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힐리야 시대 문학
무슬림 사가들은 아라비아 역사상 고대부터 이슬람교 출현 이전까지의 시기를 자힐리야시대라고 한다. <자힐리야>는 사전적 의미로는 무지, 무식 등을 뜻하지만 문학적 의미로는 야만, 미개를 뜻한다. 이 시기에는 우상 숭배와 부족간의 끝없는 반목과 복수, 영아 살해, 음주, 간통 등의 야만적인 풍속이나 관습 등이 유행하였다. 따라서 이슬람적 가치 기준에서 볼 때는 이슬람적 정신의 부재였으므로 이 시기를 자힐리야 시대라고 한다.
문학사상 자힐리야 시대 문학은 기록상 가장 오랜 시가가 지어진 기원후 500년경부터 아라비아 역사상 신기원을 이루는 무함마드의 메디나 이주 즉, 히즈라(Hijra) 원년인 622년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자힐리야 시대 문학의 발생지인 아라비아 반도는 대부분이 사막인 불모의 땅으로 강우때만 물이 흐르는 와디(wadi,乾川)와 오아시스가 산재해있는 단조로운 지형이다. 아라비아반도 남서부에는 비가 많이 내리기도 하나 대부분 지역은 극도로 건조하고 혹독한 더위로 알려져있다. 사막은 사구(砂丘)의 광야도 있고 돌덩어리가 넓게 펼쳐진 들이 있는 등 전체 사막이 똑같지는 않았다. 당시 아랍인들은 낙타와 양떼를 몰며 물과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는 유목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 아라비아 반도 북부에는 비잔틴 제국과 사산 제국이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고 이들 틈새에 아랍 왕국인 갓산(Ghassan)과 히라(Hira)가 완충지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히라 왕국의 통치자들은 특히 아랍 시인들의 후견자로서 유명하였다.
유목민인 베드윈 아랍인들의 이러한 자연 환경은 그들의 사고와 감정, 상상력에 영향을 미쳐 베드윈의 인생관은 철저히 쾌락주의적인 것이었다. 사랑, 술, 도박, 사냥, 노래와 연애의 즐거움, 재치와 지혜가 깃든 짧고 신랄하며 우아한 표현들만 좋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단순 명쾌한 사고와 사실주의적인 상상력, 섬세한 감각을 바탕으로한 간결한 어휘 구사가 당시 문학의 특성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시가(詩歌)가 베드윈들의 문학적 표현의 거의 유일한 매개체였다. 부족사이의 불화와 반목으로 싸움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부족중심 사회에서 시는 부족의 결속을 이루는 통합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자힐리야 시대 아랍인의 이상적 덕목인 무루와(Muruwwa) 즉, 관대함과 명예, 용맹성, 충성심이 시를 통해 표현되었다.
고대 아랍인들은 부족마다 시인을 두고 있었는데 만약 어느 집안에서 시인이 나오게 되면 모두 몰려가 잔치를 벌이고 시인의 탄생을 축복해 주었다. 아랍에서는 시인을 초자연적인 인식 능력을 타고 난 사람이거나 진(Jinn)이나 악마의 힘을 빌려 마력을 과시하려는 마법사쯤으로 생각하였다. 자힐리야 시대의 시인은 출신 부족의 신탁자(信託者)였으며 평시에는 부족의 안내자로서 샘물이나 목초지를 찾아주고 전시에는 자기 부족의 사기를 올려주고 적의 사기를 꺾으려는 심리전을 펼치는 전사(戰士)와 같았다.
가장 오래된 시적 표형 양식은 운율이 없는 각운인 사즈아(saj') 즉, <각운 산문>으로서 시인이나 예언자 등이 초자연적인 계시를 내리거나 온갖 신비스럽고 심원한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 채택한 독특한 표현 양식이었다. 여기에서 19세기 근대적인 시가 출현하기 까지 오랫동안 아랍시의 정형으로 뿌리를 내린 정형시 까시다(qasida)가 발달하였는데 초기에는 단순한 형태를 지니고 짧은 칭송이나 전쟁터에서 적을 향해 퍼붓는 모욕의 언사를 담은 라자즈(rajaz)가 나타났다. 까시다의 각운은 첫 행의 두 번째 반구(半句)에 사용된 것과 똑같은 운이 둘째, 셋째 행에서도 반복되며 시의 마지막 행까지 계속된다.
정교한 운율의 까시다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삼중의 구조로 이루어졌다. 첫 도입부인 나시브(nasib)에서 폐허가 되어버린 황량한 야영지를 언급하면서 옛 애인과의 추억을 되살리며 열렬했던 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슬퍼한다. 이와같은 에로틱한 서두는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의 이목을 시인 자신에게 쏠리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두 번째로 시인은 청중이 주의깊게 경청하는 것을 확인한 다음, 사막을 여행하며 겪은 어려움과 낙타와 말, 양 등을 묘사하거나 천둥 번개 등 자연 현상을 묘사한 뒤 본론에 들어가게 된다. 마지막 세 번째에서는 시인이 자신의 출신 부족이나 개인에 대한 칭송 혹은 적에 대한 비방과 풍자로서 결말을 이루게 되는데 이 때 시인이 다루게 되는 주제(gharad)에 따라 풍자시, 연시, 칭송시, 애도시, 묘사시, 주시, 무용시 등으로 분류된다. 특히 칭송은 다른 주제보다 시인들이 즐겨 선택하는 주제였으며 가장 중요한 마지막 부분이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일 경우 연인을 읊는 <나시브>는 생략될 수 있다. 까시다는 이처럼 유기적 통일체를 이루지 못하고 하나의 목걸이에 크기와 종류가 각기 다른 진주를 실로 꿰매어 놓은 것과 같았다.
까시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시의 형태는 메카의 카바 신전에 걸렸다는 장시(長詩)의 《무알라까트 Mu'allaqat》로서 '방랑의 왕자' 이므루 알 까이스(Imru' al-Qays)의 《무알라까트》를 비롯한 7편의 무알라까트가 전해진다. 아랍인들사이에 즐겨 애송된 이 무알라까트는 지금도 아랍인들의 시적인 천재성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예로서 인용되고 있다.
고대 아랍시는 이슬람 이전 시대의 아랍인들의 사고와 생활방식을 실증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의 원천이 되고 있다. 또 이슬람 이전 역사의 유일한 기록으로서 <시는 아랍인들의 등기부(Diwan al-'Arab)로서 거기에는 족보가 보존되고 유명한 전투가 기록된다>라는 말에서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아랍시는 직업적인 암송자인 라위(rawi)들에 의해 구전되다가 8세기경 수집, 정리되어 기록됨으로써 변조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의혹도 일부 문학사가들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이 시대에는 구전 문학인 시가 주류를 이룬 반면, 산문 문학은 전승되기 어려웠으므로 크게 발달하지는 못했다. 동시대 산문중에서 속담(mathal)은 이슬람 이전의 생활상을 조명해주는 흥미로운 자료가 많이 들어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전거가 되며, 그밖에도 부족과 개인의 공적을 이야기하는 설화나 연설(khutub) 등이 전해져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