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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선 (본명: 김이선에서 김완선(金緩宣)으로 개명, 1969년 5월 16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1986년 1집 《오늘밤》으로 데뷔해 무공해 목소리와 파격적인 무대 매너, 강렬한 눈빛과 매혹적인 관능미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1990년에 발매한 정규 5집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 걸쳐 대한 민국에서 큰 인기를 누렸으며, 1992년 6집 《애수》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후 동아시아에서 활동을 펼쳤다. 1996년 10월 7집 Innocence를 발매하며 컴백했고, 복귀와 공백이 반복됐던 2000년대를 보낸 후 2011년 4월 하순에 첫 번째 EP Super Love를 발매하며 가요계로 돌아왔다.
해외로부터도 러브콜을 받아 1988년 2월에는 일본 측 프로덕션의 초청으로 한 달간 극장 공연을 펼쳤으며, CBS/Sony사를 통해 싱글을 발매하며 트롯트 계열이 아닌 아이돌 댄스팝 장르의 한국 가수로서는 최초로 일본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1994년부터는 대만에서 활동을 시작해 두 번째 중국어 앨범을 크게 히트시키며 5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고, 김완선은 대한민국의 이미지 개선과 국위 선양의 공로로 현지의 한국인 유학생들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김완선은 1986년 KBS 가요대상 신인상을 시작으로 1987년부터 91년까지 5회 연속 올해의 가수상을 수상했다.[1] 1986년 데뷔한 이후로 “한국의 마돈나”라는 수식어를 만들어낸 김완선은 ‘10대 틴아이돌 스타 시대’, ‘본격적인 댄스뮤직의 시대’,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열었고,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현대적 의미의 여성 댄스가수의 시초 격 존재로 평가되고 있다.
생애
초기 삶
김완선은 아버지 김성남과 어머니 한수자 사이에서 1969년 5월 16일 5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10대 초반의 나이에 자신의 친이모이자 인순이의 매니저였던 한백희에게 발탁되어 인순이의 백댄서팀인 리듬터치의 일원으로 무대 경험을 쌓았고, 발레와 기계 체조를 비롯한 각종 춤과 함께 작곡가 신병하로부터 화성학과 오케스트라 편곡도 배우는 등 가수 데뷔를 위한 3년여의 준비 과정을 밟았다. 김완선의 부모님들은 딸이 가수가 되는 것을 반대했는데, 아버지는 “괘씸했다.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에 연예인을 한다니깐 마음에 안 들었다. 나중에 TV에 나와 춤추고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본 이후엔 곧잘 한다는 생각은 들었다. 한가지 불만은 가사가 어려워서 따라할 수가 없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1986–1992년
고등학교 2학년(만 16세) 재학 중이던 1986년 4월, 산울림의 김창훈이 전곡을 작사/작곡한 1집 《오늘밤》을 발매하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타이틀곡 〈오늘밤〉과 함께 발라드곡 〈지난 이야기〉도 인기를 얻었고, 대한민국 대중 음악계에 아이돌 가수의 개념을 확립하며 댄스 음악의 유행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1집 활동 당시 브레이크 댄스, 허슬, 로보트 춤 등 여러 장르의 춤을 선보였으며 “노래와 춤의 균형있는 예술세계를 개척하고 싶고, 기회가 된다면 국제무대에도 진출하고 싶다”며 포부를 밝혔다. 또한 빼어난 외모로 각종 여성 잡지의 표지 모델을 장식했고, 제1회 골든디스크상, 1986 KBS 가요대상을 비롯한 여러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1987년 5월에 발매한 2집 《나홀로 뜰앞에서》를 통해 〈나홀로 뜰앞에서〉, 신중현 작사/작곡의 〈리듬속의 그 춤을〉 등의 히트곡을 만들어냈다. 뒤이어 1988년 8월, 3집 《나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를 발매했다. 3집은 이장희의 작품으로 이전 음반에 비해서는 부족한 성적을 보였다. 그 당시 김완선은 모두 매니저인 이모가 원하는대로 해야했다며 “3집 때부터 이모의 아바타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후에 밝혔다.
1989년 6월, 김완선은 네 번째 정규 음반 《기분 좋은 날》을 발매했다. 당시는 댄스가수들을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강했던 시절이었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4집 활동에서는 베이시스트 윤상과 기타리스트 손무현 등으로 구성된 백밴드 실루엣과 함께 단독 콘서트도 감행하는 등 음악적인 역량을 키우고자 노력했다. 1990년 7월에 발매한 5집은 수록곡 〈나만의 것〉이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와 KBS 《가요 TOP 10》에서 처음으로 가요순위 프로그램 1위에 올랐고 뒤이어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와 〈가장 무도회〉도 정상에 오르며 김완선에게 대한민국 여자 솔로 가수 최초의 단일 앨범 판매 100만장 돌파라는 명예와 함께 최고 전성기를 안겨다 주었다.
1992년 4월, 정규 6집 《애수》를 발매했다. 6집은 이전과는 달리 발라드 색채가 강한 앨범으로 타이틀곡 〈애수〉는 손무현이 작곡하고 김완선 자신이 직접 작사를 맡으며 음악적 변신을 꾀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랩을 전면에 내세운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해 가요계에 파란을 일으키면서 74만장이라는 판매고를 올렸으나 전작만큼의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그해 11월, 여전히 최고 인기 여가수 자리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러운 은퇴를 발표해 충격을 주었다. 이후 이 때의 은퇴 선언에는 이모가 김완선의 부모에게 진 빚이 있었고 이를 갚는다는 조건에 동의해 동아시아권 시장 진출 제의를 받아들였던 속사정이 있었음을 고백했다.
1993–2001년
1993년 봄에 홍콩으로 출국해 중국어와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가을에는 홍콩 폴리그램(PolyGram - 1999년 현 유니버설 뮤직에 합병)사와의 음반 발매 계약 소식이 전해졌으며, 영화배우 겸 가수 알란 탐(Alan Tam/譚詠麟)의 영어 앨범에 참여해 듀엣곡을 부르고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다. 이 앨범 홍보를 위해 알란 탐과 함께 내한해 1년만에 방송에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홍콩 매그넘 영화사와의 영화 출연 계약도 보도되었으나 이는 무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친분이 생긴 영화감독 왕자웨이(왕가위)에게 잠시 호감을 느끼기도 했으나 유부남임을 알고 단념했다고 후에 밝히기도 했다.
1994년 중국 대만으로 거점을 옮겨 진위엔쉬안(金元萱;김원훤)이란 이름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해 3장의 만다린어 앨범을 발매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1995년에 발표한 두 번째 앨범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단교로 인해 대만에 퍼져있던 대한민국에 대한 반한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에도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1997년 클론이 대만에 처음 진출할 당시 홍보 문구 중의 하나가 “金元萱의 나라에서 온 남성듀오”였다는 이야기도 있을 만큼 그녀는 원조 한류(元祖韩流)로서 중화권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다.
1996년 10월, 7집 Innocence를 발매하며 한국으로 컴백했다. 윤일상 작곡의 〈탤런트〉가 KBS 《가요 TOP 10》 5위권에 오르며 성공적으로 복귀를 알렸으나 노래의 도입부 부분이 유럽쪽 댄스곡과 표절 시비에 올라 예정보다 빨리 〈운명의 장난〉으로 활동곡을 교체해야 했다. 또한 앨범의 기획을 맡았던 GM기획의 김광수 대표와 MBC 예능국과의 당시 불편한 관계로 인해 MBC 출연에 제재를 받는 등 악재가 겹치면서 컴백 활동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1998년 4월 한백희의 자녀 두 명이 멤버로 참여한 혼성 5인조 댄스그룹 오룡비무방의 1집 앨범을 통해 제작자로서도 신고식을 치렀으나 그해를 끝으로 13년여를 동고동락한 매니저인 이모 한백희와 결별, 독립하였다. 이로써 애시드재즈풍으로 계획됐던 한국 8집 앨범을 비롯해 대만 복귀, 중국 진출, 일본 재진출 등 여러 계획들이 무산됐고 김완선은 공백기에 들어갔다.
2002–2010년
4년후 2002년 7월, 8집 S & Remake를 발매해 당시 생소했던 트랜스/일렉트로니카 장르를 도입한 세련된 사운드와 극적인 무대 연출로 호평을 받으며 공백을 만회했고 이후 순조로운 활동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소속사와의 의견 조율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는 2003년 여름의 화보 사건 파문으로 이어져 커리어 최대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2005년 10월 말에 그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시인 원태연이 가사로 옮긴 〈Seventeen〉을 수록한 9집 rEturN을 내놓았다. 앨범의 공동 프로듀서로서도 이름을 올리며 복귀 의지를 보여주었으나 2006년 1월 이모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고 얼마 안 있어 활동을 중단, 그해 11월에 하와이로 건너갔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현지 대학에서 디지털 아트와 유화 등을 공부하다가 2009년 건강상의 이유로 귀국했으며, 미술 쪽 진로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근황만이 간간이 보도되었다.
2011–현재까지
2011년 1월 말에 김완선이 봄에 컴백한다는 보도가 나왔고, 3월 말 로맨틱 카우치의 노래 〈Like a Virgin〉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2011년 4월 21일 첫 EP 앨범 Super Love를 발매하며 6년만에 가요계로 컴백했다. 앨범의 동명 타이틀곡인 〈Super Love〉는 많은 사람들이 댄스 곡으로 나올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팝 록 장르의 노래로 김완선은 “이번 앨범은 홀로서기로 처음으로 제작하는 만큼 음악적으로 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며 김완선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2011년 4월 30일 김완선은 인디 록 밴드 타마 앤 베가본드와 함께 MBC 《음악중심》에서 〈Super Love〉를 부르며 몇 년만의 음악 프로그램 컴백무대를 가졌다. 이 외에 《뮤직뱅크》, 《엠카운트다운》, 《열린음악회》 등의 여러 방송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여름에는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 하이프 스테이지에도 올라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2011년 컴백과 함께 자신의 기획사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고, 신인 가수 양성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가을에는 오현경과 함께 tvN의 뮤직 토크쇼 《러브송》 공동 MC를 맡아 활동했다. 2011년 10월 25일에는 싱글 Be Quiet를 발표했고, 비스트의 용준형이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2012년 초에는 클래지콰이의 리더인 DJ 클래지의 솔로 앨범과 윤종신의 《월간 윤종신 2012년 3월》 싱글에 피처링으로 참여했고, 5~6월에는 창작 뮤지컬 《뉴 롤리폴리》에 출연했다. 여름에는 11회 하와이 한국 축제, 여수 엑스포 팝 페스티벌, 포항 울림 페스티벌, UMF 코리아 등 여러 음악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9월 11일에 리메이크곡들로 구성된 EP The Beer를 발매했고, 12월 29일에 서울 잠실 실내 체육관에서 소방차, 박남정, 강수지와 함께 《젊음의 행진 레전드》라는 제목으로 합동 콘서트를 가졌다.
2013년 1월, Mnet이 발표한 《레전드 100 아티스트》에 선정되었고 MBC 일요 심야 음악 프로그램 《아름다운 콘서트》의 새 MC로 발탁되었으나 두 달 뒤 봄 개편으로 프로그램이 폐지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3월부터 5월까지 방송된 MBC 《댄싱 위드 더 스타 시즌 3》에 참가해 1, 6, 7주차 우승, 최종 4위의 성적을 거뒀다. 7월 20일에 20번째 호스트로서 tvN 《SNL 코리아》에 출연하는 등 예능, 쇼 프로그램에 간간이 출연하며 신곡 준비에 들어갔다.
2014년 3월, 국제대학교 K-POP 스타과 초빙교수로 임용되어 '오디션 튜토리얼' 과목을 강의했다. 7월 7일, 탱고와 레트로 힙합이 접목된 미디엄 템포의 ‘Goodbye My Love (feat. Tiger JK & Bizzy)’를 디지털 싱글로 선보였다. 8월부터 2015년 6월 초까지 채널A의 건강 정보 프로그램 《TV 주치의 닥터 지.바.고》의 MC를 맡았다. 5월부터 SBS 예능 프로그램 《불타는 청춘》 고정 패널로서 활약 중이며, 7월 25일에는 안산M밸리락페스티벌에서 코어매거진과 함께 화려한 공연을 펼쳤고, 9월 5일 일산 킨텍스에서 박남정, 이상우, 심신과 《가요톱10 콘서트》라는 타이틀로 합동 콘서트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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