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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복음주의의 탄생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한글개역)
경이롭고 무서운 일이 그 땅에서 행해지는도다. 선지자들은 거짓되이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그들의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하니, 그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한글 킹제임스 성경)
"지금 이 나라에서는,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 (표준 새번역 성경)
이 땅에는 기막힌 일, 놀라 기절할 일뿐이다. 예언자들은 나의 말인 양 거짓말을 전하고, 사제들은 제 멋대로 가르치는데, 내 백성은 도리어 그것이 좋다고 하니, 그러다가 끝나는 날이 오면 어떻게 하려느냐? (공동번역)
자신에게 맞으면 다 맞는 것이고 자신이 은혜 받으면 모든 것이 용납이 된다. 예배가 예배답지 못하고 찬양이 찬양답지 못해도, 설교가 설교답지 못해도 내 감정에 충격이 되거나 내 감정에 만족함이 오면 모두가 만사 OK다. 내가 교회 다니면서 예수 믿고 성공하여 남들보다 잘 살며 세상 사람보다 앞서 있으면 그것이 신앙의 승리가 아닌가. 믿는 자의 성공이 아닌가. 다원주의, 상황주의, 번영주의, 신 복음 주의, 뉴에이지, 프리메이슨, 이런 것들과 나는 상관없다. 관계하고 싶지 않다. 이런 것들로 나를 골치 아프게 하지 말라. 괜히 이런 문제점을 들추어내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어렵게 하지 않았으면 한다. 괜히 나의 길을 혼돈케 하여 나를 실패케 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즐겁고 기쁘고 내가 성공하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승리 아닌가.
현재 미국 내 크리스찬 가운데 4/5가 다원주의적 신앙관을 갖고 있음은 실로 충격적이다. 이러한 다원주의적 사고는 이미 우리 한국교회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수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다원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다. 다원주의적 사고란 우리 기독교외 모든 종교에도 나름대로의 구원의 길이 있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은 성경을 파괴하고 십자가를 모독하며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무서운 배도적 현상이다.
좀 지나간 설문조사지만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사회학자 제프레이 해든(Jeffrey Hadden)이 미국내 10,000명의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7441명이 답한 내용들이다. 이 설문조사의 결과는 미국 교회들의 배도적 상황을 그대로 나타내며 약 40년이 지난 현재 미국 크리스찬 가운데 4/5가 다원주의적 신앙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거짓이 아님을 증거 하기에 충분하다. 설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경이 신앙과 역사와 세속문제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감된 무오한 말씀임을 믿는가?
감리교회의 87%가 아니오
감독교회의 95%가 아니오
연합 장로교회의 82%가 아니오
미국 침례교회의 67%가 아니오
미국 루터교회의 77%가 아니오 라고 대답했다.
오늘 세계에 악한 마귀의 존재를 믿는가?
감리교회의 62%가 아니오
감독교회의 37%가 아니오
연합 장로교회의 47%가 아니오
미국 침례교회의 33%가 아니오
미국 루터교회의 14%가 아니오 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가?
감리교회의 60%가 아니오
감독교회의 44%가 아니오
연합 장로교회의 49%가 아니오
미국 침례교회의 34%가 아니오
미국 루터교회의 19%가 아니오 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이는가?
감리교회의 51%가 아니오
감독교회의 30%가 아니오
연합 장로교회의 35%가 아니오
미국 침례교회의 33%가 아니오
미국 루터교회의 13%가 아니오 라고 대답했다.
이 통계는 민족의 그리스도라는 잡지 1982년 5월호에 기재된 것이며 원 출처는 아래와 같다. (Trans-Action , July/August, 1967; Christian News, March 3, 1969; June 27, 1983, p. 5; Pulpit Helps, December, 1987; Christian News, November 23, 1987, p. 2.)
미국 내 목회자들의 과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성경적 올바른 가치관을 거부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미국 기독교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는 나라다. 이 설문 조사 후 한 세대를 넘긴 지금 우리들의 세대는 이러한 비 성경적인 사상에 자신도 모르는 순간 깊이 물들어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본인이 신 복음주의의 배도적 사상을 알리기에 앞서 넌저리 비슷한 내용의 글로 혹 마음을 다치게 하였다면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직접적 표현으로 던져진 열린 예배나 CCM 찬양이 참된 예배나 찬양이 될 수 없는 듯한 표현을 사용함으로 여기에 별 저항의식을 갖고 있지 않는 성도들에게 혹 오해를 줄 소지도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렇게 밖에 표현 할 수 없었던 본인의 심정을 이해해 주길 바라며 본 장에서 밝히는 신 복음주의의 무서운 배도적 음모를 조금이라도 이해해 참된 성경적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진정으로 당부한다.
사실 신 복음주의에 대한 세밀하고도 전반적인 모든 내용을 본 장을 통해 다루진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나타나는 다양한 신앙적 현상들이 신 복음주의적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만을 알림으로 자신의 신앙의 형태를 돌아보도록 하고 우리 성도들에게 신 복음주의에서 나타나는 마지막 시대의 무서운 배도의 실체가 조금이라도 밝혀진다면 참으로 기쁜 일이 될 것이다. 참고로 신 복음주의란 그 어떤 교회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는 새로운 사조의 복음주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배도적 복음으로 원 복음에서 이탈되어진 현 시대의 모든 복음주의를 의미한다.
신 복음주의의 태동배경
현 우리시대의 교회는 위기를 맞고 있다. 이 위기는 교회에 사람이 모이지 않거나 교회가 없어짐으로 나타나는 위기가 아니라 복음이 변질된 위기다. 비록 사람이 많이 모이고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오기는 하나 그 속에 참된 복음이 사라짐에 대한 위기다. 주님이 가르치고 사도바울이 피눈물로 호소하던 참된 진리의 복음은 점점 사라지고 다른 복음들이 교회로 대치되어 그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너무 자연스레 다른 복음이 교회에 자리를 잡다 보니 다른 복음이 참 복음인양 이제 교회는 자연스레 다른복음을 참 복음으로 인정하여 하나님의 말씀인양 등장되고 있다.
복음의 변질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 왔던 일이기 때문에 새삼 새로이 들추어 낼 필요성이 없을지 모르나 지금은 그 성격을 완전히 달리하고 있다. 이미 우리 한국 아니 거의 대부분의 세계교회들이 거짓된 복음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부정적이지 않느냐는 비판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실제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하나님, 예수, 구원 등의 이야기만하면 모두 기독교요, 교회에서 하는 말들이기 때문에 성경적이라 할 지 모르지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 그리스도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바울은 마지막 시대의 결정적 증거로 대대적 배도현상이 있을 것임을 엄중히 경고 하고 있다.(살후2:3) 이 배도는 특정한 지역이나 장소에서 일어나는 배도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배도에 대한 경고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배도에 무수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동참하고 따라감에 대한 지적도 동시에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근대시민 사회가 형성된다. 순수한 시민의 힘만으로 절대적으로 군림하였던 왕정 정치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민사회가 형성이 된 것이다. 이 혁명이 성공하도록 결정적 영향을 준 산물은 바로 14세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성의 자유주의인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로 말미암아 다시 나타나게 된 이성의 자유에 대한 회복적 사고가 절대 왕정의 무조건적 굴복을 허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중세를 지배했던 로마 카톨릭의 절대적 이성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성으로의 회복과 자유를 주창하고 나선 르네상스는 중세사회를 지배했던 스콜라 철학을 붕괴하고 새로운 이성의 자유를 주창하는 합리론적 이성주의와 경험을 중시하는 경험론적 사고가 사람들의 인식 속에 파고들면서 절대 군주제에 대한 반감과 그들의 지배적 독재에 항거하는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고 특히 이성적 사고를 중심으로 발전한 대륙의 합리론적 철학사고는 프랑스의 절대왕조를 무너뜨리는 계기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와 아울러 종교계의 일대 혁신은 로마 카톨릭의 체제와 신학에 반대하여 새로운 성경중심의 신학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계의 혁명이 바로 루터로 인하여 비롯된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은 카톨릭과 결별하는 새로운 기독교를 탄생시키게 되었고 성경으로 돌아가고 성경중심의 신학적 기초를 마련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가치관을 새로이 확립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의 탄생이다. 어떻게 보면 탄생이라는 말이 이치에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개신교의 탄생은 새로운 탄생이 아니라 초대교회 사도들이 가르쳤던 성경중심으로 되돌아가는 그리고 올바른 성경중심의 사상으로 돌아가자는 시도이기 때문에 새로운 탄생이 아니라 본질의 회복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수 있다. 그러나 천주교와의 완전한 결별과 그 차이점에서 개신교가 나왔기 때문에 이를 새로운 탄생이라 부르는 것이다.
종교개혁을 통한 성경중심의 신학은 수많은 종교회의와 진통을 겪게 되면서 그 체계를 확립하게 되고 성경중심의 교리에 대한 뿌리를 내리게 되면서 하나님중심, 성경중심의 신학이 확립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뿌리는 새로이 등장한 이성주의의 철학에 심각한 도전을 받으면서 절대적 하나님에 대한 가치를 뿌리 채 흔드는 새로운 사상이 자연스레 기독교내로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하고 많은 신학자들이 그 사상에 동조하는 새로운 경향이 생기게 되는데 그 사상이 바로 대륙의 합리론과 경험론을 절충하여 만들어낸 임마누엘 칸트의 계몽주의적 철학 사상이다. 칸트의 계몽주의적 사상체계가 가져온 기독교계의 영향은 절대적 하나님에 대한 관념에서 탈피하여 하나님과 인간관의 관계를 절대적 관계에서 상대적 관계로 만들어 가게 하였다.
계몽주의가 등장하기 이전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절대적 가치관에 있어 하나님은 반드시 존재한다라는 사고이다. 여기에 다른 이유도 없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그 어떠한 반론도 없었다.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다양한 논쟁들은 있어 왔지만 존재 자체에 대한 거부나 부정은 일체 없었다. 그러나 계몽주의가 들어섬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달라진 하나님에 대한 가치관은 하나님은 존재하되 인간은 그 하나님을 절대 알 수 없다는 사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얼핏 보기엔 이 말이 진리며 성경의 가르침인 듯이 보이나 이 말의 본질적 의미는 인간은 그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알 수 없으니 하나님에 대해 알려고도 해선 안된다는 의미로 이는 결국 불가지론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 불가지론의 사상은 하나님은 존재하되 인간 세상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 사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이들 사상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요 거부적인 차원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불신적 계몽주의의 영향에 반발하여 새로운 신학이 태동되는 계기가 마련되는데 아쉽게도 그 신학이 바로 독일의 슐라이에르 마하에서 출발하는 자유주의 신학이다. 여기에서 출발한 자유주의 신학은 우리 기독교의 복음주의적 근본신학을 송두리째 위협하고 나선다. 앞 부분에서도 간단히 설명했듯이 마하는 하나님의 존재발견에 대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기 보다는 인간의 감정으로 하나님을 발견해야 한다는 감정중심의 사고로 성경을 멀리하게 되고 자신의 감정이 느끼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다라고 주장함으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이성적 하나님에 대한 사상을 배척하여 성경을 하나의 신화로 간주하는 경향으로 치부하였다. 더불어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등장과 때를 같이하여 나타난 무서운 사탄의 역량이 강화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변역이다. 영국의 웨스트코트와 홀트 등이 중심 되어 그때까지 아무런 이상 없이 사용하던 킹 제임스 성경을 버리고 그들이 번역한 새로운 성경으로 대치시키는 일들이 진행되면서 킹 제임스 성경은 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지고 이들이 번역한 새로운 성경이 자리를 잡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 부분은 따로 성경변역의 한 장을 할애하여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들이 새로이 번역한 성경은 자신들의 사상을 반영, 삭제 외 첨가, 변개 등 오류투성이의 성경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과 성경변역의 일들이 거의 비슷한 시대에 일어났다는 것은 일부러 맞추려 해도 쉽지 않을 텐데 이런 일들이 비슷한 시대에 일어났다는 것은 사탄의 기막힌 작업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자유주위 신학은 18세기부터 시작하여 근 20세기 초까지 득세하며 전 기독교계에 그 기세를 떨치게 되었다.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의 기세에 밀려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가 위협을 받게 되자 19세기 말 제임스 브룩스(James H. Brookes, 1830-1897)를 중심으로 윌리암 어드만(William J. Erdman), 아도람 저드슨 골든(Adoniram Judson Gorden), 에이 씨 딕슨(A. C. Dixon),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에이 티 피얼슨(A. T. Pierson)등이 합세하여 미국의 나이아가라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여기서 그들이 작성한 나이아가라의 14개 신조가 만들어 진다. 이러한 이들의 모임으로 시작된 자유주의에 대한 반격은 더욱더 구체화 되어 1910년 “근본교리들 : 진리에 대한 증언”(Fundamentals : A Testimony to the Truth)이라는 12권의 책을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였고(C. T. McIntire, "Fundamentalism," Evangelical Dictinary of Theology, pp. 433; Dollar, p. 175.) 1910년 미국 북 장로교회(PCUSA) 총회는 5개항의 교리를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본질적 내용이라고 선언하면서 근본주의를 탄생시켰다.
이렇게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반대하여 나타난 새로운 신학사상이 바로 근본주의 신학의 태동이다. 근본주의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절대적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여 성경의 근본으로 돌아가자라는 운동으로 새로운 종교개혁의 한 장르로 분류될 수 있으나 그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자유주의와 대항하기 위해 새로이 탄생된 근본주의는 1920년대 들어 제이 그레샴 메이천(J. Gresham Machen)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나 1923년 미국의 북 장로교 총회에서 새로운 어번 선언서(The Auburn Affirmation)라는 것이 작성되었는데 이는 1293명의 목사들의 서명을 받아 이전 총회(1910년,16년,23년)가 근본교리로 채택한 근본주의의 5대 교리를 인정하지 않고 그 교리들은 "본질적이지 않고 이론들일 뿐"이라고 선언하였으며, 특히 성경 무오설은 성경숭배에 빠지기 쉽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같은 총회 내에서의 이질적 싸움은 그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미국 보수주의의 마지막 보루의 관문이었던 프린스턴 신학교가 자유주의자에 의해 넘어가게 되고 이를 반대하던 메이천과 다른 보수적 교수들인 로버트 딕 윌슨(Robert Dick Wilson), 오스왈드 앨리스(Oswald T. Allis),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이 프린스톤을 떠나면서 1929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를 설립하였다(Harden, pp. 14-23; Beale, 165-170; 315-316)
성경으로 되돌아가려는 미국 내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의 신학에 밀려나면서 그 세력은 축소되고 성경적 복음전파에 상당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근본주의 교단내의 다양한 갈등 또한 복음전파에 있어 많은 지장을 초래하게 되자 근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940년대에 새로운 신학의 한 형태가 나타나면서 현대신학을 이끌어가는 대장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신학이 바로 신 복음주의이다. 근본주의를 무너뜨리고 새로이 등장한 신 복음주의는 빠른 속도로 그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을 달성키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음만 전해지면 된다라는 새로운 이들의 복음전파 방식이 시대에 그대로 적용되어 미국 내 대부분의 대형교회들이 이 신 복음주의적 사고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신학은 어떻게 하면 대중들에게 좀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게 되었고, 대중들이 좋아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심도 깊게 연구하고 고안하여 성경과는 전혀 맞지 않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방법의 새로운 형태의 복음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신 복음적 신학은 때마침 등장한 실용주의적 철학사고와 그대로 맞물려 실용을 중시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 급진적인 발전을 이루어가게 되었으며 수많은 교회들이 성경적 복음에 대한 진지한 검토도 해 보지 못한 채 세차게 몰려오는 신 복음주의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신 복음주의의 외형적 성장이 성경적 성장이라는 등식을 만들어 성경적 검토 없이 이들을 무조건 수용하는 일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복음전파의 본질과 과정은 무시한 채 결과를 통해 나타난 외적 성공의 형태로 일단 외적 성공이 이루어지면 모든 과정은 다 무시해도 괜찮다는 실용적 사고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