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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괴정(晩槐亭) 1
道谷面 竹靑里에 있다. 단층의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齋室이 있었던 것 같으나 현재는 壁間柱만 남아 있을 뿐으로 상당히 퇴락되어 있다. 1589년(선조 22)의 己丑獄事(鄭汝立謀逆事件)에 被禍된 光州李氏 李潑의 伯父 李伯虎의 孫인 竹溪 李大立이 13세시 이곳으로 피난 은둔하여 生命을 保全하고 崔希文의 女壻가 되어 정착하게 된 내력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9代孫 李京鎬가 건립한 것이다.
1) 晩槐亭原記
汝水西二十里 映碧江崖 有里日竹靑 卽我九世祖考竹溪公隱遯之地也 雲仍因居于此 前後數百年之間 ○斯椒聊 有繩繩蕃衍之勢 玆豈鼎祖先餘慶所及耶里之右鹿 有一槐樹 先祖之手植也 蒼蔚屈盤 大可十拘根 深而葉茂拂雲 而○日居人行客彷徨偃休 視以尋常植物 而其在 子孫追慕先祖手澤 敬重尊愛之心 爲當何如耶 先君子嘗誠不肖 使就此以而起亭 爲世世子孫講業承先之討 而不肖多事因仍 未遑久矣 內寅春 始得經營 五架三間 堂室略備 嗚乎 亦晩矣 亭旣成 扁其楣日晩槐 盖槐之可貴 而其晩久而益蒼古 後孫保守基手植遺澤 晩後不替 有永相終始之意 人與物 相得說 非易事 思欲名亭舍 是而奚以哉 苛使後昆 母以保守一槐一亭爲吾事巳畢 而紹述詩禮靑氈 勿墜於百世 則吾之願可伸也.
<丁卯十一月下休 光山 李京鎬>
□ 해설
汝水서쪽 二十里 映碧江가에 마을이 있어 竹靑이라 부르니 곧 우리 九世祖考 竹溪公의 은둔한 곳이다. 자손들이 인하여 이에 居한지 前後 數百年間에 子子孫孫이 繩繩 번연 할 형세가 있으니 이 어찌 정착한 祖先의 餘慶이 미친 바가 아니겠느냐 마을 右麓에 한그루 槐樹가 있으니 先祖께서 手植함이다. 울창하고 屈盤하여 크기는 가히 열 아람이고 뿌리는 깊어서 잎이 무성하여 구름을 떨치고 날빛을 가리니 居人이나 行客들이 방황하고 쉬어 놀면서 보기를 심상한 植物로 여기나 자손에 있어서 先祖의 手澤을 추모하여 敬重하고 尊愛한 마음은 마땅히 어떠하겠느냐 先君께서 일찍이 불초에게 훈계하시기를 이곳에 나아가 亭을 지어서 대대로 子孫들이 학업을 강하고 先祖를 받드는 계획을 만들어라 하셨으니 불초가 일이 많아서 그대로 지내온지 오래이다가 丙寅 봄에 비로소 경영하여 五架三間으로 堂室이 略備하였으니 嗚呼라 또한 늦도다. 亭이 이미 이루었음에 楣上에 扁額하기를 晩槐라 하였으니 대개 槐나무가 가히 貴한 것은 그 晩久하도록 蒼古함이니 後孫들은 그 手植한 遺澤을 保守하여 晩後토록 폐하지 아니하여 길이 서로 終始할 뜻을 두어 사람이 物과 더불어 서로가 기쁜 것은 쉬운일이 아니니 亭을 名하고저 할진데 이를 놓고 무엇을 취하랴 원컨대 後孫들은 一槐一亭을 保守함으로써 우리 일을 이미 마쳤다 하지말고 詩禮와 先業을 紹述하여 百世에 떨어뜨리지 말게한즉 나의 소망을 가히 펼지라
<丁卯十一月下休에 光山 李京鎬>
2) 上樑文
百歲間 惟德蔭垂裕 爰有孝悌 傳授而繼作 三代後 今敎學廢施 幸制庠塾構 堂而責成 誠極著哉 事竟就矣 醒庵君冠冕世族 菽粟家猷○素兩 先生之道學文章 蔚然爲師門的韻韻 岩溪四昆季之忠孝行蹟慨乎 此砥石江山開 士禍三百有年基 惟超脫其門戶餘礎 承租武八九著代庭焉 不墜這詩禮至言 逮竹翁手澤之表章 泣春爺衣△之藏樹 玆因羹墻所營于首址 乃敢棟宇不遑於先人 階賓主而進 退揖辭宴饗有以 鏞子孫而詩書禮樂泉石屋然 起居出入 百禮隨行 豈安常而寢○修△ △祀蒸嘗四時卽享 有永思而○豆預嘉至若廓矣底三隅嵬乎 此一閣地位之向 坤坐艮八干四維之所以剖析於河洛先後之數天時之建卯大寅二氣五行之可 以契合於陰陽體用之機二廳一退憑○雙房典型滄江之水月 八○七楹附椽五架眉額鉅野之風烟 奚斯取諸庶其命者 壇槐之蔭及百代而遲晩地體神根○李之華抽一本而發榮天倫至樂講千載古禮於魯廳之市成眠其心植三條△物於魏公之庭 未艾玆福是以理達微妙運通神明 鳳凰豈能枳辣止捿 宜彼靑倚之○竹 鯨○必固瀛海神物 得此絶勝之西 湖軒間△窓 精神可陪 康節之先風 ○月楣對 九宇氣像敢慕 河南之瑞日祥雲 由是立此累功 所以安其淸德 臺形徹監乎 烟霞之上人臥河漢江洲 登勢危留乎 日月之邊 天作錦繡屛帳 精采有分所謂溪澗大河之隱顯 雖同景物自論 庶幾麒麟△△之凡聖判異門因號也 紫幸之嘯詠有原 世皆醉芳蘭菊之飮○ 何處於斯 托而取合 庸是勉 而征邁短唱 旣終修樑更擧 兒郞偉抛樑東 子姓蕃盈値北通 孝睦恤○傳有世 一家福祿發陰功抛樑西 晩江砥柱練紗低 綠樑芳草斜陽裡 短棹漁歌上汝溪 抛樑南 鳳嵐蒼翠石惟岩 大司三月長安化 靜老心工水滿潭 抛樑北 瑞石峻岩衛斗極 學士三先休退年 藍輿想像到靑麓 抛樑上五昇三釜何當養 玉壁圭琰圍是區 箇中淸截壁千丈 抛樑下 驛使行程任取合 過者潘潘噓慨旨 斯文推古設陶冶 伏願上樑之後 山川磅○ 鎭守鬼神○呵護靈 地久天長 ○傳綱常 元氣日更 月廷益昌 閥關石門.
<黃蛇七夕節 族從 大根 敬書>
□ 해설
百歲間에 오직 德蔭으로 垂裕하여 이에 孝悌가 있어 傳受하고 繼作하였거늘 三代後에는 이제 敎學이 廢弛하고 다행히 庠塾을 지었으며 堂을 ○하여 이룸을 보았으니 誠은 지극히 나타나고 일이 마침내 이뤘도다. 醒庵君은 冠冕의 世族이요 菽粟의 家猷로다. 埃素兩先生은 道學文章이 울연하여 師門의 的韻이 되고 岩溪四昆季의 忠孝行蹟은 개연히 砥石江山에 비했도다. 士禍 열인 三百有年의 기지에서 오직 그 門戶餘礎를 초탈하였고 祖武 이은 八九代의 가정에서 詩禮至言를 떨어 뜨리지 않았도다. 竹翁手澤의 表章에 이르렀고 春爺衣冠의 藏樹에 울었도다. 이에 羹墻으로 인하여 首址에 경영한 바요 이에 棟宇는 先人이 미처 짓지 못함이로다. 賓主의 계단을 마련하여 進退 揖讓 宴饗이 있고 子孫은 가르침에 詩書 禮樂 泉石이 정연하도다. 起居出入에 百禮가 隨行하니 이에 安常하는 寢○를 수축하고 祀蒸嘗을 四時에 卽享하니 永思를 두어 ○豆를 미리 정돈 하였도다. 저 三隅는 廓然하고 이 一閣은 嵬乎하도다. 地位는 向坤 坐艮하니 八干四維의 河洛 先後의 數를 剖析하는 바요 天時는 建卯 大寅하니 五行의 가히 陰陽體用의 機에 契合하도다. 二廳一退에 雙房을 憑○하니 滄江의 水月을 典型하고 八樹七楹에 附椽五架는 鉅野의 風烟을 眉額하도다. 어찌 이를 취하여 命名하였을까 壇槐의 蔭은 百代에 미치도록 遲晩하니 地體의 神根이요 ○李의 華는 一本을 미루어 發榮하니 天倫의 至樂이로다. 千載의 古禮를 魯廳의 市에 講하니 그 마음을 잠재우고 三條의 物을 魏公의 庭에 심었으니 이 福이 다하지 않았도다. 이름으로써 理는 微妙에 達하고 運은 神明을 通하도다. 鳳凰은 어찌 枳辣에 棲止하리야 저 靑○한 ○竹이 마땅하고 鯨○는 반드시 완고하니 瀛海의 神物이라 絶勝을 西에서 얻었도다. 北窓에 精神을 可陪하니 康節의 光風霽月이요 九宇를 楣對하여 氣像을 敢慕하니 河南의 瑞日祥雲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累功을 세웠으니 그 淸德에 편안하도다. 臺形은 烟霞의 위에 徹監하니 사람은 河漢江洲에 누었고 登勢는 日月의 가에 危留하니 하늘은 錦繡屛帳을 지었도다. 精采가 有分하니 이를바 溪澗 大河가 隱顯은 비록 한가지로되 景物은 스스로 論하고 거의 麒麟 走獸의 凡聖이 判異하여 門이 인하여 號함이라 紫幸의 嘯詠은 有原한데 세상이 모두 醉했으니 꽃다운 蘭菊의 飮○은 어느 곳일까 이에 托하여 取合하고 이에 힘써 征邁하도다. 단가를 이미 지었으니 들보를 들어 올리게
아랑위 들보를 동쪽으로 들쳐보니
子姓들이 번영하여 북으로 통했도다
孝睦과 恤姻으로 대대에 전했으니
一家의 복록은 陰功이 발했어라
아랑위 들보를 서쪽으로 들쳐보니
늦은 江 砥柱에 練紗가 나직하도다
녹음방초 석양은 저물어가는데
짧은 돛대 어부노래로 汝溪를 올라가네
아랑위 들보를 남쪽으로 들쳐보니
鳳凰은 푸르고 돌은 오직 바위뿐인데
大司의 三月에 장안이 화사하니
마음공부 고요하고 물은 못에 가득하구나
아랑위 들보를 북쪽으로 들쳐보니
서석에 높은 바위 부두에 솟았도다
學士 三先生의 휴퇴한 당년에
藍輿를 상상하니 靑麓에 이르렀으리라
아랑위 들보를 위를 들쳐보니
五昇 三釜를 어찌 당하여 먹으랴
玉壁과 圭琰으로 이 지역을 둘렀으니
그 가운데 천길벽을 맑게 쌓으리라
아랑위 들보를 아래로 들쳐보니
驛使의 行程을 마음대로 取合했도다
지나간자 潘潘하여 慨旨를 부르니
斯文에 옛을 미루어 도야를 베풀리라
엎드려 원컨대 상량한 뒤에는 山川이 磅○하니 鎭守한 귀신은 ○呵하여 護靈하고 天長地久토록 이에 綱常을 전하여 元氣가 날로 새롭고 月廷은 더욱 창성하여 閥關에 石門이로다.
<戊辰七夕節에 族從 大根 공경히 씀>
3) 原 韻
一槐編覆屋西東 半是淸陰半是風 養性爲要觀拘裏 繼家元在慕先中
尋芳雜野移花本 小路△崖理石叢 不謝賓朋煩數至 溪山興趣幸余同
<丁卯 陽和節>
한그루 느티나무 집 東西를 덮었으니
절반은 淸陰이요 절반은 淸風이로다
性을 기른 요점은 얽매임을 볼것이요
집을 이은 근본은 慕先가운데 있도다
雜野에 꽃망울을 찾아 花本을 옮기고
적은길 언덕가에 돌무덤을 쌓도다
손님이 자주옴을 사양치 않으니
溪山의 흥취가 다행히 나와 한가지로다
4) 謹 次
鍾巖落落赴槐東 別有斯亭帝晩風 虛星高照三公位 擧子惟期八月中
抱檻江聲波萬項 入簾山色玉千叢 種德淸陰如許地 主翁安樂永年同
<壬申孟夏上澣 昌寧人 芝峰 曺圭萬>
鍾巖山 낙낙하여 槐東으로 달려가는데
특별히 이정자 있어 늦은 바람 띠었도다
虛星은 높아서 三公位를 비쳐주는데
과거 보려고 오직 八月달을 기약하누나
마름 감싼 물소리는 만경의 파도인데
밭에 드는 산빛은 千叢에 왕이로다
덕을 심은 淸陰은 이와같은 곳인데
主翁의 안락은 永年토록 한가지ㅡ로다
자료출처: 화순군청 누리집 ‘화순의누정’
南道 정자기행(971)-화순 만괴정(晩槐亭) 2
출처 : 2014년 한국매일뉴스 김은희 기자
한그루 느티나무 집 동서(東西)를 덮었으니/절반은 청음(淸陰)이요 절반은 청풍(淸風)이로다
性을 기른 요점은 얽매임을 볼것이요/집을 이은 근본은 慕先가운데 있도다
一槐編覆屋西東 半是淸陰半是風 養性爲要觀拘裏 繼家元在慕先中
잡야(雜野)에 꽃망울을 찾아 화본(花本)을 옮기고/적은길 언덕가에 돌무덤을 쌓도다
손님이 자주옴을 사양치 않으니/계산(溪山)의 흥취가 다행히 나와 한가지로다
尋芳雜野移花本 小路△崖理石叢 不謝賓朋煩數至 溪山興趣幸余同
화순군 도곡면 하죽청리에 있었다는만괴정(晩槐亭)에서 전하고 있는 시다.
이곳은 1589년(선조 22)의 을축옥사(己丑獄事) 때 정여립옥사사건(鄭汝立謀逆事件)에 광주 이씨(光州李氏) 동암(東巖) 이발(李潑1544~1589)의 백부(伯父) 이백호(李伯虎)의 손인 죽계(竹溪) 이대립(李大立)이 13세 때 이곳으로 피난 은둔하여 생명을 보존하고 최희문(崔希文)의 사위가 되어 정착하게 된 내력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9대손 이경호(李京鎬)가 건립하였다 하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동네어른은 마을의 산 능성을 가르킨다.
그 내력이 광산 이경호가 쓴 만괴정원기(晩槐亭原記)에 이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
여수(汝水) 서쪽 이십리(二十里) 영벽강(映碧江)가에 마을이 있어 죽청(竹靑)이라 부르니 곧 우리 9세조고 죽계공(竹溪公)의 은둔한 곳이다. 자손들이 인하여 이에 거(居)한지 전후 수백년간에 자자손손이 승승(繩繩) 번연할 형세가 있으니 이 어찌 정착한 조선(祖先)의 여경(餘慶)이 미친 바가 아니겠느냐 마을 우록(右麓)에 한그루 괴수(槐樹)가 있으니 선친께서 수직(手植)함이다.
울창하고 굴반(屈盤)하여 크기는 가히 열아람이고 뿌리는 깊어서 잎이 무성하여 구름을 떨치고 날빛을 가리니 거인(居人)이나 행객(行客)들이 방황하고 쉬어 놀면서 보기를 심상한 식물로 여기나 자손에 있어서 선조의 수택(手澤)을 추모하여 경중하고 존애(尊愛)한 마음은 마땅히 어떠하겠느냐
선군(先君)께서 일찍이 불초에게 훈계하시기를 이곳에 나아가 정을 지어서 대대로 子孫들이 학업을 강하고 선조를 받드는 계획을 만들어라 하셨으니 불초가 일이 많아서 그대로 지내온지 오래이다가 병인(丙寅) 봄에 비로소 경영하여 오가삼문(五架三間)으로 당실(堂室)이 약비(略備)하였으니 오호(嗚呼)라 또한 늦도다.
정(亭)이 이미 이루었음에 미상(楣上)에 편액하기를 만괴(晩槐)라 하였으니 대개 괴(槐)나무가 가히 귀한 것은 그 만구(晩久)하도록 창고(蒼古)함이니 후손들은 그 수직(手植)한 유택(遺澤)을 보수하여 만후(晩後)토록 폐하지 아니하여 길이 서로 시종(終始)할 뜻을 두어 사람이 物과 더불어 서로가 기쁜 것은 쉬운일이 아니니 亭을 名하고저 할진데 이를 놓고 무엇을 취하랴 원컨대 후손들은 일괴일정(一槐一亭)을 보수함으로써 우리 일을 이미 마쳤다 하지말고 시례(詩禮)와 선업을 서술(紹述)하여 백세(百世)에 떨어뜨리지 말게한즉 나의 소망을 가히 펼지라
아랑위 들보를 동쪽으로 들쳐보니/자성(子姓)들이 번영하여 북으로 통했도다
효목(孝睦)과 휼인(恤姻)으로 대대에 전했으니/一家의 복록은 음공(陰功)이 발했어라
아랑위 들보를 서쪽으로 들쳐보니/늦은 江 砥柱에 練紗가 나직하도다
녹음방초 석양은 저물어가는데/짧은 돛대 어부노래로 汝溪를 올라가네
아랑위 들보를 남쪽으로 들쳐보니/鳳凰은 푸르고 돌은 오직 바위뿐인데
大司의 三月에 장안이 화사하니/마음공부 고요하고 물은 못에 가득하구나
아랑위 들보를 북쪽으로 들쳐보니/서석에 높은 바위 부두에 솟았도다
學士 三先生의 휴퇴한 당년에/藍輿를 상상하니 靑麓에 이르렀으리라
아랑위 들보를 위를 들쳐보니/五昇 三釜를 어찌 당하여 먹으랴
玉壁과 圭琰으로 이 지역을 둘렀으니/그 가운데 천길벽을 맑게 쌓으리라
아랑위 들보를 아래로 들쳐보니/驛使의 行程을 마음대로 取合했도다
지나간자 潘潘하여 慨旨를 부르니/斯文에 옛을 미루어 도야를 베풀리라
엎드려 원컨대 상량한 뒤에는 산천(山川)이 磅○하니 鎭守한 귀신은 ○呵하여 護靈하고 천장지구(天長地久)토록 이에 강상(綱常)을 전하여 원기(元氣)가 날로 새롭고 원정(月廷)은 더욱 창성하여 벌관(閥關)에 석문(石門)이로다.이곳에 전하는 시에서 마을 앞에 펼쳐지는 경치를 보여주고 있었다.창녕인 지봉(芝峰) 조규만(曺圭萬)은 이곳에 읊기를
종암산(鍾巖山) 낙낙하여 괴동(槐東)으로 달려가는데/특별히 이정자 있어 늦은 바람 띠었도다
허성(虛星)은 높아서 삼공위(三公位)를 비쳐주는데/과거 보려고 오직 팔월(八月)달을 기약하누나
鍾巖落落赴槐東 別有斯亭帝晩風 虛星高照三公位 擧子惟期八月中
마름 감싼 물소리는 만경의 파도인데/밭에 드는 산빛은 천총(千叢)에 왕이로다
덕을 심은 청음(淸陰)은 이와같은 곳인데/주옹(主翁)의 안락은 영년(永年)토록 한가지로다
抱檻江聲波萬項 入簾山色玉千叢 種德淸陰如許地 主翁安樂永年同
이곳에서는 지봉 조규만 등이 쓴 시와 광주이씨(光州李氏) 대근(大根)이 쓴 상량문 전하고 있다. 도곡면 죽청리의 광산 이씨 집성촌이며 이대립(李大立 1579~1636)을 입향조로 하여 이어오는 1589년(선조 22) 무렵 이대립이 기축사화를 피하여 남평현 등개에서 입향하여 정착하였다. 이대립의 자는 효서(孝絮)이고 호는 죽계(竹溪)이다. 진사 이백호(李伯虎)[1510~1581]의 손자이다. 공경함으로써 행실을 가다듬어 담담하기가 깊은 우물과 같았다.
죽청에 살고 있던 최희문(崔希文)이 보고 사위로 삼았다.
이관현(李寬賢)[1824~1885]의 자는 사유(士裕)이고 호는 죽탄(竹灘)이다. 천성이 탁월하고 의지가 독실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났다. 두문불출하며 덕을 쌓았다. 이광리(李光离)의 자는 미여(美汝)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집에 불이나 빈소(殯所)까지 미치자 동생 이광곤(李光坤)과 함께 관을 껴안고 죽었다. 1763년(영조 39)에 복호(復戶)되고 철종 때 이광곤과 함께 교관으로 추증되었다.
이인갑(李仁甲)의 자는 신표(信表)로, 타고난 성품이 순하고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3차례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드려 3일 동안 목숨을 연장시켰다. 이인민(李仁敏 1828~1896)의 자는 행민(行敏)으로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효성스러웠다. 어머니가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4차례나 손가락을 잘라 7일 동안 목숨을 연장시켰다.
守之於爲, 뜻이 있는 선비는 은미한 데에서 성실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일을 행하는 데 이르러서는 잘 지켜서 악한 데로 흘러가지 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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