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페이지를 새로 손질하면서 이 게시판을 하나 추가하여 놓고 첫글로 무엇을 쓸까 고민하던 차에 그가 갔다. 그 전에는 술자리에서 장난삼아 말당(末堂)이라고 부르던 그가 엄청난 문화훈장과 부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미담마저 시처럼 덧칠해 놓고 간 것이다. 나더러 20세기 한국 최고의 시인이 누구인가 정말로 문학 작품으로만 말하라면 나는 서슴없이 서정주라고 하겠다. 그러나 나는 또 기꺼이 미당 서정주가 아니라 말당 서정주라고 말하고 싶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의 시를 수도없이 읽고 외웠다. 국화옆에서, 꽃밭의 독백, 동천, 춘향유문... 지금도 구절구절이 떠오르는 그의 시를 외우면서 나는 그가 아래와 같은 기막힌 친일시도 지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어느 누구도, 국어 선생님도, 국사 선생님도, 심지어는 대학교 1학년 때 춘향유문을 그토록 그럴 듯하게 해석해 준 교양 국어 선생님도 그가 친일시를 지었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일제 때 활동한 거의 대부분(특히 교과서에 그의 작품이나 이름이 실린) 작가들이 친일적 활동을 하였고, 그 중 상당수는 골수 친일파들이라는 것을 안 것은 대학 진학 후 한참뒤 친일문학론이란 책을 보고 나서이다.
비교적 근래에 태백산맥이란 소설이 나왔고, 보다 오래 전에 토지가 출간되었지만, 해방 후 남한의 현대 문학 작품 중에 일제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민족 해방 운동이나 독립 투쟁을 주제로 한 제대로 된 작품이 몇 편이나 발간되었는가?
우리가 해방 이후 일제의 식민 잔재를 청산하고 진정한 민족 해방과 민중 해방의 길로 나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해방 후 정치,경제,사회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학문적, 사상적인 면에서마저도 이 시대의 헤게모니를 쥐고 흔들던 자들이 바로 일제 때 그들의 주구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친일 주구들은 자신의 이익과 영달을 위해서라면 지조나 절개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풍조를 계속 확대 재생산 하였다고 생각한다.
이제 무덤에 침을 뱉어 달라고 외치는 자에게는 침을 뱉어 주고, 네가 과연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돌을 던지자.
아래에는 친일시이면서도 기막히게 아름답고 감동적인 그래서 서정주를 다시금 말당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시 한편과 그의 인격을 엿보게하는 몇가지 행적을 적었습니다.
미당 서정주
1942년부터 친일 작품들을 발표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정치 문인'으로 5공화국 때까지 맹렬한 활동을 했다. 친일 어용 문학지 국민문학, 국민시가 편집하였으며 1943년 10월 일본군 경성사단 추계 훈련에 종군하여 참관기 '보도행'을 썼다.
1942년부터 1944년 사이에 발표한 그의 친일 작품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시의 이야기-국민 시가에 대하여(1942,평론)>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평론)>
<인보(隣保)의 정신(1943,수필)>
<스무 살 된 벗에게(1943,수필)>
<항공일에 (1943,일본어시)>
<최체부의 군속 지망(1943,소설)>
<헌시(獻詩1943,시)>
<보도행(1943,수필)>
<무제(1944,시)>
<오장 마쓰이 송가(1944,시)>.
이 가운데 수필인<직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와 <수므 살 된 벗에게>, 그리고 단편 소설인<최체부의 군속 지망> ,시<헌시>등은 조선의 청년들을 일본군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학병 지원을 권유하거나 징병의 정당화 내지는 신성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민족반역 작품들이고 그 외의 작품들도 대개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의 정책에 동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거나 태평양전쟁을 일본인들의 표현대로 성전(聖戰)으로 미화한 작품들이다.
다음은 서정주가 1944년 12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발표한 그의 대표적 친일시이다.
>>송정 오장 송가 (오장 마쓰이 송가)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언덕도/산도/뵈이지 않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몇천 길의 바다런가
아아 레이테만은
여기서 몇만 리련가......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우리의 젊은 아우와 아들들이
그 속에서 잠자는 아득한 파도소리......
얼굴에 붉은 홍조를 띠우고
'갔다가 오겠습니다' ..
웃으며 가드니
새와 같은 비행기가 날아서 가드니
아우야 너는 다시 돌아오진 않는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몸뚱이로 내려져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伍長}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몇천 길의 바다런가
귀 기울이면
여기서도, 역력히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레이테만의 파도소리......
>>친일시 하나 더 소개
일장기 앞에서
이날은 대성전기념일도 축제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받은 깃대에 국기를 한번 꽂아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오히려 땀까지 흘려가며 벽장 속에서 국기를 꺼내어
그 깃대에 매었다.
탄탄한 깃대에 비해서는 벌써 장만한지 해가 겹친 국기의
깃폭은 낡아 보였다. 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왜 뒷집에서 깃대를 주려고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나는 거기에 맞추어야 할 새로운 깃폭을 준비할 생각은 하지 못하였던 것인가.
나는 깃대에 꽂힌 국기를 방 아랫목에 세워두고
한참동안 합장을 하고 있었다.
친일에 대한 변명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 꿈에도 몰랐다. 못 가도 몇 백년은 갈 줄 알았다."
그러나 이 무렵의 나를'친일파'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있다. '친하다'는 것은 사타구니와 사타구니가 서로 친하듯 하는 뭐 그런 것도 있어야 할 것인데 내게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으니 말씀이다 '부일파'란 말도 있긴 하지만 거기에도 나는 해당되지 않는 걸로 안다 일본에 바짝 다붙어 사는 걸로 이익을 노리자면 끈적끈적 잘 다붙는 무얼 가졌어야 했을 것인데 나는 내가 해준 일이 싼 월급을 받은 외에 그런 끈끈한 걸로 다붙어 보려고 한 일은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 그저 다만, 좀 구식의 표현을 하자면----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려면 '종천순일파' 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이때에 일본식으로 창씨개명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다수 동포 속의 또 다수는 아마도 나와 의견이 같으실 듯하다.(팔할이 바람 중)
해방 후 '정치문인'으로서의 활동
조선청년문학가렵회 시분과 회장,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 한국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이승만 전기를 집필했다. 1987년 전두환 탄생 56회 축시를 지어 바치기도 하였다.
200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