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讚辭/유고>
아름다운 서정의 귀향
――박정희해남 첫시집 ‘그리운, 소낙비’ 평설
고 星 村 鄭 孔 采
<한국 현대 시인 협회 회장 역임>
시가 시가 아닌 다른 모양새로 활개쳐 온 지 대충 짐작으로도 10여 년은 웃돌 듯싶다. 이 非詩的 기막힌 異常現像이 마치 새로운 知感이나 별스레 뛰어난 현대시의 典範, 혹은 시대 감각에 앞선 流線詩風 따위로 착시 착란한 지가 앞서 밝힌 ‘10여 년은 웃돌 듯싶다.’라는 所以 그대로, 이땅의 현대 시풍을 亂脈질해온 것이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기만 했다.
비시적 야릇한 이변의 자극적 쾌감 혹은 詩想의 애매 모호한 詩想 아닌 해괴한 落句 등등으로 형성된 妙出의 새방종적 산문시 낙서 따위가 정말 건전한 시의 흐름을 암담하고 골치아프게 뒤흔들어온, 비시적 혼돈의 시대흐름은 마침내 올해(2000년 신춘) 들어 그 두터웠고 무거웠던 장막을 그런대로 희망적이라 할까, 얼추 새모습의 正統詩 경향으로 바르게 회귀하고있음을 보여주기로 해서 무척 다행스럽고 安存해드는 시의 本鄕에 새삼 안기고있는 참기쁨을 만나고도 있는 새해 첫머리의 所懷에 있기도 하다.
그런데 마침 이러한 때, 이러한 심정의 필자에게 내 오랜 제자 시인의 한 못잊을 여류 시인 박정희해남(본명 박정희․‘詩鄕’ 동인) 님의 한 묶음의 시다발과 함께 ‘선생님 건강도 힘드신데 제글을 써주심을 어찌 깊이…. 평생 간직하겠습니다. 저에겐 평생 스승님이신 선생님 건강하십시오. 날마다 기도드립니다. 꼭 쾌차하실 겁니다.’라는 정성어린 문안 편지까지 싸들고 새해인사 겸 문병을 왔었다.
뜻밖에 드러난 몹쓸 폐암 3기와 입원, 그래서 어려운 항암 투병에 있는 필자이지만 정 희(登林時 필명-편집자 주) 시인의 등단 15년쯤에 이르러 기어코 출간하려던 처녀시집다발과 함께 두고 떠난 편지글은 함께 온 오정말 안병애
유회숙 이영임 김 순(본명․김영순) 안미숙 김 진(본명․김진옥) 마경덕 조영수 시인(‘시향’ 동인․필자의 제자 시인)과 조 명(본명․조필수) 시인의 깊은 마음과 함께 나로 하여금 ‘아름다운 병상’ ‘기쁨의 병상’에서 마음 절절하게 시와 시인을 거듭 만나는 ‘아름다운 시의 꽃다발’을 이렇듯 지금 이시간까지 감사하게, 향기롭게 간직케 하고있다(어쩌면 이글-찬사-의 전제가 좀 길어지긴 했어도 필자로서는 이같은 감동의 사연을 도저히 제어할 수가 없으매 용서를 바란다.).
정 희 시인의 첫시집에 실릴 좋은 시작품들을 내내 끊음(쉼)이 없이 몇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다 읽었다. 요약된 말로 해서 이시인의 이번 작품집에 실릴 시의 전체적인 느낌은 ‘아름다운 우리 서정시의 復歸와 이정통시의 승리 개선이다!’라는 흔쾌한 공감과 이의 당당한 表明을 내세우는 데 조금도 주저됨이 없다. 이공감의 明澄함은 아까 모두에서 밝힌 바 있는 ‘우리 현대시의 얄궂은 흐름 10여 년 이상’의 숨막히는 안개골짝을 벗어나고있는 새해의 상서로운 징후와도 맞물리고있는 한 ‘典範詩集’이 되기에, 더욱 흡족한 공감과 거듭 감동에의 아름다운 기쁨의 시의 꽃다발 자리를 갖게 해주었다.
어둠이 홀연 강을 삼키고
수심은 먹물되어 어둡다
강건너온 불빛이 물위에 흔들리고
강변따라 야광찌만 즐비하다
微動도 않는 낚시꾼어깨에
달빛이 내린다
스치는 바람이 찌를 흔든다
쪼그려앉은 사내
강물속으로 떠오르는 달이다
야광찌 하나
쑤욱 들어간다
빈낚시대에
붉은달이 물렸다
――시 ‘밤낚시터’ 全文
고향집 저문날에
전화 벨 울린다
내 마른 정원에 넘쳐흐르는
그리운, 소낙비
오늘도 가슴엔 바람부는데
소리나지않는 풍금 밟으며
친정집 뒤안을
서성거리는 나
――시 ‘바람 부는 날’에서
우선 위의 두 편의 시를 읽으면서 필자는 많은 싯귀아래로 ‘――’ 표지의 下線을 그었다. 바로 우리 정통 현대시가 나타내며 추구하는 ‘살아움직이는 운율에서 빛나고있는 주요한 시의 귀밝고눈밝은 서정 요소(Lilic Elementary)들의 공감의 바탕과, 여기서 거듭 움직여일어서는 서정 시심(Lilic Poesy)의 감동(승화)이 마냥 적중되면서 그 正鵠까지 찔러드는 詩境에 함께 잠겨들게 하기 때문’에 이기호(‘――’)를 붙인 까닭이다.
현대시의 서정성은 무엇인가. 못내 그냥 넘어가도 될 命題를 새롭게 짚어본다. 정 희 시인의 앞의 두 작품이 평이하게 가려는 붓끝을 고추 붙잡기, 먼저 시 ‘밤낚시터’에 잠시나마 함께 머물러야 하겠다.
①‘강건너온 불빛이 물위에 흔들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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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面에 아롱져드는 밤의 불빛이 주는 이서정성은 시 ‘밤낚시터’의 상황을 전개시키는 첫아름다움의 서정 요소로 짜인 싯귀이다. ‘流燈’이라는 시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5월 단오 무렵 창포냇물에서 칠단같은 머리를 감는 여인의 모습이 투영되고있는 듯한 연상 작용까지 불러일으켜주고도 있다. ‘강건너온 불빛이 물위에 흔들리고’로 한 行쯤 措辭法을 써도 能足한 서정싯귀이다.
② ‘…낚시꾼어깨에/달빛이 내린다/스치는 바람이 찌를 흔든다’
③ ‘쪼그려앉은 사내/강물속으로 떠오르는 달이다’
②와 ③에서는 고운 서정의 진행을 밤과 달과 낚시꾼의 어깨와 바람과 찌에서 무르익어가게 한다. 결국 주인공 ‘쪼그려앉은 사내’는 ‘강물속으로 떠오르는 달’이 되어 이작품의 카타르시스(Catharsis=Katharsis) 작용을 해줌으로써 情感의 아름다운 悲感化에 이르게 해준다. 현대 서정시가 포에지의 正鵠을 향한, 깊은 의미의 推察을 노리는 알레고리(allégorie=allegory) 비유 방식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치는 수사법이라 할 메타퍼(Metaphor=은유 또는 암유)가 마침내 ‘사내’를 ‘달’님으로 擬人化의 경지로 승화시킨다. 달과 밤낚시꾼의 멋드러진 출현이요, 그 心象에 젖어드는 서정의 主役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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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빈낚시대에/붉은달이 물렸다’
드디어 시 ‘밤낚시터’는 ④에 와서 그 絶句를 드러내며 結句의 마감을 가졌다. 낚시대에 고기가 물린 것이 아니라 ‘붉은 달’이 페이소스(Pathos․정감)의 정점에서 비감한 현대 서정으로 한껏 감동을 놀라웁게 띄워준다. 저강태공의 곧은 낚싯대가 주는 故事는 이시 ‘밤낚시터’의 현대 서정시와는 감히 견줄 수도 없다하겠다.
다음으로 짧은 서정시 ‘바람부는 날’을 작품의 짧은 성향 그대로 짧게 말해보겠다.
① 고향집 저문날에
전화 벨 울린다
내 마른 정원에 넘쳐흐르는
그림운, 소낙비
②오늘도 가슴엔 바람부는데
소리나지않는 풍금 밟으며
친정집 뒤안을
서성거리는 나
위의 작품에서는 ①+②가 함께 ‘今昔’이라고 하는 시간의 흐름과, 그과거와
현대의 서정을 잘도 대비시키면서 시의 감동을 낳고있다. ‘고향집 저문날’과 고향집에서도 울려나오는 ‘전화 벨 소리’가 어제와 오늘의 시공을 넘어 새롭게 서정을 아롱지게 만들면서 ‘내 마른 정원’(非情해가는 심정)에 아, ‘그리운, 소낙비’의 정감을 火急한 소식마냥 안겨들게 한다.
아울러 시인은 온갖 가치관과 삶의 존귀한 기쁨도 拜金 사상 따위 현실적 욕구의 검은 무덤을 되레 찬양하면서, 그 風潮로 바람부는 오늘날을 못내 아파하면서 ‘소리나지않는’ 과거의 ‘풍금 밝으며’―이렇듯 인간 性善의 본향 ‘친정집’도 그 ‘뒤안’을 서성거리고있는 것이다.
비록 짧은 단시에 불과해도 시 ‘바람부는 날’의 뜻깊은 은유와 그속내(속내평)가 표출해주는 內在哲學의 아름다움은 서정시의 본디 받침대가 되는 운율(外形律이건 內在律이건)위에 꽃망울트고꽃피고 하는 우리 서정시의 귀향과 그 安着의 경계심푼 사랑과 정의 승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이찬사의 앞머릿글에서 밝힌 바 있었듯이 우리 현대시의 복고적 정통성 회귀와 아름다운 서정시가 詩歌本然의 참된 현상이 마치 新風마냥 새롭게 2008년 어금해서 귀결돼 옴을 정 희 시인의 이번 시집이 뜨겁게 例証해주는 듯도싶다.
그런데 本稿가 뜻한 初心이 흔히 長文이 돼 지루한 느낌을 일으키기에 알맞은 흔한 그 ‘작품 해설’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정신과 시작품을 오로지 찬미․찬양하며 기리는 ‘찬사’에 있었음에도 부득불 이번 찬사에서는 거듭 두세 편의 시인 작품을 거론치않을 수 없는 自家撞着을 용납해 주시기
바란다. 서정시의 주역을 맡고있는 페이소스에서도 그핵심이 되는 悲感世界의 아름다운 승리가 이 筆頭를 멎지 못하게 하기에….
늦가을, 경전선을 탄 여인
낙조가 널부러진 갈대밭 흔들림을 보다가
인적 드문 간이역에 내린다
첫사랑 기다리던 남평역이
불혹의 나를 덥석 안는다
꽃향기에 취한 벌
꽃사이 오가며
꿀따모으기에 잉잉대고
그소년!
내 귓가에 들려오는
맥박 수
조요히 살아난다
클로버 꽃잎따 꽃시계차고
질경이풀로 신발 만들어신고
연분홍손가락 걸었던
첫사랑!
그꽃봉오리가 봉긋봉긋하다
――시 ‘남 평 역’ 全文
다 사랑할 수 없는 저녁어스름
가장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하고
흐려진 기억 저편
까맣게 타오르던 수줍은 사랑
불의 섬으로 흔들린다
장밋빛 축제 한 자락
베고누워
목메인 꿈을 건져올리는
내 뜨거운 노래 한 소절 한 소절
한 소절씩의 노래
노을아!
――시 ‘노 을’ 全文
몇 시간 배를 타고온 섬노인네들
시끌벅적 야단 법석 재판이 시작된다
피고: 판사님 너무너무 억울합니데이
진실을 밝혀주시랑께요
판사: 원고께서는 하실 말씀이나 증거없으세요?
원고: 아니, 증거는 무슨 놈의 증거가 필요하다요
하늘도 알고 땅도 다 아는디…
우리 판사님이 잘 모르는구만요?
잘 모르는 갑네요, 잉- 잉- 잉…
쪽빛바다와 하늘, 저멀리
뱃고동 울리고 배가 들어오면
그물을 수선하는 김 씨가
마늘농사 짓는 노 씨에게
3백만 원을 갚지않아 생긴 시골법정 재판 <
난 재판이라는 창을 통해 저잣거리의
풍경을 읽고
섬, 사람들의 속내를 들여다본다
아, 언제쯤 그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시 ‘시골법정’ 全文
귀중한 문학적 年條 10유 여년을 싯적 황무지로 몰아넣은―그래서 한국 시단을 혼미하게 퇴락시킨 소위 ‘미래파’를 두고 ‘서정의 미래와 비평의 윤리’라는 책명으로 비평한 문학 평론가 하상일 님의 평필 “알쏭달쏭 ‘외계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미래파’라는 멋진 수식어를 달아주기에 분주했던 자기 중심적 비평이 난무했었다.”라는 克明한 非詩的 유행의 흐름이 종식되고있는 오늘, 우리는 서정시 본디의 시심으로 새롭게 개화 결실시키는 시편들을 정 희 시인의 상기한 세 편의 작품으로서도 흡족할 공감과 조용한 감동을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새삼 반가운 ‘시의 뉴스’이기도 하다.
시 ‘시골법정’이 따사로운 사람들의 감정을 우직스런 진실로 드러내며 재판에서도 아리따운 敍事를 꽃피우고있는 劇的 詩話는 매우 소중한 서정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쪽빛남해바다와 하늘을 두고 뱃고동 울리면서 닿은 배와 섬사람들…. 시의 작자는 그냥 일반 市井(市町)의 번답한 인간 俗事로 내팽개치지않고 ‘시골법정’의 한 가지 재판일을 맑은 서정심에 아름답게 담아 멋진 한 편의 서정시로
승화시켜놓고있다. 서정시가 아니고서는 시화할 수 없는 주제라 하겠다.
‘다 사랑할 수 없는 저녁어스름’의 偏向된 아쉬움을 안타까운 ‘노을’로 그린 이작품은 ‘수줍은 사랑/불의 섬으로 흔들린다’라는 심상의 高揚은 마냥 抒情小曲으로 ‘한 소절’과 ‘한 소절’의 꿈의 노래로 익어든다. ‘노을아!’하고 마지막의 詠唱을 던져야만 하는 서정의 목메임이 꽃의 命運을 덮어쓰는 듯도싶다.
정 희 시인의 서정시 세계는 이렇듯 아름다운 정감의 凱歌로 빼곡 차있다. 시 ‘남평역’은 간이역의 주변 풍물을 고이고이 서정화하곤, 옛사연을 새롭게 현상시켜 화안한 오늘 이시간을 아름답고도 純然스레 작동시키고있다. ‘정 희 시인=서정 시인’이라는 꽃의 이름을 掛冠해야만 마땅하겠다.
우리 현대시의 아름다운 정통성 復元을 기리면서 그 뚜렷한 새획을 그어주는 정 희 시인의 시집 찬사 ‘아름다운 서정의 귀향’이 찬사로서는 그분량이 넘쳤기, 시집의 앞머리를 장식하려던 본래의 바람을 접고 책의 꼬리쪽에서 박수치고 갈채띄우는 수록을 바란다(고인의 ‘본래의 바람’ 대로 ‘앞머리를 장식’한다.―편집인 주). 정 희 시인의 ‘시의 빛나는 항행’ ‘아름다운 서정시 여정’에 늘 영광 함께 하기시를 축도드린다.
――2008년 정월 중순에
星 村 鄭 孔 采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