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 선사의 수제자로 흔히 '삼월(三月)'로 불리는 혜월(慧月, 1861년 - 1937년), 수월(水月, 1855년 - 1928년)·만공(滿空, 1871년 - 1946년) 선사가 있다.
경허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삼월인 제자들도 모두 깨달았다.
이들 역시 근현대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들이다. 1904년 7월 15일, 만공스님에게 전법게를 주고서, 천장암을 떠났다.
법자 만공에게 주다 수산 월면에게 글자 없는 도장을 부쳐 주고 주장자를 잡아 한 번 치고 이르기를 "다만 이 말소리가 이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또 말해 봐라. 이 무슨 도리인가?" 또 한 번 치고 이르기를 "한 번 웃고는 아지 못커라, 낙처가 어디인가. 안면도의 봄물이 푸르기를 쪽과 같도다." 하고 주장자를 던지고 "흐음"하고 내려오다.
현재, '북송담 남진제'의 두 큰스님의 경우에, 송담스님은 경허(75대)-만공(76대)-전강(77대)-송담(78대)의 계보이고, 진제스님은 경허(75대)-혜월(76대)-운봉(77대)-향곡(78대)-진제(79대)의 계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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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경허 선사가 산을 넘어가는데 그 모습을 본 나무를 하러 온 아이들 "저기 중이 지나간다" 고 수군거린다.
경허 선사는 어린 나무꾼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보느냐?”라고 말하고는 “너희가 만일 이 막대기로 나를 때리면 과자와 돈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아이들이 경허를 때렸지만 그때마다 “맞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아이들은
과잣값을 주지 않으려는 수작이라고 불평하자 경허는 허허허 웃으며 과잣돈을 주고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위 일화는 본래면목이란 눈으로 볼 수도 없으려니와 몽둥이로 때릴 수도 없는 청정무구한 것이라고 설명을 하지만,
석가세존은 무아라고 가르친 게 아닌가.
인간은 5온 존재이며 그 주인을 나라고 하는 데, 5온은 있지만 그 주인인 나는 없다는 게 무아.
그러니 어린 아이들이 막대기로 5온을 때리면서 당신을 때린다고 여기지만,
경허 선사는 본래 무아이기에 맞을 나는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게 된다.
다만 왜 그런 어려운 가르침을 알 턱이 없는 무지하고 천진스런 아이들을 대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걸까..
경허 선사는 당신의 제자라며 스승의 가르침을 깨달았다고 은근히 내세우는 현실을 보면서..
그런 너희들은 저 아이들과 무엇이 다르냐 고 질책하는 것은 아닌지..
참으로 무아를 깨치었으면..
깨치지는 못했어도 무아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있다면..
무아행을 자신은 아직 하지 못하더라도..
상대가 무아행을 하면 알아보아야 하는 게 아닌지..
경허 선사의 기행을 기행이라고 말을 하려면.. 벌써 경허 선사의 자아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게 된다.
참말로 무아라고 하려면 선사가 무엇을 행하든 기행이다, 선행이다, 악행이다 하는 분별을 세울 수 없다.
바람이다 깃발이다 할 때 이미 분별이 있다.
그래도 선을 넘으면 곤란할 것 같은데?..
그 선이 어디에 있는가..
석가세존은 참 무아행은 세간에서 활용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보고 있기에
출가라는 담 없는 담을 만들어 그 안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닌지.
세간이라 불리는 사회는 엄연히 5온의 주인인 나가 있는 삶의 사회이기에
나는 맞지 않았다고 해봐야 누가 알아 듣겠는가..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보살이란 방편을 만들어
나를 세워 너에게 봉사와 선행을 강조하는 사회, 대승불교를 전하는 게 아니냐 말이다.
경허 선사는 선사이기 전에 막행을 일삼은 파계승일 뿐이라고
혹평하는 불자는
내가 있고, 사회 선(善)을 강조하는 잣대로 분별하고 있듯이
불교는 제법무아를 목표라고 가르칠지언정
스스로는 자아라는 울 안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사회를 의지하고 질러대는 아우성처럼 들린다.
욕계, 색계, 무새계 삼계를 모두 보고 계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선정이나 무아를 이해하고 깨치기 전에
계율을 엄히 지킬 것을 제자들에게 강조하셨다.
'악행은 멀리하고 선행은 힘써 행하라'는 칠불통계게는 계의 핵심이다.
깨쳤다 아니다라고 나서기 전에 먼저 계를 얼마나 잘 지키느냐가 불자의 시금석이 되어야만 한다.
다행히 지금도 우리는 깨쳤다고 나서지 않으며 수 십 년 계를 엄히 잘 지키고 계시는 스님을 존경하는 예를 잃지 않고 있다.
참선 수행을 하면 할수록 나타나는 경계는 맑고 파워풀해지는 데
마지막 단계인 아라한에 이르기 전 까지는 자아가 있기에.. 선과 악이 섞여 있어 악행을 할 수 있음을 분명히 알고 보아야만 한다.
작가 최인호의 <상도>에 살인검과 활인검 얘기가 나온다.
같은 칼이지만 누가 어떤 마음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살리기도 또는 죽이기도 하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 나온다는 것.
<금강경>에 나오는 수행의 4과는 각각 자리에서 무아를 이해하듯 각각의 자리에서 무아를 실천할 수 있다.
수다원은 깨달음의 경계로 들어간 것이요,
사다함은 더욱더 깊이,
아나함은 한 번의 실수는 있지만 더 이상 실수 없는 자리라 하고,
온전히 깨친 자리로 아라한을 설하고 있다.
그런 즉 아라한이란 행함에 있어 대상을 탐하는 욕탐이 없는 것이지..
어떻게 또는 어떤 대상과 접촉하느냐가 핵심이 아니어서 일반 사회 눈으로 보면 막행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기 아라한을 목표로 삼았으면 계율을 엄히 지키는 습을 길러야만 하는 이유도
마음 가운데 탐욕[12처]은 멸해야만 하는 것이나,
몸[6근]은 멸하면 죽음이니 숨이 있는 동안은 항복받아야만 하는 것으로..
계율을 억지로가 아닌 자연스럽게 지키는 게 몸에 배이도록 해야만 한다.
하여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이 되는 동안 계를 깨지 않는 몸으로 완전히 닦아져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때 계는 비구 250계를 지칭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흐르는 물과 같은 시대 상황에서 선행을 벗어나지 않는 계를 말한다.
누구에게 들은 오래된 얘기다.
상원사에서 안거를 마친 승려들이 본사인 월정사에 내려오면 상단에 차려진 음식을 철없는 아이처럼 그냥 먹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행동은 나무 부처님 안에 사리가 들었는지 확인하는 행동으로 볼 수도 있지 않느냐 할 수 있지만..
일반 사회 눈으로 보면 웃기는 소리다.
막행은 수행자라면 끊어야만 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사회가 보는 앞이라면..
언재까지?.
스스로 자아가 없음을 깨치기 전 까지는!.().
무아행을 행하는 자 마음에는 선이 가득 차 있도록 평소 계율을 굳건히 지키고 있어야만 한다.
경허 선사를 보면..
참선을 통해 무아를 깨쳤으나..
출가 전이나 출가하여 불교를 공부할 때 엄히 계율을 지키는 스승이 옆에 계시지 않았음이 보인다.
무아를 깨쳤다 함은 5온의 주인인 마음에 내가 없다는 것을 깨친 것으로
평소 몸 수행을 포함하고 있는 계율을 바르게 지키지 않고 있었으면 무아를 깨쳤다 해도 악행이 나올 수 있다.
서양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를 보면
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천사와 같은 신부와 악마라 불리는 신과 같은 능력자가 등장할 때 거의 대등한 힘을 갖고 있음을 본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신과 같은 능력을 같고 있다는 자 마음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게 되니..
천사라 하는 신부가 곧 악마가 될 수 있다.
그처럼 깨침에 관계없이 천사처럼 행할 때도 있지만 악마처럼 행할 때도 있다.
그 말은 신과 같은 능력을 얻었다 하여 늘 선행인 천사 행을 한다는 게 아니라는 것.
이와 같은 설명은 경허 선사에게 보이는 기행이 경허 선사가 무아를 깨쳤다는 것을 의심하는 요소가 될 수 없다는 게 된다.
경허 선사 제자인 만공 선사나 그 맥을 이은 숭산 선사에게 경허와 같은 기행이 보이지 않는다.
성철 선사에게 기행이 보이지 않는 것은
출가자로 행하는 투철한 윤리관이 8년 눕지 않는 수행을 하기 전에 이미 서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참선 수행자로 본인은 무아를 깨치는 게 목적이지 막행이 되든 아니든 관심이 없다고 한다면 막을 수 없지만,
일반 사회에서 막행이 눈에 띈다면 무아를 깨친 이로서는 걸림이 없다 해도 당연한 비판을 받는다.
예를 들어 수행자들이 어쩌다 화투판을 벌일 수 있고 그것이 그들만의 세계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선비학에는 홀로 있을 때 경계하라는 훈이 있다.
그것이 사회에 소문이 나면 당연한 업보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경허 선사는 삼수갑산으로 여인과 함께 들어갈 때 승려라는 껍데기는 벗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아니, 승려 신분으로 있으면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스스로는 승려라는 신분을 잊고 지내지 않았을까..
당신의 마음에 여유가 넘친다면..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가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는 사회 윤리라는 경계에 걸려 하지 못하는 행동을
경허는 자연스럽게 보여주지 아니하는가..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우리 맘대로 남녀가.. 입던 옷을 갈아 입고 벗듯이.. 살다 헤어지는 것을 허락하는 세계가 아니다.
출가자는 출가자의 행동이 있고, 재가자는 재가자의 행동이 분별된다.
하여 재가자 눈으로 경허에게 이런저런 잣대를 내미는 것을 비난할 수 없다.
눈이 밝은 배우고 익히는 자라면..
경허 선사의 행적으로 보며..
그 마음이 어떤가를 보는지..
더 나아가 그의 행적 역시 가감 없이 이해하는 눈이 있으리라.
그의 기행을 보면서..
무아행이 무엇인지 보이고..
수행자라면.. 지금 여기서 스스로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음도 보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경허 선사는 무아행을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고 계신다.
임제 선사는 어디서나 주인[유아인 아라한]이 되라고 하지만..
주인 없이 행하는 5온[무아인 아라한]이 되어야 함도 이해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