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이(洞夷)문명 발상지… 일제도 "한국 땅" 백두산정계비는 중국의 간도 점령 야심
그 해 지용수와 이성계는 랴오닝성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 때 고려는 동녕부에 랴오닝ㆍ선양 지역이 원래 고려의 영토였음을 통고했다. 그리고 이성계의 선조인 목조 이후 4대가 원나라에 입사하여 두만강북 일대를 통치했다. 조선 세종 때는 김종서가 6진을 개척했으며, 강북의 여진족들은 조선에 거의 복종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후 여진족이 강성하여 조선을 침입했다. 이때 간도분쟁의 시발인 1627년 강도회맹이 체결됐고, 간도지역을 봉금하여 무인지대로 두었다. 이 무인지대에 청이 관심을 가지게 된 사건은 러시아의 흑룡강 연안 진출이다. 그 결과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이 체결됐으며, 강희제가 선교사를 특파하여 백두산 일대를 지도로 그려가는 등 만주 일대의 영토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야욕의 하나가 강희제의 백두산정계비 건립이다. 정계비의 오류와 두 차례 국경회담 숙종 36년에 이만건 월경사건으로 청 사람 5명이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자, 청은 조선과 국경을 분명히 정할 계획으로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해 1712년 5월 15일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서위압록(西爲鴨錄) 동위토문(東爲土門)’이다. 그러나 목극등은 토문강의 수원이 동에서 발원하여 동북 방향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유입되는 것을 몰랐다. 두만강 상류인 홍토수ㆍ석을수 양수가 합류하는 것을 토문강의 원류가 양수와 합류하는 것으로 잘못 안 것이다. 목극등의 오류를 박권이 지적했지만, 목극등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설표(設標)공사를 시찰한 북평사 홍치중도 오류를 확인했다. 후일 조선은 토문강의 위치를 송화강 상류로 보았으나, 청은 토문강이 두만강과 같은 강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간도분쟁의 원인이다. 1860년대 북관지방의 수해와 흉년으로 인하여 간도와 연해주로 도강하는 이주민이 늘어났고 이후 러시아와 청은 수차례 조선인의 귀환을 요청했다. 청은 1878년에 압록강 이북의 봉금지역을 개방했다. 1882년 길림장군 명안(銘安)이 토문강 이북ㆍ이서에 많은 조선인이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조선에 이들을 데리고 가도록 요청했다. 이때부터 국경논쟁이 벌어진다. 청은 곧 도강한 조선인을 모두 돌려보낸다고 고시했고, 조선인들은 이 고시가 부당하다고 이정래 종성부사에게 호소했다. 이에 어윤중 서북경략사는 김우식을 시켜 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를 답사토록 한 후, 이에 근거해 토문강은 송화강 상류이며, 간도지역은 우리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또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에 대한 공동조사를 청에 제기했다. 1885년 을유국경회담이 열렸지만 토문강을 국경으로 보는 우리 측의 주장과 두만강 상류인 도문강을 국경이라고 주장하는 청의 억지로 회담은 결렬됐다. 2차 정해국경회담은 1887년에 열렸으나 역시 합의하지 못했다. 토문강의 실체와 변계관리사 임명 1887년 조선은 관찰사 조존우에게 국경분쟁문제를 철저히 조사 보고토록 했다. 그는 공법회통을 인용해 국제공법상 토문강이 한ㆍ청간의 경계라고 밝혔다. 1898년에는 간도문제와 관련한 상소가 있자 내부대신 이건하의 지시로 경원군수 등이 또 국경답사보고서를 제출했다. 내용은 肩릿? ?阿???오륙백 리를 흘러서 송화강과 합하여 흑룡강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니, 토문강과 발원지로부터 바다에 들어가는 흑룡강 하류 동쪽은 우리의 땅이다. 우리나라는 변경의 분쟁을 염려하여 유민을 엄금하고 땅을 비웠다. 그런데 청이 이를 선점하여 자기 땅이라 하고 러시아에게 천 여 리의 땅을 할양했으니, 토문강으로 정계한 것으로 보면 이것을 용인할 수 없다. 민생이 이로써 곤란을 받고 변경문제가 늘어가니 한국, 청, 러시아 3국이 함께 답사하여 각국 통행의 국제법규에 따라 공평히 타결해야 한다.’ 토문강이라는 명칭은 ‘전요지’와 ‘요동지’에 ‘토문하(土門河)’로 나온다. ‘장백산 북의 송산에서 원류가 시작되어 동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간다’는 기록도 있다. 조정에서는 1897년 서상무를 서변계 관리사로 임명했고, 1900년께 평북관찰사 이도재는 압록강 대안지역을 각 군에 배속시키고 충의사를 조직했다. 그리고 1902년 5월 이범윤이 간도시찰사로 임명 받아 간도 조선인을 위무했다. 당시 간도 일대의 인구는 2만7,400여 호, 10여 만 명에 이르렀다. 간도 한인의 보호를 위해 이범윤은 진위대병의 간도 파병 등을 조정에 요청했지만 조정에선 불허했다. 이에 따라 이범윤은 스스로 사포대를 조직하고 간도 한인으로부터 세금을 받아 그 비용에 충당했다. 이후 청병과의 충돌이 늘면서 교전이 일어나고 주민살해와 가옥방화도 계속되면서 간도분쟁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간도분쟁은 결국 조정 내의 권세쟁탈을 야기했다. 이범윤이 건의한 간도 파병문제는 당시 내부대신, 경무대신, 원수부 장관 등의 알력으로 결정되지 못했다.그 사이 지위를 지키기에 급급했던 변계관들도 간도 한인보호보다 이범윤을 물러나게 하는 쪽이 낫다고 보고 청의 지방 관리들과 1904년 한ㆍ청 변계선후장정까지 임의 약정했다. 이에 따라 이범윤과 사포대의 활동이 억제 당했고, 간도의 실제 관할권은 청으로 넘어가게 됐다. 일제의 간도 개입 조작과 간도협약 체결 일본은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간도분쟁에 개입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간도문제 개입의 법적 근거를 만든 다음, 박제순으로 하여금 1906년 11월 8일 통감부에 외교교섭을 내도록 조작했다. 또한 러일전쟁 중에는 한ㆍ청 간의 간도문제 조기 타결을 우려하여 청에 국경문제의 논의를 늦추도록 요청했다. 결국 일본은 러일강화조약으로 한국에서의 우월권과 만주의 특수 이익을 인정 받았다. 러시아와 1차 협약을 체결한 후인 1907년, 이토는 간도에 사이토(齊藤季次郞) 중좌 일행을 파견하여 파출소를 개설했다. 이때부터 청ㆍ일간에 간도문제에 관한 외교교섭이 전개됐다. 원래 이토는 “간도는 한국영토임을 전제”했지만, 교섭 당시에는 청에 ‘간도는 소속 미정의 영토’라고 통보했다. 1908년 4월 일본은 간도에 한인과 일본인의 잡거를 인정하고, 일본영사관을 설치해 한인 재판권을 담당하고, 두만강을 한ㆍ청 국경으로 인정하는 쪽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청은 종전의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 양국 교섭은 1909년 2월 일본이 간도 할양을 포함한 동삼성 6안을 청에 제시하면서 진척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그 해 9월 4일 간도를 청에 양보하는 간도협약이 체결됐다. 일제는 간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당초의 주장을 번복해 만주침략정책의 일환으로 간도를 청에 불법 할양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발상지인 간도는 현재 중국이 불법 점유하게 됐다.
/이일걸 성균관대 강사ㆍ정치학 박사 2004/4/27/ 한국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