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었던 몇 년 전 난 넓은 바다를 누비기로 했다. 이유없이 불길해지거나 괜히 남에게 시비를 걸고 싶을 때, 영혼에 우울한 기운이 엄습할 때는 다시 바다로 가야 한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 길은 바다로 이어진다. 언덕을 넘고 강물을 따라 바다로 내려간다. 바다에서 모든 사람은 거울 앞에 서듯 자신을 발견한다.”
허먼 멜빌이 쓴 해양 소설 <모비 딕>의 제1장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에 나오는 대목이다. 포경선 피쿼드호가 낸터컷에서 출항하여 아조레스 제도와 혼곶을 항해하다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누비며 고래를 추격한다. 그후 자바섬과 대순다 열도 사이를 빠져나와 대만 인근과 일본연안 어장을 거쳐 적도 부근의 태평양으로 항진은 계속된다. 고래잡이는 2년에서 길게는 3년 동안 지구 표면적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바다에서 행해지는 사나이들의 거친 세계다.
“내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해두자.”(Call me Ishmael. 인명은 성경을 따름)로 시작하는 첫 문장은 소설의 분위기를 어렴풋이 암시한다. 성경에서 이스마엘은 “방랑자”라는 뜻으로 아브라함의 하녀인 하갈 소생이다. 이스마엘은 팔레스타인 광야로 쫓겨나 아랍인의 조상이 된다. 소설 속 주인공 이스마엘은 이름이 암시하듯 바다의 방랑자답게 포경선을 탄다. 이는 멜빌이 상선과 포경선, 해군 수병생활을 하면서 체득한 경험을 소설에 녹여내기 위함이다.
포경선의 관심은 덩치가 크고 사나운 향유고래다. 커다란 머리에 경랍이라고 불리는 기름의 저장고가 있어 이를 통에 퍼담으면 된다. 경랍이 정액과 유사한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기름은 불을 밝히는 양초와 화장품 원료로 쓰였다. 고래의 소화불량과 변비로 생기는 용연향은 향수의 원료인데, 같은 무게의 금보다 값이 더 나갔다. 고래잡이 본고장인 낸터컷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당시 미국 경제를 견인했다. 시인 랠프 왈도 에머슨은 이런 모습을 “낸터컷 국가”라고 치켜세웠다.
소설의 구도는 출항 전 엘리야의 예언을 스타벅이 막으려 하지만 아합은 끝내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힌고래 모비 딕에게 한쪽 발을 잃고 이를 복수하기 위해 지옥까지라도 추격하겠다는 광적인 모습을 보인다. 선장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날 미치게 한다.”며 배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이에 비해 스타벅은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내 보트에 절대 태우지 않겠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우리는 고래를 잡으러 왔지 선장의 원수를 갚으러 온 것이 아니라며 목적에 충실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엘리야의 예언, “아합이 모두 유혹해 죽게할 것이다. 한 사람만 빼놓고”라는 말이 현실이 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모비 딕의 공격을 받아 피쿼드호는 바다가 흔적도 없이 삼켜버린 것이다.
고래는 인간에게 잡히기도 하지만 배를 공격하여 인간을 바다에 수장시키기도 한다. 멜빌이 작품을 쓴 계기도 1820년 난폭하기로 유명한 향유고래가 포경선 에식스호를 침몰시킨 사건이다. 길이 30미터에 몸무게 80톤의 향유고래가 238톤 무게의 배를 10분만에 침몰시키는 이야기를 생존자 토마스 니커슨에게 들었다. 모비 딕이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 탄생의 계기가 되는 순간이다.
모비 딕은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우주와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135개의 에피소드가 장쾌하게 펼쳐진다. 산문의 깊이와 아름다움, 다양한 구성으로 이뤄진 비극적인 대서사시다. 고래잡이의 전 과정과 상황에 성경과 쉐익스피어, 그리스, 로마 신화 등 서구 문학 고전 160여 편이 거침없이 동원된다. 멜빌이 고래에 대한 모든 것을 기술하려는 듯 도서관을 드나들고 대양을 누벼 얻은 결과물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명과 비유는 성경에서 여럿 빌려썼다. 아합과 엘리야, 이스마엘, 요나, 다니엘, 욥 등 성경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독해가 어려운 작품이다. 포경선 피쿼드호도 예사롭지 않다. 미국 인디언인 피쿼드족은 백인과의 전투에서 민족이 말살됐다. 이런 피쿼드족을 왜 포경선의 이름으로 명명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많다. 또한 최후의 생존자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적통이 아니다. 그를 구원한 것도 이교도 동료이자 작살잡이였던 퀴퀘그의 관이었다. 비유와 인용이 가득찬 소설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이해와 해석의 스펙트럼이 무한히 확장된다.
이러한 모비 딕 현상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상상과 이야기거리를 주었는가? 검은 그림자 조직인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과 조작을 다룬 영화 <모비 딕>이 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증을 앓는 변호사가 고래이야기를 할 때면 눈빛에 생기가 돈다. 쟁송에서 멋진 아이디어는 고래의 분수공에서 힘차게 바닷물을 품어 올리듯 고래와 함께 온다. 이뿐인가 돌고래인 제돌이와 춘삼이는 불법 포획되었다가 2013년 제주 김녕 마을에서 바다로 방류됐다.
어릴적 나는 산골에서 자랐다. 안수산에 올라 서해 바다 쪽을 바라보곤 했다. 어쩌다 하늘이 맑고 시야가 좋은 날엔 아스라이 멀리 군산앞 바다가 보였다. 바다에 대한 어릴적 시선이 해군을 지원하는 계기가 됐다. 함상 근무를 할때면 은빛 물결로 바다는 끊임없이 다양한 변주를 했고, 밤 바다는 온 천지를 하늘이 덮었다. 잔잔하다 싶으면 어느 땐 폭풍우가 몰아쳐 사나운 모습을 보여줬다. 바다의 변주는 아무리 오래봐도 질리지 않았다.
모비 딕은 실체가 어렴풋하다. 파도가 일다 곧 다른 파도가 복잡 미묘하게 이는 것처럼 바다를 닮았다. 실체를 잘 들어내지 않는 은미(隱微)의 세계다. 이런 바다에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발견한다. 인생의 바다에서 침몰하지 않으려면 보이지 않는 데서 계신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공구해야 한다(中庸,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소설 모비 딕은 우리에게 아합이 될 것인가 아니면 스타벅이 될 것인가를 묻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모비 딕을 잡아 복수하겠다는 선장에게 “이건 사악한 항해다. 아합은 아합을 경계해야 한다.”는 스타벅의 절규가 큰 여운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