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서매수 "마치 지푸라기 줍듯 두루 시험에 통과해 이름 날렸다” 극찬
오조리 부종인(夫宗仁)묘비
위치 ; 성산읍 오조리 632번지
유형 ; 갈(묘비)
시대 ; 조선시대
오조리_부종인묘비
부종인(1767년 출생)은 조선 후기 대정현감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자겸(子謙). 아버지는 부도훈(夫道勛)이다.
서귀포시 토평동에서 태어난 부종인은 정의향교에서 학문을 익혀 정조18년(1794) 심낙수(沈樂洙)[1739~1799]가 제주위유안핵순무시재어사(濟州慰諭按覈巡撫試才御使)에 부임하여 과거 시험을 실시하였을 때 7명이 급제하였는데, 부종인은 책(策) 분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다음 해인 정조19년(1795) 식년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고, 과거에 급제한 뒤 임금 앞에서 치른 전강시에서까지 장원을 차지하였다.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이 1794년 제주에서 시행한 과거 합격자 명단과 합격자들의 글을 담아 편찬한 '탐라빈흥록' 표지(왼쪽)와 책문 분야에서 수석을 차지한 부종인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배후에는 당시 제주에 유배된 조정철(趙貞喆·1751~1831)이 있었다. 이 두 인물의 관계는 부종인의 비문과 함께 조정철이 제주 유배 기간에 쓴 글을 모아 엮은 '정헌영해처감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조 시해사건에 연루돼 1777년 유배된 조정철은 제주목에서 목사의 직접적인 감시 하에 있다가 연인 홍윤애의 죽음 이후 1782년 정의현으로 이송된 다음 1790년 추자도로 유배지를 옮길 때까지 8년간 정의현에 머물렀다.
부종인은 조정철이 정의현에 유배돼 있을 때 그의 처소에 몰래 드나들며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서매수는 부종인의 비문에 "이조판서였던 조정철이 제주에 유배됐을 때 제주사람들 모두가 두려워 떨며 감히 왕래하지를 못했는데, 군(君)은 혼자서 가끔씩 따라다니며 시격(詩格)을 토론하곤 하였다"고 기록했다.
조정철은 관아의 삼엄한 경계 아래 놓여 바깥출입이 쉽지 않았고 거처에 외부인이 드나들거나 글을 읽고 쓰는 것도 철저히 금지됐다.
유배인 중에서도 대역죄를 지은 그를 감시하기 위해 관원들은 깊은 밤에 들이닥쳐 알몸 수색도 불사했으며, 거처를 가운데 두고 동서남북 사방의 이웃으로 하여금 일거수일투족을 기찰해 보고하게 했다.
영의정 서매수는 부종인에 대하여 "마치 지푸라기 줍듯 두루 시험에 통과해 이름 날렸다”고 극찬하였다. 서매수의 글처럼 모두가 두려워 반역죄인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부종인은 야음을 틈타 조정철과 은밀히 교류했다.
심지어 금부도사가 조정철을 잡아가기 위해 제주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겨울밤에도 부종인은 죽음을 무릅쓰고 조정철을 만나기 위해 월담한 뒤 스승과의 이별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한라일보 131114)
부종인은 성균관 사성을 거쳐 예조정랑을 지냈고, 정조23년(1799) 1월부터 순조1년(1801) 8월까지 대정현감을 역임하였다.
대정현감 재임 중 대정서당을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이 광해군6년(1614)부터 인조1년(1623)까지 유배 생활을 하던 자리로 옮겨 열락재(悅樂齋)라 고쳤는데, 당시 제주목사 정관휘(鄭觀輝)가 지은 「열락재기(悅樂齋記)」가 전해지고 있다.
부종인은 청렴결백하고, 학문을 일으켜 선비를 양성하였으므로 현민들의 칭송을 받아 흥학비(興學碑)가 세워졌으며, 글을 짓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집필 김찬흡)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금부도사가 나를 잡으러 이미 배에서 내렸다고 한다. 유생 부종인이 나에게 고별하려고 밤중에 담을 넘어 들어왔다. 그 뜻이 매우 높기에 드디어 이렇게 적어 주었다."
조정철이 이 때 부종인에게 써준 시는 '삶과 죽음 결별하는 오늘밤/ 서로 보내며 빈 창가 눈물이 흐르려네'로 끝을 맺는다.
영조를 왕위에 옹립한 노론 사대신 중의 한 사람인 조태채의 증손자인 조정철은 과거에도 급제해 전도유망한 관리였다. 부종인은 조정철의 학문과 인간미에 매료돼 스승으로 삼았던 것이며, 조정철은 변방의 젊은이에게 아낌없이 학문을 전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서매수는 부종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군(君)은 바다 밖의 하나의 독특한 지행(志行)있는 유신(儒臣)이다. 가르치고 이끌지 않아도, 능히 스스로 학문에 분발하여 나이가 미처 30이 되기 전에 마치 지푸라기 줍듯 두루 시험에 통과하여 조정과 지방에 이름을 날렸으니, 당시로서는 한 고장의 수재라고만 할 수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조정철은 조선의 유배인 중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30년이라는 기나긴 유배생활을 끝낸 뒤 1811년 환갑의 나이에 제주목사로 부임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한 홍윤애의 해원과 함께 죽음을 눈앞에 둔 자신과 교류하며 인간의 정을 나눴던 부종인과 같은 제주인들의 우정과 도움에 보은하기 위해서였음이리라.
말년에 조정의 부름에 사양하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던 부종인은 1817년 8월 26일 서울 서격수 참봉의 집에서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이후 이듬해 1월 제주시 연동에 묻혔으며, 1825년 10월 26일 서귀포시 서홍동 여기모루(女妓旨)에 이장됐다가 1865년 1월 8일 서홍동 선영에 다시 이장됐다.
영의정 서매수가 지은 부종인의 비문에는 부종인이 관아의 철저한 감시 하에 놓여 있던 유배인 조정철의 처소를 드나들며 학문을 익혔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김익수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영의정 서매수가 짓고 쓴 부종인 비문은 글씨가 선명하고 보존상태가 좋은데다 서체도 뛰어나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며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한라일보131114)
2014년 11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 향토유형유산 제12호(향토유형유산 제12-41호)로 지정하였다.
지정 사유는 〈순조18년(1818) 8월 당시 영의정이었던 서매수가 작성한 비문을 새긴 비석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 제주 출신 문인인 부종인과 비문을 작성한 서매수, 비문 내용 등이 사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편가됨〉이라고 하였다.
《작성 150102》
출처 : 제주환경일보(http://www.newsj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