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신우모임에 사전 연락도 제대로 못하고 참석하지 못해 미안했습니다.
5월 17일에서 29일에 걸쳐 발칸 반도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다녀오게 된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실은 출발 시에 계속된 감기로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지만, 오래 전부터 황석회 친구들과 함께 하기로 계획했던 이번 여행은, 단순한 풍물 중심의 여행이 아니라, 종교 역사 여행으로서,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 그리고 무슬림 간의 갈들으로 인해 몇 년 간 대 살육전을 치른 발칸 발도와, 중세 이후 지금까지 중부 유럽 가톨릭 교회의 중심지인 비엔나 방문은, 종교 간의 갈등과 대화라는, 저로서는 나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여행이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슬로베이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자연 풍광과 이번 발칸 여행의 부산물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광, 비엔나 방문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여행의 중요 부분이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할 시간은 개별적으로 갖기로 하고, 먼저 아래에 이번 여행의 전체적인 소감이랄까, 보고 배운 생각의 일부를 신우들과 공유하는 것으로 귀국 인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2001년 9월 11일 911 사태로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문명의 충돌”은 고대에 그리스-로마 제국과 아씨리아, 바빌론, 페르샤 제국 간에도 있어 왔지만, 오늘날과 같은 기독교 국가들과 이슬람 국가들 간의 반목과 갈등에 의한 문명의 충돌은 (가톨릭 및 동방 정교회) 기독교와 무슬림 간의 십자군 전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성지 예루살렘 회복이라는 명분 하에 십자군이란 이름으로 유럽 제국의 기독교(유럽) 국가들의 아시아 침공은 11 세기 말 제1차 십자군 전쟁(1096)으로 본격화되어 13세기까지 8차에 걸쳐 소아시아를 주 무대로 전개되었으나, 14세기 이후에는 역으로 이슬람 국가(아시아)의 기독교 국가(유럽)로의 침공으로 대세가 바뀌게 되는데 그것은 오스만 투르크(터키) 제국에 의해 주도된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당시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의 함락(1453) 이전인, 14 세기 후반에 이미 발칸 반도를 그들의 세력권 안에 넣었고(1389), 16세기에 베네치아 점령과 유럽 침공을 목표로 한 레판토 해전(1571)과, 16~17 세기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를 상대로 한 1, 2차 빈(비엔나) 공성전(1529, 1683)을 통해, 유럽 제패를 시도하였으나, 1571년 레판토 해전과 1683년 제2차 비엔나 전투에서의 패전을 고비로 제국의 힘은 급속도로 약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발칸 지역에서의 오스만의 입지는 20세기 초에까지 이어졌으므로 발칸 반도 전역에서의 오스만의 영향력은 근현대를 합쳐 500년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 여행은 14세기 말로부터 500년에 걸친 오스만 투르크와 유럽 강국들 간의 전쟁의 교두보가 되어 양대 세력의 점령과 지배의 반복으로 얼룩진 발칸 나라들의 역사를 통해 최근의 발칸 분쟁의 기원을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티토의 통솔력 아래, 구 유고슬라비니아로 통일되었던 (그리스, 알바니아를 제외한) 발칸 반도는 티토 축출 이후 발칸 5 개국으로 분리 독립하였고, 그 중 이번에 돌아본 4 개국, 즉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헬체고비나, 그리고 세르비아 등의 여행에서는 몇 년 전 보스니아인의 인종 청소에까지 이르게 한, 세르비아의 밀로세비치의 공포 정치의 근원에는 무슬림과 기독교 동방 정교, 그리고 가톨릭까지에 이른 종교 갈등이 자리하고 있음을 파악하게 된 것은 이번 여행의 커다란 수확이었다.
특히, 종교 분쟁으로 (무슬림, 가톨릭, 동방정교회 대표 등) 세 명의 대통령이 함께 다스릴 수밖에 없는 보스니아,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가져온 합스부르크 가의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암살 현장인 사라예보의 다리, 그리고 최근 85년 간 아홉 번의 대폭격을 받은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벨그라드) 시가지 등, 그 악몽의 현장 등을 지나면서, 유럽의 화약고로서 지난 수 세기 간 유럽 대전쟁의 희생양이 된 이들 발칸 나라들의 역사적 비극을 통해 우리의 현실의 되짚어 보는 생생한 역사적 교훈을 얻은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문명의 충돌”이란 말이 우리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지만, 정작 왜 아랍 테러 단체가 뉴욕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폭격한 날짜를 9월 11일로 잡았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대답을 이번 여행의 결과로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오스만 투르크 군의 제 2차 비엔나 공성전(1683)에서의 패배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드 4세의 치세 아래 오스만의 대재상 카라 무스타파는 1683년 술탄의 명을 받들어 30만 대군을 이끌고 터키를 떠나 제2차 비엔나의 공성전을 감행한다.
그 당시 합스부르크 황제 레오폴트는 큰 위협을 느껴 성을 버리고 도주하려 했으나 베네치아 수도승 마르코의 설득으로 폴란드 왕 얀 소비에스키의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때 맞추어 당도한 얀 왕은 연합군을 총지휘하여 오스만 투르크 군을 무찌르는 데 성공한다. 이 때 무스타파가 비엔나를 무너뜨리려 했던 전투일이 1683년 9월 11일이었는데, 오히려 쓰라린 패배를 당한 무스타파는 그 해 겨울 베오그라드에서 패전을 책임를 지고 술탄에 의해 처형당한다.
무슬림 나라들은 비엔나 공성전이 패배로 끝난 이 9월 11일을 대 기독교 문명에 대한 치욕의 날로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2001년 아랍 테러단이 이 날에 미국 뉴욕 쌍둥이 빌딩에 테러를 감행한 것이,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켜 유럽을 정복하려다 실패한 오스만 투르크의 패전의 날을 무려 312년이라는 시간을 뛰어 넘어, 이 날을 기독교 문명에 대한 테러의 날로 잡았다는 것은, 무슬림 과격파 테러 단체들이 현대 기독교 문명을 대표하는 미국에 대한 그들의 증오를 얼마나 극적인 방법으로 표출하고 싶였나 하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기회가 되면 이 신우회 게시판을 통해 이번 여행으로 흥미가 고조된, 동서양 간의 문명의 충돌, 그리고 종교 간의 투쟁과 대화의 역사 등에 대해서 소통해 보려고 합니다.
샬롬! 믿음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