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에세이 학창시절의 에피소드
연이와 은이
손진숙
새싹이 파릇하게 돋아나는 봄이다. 입학 철을 맞이하여 지나간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본다. 풋풋하던 그 시절에서 얼마나 멀리 걸어온 것일까? 헤아릴수 없는 날들을 건너와 버렸지만 되짚어 보니 한순간이다. 무진장 흘러간 시간이 한줄기 바람 같고, 한바탕 꿈결 같다.
희끗해져 가는 파마머리에서 흐르는 세월을 느낀다. 양 갈래로 묶었다가 땋았던 검고 빛나던 머릿결은 어디로 가버렸나. 무심하기는 인연도 세월과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두 얼굴이 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연이와 은이다.
먼저 연이와의 짧은 우정이다. 큰 키에갸름한 얼굴로 늘 상글상글 미소를 띠며 내게 곰살궂게 대해 주었다.
신학기라 악대부를 모집했다. 연이는 얼른 가입하더니 나더러 함께 하자고 권유했다. 음악에 소질이 없었으나 친구의 권유에 따라 가입을 했다.그러나 나는 며칠 가지 않아서 못하게 되고 말았다. 통학생이라 막차 시간에 맞춰야 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연습에 임할 수가 없어서였다. 연이는 악대부 활동을 계속했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늘씬한 체형의 연이가 악대복을 입고 작은북을 치면서 운동장을 행진하는 모습은 부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했다.
악대부 연습이 없는 날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란히교실 문을 나섰다. 죽도시장에 가서 고구마튀김과 야채튀김을 사 먹기도 하고, 허물어질 듯한 분식집에 가서 맛나기로 소문난 칼국수를 사 먹기도 했다.
그해 여름방학에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연이가 보내온 편지는 목련꽃처럼 순결하고 향기로웠다. ‘당신’이라는 호칭은 동성 친구 간에 낯설기도 하고, 두근거리기도 했다. 멋을 알고 매력을 뿜던 친구였다.
연이는 시골에서 다니는 어리숙한 나를 이끌고 밀어주던 언니 같았다. 나는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했던 것 같다.
하지만 2학년이 되어 반이 달라지면서 서로를 찾지 않았다. 소극적인 성격이었던 나는 누군가 다가올 때는 조용히 손잡았지만, 멀어질 때는 말없이 손을 거두었다. 자연스럽게 잊는 길을 택할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은이와의 기억 한 토막이다. 은이 아버지는 당시 포항제철에서 직책이 높다고 알려졌다. 은이는 주근깨가 있는 둥근 얼굴에 눈웃음과 보조개가 예뻤다. 웃는 모습이 함박꽃처럼 피어났으며, 서울 말씨에 목소리도 은방울이 구르는 듯했다. 범접하지 못할귀티가 느껴지는 친구였다.
은이는 바로 내 뒷자리에 앉았다. 연이의 옆자리가 은이다. 딱히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다. 그런 은이가 어느 날 나에게 뜻밖의 제의를 했다.
무슨 과목 시간이었는지, 어느 선생님이었는지, 어떤 책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선생님께서 읽어야 할 좋은 작품을 소개했다. 읽은 사람 손들라고 했다. 나는 손을 들지 못했다. 내가 읽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된 은이는 집에 책이 있냐고 물었다. 없다는 내 대답에 자기 집에 책이 있다며 나에게 빌려주겠다고 했다. 빌려서라도 꼭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먼저 빌려주겠다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방과 후 은이의 집 앞까지 따라갔다. 집이 특별히 크거나 화려해 보이지는 않았다. 고만고만한 이웃집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은이가 집 안에 같이 들어가자고 했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담 밖에 기다리고 서 있었다. 담장 안에는 모과나무 한 그루가 새순을 뾰족이 내밀고 있었다. 은이는 현관문 안으로 혼자 들어갔다가다시 나와서 또 들어가자고 하는데도 나는 물리쳐야만 했다.
실내로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 한다. 그날따라 내가 신은 검정 스타킹에 구멍이 나 있었다. 은이에게 차마 보이고 싶지 않았다. 구멍 난 스타킹만 아니었으면 어떻게 꾸몄을지 호기심이 생기는 은이의 방을 구경했을 텐데…. 꽃샘추위가 몰아친 봄날이었으니 따뜻한 음료도 한 잔 마시지 않았을까. 지난가을 따서 만들어둔 모과차를 내놓았을지도 모르리라. 끝끝내 들어가지 않겠다는 내게 책을 가지고 나와서 건네주었다.
강산이 네 번도 더 바뀌었다. 연이도 은이도 동기회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그들의 소식을 아는 친구가 없는 듯하다. 그때의 청려淸麗함을 얼마만큼 간직하고 있는지 두 친구가 보고 싶다. 목련꽃 피는 사월이면 연이가 그립고, 은방울꽃이 피는 오월이면 은이가 궁금하다.
격월간 《그린에세이》 2022년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