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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령홍씨 원문보기 글쓴이: 매력덩거리
<총 론>
문헌에 기록된 본관은 남양(南陽)·풍산(豊山)·부계(缶溪)·개령(開寧)·회인(懷仁) ·경주(慶州)·홍주(洪州)·의성(義城)·풍천(豊川)·상주(尙州)·연안(延安)·의주(義州)·개성(開城) 등 10여 본이 전한다. 그러나 남양홍씨 대종중측에 따르면, 현재 전하고 있는 본관은 남양·풍산·부계·홍주의 4본이라고 한다. 위의 여러 본관 중 으뜸가는 대본(大本)은 남양홍씨이며, 이어 풍산·홍주·부계의 순으로 되어 있다.
남양홍씨 중에는 전혀 계통을 달리하는 두 파가 있는데, 세칭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이 그것이다. 당홍은 고려 초기의 인물인 은열(殷悅)을 시조로 하고 있는 데 대하여, 토홍은 그보다 300여 년 뒤인 고려 고종 때의 인물인 선행(先幸)을 시조로 하고 있다. 이 두 집안은 역사적으로 확연히 구별되어 왔는데, 양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들이 많지만 단정할 역사적 근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전체 홍씨 인구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남양홍씨 중 당홍과 토홍의 인구비율은 8대 2로 추산되고 있다. 이하 남양홍씨는 당홍과 토홍으로 구분하여 기록한다. 홍씨는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476명, 상신 15명, 문형 7명, 공신 17명, 왕비 2명, 청백리 6명을 배출하여 조선 10대 벌열(閥閱) 중의 하나로 꼽힌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5만 1429가구에 인구 28만 8385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20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10만 9487가구, 전국 가구구성비 1.1%로 274성 중 역시 제20위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는 가구수 161,403가구에 인구수 518,635명으로 286성씨중 20위를 차지했다.
(1) 남양 홍씨 (南陽 洪氏)
〈당홍〉 시조 은열은 《고려사》에 고려 혁명 4공신의 한 사람으로 기록된 유(儒:義城洪氏의 시조)와 동일인으로 추측하고 있다. 당홍측에 의하면, 은열의 초명(初名)은 유(儒), 자(字)는 술(術)인데,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웠으므로 '은(殷)나라의 부열(傅說:중국 은나라 고종 때의 명재상)과 같다'는 뜻에서 태조로부터 은열(殷悅)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의성홍씨가 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추측이 나도는 것이라고 남양홍씨 대종중측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당홍의 세계(世系)는 시조의 12대손에서 13파와, 그밖의 2파, 도합 15파로 대별되는데, 그 중 벼슬을 지낸 내력과 후손의 수가 많은 파로는 남양군(南陽君)파·문정공(文正公)파·판중추(判中樞)파·익산군(益山君)파·예사공(禮史公)파·중랑공(中郞公)파 등 6파이다. 이 중에서도 남양군파와 문정공파의 후손이 특히 많아서 당홍의 70%를 차지하고, 익산군파가 15%로 다음간다고 한다. 당홍은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8명, 문형 2명을 비롯하여 왕비 1명, 청백리 3명, 부마 4명, 공신 10여 명을 배출하였다.
특히 남양군 주(澍)의 7대손인 춘경(春卿)의 자손(京派)에서만 상신 5명, 문형 2명, 왕비 1명을 비롯, 20여 명의 판서급을 배출하여 가장 빼어난다. 춘경은 천민(天民:栗亭公派)·일민(逸民:燕岐公派)·성민(聖民:拙翁公派)의 3형제를 두었는데, 셋째 졸옹공파에서만 정승 4명이 나왔다. 첫째인 율정공파에서는 천민의 증손 처량(處亮)이 숙종 때 예조판서를 지낸 것을 제외하고는 두드러진 인물이 없다. 둘째인 연기공파에서는 일민의 손자 명원(命元)이 인조 때 시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슬하에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인 처후(處厚)의 자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경종 때 노론(老論)의 선봉으로 소론(少論)과 맞섰던 계적(啓迪)은 처후의 증손이다. 영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계희(啓禧)는 처후의 아우인 처심(處深)의 증손이다. 졸옹공파에서는 대제학 성민(聖民)의 손자 명하(命夏)가 현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올랐으며, 그 밖에 치중(致中)이 영조 때, 순목(淳穆)이 고종 때 각각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토홍〉 시조 선행의 9~12대손에서 문희공(文僖公)파 ·정효공(貞孝公)파 ·참의공(參議公)파 ·주부공(主簿公)파 ·대호군공(大護軍公)파 등 5파로 나뉜다. 토홍은 조선시대에 상신 2명, 문형 1명, 청백리 3명, 부마 1명, 공신 3명 등을 배출하였다. 문희공파에서는 문희공 언필(彦弼)이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섬(暹) 역시 선조 때 영의정을 세 번이나 중임하고 청백리에 뽑혔다. 뿐만 아니라, 언필의 부인 여산송씨는 중종 때의 영의정 송질(宋軼 )의 딸이다.
정효공파의 정효공 담(曇)은 언필의 조카인데, 훈구파(勳舊派)의 거두로서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내고 역시 청백리에 뽑혔다. 대호군공파에서는 숙(淑)이 병조판서·좌찬성 등을 역임하였고, 병자척화삼학사(丙子斥和三學士)의 한 사람인 익한(翼漢)은 그의 현손이다.
(2) 풍산 홍씨(豊山 洪氏)
시조는 고려 고종 때 국학직학(國學直學)을 지낸 지경(之慶)이다. 이 파는 조선 헌종 때의 세도가문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에 상신 5명, 문형 3명을 비롯,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모두 시조의 9대손인 이상(履祥)의 후손이다. 그의 아들 여섯이 모두 문과에 올랐는데, 이들 여섯 아들에게서 손자 11명을 얻었으며, 6대손에서는 140여 명으로 자손이 번창, 풍산홍씨의 세력 신장과 직결되었다.
여섯 아들 중에서도 넷째 영(霙)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영의 아들 주원(柱元)은 선조의 부마가 되었고, 주원의 큰아들 만용(萬容)은 숙종 때 예조판서, 만용의 손자 현보(鉉輔)는 영조 때 예조판서를 각각 지냈는데, 이 현보의 아들이 유명한 봉한(鳳漢)과 인한(麟漢)이다. 봉한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사도세자의 비이자 정조의 생모(生母)인 혜경궁(惠慶宮) 홍씨의 아버지이다.
이들 두 형제는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인한 궁중참변의 격동을 맞아 형 봉한은 부왕(父王) 영조의 실덕(失德)을 힐책하는 시파(時派)로, 아우 인환(좌의정)은 세자의 실덕을 규탄하는 벽파(僻派)로 갈리어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정조를 세손 때부터 보호한 사람이 국영(國榮)인데, 그는 주원의 둘째아들인 만형(萬衡)의 5대손으로 정조가 즉위하자 도승지와 숙위대장이 되어 세도정치를 휘두르지만 4년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풍산홍씨의 대표적 학자로는 양호(良浩)와 만선(萬選)을 꼽는다. 양호는 당대의 뛰어난 학자요 문장가로 《영조실록》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중국의 석학들과 교유하고 돌아와 고증학(考證學)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지방관으로 있을 때에는 치산(治山) 식수에 힘썼고, 1764년(영조 40)에는 일본에서 벚나무를 들여와 서울 우이동에 심어 경승지를 이루게 하였다.
한편, 만선은 숙종 때의 실학자로 실학사상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그의 저서 《산림경제(山林經濟)》는 후일 실학 연구에 커다란 바탕이 되었다. 그밖에 회인홍씨에서는 윤성(允成)을 배출하였는데, 그는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 2등이 되고, 예종 때에는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끝으로 부계홍씨의 인물로는 귀달(貴達)과 그의 두 아들 언충(彦忠) ·언국(彦國) 3부자가 유명하다. 귀달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을 세웠으며, 예종 때에는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오례의주(五禮儀註)》를 개정하였다. 언충 ·언국 형제도 연산군 때 문장과 글씨로 각각 이름을 날렸는데, 언국은 특히 지조가 굳어 연산군이 그의 딸을 탐내어 입궁(入宮)을 강요하였으나 거절하고 거제에 유배되었다.
<역사적 인물>
♦ 홍규 [洪奎, ?~1316]
고려시대의 국구(國舅). 충숙왕비 명덕태후의 아버지. 원나라에서 돌아오는 왕을 권신(權臣)인 처남 임유무가 배척하려 하자 삼별초(三別抄)의 힘을 빌려 그를 죽였다. 충렬왕이 양가의 규수를 뽑아 원나라에 보내려 할 때 딸의 머리를 깎게 한 사건으로 귀양갔으며 딸은 마침내 원나라 사신 아고대(阿古大)에게 바쳐졌다.
본관 남양(南陽). 초명 문계(文系). 시호 광정(匡定). 충숙왕비 명덕태후의 아버지. 원종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으며, 1270년 원나라에서 돌아오는 왕을 권신(權臣)인 처남 임유무(林維茂)가 배척하려 하자 삼별초(三別抄)의 힘을 빌려 그를 죽였다. 이어 세자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원제(元帝)의 명으로 고려 본국의 좌부승선(左副承宣)이 되었으나 국정의 문란으로 사직하고, 다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승진되었으나 이도 사퇴하였다.
충렬왕이 양가의 규수를 뽑아 원나라에 보내려 할 때 딸의 머리를 깎게 한 사건으로 가산이 몰수되고 고도에 귀양갔다. 가산은 돌려 받았으나 딸은 마침내 원나라 사신 아고대(阿古大)에게 바쳐졌다. 이듬해 첨의시랑찬성사·전리사판사(典理司判事)로서 치사(致仕)하고, 1297년(충렬왕 23) 판삼사사(判三司事)·수사도(守司徒)·경령궁영사(景靈宮領事)가 되었고, 충선왕 때 익산군(益山君)에 봉해지고 추성진력(推誠陳力) 정안공신(定安功臣)으로 남양부원군에 진봉, 상의첨의도감사(商議僉議都監事)에 이르러 죽었다.
♦ 명덕태후(明德太后) [1298(충렬왕 24)~1380(우왕 6)] → 고려 제27대 충숙왕의 비
본관은 남양(南陽). 성은 홍씨(洪氏). 아버지는 부원군 규(奎)이다. 충혜왕과 공민왕의 어머니이다. 충숙왕이 왕위에 오른 뒤 간선되어 궁중에 들어갔고, 덕비(德妃)로 책봉되었다. 그뒤 충숙왕이 원나라에서 맞이한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가 태후를 질투해 정안공(定安公)의 집에서 거처했다. 1374년 10세의 어린 나이로 우왕이 즉위하자 늘 어린 왕을 훈계하며 국정을 보살폈다. 능은 영릉(令陵)이고, 시호는 공원(恭元)이다.
♦ 경의황후(敬懿王后),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1735(영조 11)~1815(순조 15)]
조선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莊祖)의 비(妃)
본관은 풍산.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로 알려져 있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영조 20)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당쟁에 휘말려 1762년 남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비운을 겪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 둘째 아들이 왕세손에 책봉되어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宮號)가 혜경으로 올랐다. 환갑을 맞은 해(1795년)에 〈한중록〉을 썼는데, 이 작품은 남편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회고하며, 자서전적인 사소설체(私小說體)로 기록한 것이다. 문장이 섬세하고 아담하여 〈인현왕후전〉과 아울러 궁중문학의 쌍벽으로 평가되고 있다. 1899년(광무 3) 남편이 장조(莊祖)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에 추존되었다.
※한중록(閑中錄)
필사본 14종이 있으며, 국문본·한문본·국한문혼용본이 있다. 사본에 따라 〈읍혈록 泣血錄〉·〈한중록 恨中錄〉·〈한중만록 閑中漫錄〉이라고도 한다. 전체 4편이며, 제1편은 1795년, 제2편은 1801년(순조 1), 제3편은 1802년, 제4편은 1805년에 각각 씌어졌다. 제1편은 지은이가 회갑되는 해에 친정 조카의 요청에 따라 써준 글이다.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 이후 50여 년 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했다. 남편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할 수 없다며 간략히 언급했고, 후반부에는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아버지·삼촌·동생들이 화를 입게 된 사건의 전말을 기록했다. 제2편은 67세에 쓴 글로, 사도세자 사건 이후부터 정조 초년까지 정적들에게 모함받은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했다.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간으로 정조가 자신의 외가를 미워하게 되었으며, 당시의 세도가 홍국영(洪國榮)이 개인적인 원한으로 친정을 멸문시켰음을 폭로했다. 삼촌 홍인한(洪麟漢)과 동생 홍낙임(洪樂任)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며 하루 빨리 누명을 벗을 수 있기를 하늘에 축원하는 내용이다. 제3편은 68세에 쓴 글로 제2편과 내용이 비슷하다. 정조가 예전에 자신에게 효성이 지극했으며 검소하게 생활하고 학문을 열심히 했음을 회상하고 있다. 또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와 숙부의 억울한 누명을 후일 반드시 풀어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되새기며, 어린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다. 제4편은 71세에 쓴 것으로, 제1편에서 차마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한 사도세자의 사건 내막을 기록했다. 사도세자가 부친인 영조에게 미움을 받아 뒤주 속에서 죽게 되기까지의 경위를 서술하고,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게 한 발상이 아버지 홍봉한에게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한갖 모함이며 아버지는 결백하다고 역설했다.
지은이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사도세자 사건으로 비난받는 아버지 홍봉한의 결백을 입증하는 내용을 손자인 순조에게 읽히기 위한 것이었다. 곧 홍국영 등 정적들의 모함으로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홍봉한이 사도세자가 참변을 당할 때 뒤주를 바쳤다는 혐의까지 받자 아버지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쓴 것이다. 학자에 따라 이 작품을 소설·일기·수필 등으로 보고 있데, 인물묘사나 서사구조, 문체 면에서 높은 수준의 서사성을 갖춘 실기문학으로 보는 것이 유력하다. 이 작품은 첫째, 사도세자의 죽음 등 왕실의 비사(秘史)를 다룬 궁중문학이고, 순수 국문문학이며, 지은이가 역사적 사건의 핵심에 있었던 실존인물이라는 점, 둘째, 문체가 유창하고 아름다우며 멋스런 고어와 궁중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사건을 애절하고도 박진감 넘치게 서술하여 승화된 한의 미학을 보여준 점, 셋째,다양한 궁중풍속과 사도세자의 죽음 등을 자세히 그려낸 점에서 문학사·역사적 가치가 크다.
♦ 홍국영[洪國榮, 1748~1781]
조선 후기의 문신 ·세도정치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주동역할을 한 벽파(僻派)들이 세손(世孫:正祖)까지 해하려고 음모를 꾀하자 이를 막아 세손에게 깊은 신임을 얻었다. 정조를 즉위시키는 데 진력하여 도승지에 올라 누이동생을 빈으로 들여보내 세도정권을 이루고 갖은 횡포와 전횡을 일삼았다.
본관 풍산(豊山). 자 덕로(德老). 1771년(영조 47) 정시로 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說書)가 되어 사도(思悼)세자를 죽이는 데 주동역할을 한 벽파(僻派)들이 세손(世孫:正祖)까지 해하려고 음모를 꾀하자 이를 막아 세손에게 깊은 신임을 얻었다. 이어 사서(司書)에 승진, 이때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鄭厚謙) ·홍인한(洪麟漢) ·김구주(金龜柱) 등을 탄핵하여 몰아내고 1776년 정조를 즉위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이어 홍상간(洪相簡) ·홍인한 ·윤양로(尹養老) 등의 모역(謀逆)을 적발 처단하였고, 이어 동부승지에 특진,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여 그 대장을 겸임, 정조의 신변보호에 힘쓰고 도승지에 올랐다. 이때부터 세도정권이 이루어져 갖은 횡포와 전횡을 일삼아 정후겸 못지않다 하여 대후겸(大厚謙)이라 불렸다.
1778년 왕비에게 소생이 없자 누이동생을 빈(嬪)으로 들여보내 세도정권을 굳게 다졌으며, 이듬해 훈련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후궁으로 원빈(元嬪)이 1년 만에 병사하여 왕의 외척(外戚)으로서 집권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왕이 새로 빈을 맞아들이지 못하도록 극력 반대하고 왕제(王弟)인 은언군(恩彦君) 인(裀)의 아들 담(湛)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이라 하였다. 홍국영이 정계에서 물러난 후 완풍군은 상계군(常溪君)으로 개봉하였으며, 1786년(정조 10)에 죽었다. 홍국영은 완풍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780년 왕비 김씨가 앞서 원빈을 살해한 것으로 믿고 왕비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가 발각되어 가산을 적몰(籍沒)당하고 방축(放逐)되어 이듬해 강릉에서 죽었으며, 5년 후 상계군이 음독 자살하였다. 실각할 때까지 도승지 ·이조참의 ·대제학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