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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연구 범위: 출 1;1~2:25
기억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히 11:23)
요지
죄의 속박에 묶여 있는 우리의 상태가 절망적인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구원자를 준비해 놓으셨다.
개관: 출 1:1~2:25
1:1~22 속박과 압제 | 2:1~10 구원자의 탄생 | 2:11~25 구원을 위한 준비 |
이스라엘 자손들이 노예가 됨. 살해 명령 | 모세가 출생함. | 모세의 선택. 미디안으로 도망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심. |
서론
하나님께서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가 하는 것과 우리 자신들의 경험을 비교할 때, 우리는 종종 표상들을 사용한다. 이것은, 구약의 그 특별한 사건, 인물, 제도들이 신약 시대나 마지막 때의 구속의 계획과 관련된 실재들을 나타내도록 하나님께서 고안하시고 지도하셨다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바울은, 출애굽기의 모든 경험이, 죄로부터 해방되어 영생 얻을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고전 10:1~13 참조). 이번 주일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표상, 혹은 예표로서의 모세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표론이란 신약 사람들이 구약을 해석하는 데 취한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표론과 우화주의를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우화주의는 사색이나 불분명한 유사점으로부터 공상적 대비(對比)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예표론은 성경 자체에서 끌어낸 분명한 유추에 기초한 것이다.
속박과 압제 (출 1:1~22)
질문에 답하거나 설명된 내용을 읽기에 앞서, 각 곳에 지시된 성경절들을 꼭 읽읍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노예가 됨(출 1:1~14)
1절부터 6절까지는, 다음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 창세기의 마지막 다섯 장을 요약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여기 언급된 70인과, 창세기 46장 27절에서 애굽에 살러 온 야곱 가의 인원 수 는, 부인이나 딸들, 남녀종들과 그들의 하속들, 머슴들은 포함되지 않은 숫자이다.
하나님께서 부조 아브라함과 언약하실 때,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애굽으로 이사하여 속박과 압제를 받게 될 것과 그 노예 상태로부터 극적으로 해방되어 허락의 땅에 정착하게 될 것에 관해 그에게 무슨 예언을 하셨는가?(창 15:7~16)
답:
출애굽기의 첫 절들에서 우리는 창세기에 소개된 대쟁투 -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 - 에 관한 예언이 계속 성취되고 있음을 본다.
출애굽기 초장부터 나타나는 그 투쟁이 오늘날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도 적용된다고 보는가? 당신도 포함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갈 3:29; 계 12:7~18)
답:
성경은, 죄를 노예 상태로, 그 속에 붙들린 사람을 노예로 말하고 있다(요 8:34; 롬 6:16).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노예 상태에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죄의 땅에 속박된 상태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들에게도 해당된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던 것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들을 성취시키기 위해 오늘날 어떻게 역사하실 것인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세보다 더 능하신 구원자를 준비해 두셨으며, 그가 우리를 죄로부터 구해 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가실 것이다.
(생각해 봅시다) 죄가 그 노예된 자들에게 강요하는 것들은 바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요구한 것들보다 덜 괴로운 것인가? 죄의 대가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히브리서 11장 25절에서 성경은 왜 ‘죄악의 낙’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가?
죄가 그 추종자들에게 제공해 주는 쾌락은 진짜처럼 보이나, 사실 그 쾌락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을 행복하게 하시고자 주신 것을 악용한 것들이다. 이것을 바른 입장에서 보면, 죄로 굽어진 본성이 악을 섬기는 데서 발견하는 쾌락에도 불구하고 “범죄자의 길은 험”(잠 13:15 영문)한 것이다. 죄는 점점 힘겨운 봉사를 요구하여 결국 우리를 죽게 만드는 일종의 작업 감독이다. 이 세상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옛날 애굽에서 압제 당했던 이스라엘 사람들보다도 더 무서운 노예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이같은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기 전까지 그들의 인구는 어느 정도로 늘어났는가?(민 1:46; 출 38:26)
답:
이 숫자로 보아, 총인구, 그러니까 부녀자들을 포함한 전체 인구는 적어도 2백만은 되었을 것이다. 출애굽기 1장 7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보편적인 기대치를 훨씬 넘는 인구증가율을 보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다섯 가지 다른 표현들을 쓰고 있다.
살해 명령(출 1:15~22)
이스라엘을 멸하고자 하는 사단의 계획은 실패하였다. 애굽 사람들이 그들을 압제하면 할수록 그 히브리 인들은 더 불어났다. 하나님의 축복은 사단의 공격을 무산시켜 버렸다. 그러자, 사단을 바로를 움직여 모든 남자 아이들을 죽이도록 명하게 하였다. 이 일에 있어서 바로의 행동은, 죄가 그 희생자를 점점 더 자신의 세력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이는 방법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을 취급함에 있어 바로가 취한 단계들을 생각해 보자.
강제 노동(11절)
노역에 잔인함이 첨가됨(13,14절)
산파들에게 남자 아이를 죽이라고 명함(16절)
모든 애굽 인에게 히브리 남자 아이를 죽이라고 명함(22절)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셉의 때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중재로 그분의 인도하심 하에 애굽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렇게도 잔인한 압제를 당해야 했는가?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면 고통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항상 고통에서부터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가? 아니면 당신께서는 최선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이따금씩 고통을 허락하시기도 하는가? (시 34:19; 고전 10:13)
나는 고통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그것을 품성을 계발시키는 수단으로 받아들이는가 혹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증거로 받아들이는가?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의 매일의 생활이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울 때 그들을 버리셨는가?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 옴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형편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이것은 전 세계가 하나같이 점점 더 타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고대 이스라엘이 경험한 것과 유사한 핍박과 압제가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도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죄가 충분히 발전되도록 허용된 후에는 하나님께서 죄의 역사를 종결지으시기 위해 개입하실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핍박과 곤경은 구원이 가까워 옴을 가리켜주는가?(눅 21:12,28)
답:
사단이 바로로 하여금 남자 아이들을 모두 살해하도록 명하게 한 데는,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에게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 이상의 어떤 큰 목적이 있었다.
<참고> “사단은 이 일 (살해 명령)에 있어서 선동자였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구원자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왕으로 하여금 그들의 자녀들을 죽이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를 좌절시키고자 하였다”(부조와 선지자 상권, 315).
그 후의 어떤 사건에서 사단은 동일한 수단으로 또 다른 구원자를 죽이려 하였는가? 마 2:16~18 사단의 계획은 어떻게 해서 두 경우 다 실패하게 되었는가?
답:
<참고>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동일한 증오심과, 오류를 진리처럼 보이게 하고 사람의 율법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대신하게 하여 사람들로 창조주를 경배하기보다 오히려 피조물을 경배하게 만드는 동일한 속임수의 자취를 우리는 과거의 모든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 마지막 대쟁투에서 사단은, 지나간 모든 시대에 그가 사용했던 동일한 술책을 사용할 것이며 동일한 정신을 보이고 동일한 목적을 위해 일할 것이다. 지금까지 있어온 일은 앞으로도 있을 것이며, 다만 앞으로 다가올 투쟁은 세상 사람들이 이전에 보지 못한 무섭고 치열한 투쟁이 될 것이다(대쟁투, 저자의 서문에서).
구원자의 탄생(출 2:1~10)
이스라엘 백성들의 곤경이 절정에 달한 듯이 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한 해방자 혹은 구속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 혹은 예표이다(신 18:15; 요 1;21~23, 5:46; 행 7:37). 물론 모세의 경험이 모든 점에서 그리스도의 표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세와 그리스도의 생애와 업적에는 놀랍게도 유사한 점들이 많이 있다. 다음을 살펴보자.
사단은 통치자의 살해 명령을 통하여 모세와 예수를 둘 다 죽이려 하였다(출 1:15,16; 마 2:16).
모세와 예수는 둘 다 포로를 자유케 하는 사명을 받았다 (출 3:9,10; 사 61:1,2; 눅 4:18).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애굽 왕위의 제반 권리를 모두 포기하였다. 예수께서는 인류와 하나 되시기 위해 하늘의 보좌를 버리셨다. (히 11:24~26; 빌 2:6~8).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히 11:26)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천하만국을 주겠다는 사단의 유혹도 물리치셨으니, 이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히 12:2) 심이었다.
모세는 그의 사명을 위해 준비하면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냈다. 예수는 지상 봉사를 준비하시면서 광야에서 40일을 보내셨다 (행 7:29,30; 마 4:1,2).
모세와 예수는 둘 다 하나님과 죄된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섰다 (출 32:31,32; 히 3;5,6).
(알아봅시다) 모세와 예수 사이의 어떤 유사점들이 또 있을까?
출 34:32; 눅 22:41, 42
출 2;13,14; 요 10: 11
기타
(생각해 봅시다) 모세의 가족이 하나님의 계획에 협력하는 데 실패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당신은 하나님의 사업에 있어서 맨 먼저 선택된 사람이 임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그 밖의 다른 사람으로 대치된 예들을 생각해 낼 수 있겠는가?
우리의 행동과 선택들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와 우리의 구원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것들에 의해 하나님의 계획들이 생기거나 깨어지지는 않는다. 설사 모세의 가족이 하나님의 계획에 협력하는 데 실패했더라도 하나님의 목적은 여전히 다른 방법으로 성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면, 모세와 그의 가족들은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좀처럼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당신의 은혜로 우리 대신 해주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며, 우리가 노력할 때 당신의 능력을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신다.
무엇 때문에 요게벳은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강에 띄우기로 결심하게 되었는가?(출 2:3)
답:
바로는,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모두 강에 던지도록 명하였다 (출1:22). 좋다. 모세 어머니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녀는 모세를 갈대 상자에 담아서 강에다 띄웠다 - 요게벳은 애굽 사람들이 갈대로 보트를 만들던 것을 보고 힌트를 얻은 듯하다. 또한 그녀가 그 일을 시도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있었을 것이다 (천사들은 바로의 딸을 모세의 갈대 상자가 있는 지점으로 인도하였다. (부조와 선지자 상권, 316). 요게벳은 그 일들을 처음부터 예상한 듯하다. 그녀는 갈대 상자를 바로의 딸이 자주 와서 목욕하는 장소에 두었다. 그녀는 미리암을 그 근처에 있게 하고, 바로의 딸이 아기를 발견하면 이러이러하게 말하라고 지시하였다.
공주는 우는 아이를 보고 사연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고, 아이를 돌보도록 그녀가 유모로 고용하게 될 그 여인이 아이의 어머니라는 것도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수는 뻔 한 것이었으나 그녀는 동정심이 생겼다. 이 작전은 그냥 모르는 척 넘겨져야 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명령을 피하도록 히브리 인을 도와주는 것을 그 공주 자신이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주가 그 어머니에게 급료를 지불한 것은 모세가 자신의 양자임을 옹호하려 한 것이다.
<참고> “요게벳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제 안전하게 자신의 아기를 기를 수 있는 행복한 이 과업에 임하였다. 그녀는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 아이를 가르치는 일에 모든 기회들을 성실히 사용하였다. 그녀는, 어떤 위대한 사업을 위해 그 아들의 생명이 보존되었다는 확신을 가졌으며 …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그녀는 다른 아이들보다 이 아이를 더욱 부지런하고 주의 깊게 지도 하였다.”(부조와 선지자 상권, 317).
구원을 위한 준비(출 2:11~25)
모세의 선택(출 2:11~14)
모세의 어머니는 모세의 생애 처음 몇 년 동안의 교육을 담당하도록 허락되었다. 그가 12살이 되었을 때(부조와 선지자 상권, 317), 바로의 공주는 모세를 궁으로 데려가 그 곳에서 자신과 함께 살게 하였다. 이제 애굽의 제사장들이 그의 교육을 떠맡았다. 모세는 신학.천문학.의학.수학.군사학.법학등 그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국을 다스리는 데 필요했던 모든 학문을 습득하였다.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모세가 애굽 군대의 사령관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이디오피아의 침입에 대항하여 적들을 대파한 후, 그 나라의 가장 인기 있는 사람으로 돌아왔다고 말하였다. 엘렌 G.화잇은, 모세가 애굽의 전쟁을 지휘한 사실을 인정하였다(본교 성경 주석 1권, 1099, 행 7:25 참조). 그러므로 모세가 히브리 노예를 두둔하여 애굽 감독을 죽였을 때 바로가 놀라 격노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모세를 주동으로 하여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히 두려워하였다. 사실 이것이 모세가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왜 모세는 압제받는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선택하였는가?(히 11:24~27)
답:
모세의 믿음을 분석해 보자. 그는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배운 교훈들을 믿었고,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으며, 이 사업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일으키셨음을 확신하였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밀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때는 히브리 인들과 운명을 같이할 아무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눈으로 영원한 실제들을 바라보았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히 11:26)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다. 세상의 모든 유혹들이 우리의 눈을 가려 “상 주심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오직 계발되고 가꾸어진 산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애굽인을 죽인 행동에 의해 모세는 자신의 선택을 온 천하에 알리고 하나님의 고통당하는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지도자로 환영하고 애굽인을 대항하여 반역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모세나 백성들이나 아무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죄와 자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고 그 은혜에 의해 굴복되어야 한다.
미디안으로 도망함(출 2:15~22)
모세는 남동쪽으로 도망하여, 미디안으로 알려진 시내 반도지역까지 갔다. 그 곳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그두라를 통해 낳은 후손들이었다. 모세는 거기서 그의 생애의 둘째 40년을 양떼를 치며 보냈다 (행 7:23, 30 참조). 애굽의 뛰어난 학문이 그에게 줄 수 없는 귀중한 교훈을 그는 거기서 배웠다. 미디안에서 보낸 40 년 동안 그가 얻은 이해의 태도와 성장은 거기서 그가 낳은 두 아들에게 붙여진 이름 게르솜 - “타국에서 객이 되었” (출 2:22)다 - 과 엘리에셀 - “하나님이 도우심”(출 18:3,4 참고) -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디안에서 모세는 어떤 상황에서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심(출 2:23~25)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는가?(출 2:23)
답: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부분 애굽 신들을 섬기기 시작하였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은 점점 희미해졌다. 40 년의 준비 기간은 모세를 위해서만 필요했던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도 필요하였다. 나이 많은 바로가 죽자 그들은, 새로운 후임자는 그들의 압제의 고통을 좀 덜어 주겠지 하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이 변함없이 계속되자 그들은 마침내 하늘의 하나님 - 그들의 부조들의 하나님 -께서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들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길고 긴 기다림의 기간 동안 당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셨으나 그들이 필요를 깨닫고 당신께 돌아서기까지는 그들을 위해 역사하실 수 없으셨다.
이 기다림의 기간은 예수의 재림이 분명히 지연되고 있음에 대해 무엇을 암시해 주는가?(벧후 3:3~13)
답:
어떤 이들은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시간이 오래 걸림을 인해 초조해 한다.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아직 나타나지 않으신 것으로 보아 이 교회의 개척자들이 재림을 예상함에 있어서 무엇인가 실수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신다. - 애굽에서 뿐만 아니라 이 마지막 때에도. 예수께서는, 만일 당신의 백성들이 준비되기만 했더라면 벌써 오셨을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할 준비가 되었고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도하심을 받아들이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능하신 방법으로 역사하셨다. 오늘날도 그러할 것이다.
보충학습: 부조와 선지자 상권, 313~332쪽의 제22장 ‘모세’의 앞부분을 읽어라.
요약
하나님께서 고대 애굽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섭리의 돌보심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끔찍이 돌보시는가를 볼 수 있고, 구원받기 전의 고통의 날들 동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확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세보다 더 크신 구원자를 예비해 두셨다. 그가 우리를 하늘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이실 것이다.
적용
설사 하나님께서 내가 기대하는 대로 해주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분의 역사하심을 깨닫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이겠는가?
나는 날마다 의식적으로 일상생활의 현실을 넘어서 더 중요한 영원한 실재에 시선을 고정시켜 왔는가?
나는 모세가 바로의 궁전에서 한 것처럼 나의 구원자를 증거하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에 유리한 어떤 기회들을 가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