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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 기행문
지난 여름 하계 휴가를 빌어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 왔던 우리 민족의 신령스런 영산인 백두산을 탐방 하였다
설레이는 기대감을 안고 인천공항 에서 중국민항기인 동방항공을 이용하여 두시간 넘게 날아서 연길공항에
도착하였다
연길공항은 공군기지를 겸한 공항으로 규모나 시설면에서 낙후된 공항이란 것이 느껴졌다
연길이란 도시는 중국의 길림성 내에 있는 조선족 자치주인 4개시 2개현 으로 구성된 연변주의 수부도시 로써
한반도 북단에 위치 하여 있으며 기후는 8월 초임에도 크게 덥지도 않은 선선하고 쾌적한 날씨 이었다
연길은 80% 이상이 우리 동포들 이었고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동포 인구수가 대략 이백오십만명 정도라 한다
오늘날 연길은 중국에서 제2의 홍콩 이라 불리운다 그이유로는 그들의 모국인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으로 모국에
친인척이 있는 가정에서는 모국으로 진출하여 경제활동을 한 댓가이며 또하나는 백두산 인근의 가장 가까운 도시
로써 백두산 관광특수의 혜택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행일정에 우리나라에서 부터 친분이 있던 중국동포와 동행을 하였기에 현지에서의 안내 와 현지인 소개등 그지역
동포들의 삶에 근접할수 있는 기회가 여러차례 있었다
중국내 우리동포들의 삶은 보편적 으로 중국인들보다는 여유롭다 하였다 그것은 우리민족의 고유한 근면심 으로
인하여 이주당시부터 황무지 개간등으로 농토를 확보하는등의 피땀어린 노력의 결실이라 하였다
중국에는 광할한 황무지가 널려 있지만 개간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다가 우리동포들이 하는것을 보고 이제는 중국인들도 하고있다 한다
대다수의 동포들이 중국에 정착하게된 동기를 더듬어보면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받던시절 식민지 정책에 의하여 강제적인 인구분산책으로 만주등지로 이주된 것이 오늘날
중국의 53개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분류되어 중국에서 살아가게 된것이다
동포들의 타국 땅에서 살아나온 방식은 똘똘뭉쳐 집단마을을 형성하여 서로간에 의지하고
협력하여 타국에서의 서러움을 최소한으로 줄여가면서 일정 규모의 마을 마다 학교를 세워
우리글과 우리의 문화를 가르키면서 13억 인구의 중국에 유일하게 동화되지 않은 소수민족
으로 평가 되고 있다
철저한 동포간의 혼인과 다산을 권장하여 민족의 뿌리를 이어오며 조선족 거주마을을 보면
우리고유의 건축양식 으로 집을 지어 조선족이란 것을 나타내므로써 건물의 지붕만 보아도
동포가 살고있다는 것을 떳떳하게 나타내는 자긍심을 엿볼수 있었다
새벽에 연길에서 소형버스를 임대하여 백두산으로 출발을 하였다 연길시를 벗어나 윤동주
선생께서 자란 용정시를 지나 백두산을 향한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스쳐가는 풍경이한적하고
광할함을 느낄수 있었다 고속도로는 최근에 건설된 것으로 보이는 콘크리트 포장의 4차선
도로 이며 노면상태는 주행감이 많이 떨어지는것을 볼때 평탄성이 좋지못했다
통행차량은 극히소수였으며 노선버스는 거의 볼수가 없었다
두시간 정도를 주행하니 4차선 도로에서 2차선 도로로 분기되어 한참을 가자 백두산을
향한 노선중에서 유일한 휴게소가 있었다 휴게소 에서는 커피와 라면정도 판매하고
그밖에 장뇌삼을 비롯한 특산품등 조잡한 것들 뿐이었다 한눈에 바가지 요금이란
것을 알수있었다 또한가지 기막히는것은 화장실 이었다
허접한 판자로 건물형태만 갗추고 중간지점을 칸막이하여 남녀용 구분을 하고 우리 6.70
년대 처럼 커다란 인분받이 구조물위에 나무를 걸쳐 그위에서 볼일을 보도록 되어 있는데
문제는 여러명이 동시에 볼일을 보도록 했으면서 칸막이가 없다는점 이다
아주 쑥스런운 장면으로 그쪽지역의 식당 주유소등 모든 화장실이 같은 구조라서 장이 나빠
큰거를 자주보는 필자로서는 즐겁지못한 기억이었다
백두산 아래에 도착하여 대형주차장에 주차하고 매표소까지 약2 킬로 정도를 도보로
이동하여 입장하니 현대식 대형 셔틀버스가 대기중에 있었다
이를 이용하여 15분정도를 이동하여 중간 기착지에 도착하였다
중간 기착지라 하여 산중턱에 위치한것이 아니고 산의 하단으로 그지점에서 도보로 등산
하는거와 지프로 등산하는 기착지인 것이었다
우리는 지프로 천지에서 200 여미터 아래의 주차장에서 하차하여 천지로 올라갔다
출발 당시 연길은 잔뜩 흐려 비가올것만 같은 날씨라서 백두산에 도착하여 비가올것을
걱정하자 안내자가 백두산 천지는 복이 있는자만이 볼수있기 때문에 현지에 가봐야만
알수 있다더니 그말이 사실이었다 8월 초순임에도 천지의 기온은 섭씨 5도 정도로 안개
즉 구름이 끼어 있었다 천지에서 30여분을 기다리나니 거짓말 같게도 5분여간 그것도
두차례나 구름이 완전히 걷히면서 신비한 천지의 자태가 드러났다
우리민족의 영산 백두산 그리고 천지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한채 장엄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청결 고귀함 등의 어떠한 형용사
도 부족한 우리 민족의 영산의 천지를 바라보노라니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우리는 어찌하여 이곳을 중국땅을 밟으며 와야만 하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6 .25사변 당시 연합군의 인천상륙 작전을 계기로 북으로 진군하여
우리 국군이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고 나서 얼마후에 북한 김일성의 요청에 의한 중국
공산군의 개입으로 다시 밀리고 밀린 1 .4후퇴로 인하여 우리민족의 통일을 이루지못한
뼈아픈 전쟁을 모두다 알고 있다 이때 중국공산군의 참전에 대한 댓가로 김일성은 백두산
천지의 3분지 1을 중국측에 주었다한다 그것이 민족의 성지인 백두산을 중국과 공유하게된
동기이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당시에 참전한 중국공산군에 대한 좋지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연길에서 우리동포와 식사하면서 대화중에 연변의 조선족 인구수가 6 .25사변때에 많은
수의 청장년들이 전쟁에 나가 죽지만 않았다면 동포들의 인구수는 지금보다 훨씬 많아
조선족의 입지가 더좋았을 거라는 말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전쟁에서 사망한 인원이 자그마치 60 만명 이었다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해전술로 밀고밀은 중국공산군의 대다수가 우리동포 였다하니 경악을
하지않을수가 없다 당시의 그들은 중국보다도 잘살고 있는 북한이 모국이고 자랑이었으며
남한은 미국의 통치를 받으며 학대받고 있는 못사는 모국으로 기회가오면 미국으로부터
해방시켜야 된다고 교육 받아 왔다 한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동포들이 세운 학교에서는
교육교재가 북한에서 조달되었으니 이해될 만한 이야기이다
전쟁도 미국을 등에 업은 남한에서 일으켜 북침하였기에 모국을 구하기위해 모병에 자원
하여 생명을 받쳤다 하니 남북의 골육상쟁은 물론이고 타국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혈육을
끌여드려 고귀한 생명을 잃게한 같은 핏줄간의 이념분쟁이 절로 한스러울 뿐이다
우리의 전쟁으로 인하여 최대의 수혜를 입은 나라는 중국 이었다 그나라의 53개 소수민족
중에 유일하게 중국에 동화되지 않고 세력을 키워가는 껄끄러운 조선족의 개체수를 줄이는
데 있어 우리의 전쟁을 이용하였으며 그들은 북한을 도와 줬다는 생색과 함께
옛부터 우리선조들과 다투어 왔던 영토분쟁을 그 기회를 이용하여 백두산의 일부를 차지
하는 등의 실리를 챙기게 된것이다
천지에서 먼발치의 북한구역을 바라보니 중국과는 달리 한가 하다못해 스산하기 까지하였다
백두산을 찿는 인구의 절반이상이 우리나라에서 그리고 중국내 동포들 이라한다
중국이 백두산을 관광자원 으로 개발하여 엄청난 부를 누리는 것을 지켜보자니
6 .25라는 전쟁이 원망스럽고 또한 그당시 중국공산군의 개입때 연합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의 계획대로 중국의 수도인 북경에 핵폭을 하였으면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
당시의 미국 대통령인 트루만은 맥아더 장군의 확전전술이 세계3차 대전을 유발할수 있다
는 우려감에 맥아더 장군을 소환하여 예편시킬때 장군이 예편식에서 남긴 명언이다
다시 지프로 하산을 하였다 중간기착지에서 천지 까지는 지프로 약20분 정도가 소요된다
산길여건은 폭 5미터의 콘크리트 포장도로 인데 옆을 보면 끝이 않보이는 말그대로 천길
낭떠러지 이고 도로선형은 꾸불꾸불한 급커브로 위험스런 도로임을 느낄수 있다
이러한길을 지프는 카레이스 하듯달려댄다 참으로 무지막지한 운행이엇다
오를적과 내릴적에 저승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더욱이 내려올때의 운전자는 술냄새가
풀풀 풍기여 간이오그라드는 곤욕을 겪었다
하산하여 중간기착지에서 셔틀버스로 약10분 이동하면 유황냄새가 물씬한 노천유황천이
흐른다 여기에 계란을 삶아 먹어보니 표현하기 어려운 특이한 맛을 낸다
유황천 하류쪽에 그물을 끌어드린 온천탕이 있는데 물은 정말로 좋았지만 시설이나
온천탕 관리상태는 저급하기 짝이 없었다 욕실바닥은 청소를 하지않아 이끼같은 이물질
이 끼어 미끄럽고 지저분하고 아무튼 양질의 온천물로 목욕을 했지만 개운한 기분은
아니었다
연길의 숙소로 돌아와 다음날 우리는 동행한 동포의 인척이 살고있다는 두만강으로 철렵을
떠났다 목적지 까지 가면서 차창에 보이는 풍경에 두만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을 옆에
끼고 연결된 도로를 따라가니 저넘어가 북한땅이라 한다
도로와 하천은 북한땅 옆으로 이어져 있어 북한의 풍경을 자연스럽게 볼수가 있었다
국경이래야 남북과 같이 철책이 있는것도 아니고 막연하게 저기부터 북한이라는 설명에
중국과 북한진영을 비교해보니 중국은 차량통행이 제법있고 길가에서 야채등을 파는 노점상
도 보이며 주민들의 활동장면이 목격되고 수림은 자연그대로 방치된듯한 상태이었지만
북한쪽은 간간이 농막은 보였으나 사람은 보이질않고 산의 수림은 모두 제거하여 목초지
형태로 되어있어 시야가 확보되여 훤히 들여다보였다 아마도 중국으로 탈북하는 주민을
감시하기 위한 처사인듯 싶다
70년대 까지는 중국보다도 북한의 경제여건이 좋았다한다 그러다보니 북한에 친인척을둔
동포들은 북한을 왕래하면서 여러 가지 도움을 받으므로써 북한은 동포들의 동경의 대상
이었으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많은수의 북한인들이 중국으로 탈출 한다
탈북인들은 중국내에 어떠한 연고가 없으면 인간을써 겪어야하는 가장 비참한 생활을 하며
현지 중국인들의 신고 내지는 중국공안원에게 검거됬을때 짐승취급을 당하다 북송되여
처형된다한다 어떤 탈북녀는 숨어지낼곳이 없어 산에서 산일을 하는 남성에게 의탁하여
지내며 애까지 낳았지만 공안원에게 잡혔을때 많은 구타에다 정육점에서 고기덩어리 걸어
놓을때 사용하는 갈구리로 탈북녀의 몸을 찍어 질질 끌고 가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동포의
말을 들을때 소름이 끼쳐왔다
어이하여 우리의 신은 지구상에 단하나 남은 분단국으로 우리민족에게 이러한 시련을주실까
철렵온 개울은 하폭이 10 미터 정도인 두만강 지류의 하천이었다 개울을 경계로 국경이
나누어져 있었다 수심도 무릅을 찰정도 이고 간간히 건너편에 농부인것 같은 북한인이
개울에서 더위를 씻곤 했다 있는것은 “이곳은 국계 이니 건너지 마시오” 라는 팻말 뿐이고
잘못되면 북한군들이 건너와 우리를 납치하는거 아닌가 하고 한동안 묘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작고한 가수인 김정구님의 “눈물젖은 두만강” 이란 가사중에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뱃사
공 흘러간 그옛날에 내님을 실고“
사실 두만강은 배를 띄울 만큼의 큰강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에 와서 느껴보니 이땅은
틀림없는 우리민족에 땅이란것을 쉽게 알수가 있었다 두만강이 중국과 우리를 구분하는
국경이 아니고 개울건너 김서방네 식의 아래위 옆동네 였던것이다 같은 풍경의 정취에
같은 핏줄의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과 같은 생활 풍습등 뭐하나 다른점이 없는 우리 민족
의 땅이 어찌되여 중국이란 말인가!
동북공정 이란 말이 떠오르는게 중국에서도 이점을 의식하여 시행하는 정책인듯 하다
달라이 라마를 정신적인 지주로 삼아 봉기하고 있는 티벳의 독립운동을 원천봉쇄 하므로써
중국내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의 싹을 사전에 잘라버리는 중국으로 볼때 중국내 조선족은
언젠가는 타오르는 활화산 당시의 백두산과도 같은 존재감을 인식하여 장기적으로 추진하는
정책인 것이다
현재는 남북이 분단되여 민족의 힘이 각각의 이해타산에 의해 나누어져 힘을 못쓰지만 훗날
통일을 이룬경우 중국내 조선족에게는 거대한 모체가 됨으로 인하여 예전부터 열악한 환경
에서도 입지를 다져왔는데 하물며 거대한 빽그라운드가 형성됬을때의 조선족은 중국에서도
통제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하에 계획된듯 하다
중국의 역사 왜곡은 일본의 역사 왜곡 보다 더욱더 심각한실정 이다
중국과는 역사적으로 국경을 접하다보니 크고 작은 수많은 다툼으로 침략과
방어를 반복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지만 그들에게수치를 안겨준 역사에 대하여는
부정한다는 사실이다 그들과 동북아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던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는
아예 인정을 하지않는 다는 사실은 그들의 숨은 음모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우리를 안내한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동포의 말을 빌리자면 대학교 졸업 때까지 역사
시간에 고구려와 발해에 대하여 배운바도 없고 지금의 요녕성이 옛고구려 영토 였다는것을
우리나라 사람에게들었다 했다 또한 중국당국은 조선족들의 대대적인 문화 행사는 허락지도
않으며 옛고구려 영토인 중국땅에서 고구려의 유적이 출토되면 숨기면서 왜곡하는 것이
다반사라 한다
현재 중국내 조선족의 본거지라 할수있는 제2의 홍콩으로 불리우는 연길이 남한경제와
백두산 관광 거점도시로써의 호황을 누리자 조선족의 경제위상이 커져가는 것에 위기감을
느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백두산 인근 지역에 공항과 신도시를 개발하는 것은 백두산관광
을 위한 편의성을 제공하기 보다는 조선족 자치주의 수부도시인 연길을 견제하여 궁극적
으로는 조선족 위상이 커져가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두만강 본류의 규모는 경기남부에 있는 안성천 이나 황구지천 정도 이다
강건너 언덕구릉지에 거대한 동상이 보였다 김일성 동상이라 하였다 아무도없는 허허벌판에
왜 세워놨는지 촌스러운 생각이들었다 두만강을 건너는 콘크리트 스라브 형식의 교량이
중간지점이 꺽인채 방치되여 있다 그교량이 그지역에서는 명물 이라한다
80 년대 상반기에 납치된 중국민항기의 춘천공항 불시착을 계기로 중국과의 개방의 문이
열리면서 동포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남한사회는 중국동포들에 있어서는 꿈속의 파라다이
스 였다 미국의 지배하에 헐벗고 가난한것 으로만 알았던 남한의 등장은 추락한 북한을
대신한 동포들의 새로운 희망이었기에 많은 수의 동포들이 남한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따듯히 포용할줄아는 마음을 보여야한다 긴세월을 몇 대째 타국에서
얼마나 많은 섦움을 받았겠는가 같은 핏줄로써 이들을 돌보는 것이 훗날 중국의 동북공정
맞서 잃어버린 옛땅을 찿기위해 싸울수 있는 최고의 자산이 될 것으로 본다
옛말에 먼데 있는 물은 불을 끄지못한다 했다 이들이야 말로 중국의 내부에서 중국을
가장 많이 알면서 중국과의 경쟁이 되었을때 우리의 염원을 달성하는데 최고의 전사임을
명심해야 할것임을 강조하면서 백두산 천지 기행문을 마칩니다. 끝.
첫댓글 고맙소~아직 탐방은 못했지만 자세히 기록해줌으로 참고가 될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