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퇴계원교회 첫째 성전 마련
예배 장소의 필요를 절감한 교회는 퇴계원리 산 65번지에 위치한 16평 개인 가정집을 구두 약속으로 구입하였다. 매매하는 당사자 사이에 양해를 하면 정식 계약이 없이 구두(口頭)로 매매를 하고, 후에 정식으로 서면계약을 하는 것은 당시의 사회 관례였다. 11월 8일에, 퇴계원 교회를 수리할 도배지를 청량리에서 구입하여 퇴계원까지 트럭으로 운반하였다. 아직은 공사 중이지만 한쪽 방을 먼저 수리하여 도배한 후, 1953년 11월 10일 화요일에 첫 예배를 드렸다. 그 때의 감격을 최성훈 전도사는 당시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금일 처음으로 방에서 예배를 보게 되어 신선미가 있다.”
다음 날인 11월 11일부터 13일 늦은 밤까지 성도들이 합심하여 교회 수리 공사를 계속하였다. 방홍근, 김숙자, 윤금순, 김일순, 백옥란, 임양순과 그 외 다수의 성도들이 마무리 공사에 헌신하였다. 그 때의 일하는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김숙자양의 열심, 그녀는 성신에 감동되어 즐거움으로” 봉사하였다. “윤금순의 끝까지 충성하는 봉사에는 놀래지 않을 수 없다.” 13일 저녁에는 삼안리교회에서 저녁예배를 진행하고, 11월 14일 안식일에 “수리한 예배당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보게 되었다. 김야곱씨가 참석하니 전 회중은 크게 기뻐하는 바이었다. 만사는 다 해결된 듯하다. 평안함이 오다.”(최성훈 전도사 일기에서).
교회 건축물에 대한 공식적인 매입 절차는 1953년 11월 17일 화요일에 퇴계원예배소에서 예배를 마치고 직원회에서 결의하였다.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퇴계원리 산 65번지 가정을 매입하여 수리하여 교회 예배 장소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11월 19일 목요일에는 3만 5천원에 구입하기로 하고, 계약금 1만원에 건물 구입계약서를 작성하였다. 11월 25에는 중도금으로 1만원을 중한대회에서 지원 받아 지불하였다. 11월 30일에 잔금 지불을 위해 중한대회에서 보조금 1만 3천원을 받아 지불하려 하였으나 주인이 오지 않아, 12월 13일에 완불함으로 교회 건축물 매매가 완결되었다.
12월 5일 안식일에 성전을 마련한 성도들은 감격하여 추수감사예배를 드렸다. 추수감사예물을 드린 분들은 다음과 같다. 김영기, 김옥순, 김보배, 김간난, 장점산, 유태윤, 유장덕, 안소성, 이중선 등으로 백미 55말과 밤(栗) 1말이었다. 이 날 참석한 손님은 정동심 목사 내외, 이주복, 유형환 등 신학생 4인은 음악으로 도움을 주었다. 임병의 사모, 노사라 모친, 이여식 목사 사모가 참석하였다. 12월 19일 안식일에는 교회 건물에 관한 모든 일을 마치고, 새로 구입하여 단장한 첫째 성전에서 입주예배(入住禮拜)를 드렸다. 이 날 참석한 인원은 유소년 약 30명, 청장년 약 15명이 모였다. 이로써 퇴계원 지역에 최초로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게 되어 안정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1954년 1월에 처음으로 선출된 퇴계원교회 초대 직원으로는 예배소장 김야곱, 회계 김순덕 의사(醫師), 부회계 방홍근(김순덕의 시아버지), 안교장 임모세(처 윤금순, 1953년 12월 27일 결혼함), 부안교장 김야곱, 서기 김숙자, 부서기 김영화 성도가 봉사하였다. 3월 20일 안식일 예배에는 약 40여명이 모였고, 3월 26일 금요일 저녁예배에는 약 50명이 모였다.
이때 성도들이 급속히 증가한 이유는 6.25 전쟁 이후에 국가 경제가 어려운 우리나라에 미국을 중심으로 재림교회의 구호활동이 활발하여 밀가루와 “구호물품이 전달”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또한 최성훈 전도사는 1940년에 북한 사리원교회에서 최태현 목사의 집례로 침례를 받고 11년 이상을 전도사와 문서전도사로 근무한 후, 신학원에서 공부한 까닭에 영혼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