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풀이 살랑 거리네
얼마 전 학생들에게 슈바니츠의 ‘교양’에 관해 강의를 하다가 감명깊게 읽은 책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성서, 사람의 아들, 분노의 포도 등 여러 가지가 나왔다. 한 학생이 만화를 이야기 하길래 만화는 교양도서로 보기에는 조금 부족하지 않은가 하였더니 섭섭해 하였다. 실제로 만화를 즐겨보는 편인 나도 조금 미안해서 만화도 경우에 따라서는 ‘유익한 책’이다 라고 말한 생각이 난다. 평소 이두호와 허영만의 만화세계를 좋아하는 나에게 이번 휴가는 아키라 오제(AKIRA OZE)의 만화세계로 인도하였다.
이번에 소개하는 아키라 오제(AKIRA OZE)의 ‘명가의 술’은 나츠코라는 23세의 양조장집 딸이 죽은 오빠가 남긴 ‘다츠니시키’라는 환상의 쌀을 부활시켜서 일본 최고의 술을 만드는 과정을 그린 만화이다.
오빠의 유지에 따라 처음으로 무턱대고 곡괭이를 들고 논을 만들어 다츠니시키를 키워 나가는 주인공에게 온갖 어려움은 당연하게 밀려온다. 그러나 주인공은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서 유기농을 추구하는 재배회를 조직하는 등 역경을 헤쳐 나간다.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오빠가 남긴 최고의 술이라는 ‘음양주 NO’의 맛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술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그는 점차로 인간적으로 성숙해져가고 양조장 경영마인드도 쌓아가는 등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해간다. 그리고 오빠의 술을 만들겠다는 애초의 목적에서 점차로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자기 자신만의 술인 ‘나츠코’의 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 결과 부분적으로 되살아난 음양주의 느낌은 한마디로 ‘깨끗하다’ 였다. 그러나 나츠코는 뭔지 모르지만 미진하여 이정도의 맛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가 애써서 얻은 최고수준의 술은 다양한 미주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으면서도 힘있고 따뜻하게 사람 마음에 직접 호소하는 맛을 가진 것이다.
그러면 과연 최고의 술은 어떠한 맛을 지닐까?
작가는 여러 등장인물을 통해 최고의 술은 탄성이 나오는 술보다는 감동이 오는 술이며 힘이 있으면서도 깔끔하고 질리지 않은 술이라고 한다. 좀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맛이 있으면서도 질리지 않고, 깔끔하면서도 풍부하고, 달고 맵고 강하면서도 섬세하고, 그리고 그것들이 절묘하게 균형 잡힌 술, 거기에 기술자의 자부심이 넘치는 술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주를 만드는 장인들의 정신은 거의 ‘목숨을 건다’의 수준이다. 술을 만드는 과정 과정에는 이들의 혼과 백이 처절하게 서려있다. 오죽하면 이른바 ‘경면’이라고 하여 술 만드는 비법을 터득하면 술밑에 커다랗고 티 하나 없어서 사람얼굴이 비칠 정도의 투명한 큰 거품이 생긴다고 하였을까?
고향을 떠나 근 10여 개월을 양조장에서 혼신을 쏱는 이들의 애환은 다음과 같은 시로 나타난다. ‘에치고를 나올 땐 눈물이 났지만, 지금은 에치고의 바람도 싫어라 ’ 이러한 술의 예술가들에 의해 전후의 일본주는 어려운 벼농사의 감산정책을 뚫고 화려하게 부활하지 않았나 본다.
주인공이 그토록 주장한 유기농법에 대해서 잠깐 설명하고자 한다. 유기농법은 1987년 실제로 있었던 후루노의 오리유기농법에 근거하여 쓴 것이다. 후루노는 일석만조의 세계를 주장하며 완전 무 농약 유기 농사를 지향하였다. 그는 누구라도 당장에 농약을 안 쓰고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하며 오리와 벼가 공존하는 세계를 만들었다. 이러한 농법은 새끼 때부터 소중히 키워 논에서 잡초를 띁어 먹으며 성장한 오리를 무와 파가 제 맛이 나는 가을 무렵에는 탕으로 해 먹을 수 있다는 낭만도 있다. 그러나 반년에 걸쳐 애착도 가고 무엇보다도 고마운 그 생명을 죽여 먹는 잔혹함은 ‘인간은 생명을 받아서 살아간다’는 이 세상의 냉엄한 구조를 피부로 느끼게 한다.
만화에서 소개되는 일본주는 다양하다. 잘은 모르지만 일본주를 정미비율과 원료를 기준으로 보았을때 대음양주, 음양주, 순미주, 본양조주등으로 나눈다. 작가는 일본주의 특징을 ‘데운다’에서 찾는다. 조용한 응접실에서 비백무늬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그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쇠단지에서 가만히 데워진 술병을 내면서 ‘따뜻합니다’하며 따르는 모습은 벌써 취함의 정취를 갖게 한다.
이야기가 잠시 빗나갔다. 결국 최고의 술을 빚기 위해서는 과학적이고도 합리적인 제조방법과 장인의 감성과 정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술의 신인 마츠오님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신은 자연에게 다 역할을 주신다. 인간이 그것을 모르는 것뿐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술을 빚어가야 할 것이다. 만화의 결론은 독자들을 위해 유보한다. 좋은 술은 마신 후 뒷 끝에서 음미된다는 자칭 주선들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술을 마시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취하기 위해서 마신다고 한다. 진리인 것 같다. 마시고 취하지 않은다면 그것은 술이 아니리라. 그러면 술이 취하면 그 감흥의 세계는 어떠할까? 일본 토속주의 선구자 고다마 미츠히사는 산두화라는 글에서 술에 취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여유 있게 취하고 보니 온갖 풀이 살랑 거리네’
얼마 전에 읽은 ‘술’이라는 책은 이외수를 중심으로 한국문단의 작가 32인에 토하게 한 술과 인생에 관한 책이다. 여기서 술은 문인들의 애환과 호기, 사랑과 헤어짐, 절제와 후회, 치기와 여유, 폭력과 굴종을 끝없는 술 내음으로 그리고 있다.
필자의 피상적인 정리인지 모르나 일본인들은 술을 담백하게 음미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마신다고 본다면 우리는 쌓인 한을 표출하고 해소하는 풀이의 마심인 것 같다. 이백과 도연명의 시에 나타난 중국인들의 술 마심은 관조와 여백, 그리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미학적인 음주이다. 주량은 약하나 술이 주는 감흥을 적지 아니 알고 있는 필자로서는 최고의 술맛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미각과 분위기. 그리고 마시는 이의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최고의 술맛이 정해지겠지만 결국 최고의 술맛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마시는 술이 아닐까? 한다.
문득 남도에서 한 지인이 보내온 글이 생각난다.
‘흔들리는 대숲소리를 바라보며 함께 소주한잔 하지 않으시렵니까?’
작성일: 05/01/20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