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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吉再)의 충절과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금오서원(金烏書院)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금오서원(金烏書院)은 고려말기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불리는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충절과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1570년(선조 3)에 길재의 위패를 모시고 금오산(金烏山) 아래에다 처음 창건하였다. 1575년에 사액을 받았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2년(선조 35) 부사 김용(金涌)이 주도하여 지금의 위치에 복원하였으며, 1609년(광해군 1)에 다시 사액을 받고 중수하였다. 그 뒤 김종직(金宗直), 정붕(鄭鵬), 박영(朴英)을 추향하고 이후 장현광(張顯光)을 추배하였다. 또한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이 사원의 주인공 길재(吉再) 선생을 떠올리면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배운 시조 『회고가(懷古歌)』 한편이 먼저 떠오른다. “오백 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 현재 금오서원은 1602년(선조 35) 이래로, 경북 구미시 선산읍 원동 유학길 593-31에 위치하고 있으며, 근래에는 서원 동북편에 새로운 서원 건축물을 여러 동을 세워 규모가 2배로 확장되었다. 서원이 있는 약 50가구 정도의 원1리 송죽 마을은 인적이 드문 외딴 농촌 마을이다. 차량으로 방문하는 분은 ‘금오서원’을 <네비게이션>에다 입력해서 마을로 들어가, 마을 회관 겸 경로당의 동편 옆길을 따라 북쪽으로 약140m 올라가면 서원 주차장이 보인다. 만일 마을 경로당에 주차하게 되면, 오르내리는 길에 마을 개들이 시끄럽게 짖어대 신경이 쓰이니 되도록이면 서원 주차장까지 차량으로 이동하는 게 좋다. 서원 바로 앞에는 하천 ‘감천’이 흐르고 동쪽 약 1Km 지점에 낙동강이 남북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다.
○ 처음 금오서원을 창건한 금오산 터에는 신라 말 도선(道詵)이 창건한 대혈사(大穴寺)라는 사찰이 있었다. 대혈사는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금오산(金烏山)에 있었던 절이다. 그 옛날 큰 굴이 있는 절이라 하여 대혈사라 했으며, 굴 이름은 도선이 수도하던 곳이므로 도선굴이라 부른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말의 충신 길재(吉再)가 은거한 곳으로 더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그 뒤 중창하였으나 영조 이전에 다시 폐허화되었다. 물론 근래에는 옛터 위에 해운사(海雲寺)라는 이름으로 중창하였으니 지금은 해운사 사찰로 찾아가면 된다. 해운사 인근에는 지금도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고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가 손수 심었다는 대나무 2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이 대나무는 야은죽(冶隱竹)이라고 불리는데, 길재가 금산으로부터 대나무를 옮겨 손수 심었으며, 고을사람들이 그 뒤에도 잘라가는 것을 금하였다고 한다. 길재는 이 절의 남루(南樓)였던 함벽루(涵碧樓)에 거처하였다고 전한다.
이곳을 방문하기 前에 금오산 입구에는 ‘구미 성리학 역사관’ ‘금오랜드’ ‘야은 역사 체험관’과 금오산 케이블카를 탈 수 있다. 해운사 조금 위쪽 해발고도 400m 지점에는 높이 28m 대혜폭포가 장관이다. 꼭 한번 찾아가보길 권한다.
○ 덧붙여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은 우리나라 유학사의 한 맥을 잇는 대학자이다. 고려 안향에서부터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길재→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는 도통(道統)의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이다. 비록 그가 조선의 관직에는 진출하지 않았으나 그의 동문들, 그가 후에 길러낸 제자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문하에 오식(吳湜) 김숙자(金叔滋), 배인경(裵仁敬), 최운룡(崔雲龍), 신영손(辛永孫) 등의 제자를 길러냈고 그의 성리학은 김숙자, 오흠로(吳欽老), 최운룡,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에게 이어져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된다.
◉ 지금부터는 금오서원(金烏書院)과 관련해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제자들이 차운한 한시(漢詩)와 함께 총 5편의 작품과 그리고 장현광(張顯光)의 축문(祝文) <금오서원을 중건하고 봉안한 글(金烏書院重建奉安文)>, 정조(正祖)왕의 제문(祭文) <금오서원(金烏書院) 치제문(致祭文)>을 차례로 소개하겠다.
● 먼저 주자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 선생이 지은 <금오산(金烏山)을 방문하다.(訪金烏山)>라는 오언절구(五言絶句)를 소개한다. 이 작품은 그의 문집 『여헌집(旅軒集)』에 수록되어 있다. 1607년 당시 여헌(旅軒) 선생이 길재(吉再) 선생의 자취를 찾아 구미시 남통동 금오산(金烏山)에 있었던 대혈사(大穴寺)를 찾아갔다가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한시이다.
사찰 대혈사(大穴寺)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려말의 충신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가 은거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는 길재(吉再)가 손수 심었다는 대나무 2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이 대나무는 야은죽(冶隱竹)이라고 불렀다. 이에 이곳을 찾은 여헌 선생은 그 옛날 야은 선생을 기리며 야은의 <한거(閒居)> 운(韻)에 차하여 즉석에서 오언절구 한 편을 지었다.
그런데 이후 경북 구미지역 그의 문인들이 이 작품의 압운자(押韻字) ‘高’와 ‘遥’를 차용해 ‘공경하는 여헌 선생 운에 차하다(敬次旅軒先生韻)’라는 <금오서원(金烏書院)> 시(詩)를 여러 편 남겼다. 아마도 제목을 <금오서원>으로 채택한 것과 압운자를 ‘高’와 ‘遥’를 사용한 것은, 길재 선생과 장현광 선생을 모신 금오서원을 추앙한 결과물인 듯하다.
그런고로 이들 작품과 더불어 여헌(旅軒) 선생의 <금오산(金烏山)을 방문하다.> 원운(原韻)부터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음은 여헌(旅軒) 선생의 원운(原韻)이다.
1) 원운(原韻), 금오산(金烏山)을 방문하다.[訪金烏山] / 장현광(張顯光)
竹有當年碧 대나무는 당시의 푸르름 그대로 유지하고
山依昔日高 산은 예전과 다름없이 높도다.
淸風猶竪髮 맑은 바람에 오히려 머리털 쭈뼛해지니
誰謂古人遙 누가 옛사람을 아득하다 하리오.
1607년에 금오산을 찾아가 대혈사에서 쉬었다. 사찰은 선생(길재)께서 그윽하게 은거하던 곳이다. 지금은 심은 대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졌다. 이에 선생의 <한거(閒居)> 운(韻)에 차하여 이 시를 이루었다.(歲丁未 尋山憩大穴寺 寺乃先生幽棲之所 今其種竹尙在 仍次先生閒居之韻而及之)
◉ 다음은 장현광(張顯光)의 또 다른 <금오산을 방문하다.(訪金烏山)> 작품인데 오언절구 마지막 결구(結句)가 ‘誰謂古人遙’ 대신에 ‘不覺古人遙’로 쓰여져 전해온다.
○ 원운(原韻) 금오산을 방문하다.[訪金烏山] / 장현광(張顯光 1554~1637)
竹有當年碧 대나무는 당시의 푸르름 그대로 유지하고
山依昔日高 산은 예전과 다름없이 높도다.
淸風猶竪髮 맑은 바람에 오히려 머리털 쭈뼛해지니
不覺古人遙 옛사람이 아득한 줄 깨닫지 못하겠네.
● 다음은 장현광(張顯光)의 제자이자 사간원 지평(持平)을 역임했던 만오(晩悟) 신달도(申達道 1576~1631)의 <금오서원(金烏書院)> 2수(首)이다. 공경하는 여헌 선생(장현광) 운에 차하다(敬次旅軒先生韻)라는 말속에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이 심은 대나무를 통해 고려 삼은(三隱)이었던 야은 선생의 충절을 기리었다. 또한 첫 수(首)에서 보듯, 당시에는 아마 야은 선생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금오서원[金烏書院] 공경하는 여헌 선생(장현광) 운에 차하다(敬次旅軒先生韻) /
신달도(申達道 1576~1631)
大節誰能及 대절(大節)에 그 누가 이르랴
烏山仰止高 금오산을 높이 우러러 보노라.
百年遺像在 오랜 세월동안 초상화가 있었다는데
風範政非遥 풍채의 그림은 확실히 오래되진 않았네.
不有一絲重 한 가닥 실이 무겁지 않듯이
誰穪七里高 누가 칠리(七里)가 고상하다 일컫더냐.
靑靑無限竹 푸르고 푸른 무한정의 대나무와
殘日共逍遙 함께 남은 생애를 소요하리라.
[주1] 대절(大節) :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지키는 절개
[주2] 칠리(七里) : 옛날 광무제(光武帝)의 벗인 엄광(嚴光)이 동강(桐江)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질하며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던 고사가 있다. 세상을 피하여 숨어사는 것을 말한다.
● 다음 <금오서원(金烏書院)>은 조선시대 능주목사를 지낸 나재(懶齋) 신열도(申悅道 1589~1659)의 작품이다. 그는 장현광(張顯光)의 제자이자 앞서 소개한 신달도(申達道)의 동생이다. 그도 형과 마찬가지로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의 충절을 기리었고, 또한 그 옛날 선비들이 발을 씻고 놀던 모임을 회상하면서 간단한 오언절구를 남겼다.
3) 금오서원[金烏書院] 공경하는 여헌 선생 운에 차하다(敬次旅軒先生韻) /
신열도(申悅道 1589~1659)
長夜日星煥 깜깜한 무덤에 계셔도 해와 별처럼 빛나고
狂瀾砥柱高 거친 물결에도 변함없는 지주(砥柱)가 고상하네.
遺編跪讀地 생전에 남긴 책을 무릎 꿇고 읽던 곳인데
猶足會遙遙 가히 탁족회(濯足會)하던 모습 아득하기만 하네.
[주1] 장야(長夜) : 영원히 깜깜한 땅속 무덤을 뜻한다. 또는 긴긴 밤
[주2] 지주(砥柱) : 본디 중국 황하강 거친 물살 속에서도 천만년 변함없이 모습을 지켜 온 바위 이름을 말한다. 여기서는 은나라 충절의 대명사인 '백이숙제'형제의 무덤 앞에 비문으로 새긴 지주중류(砥柱中流)를 본떠 인동현감인 겸암 류운룡이 야은 길재선생의 충절을 기리는 '지주중류비'를 세운 것을 일컫는다. 비각은 구미시 오태동 산1번지에 위치함.
[주3] 탁족회(濯足會) : 여름철에 청간(淸澗) 옥수(玉水)를 찾아다니며 발을 씻고 노는 모임
● 다음은 조선 중기의 학자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 1572~1652)의 <야은 선생의 옛 거처를 방문하다(訪冶隱先生舊居)>이다. 이 작품도 앞서 소개한 한시와 같이 여헌 선생의 운(韻)에 차하여 이 시를 완성했다. 그도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이 은거했던 옛 거처에서 대나무를 보고, 그 옛날 야은 선생의 늠름하고 고상한 풍채를 떠올리고 그의 절개에 경의를 표한다.
4) 야은 선생의 옛 거처를 방문하다[訪冶隱先生舊居] 여헌 선생 운에 차하다(次旅軒先生韻) /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 1572~1652)
昨見烏山竹 어제 와서 금오산의 대나무를 보았는데
淸飈尙凜高 맑은 바람에 여전히 늠름하고 고상하네.
今看追和句 이제 다시 보니 화답하는 글귀가 떠오르고
風節共迢遙 풍채와 절개 또한 멀고도 아득하네.
● 다음 <금오서원(金烏書院)>은 조선중기 부제학을 역임한 문신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의 작품이다. 그는 이조년(李兆年)의 종손이자,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이 한시는 먼저 ‘尤’ 운(韻)의 칠언율시를 완성하고 난 후에 칠언절구 한 수(首)를 보태어 한 편의 작품을 이루었다. 이 시는 저자가 경상도 낙동강 유역 금오서원에서 한 달을 머물며 유명 인사 21분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탐구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5) 금오서원[金烏書院] 빈한한 여러분들이 모여(會一寒諸公) /
이준(李埈 1560~1635)
一畝儒宮占上游 일경(一畝)의 서원(書院)이 상류를 차지하고 있는데
洋洋衿佩捴名流 모든 유명 명사(名士)와 선비들이 가득하구나.
共尋東洛千年勝 천년의 승지에서 동락(東洛)과 함께 학문을 탐구하니
遠憶南山再月留 멀리서 생각하며 남산(금오서원)에서 재차 한 달을 머물렀네.
水向孤峯分燕尾 물길은 제비 꼬리처럼 나뉜 외딴 봉우리를 향해 흘러가고
臺臨平野聳鰲頭 대(臺)는 평야에 자라 머리처럼 솟은 곳에 있구나.
塵緣未盡還星散 세상과의 인연이 산산이 흩어져 돌아오니 아직 끊지 못하여
岐路明朝抱別愁 내일 아침 갈림길에서 이별의 수심을 가슴에 품으리라.
서원을 일명 남산이라 한 것은 주장(朱張)의 일을 인용한 것이다.(院一名南山 故用朱張事)
瀛洲十八又加三 영주(瀛洲)에 18분의 선비와 또 3분을 보태었는데
江閣仍憐月色添 강가의 집은 달빛이 더하니 더욱 사랑스럽네.
明日橋頭難別意 내일 다리 근처에서 이별의 뜻을 말하기 어려우리라
片雲西去雁飛南 조각구름은 서쪽을 향하고 기러기는 남쪽을 향해 가네.
무릇 21명이 함께 모였다.(同會凡二十一人)
[주1] 일경(一畝) : 땅 넓이의 단위(單位). 30평
[주2] 동락(東洛) : 동방의 이락(伊洛)이란 뜻으로 이락은 정호(程顥)와 정이(程頤)가 공부하던 중국의 이천(伊川)과 낙양(洛陽)을 가리킨다. 뒤에 주자(朱子)가 그들의 학통(學統)을 이었기에 결국 동락은 정주학(程朱學), 주자학(朱子學)의 근원이자 상징이라는 의미다.
[주3] 주장의 일(朱張事) : 주장(朱張)은 주희(朱熹)와 그의 학문적 동지 장식(張栻)을 뜻한다. 당시 중국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에 있는 악록서원(嶽麓書院)에서 두 분이서 유명한 회강(會講)을 했다. 여러 학파의 스승과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몇날 며칠 거대한 논쟁을 벌이었다. 악록서원의 주장(朱張) 회강엔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고 결국 성리학은 이렇게 성장한 학문이었다.
● 다음은 개항기 공조판서를 역임한 유헌(遊軒) 장석룡(張錫龍 1823~1908)의 <금오서원 중수 운에 삼가 차하다(謹次金烏書院重修韻)>이다. 이 시는 ‘眞’ 운(韻)의 칠언율시이다. 길재·김종직·정붕·박영·장현광 5분을 모신 금오서원의 동우(棟宇)를 중건 한 후에 장석룡 선생이 이 시를 지었다. 선산군 수령이 비용을 충원하였고 여러분들이 여러 가지 제물을 모두 갖추니 비로소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6) 금오서원 중수 운에 삼가 차하다.[謹次金烏書院重修韻] /
장석룡(張錫龍 1823~1908)
忠藎儒宗百世眞 백세의 진리에 충심을 다한 유종(儒宗)의
一堂齊享五賢臣 다섯 어진 신하를 한 자리에 제향(齊享)하였다.
江山不變猶依舊 강산은 불변하여 아직도 옛날과 같은데
棟宇重成似創新 동우(棟宇)를 중건하니 새로 지은 것 같구려.
太守損金增士氣 태수가 손해난 돈을 충원하여 선비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聖朝宣額感天神 조정에서 사액을 내리시니 하늘의 신령도 감동했도다.
羹墻俎豆蹌蹌地 갱장(羹墻)과 조두(俎豆)를 질서 정연히 갖추니
鷰賀翬飛歲在辛 제비가 축하하듯 훨훨 날아다니며 해가 바뀌도록 이어졌다네.
[주1] 유종(儒宗) : 유학에 통달한 권위 있는 학자
[주2] 동우(棟宇) : 집의 마룻대와 추녀 끝
[주3] 선액(宣額) : 사액(賜額). 임금이 사당(祠堂), 서원(書院), 누문(樓門) 따위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
[주4] 갱장(羹墻) : 선왕(先王)의 거룩한 업적을 사모하며 좋은 정치에 매진하는 것을 말한다.
● 다음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중건하고 봉안한 글>은 주자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축문(祝文)이다. 그는 경북 구미시 인동현(仁同縣) 인선방(仁善坊) 남산(南山)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중기의 대학자, 문신, 정치인, 철학자, 작가, 시인이다. 1602년(선조 35) 부사 김용(金涌)이 주도하여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금오산의 금오서원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고 그때 장현광이 「금오서원중건봉안문(金烏書院重建奉安文)」을 지었다. 옛터는 혹독한 병화를 겪어 쑥대만이 무성하였으며, 구역이 너무 궁벽하여 넓지 못하므로 지기(地氣)가 모인 이곳에 터를 잡았으며, 마침내 길일을 택하여 봉안했다는 내용이다.
7) <금오서원을 중건하고 봉안한 글(金烏書院重建奉安文)>
장현광(張顯光)
여기 선산 시골은 영남의 한 고을이다. 산이 돌고 물이 합하여 기세가 응하고 기운이 통하였다. 정기가 쌓이고 좋은 기운이 모여 대대로 훌륭한 분이 나오니 학문을 창도하고 도를 밝혀 세상의 훌륭한 스승이 되었다. 백이(伯夷)처럼 깨끗하고 유하혜(柳下惠)처럼 화하니 도는 비록 똑같지 않으나 유림을 붙드오니 세대는 다르지만 공이 똑 같다. 선비들은 남은 가르침 우러르고 시골에는 유풍이 남아 있다. 더욱 오랠수록 더욱 빛나오니 함께 흠모하고 높일 것을 의논하였다. 처음 터를 잡을 적에 저 높은 금오산을 등지고 사당에서 다년간 제향하였으며 많은 선비들이 여기에서 공부하였다. 지난번 혹독한 병화를 겪어 하늘에 의뢰함을 받지 못하오니 거문고를 타고 글을 외던 마당이 쑥대만이 무성하였다. 섬의 오랑캐가 겨우 물러가자 크고 작은 사람들이 모두 애통히 여겨 이미 성묘를 새로 만들고 다음에 서원의 일에 미쳤다. 돌아보건대 이 옛터는 구역이 너무 궁벽하여 넓지 못하므로 옮겨 터를 잡아 이 곳을 얻자오니 참으로 지기(地氣)가 모인 곳이었다.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바로 목구멍에 해당하는 곳이다. 방위가 이미 정해지니 체세가 저절로 웅장했다. 다만 난리를 겪어 재력이 충실하지 못하므로 20년을 경영하여 이제 비로소 완성하였다. 길일을 택하여 봉안하오니 유관들이 모두 모였다. 조두를 정결히 올리오니 희생과 곡식이 살지고 풍성했다. 엄연히 돌보아 흠향함을 받자오니 누군들 몸을 공경하지 않으랴. 도는 이에 더욱 높아지고 가르침은 후세에 길이 드리워질 것이다. 영원히 세대에 밝히시고 떳떳한 천성을 도와 보전하게 하소서.
[惟此善鄕 居嶺南中 山回水合 勢應氣通 儲精鍾淑 代出偉公 唱學明道 爲世師隆 夷淸惠和 道雖不同 扶植儒林 異世幷功 士尙餘敎 鄕有遺風 愈久彌光 共議欽崇 初焉卜地 負彼烏嵩 廟享有年 多士攸宮 頃酷兵火 無賴蒼穹 弦誦之場 茂爲蒿蓬 島寇纔退 大小咸恫 旣新聖廟 次及院工 顧厥舊址 區僻靡洪 移龜得此 正會結融 若比人身 卽當喉嚨 方位旣定 體勢自雄 第經亂離 財力未充 經營卄載 今始成終 擇吉奉安 儒冠畢叢 俎豆淨潔 牲粢肥豊 儼承顧歆 孰不敬躬 道斯益尊 敎垂無窮 昭明永世 祐保彛衷]
● 다음 제문(祭文)은 조선 제 22대 왕 정조(正祖)가 금오서원에 보낸 치제문(致祭文)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세상의 절의를 곧게 하고자 고향인 선산(善山)으로 돌아와 은거하다 죽은 고려말의 충신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을 모신 금오서원에다 제물과 제문을 정조 왕이 보냈다. 그리곤 정조왕이 이렇게 치제문을 적어 보낸 것은 먼저 일찍부터 야은(冶隱)의 충절을 흠앙하였고 그리고 안향(安珦)으로부터 포은(圃隱)에 이르기까지 유도(儒道)가 우리나라에 전해져 온 바, 야은이 이를 계승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또한 야은(冶隱)은 송나라 때 대학자 예장(豫章)과 연평(延平)과 다름없다고 칭송하고 있다.
8) <금오서원(金烏書院) 치제문(致祭文)> 정조(正祖) 재위기간 1776년~1800년
가파른 저 금오산(金烏山)이여 그 높이가 천 길이로다. 그 가운데 위대한 사람이 있어 도와 함께 순절하였네. 명이(明夷)의 세상에 절의를 곧게 하고 쇠미한 세상의 잠랑(潛郞)이 되었다가 새로운 임금이 일어날 즈음에는 기린이 몸을 숨기듯 자취를 감추었네. 거듭 부름을 받고 곧 이르긴 했으나 한 번 읍을 하고는 물러났으니 소하(蕭何) 조참(曹參) 등우(鄧禹) 가복(賈復)과 무리가 되기를 사양하였네. 소인에게 노모가 계시는데 조석의 끼니는 봉양할 수 있다 하고 자취를 비돈에 맡기니 그 뜻을 빼앗기 어려웠네. 서산의 고사리를 캐고 동문에 외를 심으며 구름 가에 나는 기러기가 되리라고 홀로 깨어 노래하며 길이 다짐하였네. 광무제(光武帝)가 현인을 존경하여 본받았기에 자릉이 고절(高節)을 이루었으니 백대에 전하는 청풍에 화곤(華袞)의 빛남이 있다네. 일찍이 내가 크게 흠앙한 것은 충절 때문만이 아니라 안향(安珦)으로부터 포은(圃隱)에 이르러 우리 유도(儒道)가 동국에 전했기 때문이네. 우리나라 선비들을 창도한 공적은 주자(朱子)가 정자(程子)를 사숙(私淑)함과 같으니 공은 정주(程朱)의 사이를 이었던 예장과 연평이었네. 사문의 기준이 되고 정학의 연원이 되었으니 은미한 말씀은 아득히 멀어져도 어둡지 않은 광채는 지금도 남아 있네. 돌아보건대 여기 제수를 갖춘 곳은 옛적에 은거했던 장소이니 엄숙한 서원에서 좌우로 사숙하네. 푸른 갈대에 흰 이슬이 내리는 즈음 광세의 생각이 있으니 모든 군자들이여 이 제문을 볼지어다.
[崷彼烏山 其峙千仞 中有碩人 人與道殉 貞節明夷 叔季潛郞 時際龍興 身如麟藏 再召則至 一揖以退 蕭曹鄧賈 讓與流輩 小人有母 哿矣菽水 肥遯者跡 難奪者志 西山之蕨 東門之瓜 雲際冥鴻 永矢寤歌 漢祖象賢 子陵遂高 淸風百代 有煌衮褒 夙予景欽 匪直也忠 自安洎圃 吾道其東 倡我羣儒 若朱於程 公於其間 豫章延平 斯文準繩 正學淵源 微言雖邈 耿光猶存 顧玆豆籩 在古薖軸 秩秩黝檐 左右私淑 蒼葭白露 曠世之思 凡百君子 視此酹詞]
[주1] 명이(明夷) : 《주역(周易)》의 괘 이름이다. 명이는 땅 밑에 불이 있는 형상인데, 나아가면 반드시 손상을 입기 때문에 군자가 어려움을 알아서 정고(貞固)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말하였다.
[주2] 잠랑(潛郞) : 재능이 있으면서도 불우하게 오랫동안 낮은 관직에 묻혀 있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안사(顔駟)가 문제(文帝) 때 낭(朗)이 되어 경제(景帝)를 거쳐 무제(武帝) 때까지 승진하지 못하고 낭서(郞署)에서 늙었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주3] 비돈(肥遯) : 《주역(周易)》 돈괘(遯卦) 상구(上九)의 말로, 멀리 떠나서 숨어 지내며 구애됨이 없이 여유가 있음을 말한다.
[주4] 동문(東門)에 외를 심으며 : 진(秦) 나라 동릉후(東陵侯)인 소평(召平)이 진 나라가 망하자 포의(布衣)로 가난하게 생활하며 장안성 동쪽에 외를 심었는데, 그 외의 품질이 좋았으므로 세속에서 이를 동릉과(東陵瓜)라고 했다 한다.
[주5] 자릉(子陵) :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의 고사(高士)인 엄광(嚴光)을 가리킨다. 자릉은 그의 자(字)이다. 엄광은 광무제의 어린 시절 벗이었는데, 광무제가 즉위한 후 성명을 바꾸고 숨어 사는 엄광을 불러서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으로 들어가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질하면서 평생을 지냈다.
[주6] 예장(豫章)과 연평(延平) : 예장은 송나라 때의 학자 나종언(羅從彦)이다. 자는 중소(仲素)이며 양구산(楊龜山)과 정이천(程伊川)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학자들이 그를 예장 선생(豫章先生)이라고 불렀다. 연평은 송나라 때의 학자 이동(李侗)인데 연평은 그의 호이다. 나종언에게 배웠고 주자(朱子)의 스승이었다.
[주7] 푸른 …… 즈음 : 사람을 구하고자 하나 얻을 수 없다는 뜻으로, 《시경(詩經)》 진풍(秦風) 겸가(蒹葭)에 “갈대가 푸르니 흰 이슬이 비로소 서리가 되었구나.”라고 한 데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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