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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성령의 위격과 사역
고전 12:1 “형제자매 여러분, 성령의 은사들에 대하여 여러분이 모르고 지내기를 나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구속의 계획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을 통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담대한 소망이 생겼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의 부활을 전함으로 그리스도교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위대한 미션과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객관적인 사실로 인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독교에서 가장 주요한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은 그리스도 중심주의라는 20세기 신학적 트랜드를 만들어 냈습니다. 칼 바르트와 본회퍼를 중심으로 한 바르멘 신학 선언 이후에 그리스도 중심주의는 16세기의 종교개혁 신학과 더불어 20세기의 기독교 신학(신정통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신학자들은 이런 그리스도 중심주의로 인해서 기독교 신학에 “성령의 망각”(Geistvergessenheit)의 추세가 심화되었다고 진단하기도 합니다. 현대 가톨릭 신학자들은 물론이고 몰트만과 같은 개신교 신학자들도 이런 진단에 참여합니다. 물론 이런 신학적 평가가 지나친 점은 있지만,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에 비해서 성령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성부의 사역과 성자의 사역이 중요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성령의 사역 역시 중요하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 없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부터 언제나 구분되며, 그 속에서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상호관계적이며, 구별된 것이라는 이 표현은 삼위일체적 신학 이해를 반영한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 사역에 있어서 상호관계적이며, 서로 구별된다. 그렇다면 성부의 사역과 성자의 사역 못지않게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성부의 사랑과 은총과 지혜는 성자와 성령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이 점에서 인간을 향한 성부의 사랑과 은총과 지혜의 사역은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첫째는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고, 둘째는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성부가 성자를 보내신 것은 요 3:16, 17절에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성자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성부로부터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런 성부의 사랑의 섭리에 따라서 성자
는 육신으로 오셔서 인류와 함께 하셨습니다. 요 1: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자는 사랑과 은총과 비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울러 성부는 우리를 위해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보낸 바 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서적인 것은 아닙니다. 1054년에 동서교회가 영원히 결별하게 된 핵심 요인 중 하나인 “필리오케”(filioque) 논쟁에서 나타난 것처럼 교회 역사에서 서방교회는 성령이 성부로부터, 그리고 아들로부터 왔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갈등이 발생하게 된 이유는 삼위일체에 대한 동방과 서방교회의 약간 다른 이해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동방 지역에 속한 교회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실체(substantia)를 강조합니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가 서로 독립된 실체라면 성령이 그 두 실체로부터 보내졌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서방교회들은 한 본질을 강조하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성령이 보내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인식적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런 논쟁은 교리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좀 복잡한 논쟁입니다.
성경에서는 성부가 성령을 보내셨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성령의 시대를 예고하는 성령의 기록은 예수의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 날 저녁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중요한 권면을 주시면서 성령의 약속을 언급하십니다. 요 16:7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떠나가시면 보혜사가 오실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떠나신 이후에 오실 보혜사는 진리의 성령임을 알게 해줍니다. 특별히 이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설명하는 것처럼 이해됩니다. 그러나 요 14:16, 17절에서는 성부께서 그 보혜사를 주실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성부께서 인류를 위해 두 보혜사를 보내셨음을 알게 됩니다. 첫 번째 보혜사는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육신을 취하실만큼, 자기를 낯추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빌 2:6-8절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말씀이 첫 번째 보혜사이신 성자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는 성부에 의해 보냄을 받아 이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자의 지상에서의 사역이 마친 후, 성부는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셨는데, 그것은 바로 “진리의 성령”이셨습니다.
성부께서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로 보내시는 이유는 요 14:25-26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요 15:26절에서 “네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는 진리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의 위격과 사역에 대한 매우 분명한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특별히 이 내용은 삼위일체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먼저, 성령의 위격에 대한 이해를 분명하게 해줍니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성자와 성령은 성부께서 사랑과 은총과 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에게 보내신 두 보혜사입니다. 따라서 성자의 위격이 분명하게 구별된다면, 성령의 위격 또한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령을 비인격적인 하나님의 영, 혹은 능력으로 이해하지만, 성경은 성령이 삼위일체로서 독립적인 위격을 가진 실체임을 분명하게 계시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또 다른 보혜사”라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게 해 주십니다. 성부께서 보내신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이 위격을 가지신 실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레내우스로부터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은 고대 교부들에 의해서 삼위일체 신학이 형성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성경절은 마 28:19절, 즉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구절의 헬라어 원어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각각 “tou”라는 정관사와 함께 나타납니다. 이런 문법적 상황에 비춰볼 때, 아버지와 아들이 위격적으로 구분된 존재라면 당연히 성령도 위격적으로 구분된 존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이 구절에 근거해서 삼위일체 신학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두 가지 내용에서 우리는 성령의 영적인 현현에 대한 가시적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 내용은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신 것입니다. 이 내용은 마태와 누가와 요한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가의 기록은 매우 특별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눅 3:22절에 보면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somatiko eidei)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누가는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강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형체로 표현된 단어는 “somatiko eidei”(bodily form)입니다. 그리스어에서 “에이도스”(eidos)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형상”을 말합니다.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질료(hyle, matter)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영혼의 눈으로 혹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형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비
둘기의 형상으로 강림하셨다고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도록 비둘기의 형상으로 내려오셨다는 이 표현에서 신학자들은 성령의 구별된 실체를 이해합니다.
그리고 둘째 내용은 오순절에 제자들의 성령 체험 경험에서 불의 혀같이 갈라진 모습으로 임하신 사건입니다. 행 2:3, 4절에서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실 때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영적인 존재이지만, 그가 임하실 때 가시적인 형상으로도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따라서 성령은 육체로 오신 예수만큼이나 가시적으로 계시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제3의 위격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여러 계시의 말씀 속에서 성령이 위격적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전 2:10절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에 의해서 우리에게 나타났는데, 그 이유는 바로 성령이 하나님의 깊은 통찰력까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통찰력을 꿰뚫는 지혜를 가지고 계신 존재라는 것입니다. 고전 12:11절에서는 성령의 은사를 설명하면서 “이 모든 일(은사)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 설명합니다. 즉 성령의 모든 은사는 성령께서 자신의 뜻대로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자신의 의지를 가지신 위격적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욥 33:4절에서 “하나님의 영(ruach)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neshamah)이 나를 살리시느니라”고 기록하는데, 이 표현에서 우리는 성령이 인간을 만들고 살아 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음을 알게됩니다. 창 2:7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여기서 생기(hay-yim nis-mat)를 불어넣으시니(way-yip-pah)라는 표현은 요 20:22절에서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되 성령을 받으라”라는 표현과 유사한 것입니다. 즉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다는 표현은 성령을 주셨다는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이런 표현들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께서 창조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는 일에 함께 하셨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내용은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성령이 지혜와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설명함으로써 그의 존재의 성질, 즉 위격적 특성들을 설명해 줍니다. 이런 계시들을 기초로 해서 우리는 성령을 제3의 위격으로 이해하고 삼위일체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위격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서 우리는 성령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번 장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을 세부적으로 다루기 전에 먼저 그의 사역의 본질
을 소개해 볼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성령의 사역은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요 14:16절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묘사합니다. 눅 12:11, 12절에서는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고 기록합니다. 요일 2:27절에서는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untion)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친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말씀합니다. 요한은 20절에서 “너희는 거룩하신 자(성령)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고 이미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서 “기름 부음”이라는 표현은 성령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이 너희에게 가르친다는 것이죠.
이처럼 성경은 성령의 사역이 가르치는 것임을 명백하게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이 오셔서 그의 백성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칠 것이라고 성경은 성령의 사역을 설명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실 것이고, 성령이 오시면 그분은 사람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안내하시며,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즉 성령은 “증거하시며, 전도하시며, 세상을 꾸짖으시며,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게 하시며,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게 하시며,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역이라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힘든 사역 중 하나는 바로 이런 사역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런 사역들이 모두 우리의 어깨 위에 놓여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역을 감당하기에 벅찬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사역에 대해서 절망하면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역이 우리의 사역이기 이전에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떠나간 후에 제자들이 우리와 같은 두려움에 처해 있음을 아시고 그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께서 그 모든 것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보혜사”입니다. 위로자라는 뜻이지요. 성령은 우리의 위로자가 되셔서 우리의 모든 부담과 두려움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놀라운 약속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두려움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즉 우리가 성령의 사역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우리는 성령, 즉 성령의 위격과 그 사역에 대한 깊은
이해를 추구해야 합니다. 성령에 대한 깊은 이해를 추구하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의 두려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령에 대해서 깊이 있는 신앙적 통찰을 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엘렌 화이트는 <사도행적 49>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령의 약속은 어떤 시대나 어떤 족속에게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거룩한 감화가 세상 끝날까지 그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오순절 때부터 지금까지 보혜사 성령은 자신을 주님과 그분의 사업에 온전히 바친 모든 사람과 함께 하셨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은 권고자로, 성결케 하는 자로, 인도자로, 그리고 증인으로 함께 하셨다. 신자들이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할 때 그들은 구속주의 사랑과 그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더욱 힘 있고 분명하게 증거하게 되었다. 박해와 시련의 오랜 세기를 통하여 남녀들은 그들의 생애에 성령의 임재를 크게 누렸으며 세상에서 이적과 기사를 베푸는 자들로 섰다. 그들은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 구속하시는 사랑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나타냈다.”
엘렌 화이트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가장 연약한 사람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행사함으로 그들에게 맡겨진 능력을 증진시키는 법과 성화되고 우아해지며 고상하게 되는 법을 배웠다. 겸손히 성령의 변화시키는 감화에 복종하였을 때 그들은 신성의 충만함을 받고 거룩한 형상으로 변화되었다.”(50).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성령이 어떠한 사역을 하였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그의 사역은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변화에서 성령이 어떤 사역을 수행하시는지,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 성령이 우리에게 어떤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것인지를 살펴봄으로써 이 시대에 성령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깊은 통찰을 추구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은사에 대해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고 편지합니다. 이 편지는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몰라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바로 성령에 대한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