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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복오씨 세계도
오현좌(吳賢佐) 동복군(同福君)
1세 오 녕(吳 寧) - 동복군(同福君) 오현좌(吳賢佐) 의 장자. 동복군(同福君)
2세 중환(仲環)
3세 대승(大陞) 문헌공(文獻公) 시중(侍中)
4세 광찰(光札) 조정대부(朝靖大夫)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5세 선(璿) 문정공(文靖公) 광정대부(匡靖大夫)
6세 잠(潛) 문제공(文齊公) 찬성사(贊成事)
7세 선(僐) 찬성사(贊成事)
8세 중화(仲和)
※. 7세 찬성사(贊成事) 선(僐)은 화의군(和義君) 휘(諱) 달상(達祥) 조(祖)의 장인(丈人)이시다.
同福吳氏
1. 씨족의 연원
시조 오현좌(吳賢佐)는 고려(考慮) 고종 때 동복군(同福君)에 봉해 졌다. 그의 선계(先系)는 중국에서 지증왕(智證王) 원년(서기501년) 우리 나라로 건너온 무혜공(武惠公) 오첨(吳瞻)이고 23대손 병부상서 (兵部尙書) 오수권(吳守權)은 고려 고종3년 거란군(契丹軍)이 침입했을 때 오현보(吳賢輔). 오현좌(吳賢佐). 오현필(吳賢弼)등 세 아들에게 이를 격파케 하였다. 그 공으로 오현보(吳賢輔)는 해주군(海州君)에, 오현좌(吳賢佐)는 동복군(同福君)에, 오현필(吳賢弼)은 보성군(寶城君)에 각각 봉(封)해졌다. 그리하여 오현좌(吳賢佐)의 후손들은 오녕(吳寧)을 시조(始祖)로 하고 동복(同福)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2. 본관지 연혁
동복(同福)은 원래 전남 화순군(和順郡)에 있는 지명이다.
동복은 마한(馬韓)시대에는 비리(卑離)의 치소(治所)였고 백제(百濟)의 두부지현(豆夫只縣)이라 하였고.신라(新羅)시대에 동복(同福)이라 하여 곡성군(谷城郡)에 속하였고 고려조(高麗朝)에는 보성군(寶城郡)에 속하다가 고승(高僧)조영(祖英:光札아들)의 향리(鄕里)라 하여 감무(監務)를 두었다.
태조(太祖) 3년(1334)에 다시 분리(分離)되어 오다가 1914년 화순군(和順郡)으로 합하였다.
동복의 군명(郡名)의 변천(變遷)으로 보면 비리(卑離). 두부지(豆夫只). 구성(龜城). 옹성(壅城), 라복(蘿) 동복(同福)의 순으로 되어있다. 동복면(同福面)의 면적은 62km2이며 행정(行政)동리(洞里)는 22개소이고 자연부락(自然部落)은 26개소. 법정(法定)동리(洞里)는 12개소이다.
3. 파명록
귀은공파(歸隱公派). 감천공파(感泉公派). 의재공파(毅齋公派). 상서공파(尙書公派).판사공파(判事公派). 주서공파(注書公派). 만취공파(晩翠公派). 묵재공파(默齎公派).감찰공파(監察公派). 매암공파(梅庵公派). 금위장공파(禁衛將公派).승지공파(承旨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재신공파(宰臣公派).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진무장공파(鎭撫將公派) 17개파이다.
4. 주요 세거지
해방 전후(前後)까지만 해도 동복(同福)의 복(福)자를 따서 '복삼'(福蔘) '복청'(福淸:벌꿀) '복천어'(福川魚)등의 특산물로 유명했던 화순의 동복은 동복오씨(同福吳氏)의 오랜 세거(世居)의 터이다.
이 곳 모후산(母后山) 서록(西麓) 재궁동(齋宮洞)에는 1세 오녕(吳寧)에서 5세 선(璿)에 이르기까지 신위단비(神位壇碑)와 3세 오대승(吳大陞)의 묘소(墓所)가있다. 일찍이 동복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全國)각지(各地)로 뿔뿔이 흩어져 곳곳에 뿌리를 내렸던 동복오씨(同福吳氏)의 자손들의 집성지(集姓地)로는 제주도(濟州道) 북제주군(北濟州郡) 추자면(湫子面)과 전남 순천(順天). 여수(麗水), 완도(莞島). 진도(珍島). 고흥(高興). 장흥(長興). 해남(海南). 신안(新安). 보성(寶城). 강진(康津). 영암(靈巖). 함평(咸平). 화순(和順). 전북 고창(高廠). 남원(南原). 정읍(井邑). 김제(金堤) 완주(完州). 옥구(沃構).익산(益山)등지를 들 수있다. 또한 충남 서천(舒川). 보령(保寧). 청양(靑陽). 논산(論山). 금산(錦山). 공주(公州)등지 충북 청원(淸原). 옥천(沃川). 중원(中原). 제천(堤川). 단양(丹陽).등지와 경북 의성(義城). 경남 진양(晉陽). 함양(咸陽). 강원도 양구(楊口). 홍천(洪川). 원주(原州). 경기도 연천(漣川). 고양(高陽). 남양주(南陽州). 시흥(始興)등지에도 자손(子孫)들이 많이 살았다.
그리고 이북(以北)지역(地域)에서는 해방전 평남 평원(平原)과 황해도 연백(延白). 옹진(甕津). 장단(長端).등지에 많이 살았다. 지금은 서울 수도권(首都圈)지역에서 대다수(大多數)가 살고 있다.
5. 씨족사 개요
전국 오씨대종회(吳氏大宗會)는 우리 나라 모든 오씨(吳氏)는 해주군(海州君). 동복군(同福君). 보성군(寶城君)등 삼군(三君)의 후손으로 동조동근(同祖同根)이라고 말한다. 충남 공주 취리산(忠南公州就利山)에 해주(海州). 동복(同福). 보성(寶城) 오씨의 시조를 모시는 금양단(錦陽壇)이란 신단(神壇)이 있어 매년 후손들과 지방 사림(士林)이 모여 제사(祭祀)를 지내고 있다.
동복군(同福君) 오현좌(吳賢佐)는 두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녕(寧)도 아버지에 이어 동복군(同福君)에 봉(封)해져 1세가 되어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고 둘째 아들 숙귀(淑貴)는 군위오씨(軍威吳氏)로 분적(分籍)하였다. 녕(寧)의 3세손 대승(大陞)은 고려(高麗) 원종(元宗)때 (서기1260년) 문과(文科) 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시중(侍中)까지 올라 문헌(文獻)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나중에 동복현(同福縣:현 전남(全南) 화순군(和順郡) 동복면(同福面)에 낙향. 여생을 보냈다. 그는 이곳에서 암석(岩石)에 석등(石燈)48개를 만들어 밤마다 점화(點火)해. 국태민안(國泰民安)과 후손들의 융성(隆盛)을 기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석등(石燈)은 현재 원형(原形)대로 보존되어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62호로 지정 되었다.
동복오씨(同福吳氏)의 못 자리인 전남 화순군(和順郡)동복면(同福面) 모후산(母后山)에는 1세 오영(吳寧)과 그의 아들 중환(仲環). 4세 고려(高麗)조정대부(朝靖大夫)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오광찰(吳光札). 5세 광정대부(匡靖大夫) 선(璿)등 4위의 신단(神壇). 문헌공(文獻公) 대승(大陞)의 묘등 동복오씨 17개파 전 문중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여 초정일(初丁日)에 제사(祭祀)를 지내고 있다.
동복오씨(同福吳氏) 세적(世蹟)에 따르면 봉군(封君)은 녕(寧) 잠(潛) 백령(百齡) 등 3명. 상신(相臣)은 대승(大陞). 시수(始壽)등 2명이다. 시호(諡號)는 대승(大陞). 선(璿). 천(薦). 식(軾).윤감(允). 유년(有年). 승(陞). 백령(億齡). 광운(光運)등 10명이다. 학행(學行)은 억령(億齡). 백령(百齡) 형제이고. 생진(生進)은 75명. 문과(文科) 급제(及第)는 28명 무과(武科)는 32명 정도이다.
국조방목 참조(國朝榜目 參照) 이 밖에 효행(孝行) 51명. 충의(忠義)11명 등으로 기록 되있다.
진신관작보참조(縉紳官爵譜 參照) 제각(祭閣)은 동복(同福)의 효사재(孝思齋)외에 전북 김제시 신월동의 경모재(敬慕齋). 남원시 산내면 매동의 경모재(景慕財). 전남 해남군 오산의 효모재(孝慕齋) 계곡면 사정리의 용지사(龍池祠) 등이 있다. 고려조(高麗朝)의 동복오씨(同福吳氏) 인물(人物)로는 동복군(同福君) 현좌(賢佐) 동복군(同福君) 녕(寧) 부자(父子)를 비롯하여 시중(侍中) 문헌공(文獻公) 대승(大陞). 조정대부(朝靖大夫) 광찰(光札)과 그의 아우 재신(宰臣) 광명(光明).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광식(光植), 광붕(光棚)등 4형제. 광찰(光札)의 아들 문정(文靖) 선(璿). 대선사(大禪師) 조영(祖英). 선(璿)의 큰아들 문제(文齊)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잠(潛).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낸 천(潛). 밀직사사(密直司事) 선(璿). 상서(尙書)윤백(允伯).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윤후(允侯). 한림승지(翰林承旨) 자귀(自貴). 좌윤(左尹) 윤감(允감). 상서(尙書) 유년(有年).등이 있다.
동복오씨의 대표 인물은 광찰(光札)의 10세손 세현(世賢)의 아들 억령(億齡). 백령百齡) 형제이다. 이때부터 동복오씨는 본격적으로 중앙(中央) 정계(政界)에 진출 기라성(綺羅星) 같은 명현(明賢)을 배출하면서 명문(名門)의 위치를 굳혔다. 의제(儀制) 오전(吳詮)은 중종 36년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삼도해운판관(三道海運判官)에 이르고 의제문집(毅齋文集) 상하권(上下卷)이 있다.
만취(晩翠) 오억령(吳億齡)은 조선조 선조 15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벼슬에 있는 동안 대사헌(大司憲)5회 형조판서(刑曹判書) 3회 등을 역임 40여 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검소(儉素) 청렴(淸廉)하니 청백리(淸白吏)에 녹선(祿選)되고 문장(文章)과 서예(書藝)에도 뛰어나 만취문집(晩翠文集)을 남겼다.
그의 아우 묵재(默齋) 오백령(吳百齡)도 문과(文科)에 급제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 이조참판(吏曹參判)등을 지내고 복천군(福川君)에 봉군(封君)되었다. 이 집안에서만 8판서(判書)를 배출하였다. 동복오씨의 인물은 거의가 이들 형제의 후손이다. 조선조(朝鮮朝) 인물중 정평공(靖平公) 승(陞)도 크게 돋보인다.
문헌공(文獻公)의 6세손인 그는 공조판서(工曹判書). 대제학(大提學)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역했다. 이조참판(吏曹參判) 시절 주현둔전제도(州縣屯田制度)를 개설했고. 역사상(歷史上)처음으로 군주(君主)정치(政治)의 독선(獨善)을 배제하고. 민주적(民主的)인 국민투표를 창안(創案)왕의 재가(裁可)를 받아. 실행에 옮긴 장본인이다. 저서(著書)로는 죽헌유고(竹軒遺稿)가 있다. 동복오씨(同福吳氏)는 조선조(朝鮮朝)에 문과(文科)급제(及第) 28명이다. (國朝榜目參照) 우의정(右議政)1명(始壽). 호당(湖堂) 1명(億齡)등을 배출했다. 한림학사(翰林學士).자귀(自貴)의 증손(曾孫) 준(浚:1444~1494)은 조선조(朝鮮朝)의 손꼽히는 효행(孝行)자로 이름난 인물이다.
그 효행(孝行)사적(史蹟)으로 남아있는 전북 고창군 신림면 외화리 효감천(孝感泉)이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었다. 의재(毅齋) 오전(吳詮)은 가정(嘉靖)16년 정유(丁酉)1537년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급제 영남(嶺南)지방 암행어사 (暗行御史)를 거쳐. 삼도해운판관(道海運判官)을 역임하고 지병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유고(遺稿)는 의재(毅齋) 문집(文集)2권이 있다. 오억령(吳億齡)의 아들 오익(吳翊)은 선조36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이 되어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손실된 이조실록(李朝實錄)의 재간(再刊)에 공헌했고. 승지(承旨)등 벼슬을 지내면서 명나라를 다녀 오기도한 명필(名筆)이었다. 오백령(吳百齡)의 아들 오준(吳竣)(광해:10년)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효종조(孝宗朝)에 형조(刑曹)판서(判書)를 현종조(顯宗朝)에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으며. 當代의 국필(國筆)로 이름을 떨쳤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송파(松坡)의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 전남 영암군 월출산(月出山)에 있는 보물급 문화재(文化財). 선국사비문(道詵國師碑文) 충남 아산(牙山)충무공(忠武公) 이순신장군(李舜臣將軍) 신도비문(神道碑文) 등 그의 필적(筆跡)은 전국 각지에 많이 남아있다.
저서(著書)로는 죽남당유고(竹南堂遺稿)가 있다. 오준(吳竣)의 아우 오단(吳端)역시 인조2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황해도 관찰사(觀察使)등을 역임했고. 오익(吳翊)의 아우 오전(立專)도 같은 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충직(忠直)한 암행어사(暗行御史)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오단(吳端)의 아들 오정일(吳挺一)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승지(承旨)를 거쳐. 황해도(黃海道). 경기도(京畿道)등 관찰사(觀察使)와 대사헌(大司憲). 이조판서(刑曹判書)등을 역임했고. 경기도(京畿道) 관찰사(觀察使) 재직시 휼민(恤民) 선정(善政) 송덕비(頌德碑)는 경기도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로 지정(指定)되 있다.
전(吳立專)의 아들 오정위(吳挺緯)도 인조10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관찰사(觀察使)와 형조판서(刑曹判書)등을 두루 거쳤다. 오백령(吳百齡)의 손자 오정원(吳挺垣)은 효종원년(孝宗元年)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서해(西海).호서(湖西)등 관찰사(觀察使)를 지냈고. 오단(吳端)의 아들 오정창(吳挺昌)은 대사헌(大司憲).예조판서 禮曹判書)를 지내고 특히 오정원(吳挺垣)의 아들 오시수(吳始壽)는 암행어사(暗行御史). 관찰사(觀察使). 도승지(都承旨). 형조판서(刑曹判書)등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을 숙종(肅宗)5년까지 지낸 당대(當代) 동복오씨(同福吳氏)의 큰 별이다.
이 밖에 조선조(朝鮮朝)의 오시복(吳始復:숙종)이조판서(吏曹判書). 오시만(吳始萬:숙종) 대사헌(大司憲). 오시대(吳始大:숙종) 관찰사(觀察使). 오상유(吳尙游:숙종). 해운판관(海運判官). 오광운(吳光運:숙종) 예조참판(禮曹參判). 오달운(吳達運:숙종). 오수찰방(獒樹察訪)을 지내고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이다.
오인영(吳麟泳:철종) 승지(承旨). 오필운(吳弼運:정조) 예빈직장(禮賓直長). 오대익(吳大益:영조) 호조참(戶曹參判)이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는 오유(吳宥). 오정달(吳廷達). 오극신(吳克信). 오홍적(吳弘績) 오대무(吳大武) 오신령(吳信齡)등 6충(忠)의 열사(烈士)가 순국(殉國)했고.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오정직(吳挺稷)과 무신란(戊申亂)때의 오한필(吳漢弼)은 2.000여명의 의병(義兵)을 거느리고. 반군을 토벌하기도 했다.
특히 오현영(吳憲泳)은 순종 경술 (庚戌)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의 비보를 듣고 독립(獨立) 투사(鬪士) 나만성(羅萬成). 상수(金相洙)등과 합께 중국(中國). 몽고(蒙古)에 근거(根據)를 개설하고 13년간 항일 (抗日)투쟁(鬪爭)을 하다. 순국(殉國)한 인물이다. 이 밖에 오준상(吳準相)은 충청도(忠淸道). 의병장(義兵將)으로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 주석(主席). 백범(白凡) 김구(金九)와 밀통. 광복(光復)에 힘쓰다 붙잡혀 오래 동안 복역(服役)하기도 했다.
동복오씨(同福吳氏)는 조선조(朝鮮朝)초기(初期)이후 벼슬을 마다하고.문학(文學) 철학(哲學). 사상(思想). 실학(實學)등 학문(學問)에 정진(精進)한 명현(名賢)들이 드러지게 많다. 그 결과 오억령(吳億齡)의 유고(遺稿)인 만취문집(晩翠文集)을 비롯 20여명의 문집(文集)과 시고(詩稿)등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이에 따라 1981년. 동복오씨(同福吳氏) 문헌선양회(文獻宣揚會)가. 발족(發足)되 씨족사(氏族史)정립(定立).목표로 선조들이 남긴 고문헌(古文獻)의 번역(飜譯)과 가승(家乘)의 정통(正統)계승사업(繼承事業)을 활발하게 추진. 동복오씨(同福吳氏). 세적지(世蹟誌:국역판) 2집을 발간(發刊) 하기도 했다.
동복오씨(同福吳氏)문헌선양회(文獻宣揚會)편집(編輯)
3세 대승(大陞) 공(公)의 행적(行蹟)
고려조에 시중을 지내셨다. 문헌(文獻), [묘] 동복면 독상리산 23번지 모후산 서쪽기슭 재궁동 묘좌. 공은 관아(官衙)의 남쪽에 돌을 쪼아서 48등(四十八燈)을 만들고 밤마다 등(燈)에 불을 켜고 국가(國家)의 번영(繁榮)과 자손의 창성(昌盛)을 축원하니 그 후에 자손들이 대대로 잇따라 벼슬에 오르게 되니 사람들이 전하기를 기이한 일이라 했다. 석등(石燈)의 형체(形體)가 여러 백년을 지나도록 그대로 남아있고 지금도 완연하다. 현종(顯宗) 경술년(서기1670년) 후손 시수(始壽 : 호는 水村)가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로 있을 때 묘 앞에 비(碑)를 세우고 사적(事蹟)을 간단히 새겼으며 또 석등 옆에 작은 비석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상고할 수 없게 되자 새로 비를 세우고 김상보(金尙保)의 기록을 추가하였다. 세월이 오래되어 이 또한 마모되었다. 영조(英祖) 정해년(서기 1767년)에 다시 바꾸어 세웠다. 1959년 후손 병석(炳晳)이 비문을 지어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1990년 동복오씨 광주 전남 종친회(회장 형옥, 간사장 기탁)주관으로 석등각(石燈閣)을 중수(重修)하고 四十八 석등기비와 헌성비를 세웠다. 1993년 문헌공 묘소로 가는 길을 넓히고 묘들래석을 설치하는 등 묘역을 정화하였다. 1996년 효사재(孝思齋)를 보수하고 효원당(孝源堂)을 건립하여 종원과 후손의 교육장으로 활용토록 하였다.
4세 광찰(光札) 공(公)의 행적(行蹟)
고려 충렬왕(忠烈王) 6년 (서기 1280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왕으로부터 홍정자(紅?子)를 하사 받았다. 조정대부(朝靖大夫)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89세 되던 해 관직(官職)을 그만 두었다. [부인] 동북화씨 [묘] 동북면 재궁동에 부군과 함께 설단하여 시향을 모시고있다. 父 散員 仁亮.
5세 선(璿) 공(公)의 행적(行蹟)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都僉議) 시랑찬성사(侍郞贊成事)로 판도랑사(版圖郞事)의 찬사(判事)와 상호군(上護軍)이시다. 고려 충숙왕조(忠肅王朝)에 벼슬을 그만 두다. 시호 文靖(문정) [부인] 안강 安씨 父 별장 정용(精勇) 안강은 강진 땅에 있던 고을이다.
6세 잠(潛) 공(公)의 행적(行蹟)
초명 祁(기), [字]興雨, [諡號] 東軒, 고려 충숙왕 때에 중대광(重大匡) 품계로 첨의부(僉議府)의 찬성사(贊成事)로서 우문관(右文館)의 대제학(大提學)이며 춘추관(春秋館)의 감사(監事)와 총부(摠府)의 판사(判事)로서 귀성군(龜城君)에 봉(封)해지다. 행장(行狀)은 묘지문(墓誌文)에 실려 있다. [부인] 이천申씨 [묘]진서면 눌목리 서쪽 대덕산 합장 [父]상서(尙書) 전(?)으로 전하나 묘지문에는 통의대부(通議大夫) 품계에 예빈시(禮賓寺)의 판사며 춘궁(春宮:왕세자)의 시독학사(侍讀學士)의 사관(史館)의 수찬관(修撰官)과 지제고(知制誥)를 지낸 욱(頊)의 따님이라 하였다.
7세 선(僐) 공(公)의 행적(行蹟)
초명 方愿(방원), [字]백아(白雅) [諡號]눌재(訥齋) 1284(갑신)7.5생 공민왕(恭愍王)때인 1352년에 봉익대부(奉翊大夫) 품계에 밀직사(密直司)의 판사이며 우문관(右文館)과 총부(摠部)의 판사를 지내고 세습하여 귀성군(龜城君)에 봉(封)해지다. 정사(政事)를 돌보던 14년 동안은 신돈(辛旽)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법을 어기는 데에 유숙(柳淑) 정세운(鄭世雲)등과 같이 나라를 해치는 사람은 머리를 깎아 내쳐야 한다고 왕에게 간(諫)하였으나 듣지 않자 속으로 생각하기를 더 이상의 뜻을 접기로 하고 가솔인 다섯 아들과 세 딸 그리고 손자들과 증손자들을 데리고 광나루를 지나 초월(初月:광주군 초월면 길(路)의 지월봉(池月峯) 아래에 대(臺)를 쌓고 숨어 살게 되었다. 그곳을 말문이 막혔다 하여 언두(言杜)라 하고 세상(世上)을 근심하고 탄식하다. 1366.925별세하였다. [묘]지월봉 뒷기슭새변단(塞邊壇) 유좌,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이 지은 행장(行狀)이 있다 [부인] 여산송씨 [父]밀직사사 좌부승지 진(瑨) 1366.11.3별세 [묘]위 합장 이하 3世 분묘가 수백년 동안 실전(失傳)되었다가 종인(宗人) 이영(理泳)이 전한 바를 덕산리 종인(宗人) 재도(爭)가 성심(省尋)하여 그 사실을 대동보(大同譜) 수권(首券)에 실었다.
※2004.11.6에 이하 3世분의 묘역을 정화하고 묘비를 세웠다
▲ 석등제 48 기원
오재경 동복 대종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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