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문헌과 현대 사적의
손홍량 선조
손홍량(孫洪亮) 1287(충렬왕 13)~1379(우왕 5) 고려문신. 본관은 일직(一直), 본성(本姓)은 순(荀)이나 현종의 이름과 같아 5대조 응(凝)때 손(孫)이란 성을 하사받았다. 충선왕(忠宣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 충숙(忠肅) 충혜(忠惠) 양조에 벼슬하고, 1348년 충목왕(忠穆王) 4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349년 충정왕(忠定王) 1 추성보절 좌리공신(推誠保節佐理功臣) 에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었고, 이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으며, 이듬해 복천부원군(福川府院君)으로 봉해지고, 1351년 치사 (致仕)했다. 1362년 공민왕(恭愍王) 11 홍건적(紅巾敵)의 난으로 복주(福州)에 피난하는 왕을 중도에서 평복으로 맞아 치하를 받았고, 1364년 난의 평정을 축하하러 서울에 갔다가 왕으로부터 궤장(几杖)과 자기 초상화를 받았다. 돌아올 때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등 학자들이 시를 지어 전송했다. 시호(諡號)는 정평(靖平).
한국인명대사전편찬실 편
한국인명대사전(신구문화사 간)에서
손홍량(孫洪亮) 1287~1379 고려 말기의 명신. 시호는 정평, 본관은 일직. 본성은 순이나 현종의 휘(諱)와 같다 하여 손으로 고쳤다. 충선왕 때 과거에 급제, 충해 양조에 벼슬하고 충목왕 때 재상을 거쳐 충정왕 때 사임했다. 1362년 공민왕 11 홍건적의 난을 만나 왕이 복주(福州)로 피하자 홍량이 평민으로 왕을 도중에서 맞았다. 난이 평정된 후 왕은 홍량의 초상화를 그려 궤장과 함께 내려 그 공을 표창하였다.
이홍직(李洪稙) 편,
국사대사전(지문각 발행) 중에서
충선왕(忠宣王) 때 문과에 급제하고 1348년 충목왕(忠穆王) 4 첨의평리(僉議評理) 첨의평리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349년 충정왕 1 추성보절 좌리공신(推誠保節佐理功臣)으로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었고, 이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으며, 다음해 복천부원군(福川府院君)에 봉해졌다. 1362년 공민왕 11 홍건적 난으로 안동에 피난하는 중도에서 평복으로 맞아 치하를 받고 1364년 왕으로부터 궤장(几杖)과 자기 초상화를 하사받았다.
한국인의 족보편찬위원회편
한국인의 족보(일신각 펴냄) 중
안동 일직 손씨 ‘역대 중요 인물’에서
손홍량 (孫洪亮) 1287(충렬왕 13)~ 1379(우왕 5) 고려의 정치가. 본성은 순이나 현종의 이름과 같아 5대조 응(凝) 때 손이란 성을 하사받았다. 시호는 정평. 본관은 일직.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 충숙 충혜 양조에 벼슬하고 48년 (충목왕 4)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49년 (충정왕 1)추성보절 좌리공신(推誠保節佐理功臣) 에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었고, 이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으며, 이듬해 복천부원군(福川府院君)으로 봉해졌다. 62년(공민왕 11) 홍건적의 난으로 복주(福州)에 피난하는 왕을 중도에서 평복으로 맞아 치하를 받았고 64년 난의 평정을 축하하러 서울에 갔다가 왕으로부터 궤장과 자기 초상화를 받았다. 돌아올 때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등 학자들이 시를 지어 전송했다. 문헌으로는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귀록집(歸鹿集) 등이 있다.
세계인명대사전(문공사 간행)에서
안동 일직 손씨만은 전연 계보를 달리한다. 안동 손씨의 시조는 순응(荀凝으)로서 본디 순씨(荀氏)였었는데 고려 제 8대 현종(顯宗)의 이름이 순(詢)이어서 음(音)이 같다하여 이를 피해 손씨로 개성했다. 안동 손씨는 그의 후손인 손간(孫幹고려장군)을 중시조로 하고 5대 손 손홍량(孫洪亮)이 충정왕 때 좌리공신에 도첨의 찬성사가 되고 복천부원군에 봉해졌다.
한국성씨대관(창조사 판)
저성편(著姓篇)에서
일직인(一直人). 원래 복주 타양현(福州陁陽縣 )사람으로서 본성은 순(荀). 시조 간(幹)이 신라왕을 받들고 일직군(一直郡)에 이르러니 관(貫)을 일직으로 하고 후에 고려 현종(高麗顯宗)의 이름을 피하여 성을 손(孫) 으로 하였다. 그는 일직 태생으로 고려 충선왕조(忠宣王朝) 에 등과하여 충숙(忠肅) 충혜(忠惠) 양조를 역사(歷事)하고 충목왕조(忠穆王朝)에 상위(相位)에 올랐다. 그는 충개진절(忠蓋盡節) 정사(政事)에 관대하니 대신(大臣)의 풍도(風度)가 있었고 충정왕(忠定王) 신묘(辛卯)에 벼슬을 마다하고 영가(永嘉)로 돌아가 산수(山水)로 낙을 삼으니 그때 나이 60여세였다. 공민왕(恭愍王) 임인(壬寅) 홍건적 난때 따른 공이 있어 궤장(几杖)을 받았고 당시 명석(名碩) 이익제(李益齊), 이목은(李牧檼) 등과 더불어 시를 지으며 만년(晩年)을 즐기더니 우왕(禑王) 기미(己未)에 세상을 떴다. 벼슬은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정평(靖平)이라 하였다.
조선명인전(문호사 출간)중에서 ‘손홍량’
전 판삼사사(判三司事) 손홍량(孫洪亮)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주었다.
국역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민족문화추진회 발행) 중에서
나의 4대조(四代祖) 판삼사(判三司) 손홍량(孫洪亮) 공이 정일품(正一品) 벼슬에서 물러나와 이 고을에 사니 공민왕이 궤장을 하사하고 총애하였다.
僕四世祖判三司孫公洪亮以正一品退居是付恭愍王賜几杖以寵之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4권(新增東國輿地勝覽之二十四)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누정(樓亭) 관풍루(觀風樓)에서
관풍루를 중수할 당시 안동목사 손소(孫昭)가 관찰사
김영유(金永濡)에게 한말.
손홍량(孫洪亮) 일직현(一直縣) 사람이다. 벼슬이 누진(累進)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공민왕이 친히 그의 초상(肖像)을 그려 하사하였다. 지금까지 부(府)의 臨河寺에 보관되어있다. 아들 득수(得壽)는 벼슬이 대언(代言)에 이르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24권 안동대도호부 인물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