엽송, 소나무, 튜울립나무 숲길을 지나 동호정을 만난다. 징검다리를 건너고 너럭바위 위를 걷고 돌아간다. 한 척 돋아난 바위에 금적암이라 새겨놓았다. 거문고를 타고 피리를 부는 곳. 그 흥에 취해 막걸리 한잔하기 딱 좋은 곳이다. 월하정인은 징검다리에 자리를 잡고 물하(河)일체 되었다.
농월정이다. 너럭바위의 끝판왕이다. 바위에 담긴 물은 호수가 되었다. 달을 희롱할만 하였다. 물줄기에 패인 자국이 선명하게 들어나 기암괴석으로 굽이친다. 규모와 제작 방식은 동호정과 비슷하다.
경남 함양군 서하면 화림동계곡. 과거 보러 떠나는 영남 유생들이 덕유산 육십령을 넘기 전 지나야 했던 길목이다. 해발 1508m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강의 상류 금천은 계곡을 따라 흐르며 곳곳에 기이한 바위와 담·소를 만들어 놓았다. 옛 선비들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산수화처럼 펼쳐지는 무릉도원에 반해 너럭바위에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여덟 개의 못과 여덟 개의 정자가 있어 ‘팔담팔정(八潭八亭)’으로 불리는 화림동계곡의 비경을 엮은 길이 선비문화탐방로다. 거연정∼군자정∼영귀정∼다곡교∼동호정∼호성마을∼경모정∼람천정∼황암사∼농월정으로 이어지는 길은 약 6.2㎞로 걸어서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군자정
'군자정'은 조선 5현이라고 알려진 일두 '정여창 선생'과 연관이 있다. 정여창 선생의 처가가 바로 이 정자가 있는 봉전마을이었다. 그가 처가에 머무를 때 자주 머물렀던 곳에 전 씨 문중의 전세걸 진사 등이 1802년에 선생을 기리면서 정자를 세운 것이다. 해동군자가 쉬던 곳이라 해서 이름을 ‘군자정’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정자 아래 계곡에 집채만 한 바위 등의 볼거리가 있으며 바위에 올라 바라보는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하다.
영귀정
정자의 이름이 '영귀(詠歸)'가 된 것은 아마도 『논어』 '선진(先進)'편의 다음과 같이 유명한 일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공자가 자로, 증점, 염유, 공서화 등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각자의 포부를 물었을 때 모두 정치적 경륜을 펼치겠다고 답하는데 유독 증점(증자의 아버지)만이 다음과 같이 답을 한다.
"늦은 봄철에 봄옷을 갈아입고 5∼6인의 어른과 6∼7인의 아이들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고 싶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者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이에 공자는 "오여점야(吾與點也, 나는 증점과 같다)"라고 답하였다.
공자의 물음에 다른 제자들은 모두 정치적 포부를 밝혔지만 증석은 비정치적인 삶을 제시했다. 하지만 공자는 군자의 목표가 실천된 궁극적인 경지를 증석에게서 발견했던 것이다. 군자란 인격적 완성자로 소인과 대척적인 캐릭터이다. 이들을 달리 선비라고 일컬었다
선비정신의 핵심은 수신제가(修身齊家), 입신양명(立身揚名), 거구무안(居求無安),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이다.
수신제가와 입신양명은 '몸을 닦고 집안을 잘 다스린 후 출세해서 이름을 드높인다'는 뜻이고 거구무안은 '일상 속에서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우도불우빈은 '도를 걱정하지 가난을 걱정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10대에 과거를 보던 그들이 무슨 입신의 경지에 도달했겠는가. 과거에 합격하면 공부는 뒷전이었다고 한다. 그저 그들의 구호일 뿐 성리학은 자신들만의 세계관 속에, 자기들만 호의호식하는 방어용 학문의 전락했던 것이다.
동호정
이 정자는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등에 업고 의주로 피난을 했다는 장만리 선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1890년 경에 지은 것이다.장만리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서하면 황산마을에 내려와 지금 정자가 있는 곳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선생이 즐겨 찾았던 그 물가에 정자를 세운 것이다. ‘차일암’이라는 암반 바위와 짙푸른 숲, 여유 있게 흐르는 물줄기가 평온한 기운을 내뿜는다. 정자에 올라 바라보는 물과 너럭바위와 물 건너 숲의 풍경이 한가로우면서도 풍요롭다. 정자 천장에는 화려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눈에 띄는 것은 물고기를 입에 물고 있는 용의 조각이다. 보통 용 그림이나 조각을 보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데 이곳의 용은 물고기를 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모정
경모정(景慕亭)은 조선 영조 때 호성마을 출신의 문신이던 계은 배상매(裵尙梅) 선생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78년에 건립한 정자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지는 않지만 소박한 멋이 있는 정자가 경치가 빼어난 너럭바위 위에 자리 잡고 있으니 가히 쉬어가기 좋은 정자다.
람천정
람천정(藍川亭)은 고풍스러운 외관에 비해 그리 오래된 정자가 아니다. 그래서 그 흔한 안내문도 없고, 문화재번호도 없지만 풍경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쉼터로 인근 주민들에게 사랑을 받는 곳이다.
황암사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에 있는 ‘황암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을 지키기 위해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3,500여 호국선열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황석산성 전투는 정유년인 1597년에 다시 침공해 온 일본군 14만 명 중 2만 7천 명이 8월 16일에 가토 기요마사 · 구로다 나가마사 등의 지휘로 황석산성을 공격하면서 일어난 3일간(8월 16일~8월 18일)의 처절한 공방전을 말한다.
이때 안의현감 곽준과 전 함양군수 조종도는 소수의 병력과 인근 7개 고을의 주민들을 모아 성을 지킬 것을 결의하고 조총으로 공격하는 일본군에 맞서 활과 창칼 혹은 투석전으로 대항했다. 마지막에는 육박전으로 처절한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8월 18일 황석산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그 후 1714년(숙종 40)에 황석산 밑에 사당을 지었다. 이 사당은 ‘황암사(黃巖祠)’라고 사액되었으며, 황석산성 싸움에서 순절한 분들의 원혼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내왔다.
일제강점기에 황암사가 헐리고 추모행사마저 중지되어오던 중 1985년 김재연 초대 황석산성 순국선열추모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지역유지들이 뜻을 모아 위원회를 발족시켰고 매년 추모행사를 봉행하고 있다.
1987년에 황석산성이 사적으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지역주민들의 정성을 모아 2001년에 호국의총(護國義塚)을 정화하고 사당을 복원했다.
대소헌 조종도는 황석산성에 들어가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공동산 밖에 사는 것이 행복하다 하겠지만
崆峒山外生猶幸
장순 · 허원처럼 성을 지키다 죽는 것 또한 영화로운 일이다.
巡遠城中死亦榮
농월정
조선 선조 때 예조참판을 지낸 지족당 박명부(知足堂 朴明榑) 선생이 지은 정자로
2003년 화재로 사라졌으나, 2015년 9월에 12년만에 복원된 농월정(弄月亭)
탐방코스: [ 거연정~군자정~영귀정~다곡교~동호정~경모정~람천정(藍川亭)~황암사~농월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