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사덕수용소 수도자들의 ‘행복’
‘행복이 무엇인가’ 또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가’ 라는 질문은 던지기조차도 식상할 정도로 되풀이되어 왔다. 또한 누가 대답을 해도 구태의연한 답으로 돌아오는 질문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삶, 비우는 삶 등등. 그래서 이 주제를 건다는 자체도 망설여진다. 한편, 되짚어보면 질문과 대답이 끝없이 되풀이된다는 사실은 그만큼 인류에게 절실한 질문이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래서 문득 본인의 삶이 행복했다고 하는 사람들, 그 삶의 순간을 살펴보고 싶어졌다. 옥사덕 수용소(북한, 자강도 전천군 별하면)에서 4년 6개월을 보낸 독일인 성직자·수도자들은 생을 마치면서 그 수용소 시간이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한국 베네딕도 수도회의 위기와 옥사덕수용소 생활
1909년 한국 천주교회 처음으로 수도회 선교사들이 한국(대한제국)에 도착했다. 독일 샹트오틸리엔에서 파견한 베네딕도 수도회이다. 그들은 10여년을 서울의 백동(지금의 혜화동)에서 활동하고, 1920년대 북한의 함경도 일대와 만주 일대를 사목하러 원산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덕원을 중심으로 수도원 자치구를 세우고, 수도원, 성당, 신학교, 수녀원, 병원, 학교 등을 세우며 크게 활동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일본군의 전선이 불리하게 되자 일본 제국은 차츰 교회가 가진 재산을 빼앗기 시작했다. 게다가 불행은 혼자만 오지 않는다던가? 독일에서는 1930년대부터 나치정권이 서면서 가톨릭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2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으로 기울면서 독일 내에서도 수도원이 폐쇄당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선교사들에게는 본국으로부터의 소식이나 후원도 끊겼다. 수도자들의 곤궁함은 극한으로 치달아 그들은 수도복이 다 헤졌는데, 새로 만들 천이 없다며 고국에서 천을 공급받고 싶다고 편지를 띄울 정도였다. 물론 편지는 도달하지 않았다.
이후 독일 수도자들의 생활은 더 막달은 길로 치달았다. 1945년 드디어 한국이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기 직전인 8월 10일 무렵부터 소련군이 북한으로 진주해왔다. 이들은 일본군이 빼앗았던 교회 재산을 모두 차지했다. 그리고 1년여 만에 소련군을 이어 북한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교회 말살정책이 시작되었다.
공산주의는 ‘무신론(無神論)과 유물론(唯物論)’을 바탕으로 하는 사상이다. 결국 공산정권은 1949년 5월 14일 덕원수도원을 폐쇄하고 모든 독일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체포하고, 또 한국인 성직자도 체포했다. 그리고 한국인 수도자들은 수도복을 벗기고 각자 집으로 보냈다.
체포된 독일인 성직·수도자들 중 64명이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평안북도 산골짜기(옥사덕)에 집단수용되었다. 그들은 축산, 농사, 숯굽기 등의 노동을 하여 북한사회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제공해야 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북한에서 공급하는 것으로 생활해야 했는데, 그 정도가 극히 열악하여 굶주리거나 병으로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생필품이 없는 것은 물론, 또한 병이 들어도 환자에게 줄 약품도 없었다.
그들의 작은 건의조차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농사를 짓는 김에 감자와 밀을 조금 키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았다. 감자와 밀은 그들의 주식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특히 미사용 제병을 만들기 위해 밀은 필수적이었다. 그들의 밀을 얻기 위한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수도자들은 동료가 죽으면 묻어가면서 그 옆에서 생활했다. 6·25전쟁 때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으로 진격했을 때 전쟁이 일어난 줄도 모르는 그들은 북한군에게 끌려 만포진까지 걸어 이동했다. 이를 ‘동부 죽음의 행진’이라 한다. 중국군 참전 이후 다시 옥사덕으로 돌아왔다.
매일 미사를 하며 살아야 하는 그들에게 미사도 금지되었다. 그들의 노동 시간이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잡혀 있고, 또 그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감시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일 나가는 채비를 하면서, 한 사람이 망을 보고, 얼른 미사를 드렸다. 그리고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수녀들에게는 한 사람이 제병을 숨겨가지고 가서 나누어 주었다. 이들의 생활을 일일이 다 설명할 순 없다. 죽음의 행진에서 4명, 옥사덕에서 13명이 희생되었다. 생존자 47명은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다음에 독일로 송환되었다.
요한네스 마르의 『덕원의 순교자들』
선교사들의 옥사덕 생활은 후에 여러 책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임인년 섣달그믐부터 계묘년 첫날까지 『덕원의 순교자들』(요한네스 마르 작, 이종한 옮김, 2012)을 읽었다. 논문을 쓰느라 이미 읽은 책이지만 남의 인생으로 다시 읽는 것은 의미가 달랐다.
1909년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1950년 옥사덕 시절 이미 노인의 나이였다. 평생을 식민지가 된 땅에서 선교를 하고 살았는데, 말년에 맞은 그들의 상황은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비참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열매인 신자들과는 물론, 자신들의 뿌리인 본국과도 철저히 단절되어 있었다. 그렇게 견디는 것을 보여 ‘선교’에 이바지하게라도 될 다른 사람도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 산골짜기와 그들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생활을 견뎠다. 죽은 사람이 많긴 하지만, 그러나 그 죽은 사람의 힘까지 합쳐서 그들은 이겨낸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이를 받아들였을까? 그래도 교회에 대한 미래를 믿었을까? 과연 수도자가 된다는 것,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무튼 이들 생환(生還)된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덕원수도원에서 쫓겨난 한국인들이 왜관에서 수도원을 이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한국교회의 발전은 실로 놀라웠다.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귀환하여 평생을 바치고 죽으면서, 그들은 옥사덕 때가 행복했다고 했다. 2015년 1월 벨트뷔나(한국 이름 채인숙) 수녀님이 100세로 선종했는데, 이분이 내가 인터뷰한 분이다. 그는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들이 옥사덕에서 왜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가야 했는가라는 것은 또 다른 질문이다. 그 삶의 의미적 차원, 역사적 해석은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다만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그들의 생활 상황을 들여다볼 수 있다.
행복은 밀접한 관계의 형성과 느끼는 횟수에 따라
나는 하버드대학에서 진행했다는 행복에 대한 연구를 기억해 낸다. 그 연구는 행복의 조건으로 두가지를 제시했는데, 하나는 밀접한 관계를 이룰 것, 그리고 행복은 한번에 억만장자가 되는 등의 밀도에 의한 게 아니라 회수에 의한다라는 것이었다. 수도자들은 정말로 일치단결했다. 관계는 나 아닌 한사람 이상이면 족하다. 한편, 그들에게 물질은 거의 없었다.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없을 정도로 빈곤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없는 것에서 자신들이 지향하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냈고 새로운 것들을 개발했다. 미사를 드리기 위한 포도주를 구하지 못하자 산속에서 머루나 다래 등의 열매를 발견하고 기뻐했다. 행복의 두가지 조건인 밀접한 관계 형성과 작은 행복(만족)을 수시로 누릴 수 있었다는 상황은 형성되어 있었다. 물론 이는 큰 불행 속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다.
이밖에 그들에게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과의 일치라는 안온한 세계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이는 일반인이 논하기 쉬운 세계는 아니다. 또한 수도공동체가 갖는 공감대는 일반인에게는 다른 말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옥사덕 수도자들을 생각하면서 품었던 많은 역사적 질문을 이 짧은 글에서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1968년 한국 선교사로 입국한 독일인 신부님, 옥사덕 선배들의 생활을 잘 알고 또 그들로부터 삶의 용기를 얻는다는 분의 말을 소개한다. “왜관수도원에 있으면 해뜨는 것이 아주 잘 보여요. 낙동강으로 해지는 것도 잘 보이구요. 이런 것을 한번 보는 것만도 생이 보람되다라는 느낌을 가져요. 또 요즘처럼 밤하늘이 청명할 때는 많은 별들이 보이는데, 그럴 때마다 두려울만큼 우주의 경이로움이 느껴져요. 독일에는 철학은 놀라움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어요. 이렇게 놀랄 수 있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면서 그분은 며칠 전 내가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도 발코니에 있는 수선화 싹이 올라왔다고 찍어보냈던 사진을 기억하시면서 그 또한 놀라움에서 일어나는 행위라고 했다. 이것이 봉헌의 삶에 중요하다고 하면서-. 내가 수선화 싹을 사진찍을 때 행복하다고 느꼈었나? 신비롭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옥사덕 수도자들의 환경에서 짚어낸 행복 조건의 중요한 원동력이 이것과 같다면, 행복은 순간순간 발굴하는 놀라움, 경이로움이 바탕이 된다는 말이 된다. 순간의 경이로움을 놓치지 않으려면 자신에게 생동감이 있어야 한다. 순간순간 약동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옥사덕 수도자들의 상황은 참 많은 말을 한다.(20230205, 김정숙)
첫댓글 우와 우리나라에 이런 선교 역사가 있었군요. 교수님 열정이 아니었으면 알 수 없는 역사적인 중요한 사실을, 이렇게 이해하기 쉽게 글로써 소개하여 주셔서 무한 감사드립니다. 👏👏👏 🥰
베네딕도 수도회의 한국 선교사에 이런 모진 풍파가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