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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14편
기억과 추억 사이/손바닥 동화
2019-01-23 09:31:47
외환은행 사보에 발표했던 동화 14편을 책을 내기 위해 원고를 보냅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의 내용입니다.
동화 제목
1, 수갑을 찬 고슴도치
2, 장닭이 날지 못하는 이유
3, 분교와 민들레
4, 꽃가루를 배달하는 집배원
5, 알밤 도둑과 다람쥐
6, 개미와 찌르레기
7, 키다리 전봇대 아저씨
8, 노래하는 무쇠 종
9, 하모니카가 된 옥수수
10, 숲속의 우체통
11, 달맞이꽃의 노래
12, 개똥벌레가 들려준 전설
13, 나무새를 타고 간 아이
14, 벌들의 패싸움
수갑을 찬 고슴도치
유진택
고슴도치 굴 앞에서 잠을 깬 너구리 형사는 아함 하고 기지개를 쭉 폈어요.
앞발을 쭉 내밀고 털을 탈탈 털었더니 뒹굴며 자다 뭉친 낙엽이 허공으로 흩어졌어요.
너구리 형사는 매우 피곤했나 봐요.
범인을 잡는 형사의 신분이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저께 고슴도치 굴 앞에서 잠복근무를 서다가 그만 깜빡 잠에 곯아 떨어졌어요.
“아차차, 이거 큰 일 났네, 놈이 도망을 갔겠는데”
하늘을 보니 10시가 넘은 것 같았어요. 이미 동쪽 산을 솟구쳐 오른 해가 뜨겁게 햇살을 뿌려대고 있었거든요.
간혹 낙엽들이 바삭바삭 마르는 소리를 냈어요. 너구리 형사는 옆구리에 찬 수갑을 만지작거렸어요.
그런데 고슴도치란 놈을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아주 변장술에 능해 너구리 형사의 날카로운 눈을 피해 잘도 도망을 다녔기 때문이지요.
사실 너구리 형사는 고슴도치를 거의 10일 동안 쫓아다녔어요.
바로 변장술에 뛰어난 이유 때문이지요, 동물의 세계에도 법이 있었거든요.
변장술이 뛰어난 동물들을 잡아오라는 명령 때문이었어요,
그런 동물들을 미리 잡지 않으면 죄를 짓고 나서도 변장을 하기 때문에 왠만해선 잡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슴도치는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어요.
너구리 형사는 고슴도치 굴 앞에 주둥이를 바싹 들이 밀고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어요.
고슴도치가 간신히 몸만 들이밀 정도로 비좁은 굴이라 도저히 굴속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어요.
어저께 고슴도치가 분명히 굴속으로 들어간 것을 보았는데
아마 너구리 형사가 깜박 잠이 든 틈을 타서 굴속을 빠져 나와 도망을 친 것이 분명했어요.
너구리 형사는 앞발을 머리에 갖다 대고 깊은 생각에 잠겼어요.
그러다가 손뼉을 탁 쳤어요. 고슴도치가 밤나무 골로 숨어든 것이 분명했거든요.
점점 포위망이 좁혀 드는 것을 눈치 챈 고슴도치로서는 그래도 안전하게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이 밤나무 골밖에 없었거든요.
그 숲에는 주먹만 한 밤송이들이 많아서 고슴도치가 몸을 말아 밤송이로 변장하기가 제일 좋았으니까요.
너구리 형사는 곧장 밤나무 골로 향했어요. 밤나무 골까지는 무척 멀었어요.
험한 산 한 개를 넘고 강줄기를 건너면 바로 감나무 골이 나타나지요.
너구리 형사가 밤나무 골에 도착하자 날이 어두워졌어요.
주먹만 한 밤송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수백 그루의 밤나무들이 울창하게 가지를 뻗은 채 하늘을 가리고 있었어요.
늦가을이라 낙엽도 많이 쌓이고 밤송이들이 수없이 흩어져 있었어요.
밤송이들 틈에 분명 고슴도치가 숨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요.
너구리 형사는 주먹을 불끈 쥐었어요. 고슴도치가 아무리 밤송이로 변장을 잘해도 이번에는 놓치지 않을 작정이었어요.
밤나무 골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꼭 찾아내고야 말겠다고 다짐을 했어요.
너구리 형사는 밤나무 골을 훑기 시작했어요.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낙엽들이 바삭바삭 소리를 냈어요.
너구리 형사는 골짜기로 점점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어요.
낙엽 위에 깔린 밤송이들은 물론 가지에 매달린 밤송이까지 샅샅이 훑고 지나갔어요.
그런데 그 순간 너구리 형사는 바싹 긴장을 하며 발걸음을 멈추었어요.
“음, 냄새가 나”
너구리 형사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어요.
“틀림없어, 저 놈이 고슴도치가 틀림없어”
너구리 형사의 눈길이 머문 곳에 둥그런 물체 하나가 들어왔어요.
너구리 형사는 가만가만 다가가 그 물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어요.
모양이나 색깔이 약간 다른 걸 봐서는 밤송이가 아닌 것이 틀림없었어요.
주먹만 한 몸에 흰색과 갈색 가시들이 뒤덮여 있었는데 간혹 팔딱팔딱 숨을 쉬기도 했어요. 게다가 체온도 따스하게 느껴졌어요.
“음”
너구리 형사는 팔을 걷어붙이고 한쪽 손에 수갑을 쥐었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날쌘 발로 그 물체를 세차게 걷어찼어요.
무작정 손을 댔다가는 억센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기 쉬웠기 때문이지요.
바로 그때였어요. 밤송이처럼 똘똘 말았던 몸이 풀어지더니 절룩절룩 산 능선이 있는 골짜기로 달아나기 시작했어요.
그 놈은 바로 고슴도치가 틀림없었어요. 얼마를 못 가서 고슴도치는 푹 쓰러졌어요.
너구리 형사는 고슴도치의 팔에 찰깍하고 수갑을 채웠어요.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밤나무 골을 내려가는 너구리 형사의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어요.
장닭이 날지 못하는 이유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을 고민하는 늙은 장닭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인간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날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까치가 장닭 옆에 사뿐히 내려앉으며 쫑알대기 시작했어요.
“너는 인간에게 잡혀 사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아?”
“부끄러워도 할 수 없지.”
“바보 같은 말만 하지 말고 연습 좀 해. 귀찮다고 날개를 쓰지 않으면 영영 못 날게 된단 말이야.”
장닭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톱니처럼 솟아 있던 볏도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네가 사람들과 있어 봤자 좋은 게 하나도 없어. 결국 잡혀 죽을 뿐이지.”“잡혀 죽는다고? 그럴 리가 없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왜 주인아저씨가 나한테 매일 모이를 주겠어?”
“그건 살을 포동포동하게 찌워서 시장에 내다 팔려고 그러는 거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주인아저씨가 나를 얼마나 귀여워하는데.”
“남들이 왜 네 머리가 나쁘다고 하는지 이제야 알겠구나.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정신 좀 차리란 말이야.”
“뭐? 내가 머리가 나쁘다고?”
“그래.”“날지 못한다고 날 무시하는 거야? 두고 보렴. 머지않아 너처럼 꼭 날아 보일 테니까.”
“제발 그렇게 좀 해봐라.”
까치의 무시에 장닭은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래 전에 본적이 있는 독수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독수리는 부근에서 이름을 모르는 새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어요.
오랜만에 장닭을 만난 독수리는 대뜸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쯧쯧. 지금까지 견딘 게 놀라워. 날개를 쓰지 않아서 아예 없는 것만 못하잖아. 그래도 넌 희망이 있는 편이야. 거위는 바로 돌려보냈거든. 전혀 날지도 못할 뿐더러 아예 날 생각도 하지 않더라구. 오히려 걷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하루 종일 오종종종 걸어 다니기만 해. 날개를 쓰지 않으면 결국엔 없어진다는 사실을 잊은 거야. 당장 내일부터 훈련을 할 테니까 오늘은 그만 쉬도록 해.”
하룻밤을 잔 장닭은 바로 훈련에 들어갔어요.
훈련이라고 해봤자 단순히 독수리 발에 매달려 아스라한 허공에서 몇 번씩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날아오르는 연습을 하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날게 되는 것이었죠.
그러나 나는 것이 그리 쉬운 건 아니었어요.
독수리가 말했듯이 거위는 아예 겁에 질려 날개 한번 펼치지 못하고 풀밭에 떨어지기만 하다 결국 돌아갔으니까요.
하지만 장닭은 거위보다는 한결 나았어요. 몇 번씩 날갯짓을 하다가 풀밭으로 떨어졌지만 다치지 않을 정도로 사뿐히 발을 딛는 모습에서 희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장닭은 몇 번이고 독수리 발에 매달려 높은 허공에서 떨어지며 죽을힘을 다해 날개를 파닥거려 보았어요.
그럴수록 나는 횟수도 늘어났지만 웬일인지 장닭의 마음은 갈수록 허전해지고 주인아저씨의 얼굴이 아른거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날수 있으면 뭘 해. 숲속에 살 것도 아닌데, 날 수 있다고 마을의 친구들 앞에서 우쭐대다가 혹시 봉변을 당할지도 몰라. 새들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 돼. 자신만의 세계가 있는 법이거든.’
높은 허공에서 떨어지는 장닭의 마음은 어지러웠어요. 그
때 독수리도 장닭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소리를 크게 질렀습니다.
“모든 잡념을 버려야 해. 그렇지 않으면 위험해!”
장닭이 아차하고 정신을 차린 순간 풀밭으로 떨어지며 그만 다리를 다치고 말았습니다.
“독수리님, 전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왜지? 조금만 참으면 하늘을 나는 자유를 맛볼 수 있을 텐데. 자, 다시 한 번 해보자.”
“아뇨. 이제 그만 두겠어요. 누구나 자기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하는가 봐요. 제가 날지 못하는 건 참을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손에 길들여진 탓인지도 몰라요.”
“그래. 바로 그거야.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 너의 본성을 찾아야 한다구. 너는 들짐승이 아니라 새란 말이야. 인간과 살다 보면 넌 아예 날개를 잃게 될지도 몰라.”
“생각해 주시는 건 고맙습니다만 저는 집으로 돌아가 주인아저씨와 예전처럼 편하게 살고 싶어요. 시장에 내다 팔리는 한이 있더라도 주인아저씨를 믿고 따를래요. 그게 제 타고난 운명인걸요.”
“너의 운명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왜 필요도 없는 날개가 있겠어? 조금만 노력하면 날 수 있는데 들짐승들조차 부러워하는 날개를 쓰지 않으려고 하다니. 안타깝지만 네가 싫다면 할 수 없지. 그만 돌아가. 그리고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마.”
독수리는 몹시 기분이 상했어요.
절뚝거리며 산 아래로 내려가는 장닭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독수리는 몇 번이고 혀를 끌끌 차다가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습니다.
분교와 민들레
낡고 허름한 분교 옆에 자리 잡은 민들레 부부는 올해도 하얀 꽃을 피웠습니다.
민들레들이 작은 물결을 이루는 모습을 볼 때 마다 가슴이 흐뭇했습니다.
넓은 밭이나 산골 대신 분교 옆에 자리를 잡은 이유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 때문이었습니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고 순박한 아이들을 하루 종일 보는 일이 무엇보다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하거나 숨바꼭질을 할 때 내지르는 함성이 민들레 부부의 가슴속에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민들레들도 그 소리를 들으며 맑고 순수하게 자랐습니다.
하지만 걱정거리 하나가 있었습니다. 운동장에서 놀던 아이들 때문에 민들레 밭이 엉망이 될 때가 많았습니다.
이럴 줄을 뻔히 알면서도 올해는 괜찮겠지 하고 마음 놓고 살다가 몇 해 세월이 흐른 것이었습니다.
민들레 부부도 이것이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서로 옆에 붙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큰 일이예요. 이번에도 아이들 때문에 밭이 엉망이 될지 몰라요.”
“어쩌겠소, 힘이 없으니 당할 수밖에”
엄마 민들레의 걱정에 아빠 민들레가 풀이 죽어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당하면 우리의 자식들이 발 뻗고 지낼 곳이 없어져요.”
“애초에 보금자리를 잘못 잡은 탓이야. 그저 아이들이 좋아서 분교를 떠나지 않은 것이 큰 실수였어. 그때 부모님이 왜 나한테 멀리 떠나라고 했는지 지금 생각하니 이해가 될 것 같아”
민들레 부부가 내쉬는 한숨 소리는 시끄러운 뻐꾸기 소리에 묻혀 더욱 적막하게 느껴졌습니다.
“여보. 이번에 또 당하면 자식들을 멀리 보냅시다. 사람이 갈 수 없는 깊고 험한 산골로 말이에요.”
“두고 봅시다.”
며칠이 흘러갔습니다. 싱그러운 바람과 따스한 햇살은 민들레들을 더욱 무르익게 만들었습니다.
산속에서 날아온 솔 씨들도 가끔 민들레 밭에 내려앉았습니다.
그 바람에 민들레들도 머리가 부풀어 올랐습니다. 아빠 민들레와 엄마 민들레는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가슴 속으로 차오르는 행복감에 그들은 술렁술렁 어깨춤을 추었습니다. 이 행복감이 오래도록 남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예상대로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공놀이를 하던 몇 명의 아이들이 공을 주우러 민들레 밭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 바람에 민들레들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억센 발에 밟혀 밭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하마터면 아빠 민들레와 엄마 민들레도 크게 다칠 뻔 했습니다.
“휴,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네.”
“그러게 말이에요.”
운동장으로 뛰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멀리서 보며 민들레 부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안 되겠어요, 여보. 결정을 내립시다. 이렇게 불안하게 살다가는 언젠가는 자손이 끊기고 말겠어요.”
“어쨌든 자식들이 제 힘으로 하늘을 날 때까진 기다려 봅시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어느 정도 성장할 테니 그때 가서 조용히 일러줍시다.”
아빠 민들레도 확실하게 결심을 한 것 같았습니다.
갈수록 햇살은 더 뜨거워졌습니다.
그 아래서 몇 명씩 편을 갈라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며 씨앗은 잘 여물어갔습니다.
엄마 민들레의 머리는 곧 터질 듯 엉성하게 부풀어 올랐습니다.
간혹 바람에 날려 하늘을 날아오르는 씨앗들도 있었습니다.
“자식들과 이별할 때가 온 것 같아요.”
“당신이 잘 타일러 줘요.”
“얘들아, 여기는 너희들이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그러니 멀리 떠나거라. 되도록이면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산골로 날아가 그 곳에 보금자리를 일구어라. 알았지?”
그때 바람이 쌩하고 불어오자 씨앗들은 풀풀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가벼운 날개에 매달려 멀리 하늘을 날아오르는 씨앗들을 보며 엄마 민들레는 있는 힘을 다해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꽃가루를 배달하는 집배원
“참 이상하다 이상해. 왜 안 날아올까? ”
꽃이 활짝 핀 과일나무들이 웅성거렸습니다.
과일나무들은 매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먼 산을 바라보는 과일나무들의 얼굴에는 그리움이 하염없이 묻어 있었습니다.
바람이 과일나무들의 가지를 흔들고 지나갈 때마다 과일나무들은 술렁술렁 향기를 쏟았습니다.
그 향기가 바람을 타고 먼 산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과일나무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꿀벌 친구들 입니다.
꿀벌 친구들은 꽃이 활짝 핀 이때쯤 어김없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올 봄은 달랐습니다. 과일나무들이 향기를 날려 보내도 꿀벌 친구들은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꿀벌 친구들이 오지 않는 건 바로 주인아저씨 때문이야. 너희들도 알지. 작년에 일어났던 사건 말이야”
“응, 알아.”
사과나무의 말에 과일나무들이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작년의 그 사건을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몸을 흔들었습니다.
사실 작년에 일어났던 그 사건은 참으로 끔찍했습니다.
꿀벌 친구들이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며 사랑을 맺어줄 때 주인아저씨가 농약을 뿌린 것입니다.
그 때 죽은 꿀벌 친구들의 숫자가 산더미 같았습니다.
그런 행동을 한 주인아저씨를 과일나무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단순히 과일나무에 살고 있는 벌레들만 죽이려고 했지 꿀벌 친구들 생각은 전혀 하지 못 한 것 같았습니다.
꿀벌 친구들이 이 꽃 저 꽃에 꽃가루를 묻혀줘야만 맛있는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것 같았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면 우리는 이 땅에 존재할 이유가 없어.”
“맞아, 열매는 바로 이름표 같은 것이야. 열매의 생긴 모양을 보고 사람들은 우리들의 이름을 불러주거든.”
사과나무의 말에 배나무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
“어떻게?”
사과나무의 말이 끝나자 복숭아나무가 물었습니다.
“전부 모여 기도를 하는 거야. 며칠 동안 끈질기게 기도를 하면 꿀벌 친구들도 우리들의 마음을 알아줄 거야”
“그래 좋은 생각이야.”
과일나무들은 모두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럼 모두 나를 따라 해봐. 먼저 하늘을 향해 팔을 쭉 벌리고 소원을 비는 거야. 꿀벌 친구들아. 제발 열매를 맺게 해 줘. 이렇게 말이야.”
과일나무들은 사과나무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기도는 며칠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햇살이 쏟아지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과일나무들은 쉴 줄을 몰랐습니다.
그럴수록 과일나무들은 더 힘이 났습니다. 꽃잎들은 더 싱싱해지고 향기를 허공에 쏟았습니다. 과일나무엔 온통 눈부신 꽃들과 달콤한 향기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마침내 꿀벌 친구들이 날아온 것입니다.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꿀벌 친구들의 손에는 노란 꽃가루가 묻어 있었습니다.
“고맙다 친구들아.”
“다 너희들의 기도 덕분이야.”
과일나무의 말에 꿀벌 친구들은 다정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과일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더 힘차게 팔을 뻗어 올리고 기도를 했습니다.
먹구름이 벗겨진 하늘은 불타는 햇살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과일나무 주변을 바쁘게 날아다니는 꿀벌 친구들이 오늘은 왠지 꽃가루를 배달하는 집배원처럼 보였습니다.
알밤 도둑과 다람쥐
가을이 깊어지자 밤 골은 무럭무럭 밤 익는 소리로 시끄러웠어요.
바람이 살짝 불어도 통통한 알밤들이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어요.
낙엽이 깔린 풀 섶에는 온통 알밤투성이었어요.
울창하게 들어찬 밤나무 숲은 대낮에도 어둑어둑 했습니다.
그래서 산짐승들이 많았어요.
또한 산새들도 밤나무 가지 사이를 포르릉 날며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어요.
밤나무 골에서 밤을 털고 있는 석이는 아주 신이 났어요.
장대로 나뭇가지를 후려칠 때마다 벌어진 밤송이에서 굵은 알밤들이 후드득 쏟아져 내렸어요.
석이는 밤을 잘 털었어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탓으로 할아버지와 자주 밤을 털러 다닌 적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며칠 후면 추석이라 제사지낼 밤도 필요하고 또한 시장에 내다 팔아 몸이 아픈 엄마의 약값도 마련할 생각입니다.
오랫동안 신경통으로 고생을 하고 계시는 엄마는 제대로 병원을 다닌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방안 신세만 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보다 못한 석이는 어린 마음에 밤을 털어서라도 엄마의 약값을 마련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석이는 낙엽 위에 떨어진 알밤을 주어 자루에 주섬주섬 담았습니다.
아직 입이 덜 벌어진 밤송이는 끝이 뾰족한 막대기로 껍질을 까서 알밤을 꺼냈어요.
그렇지만 벌레투성이 밤들이 많았어요.
올해 들어 공해가 부쩍 심해진 탓이었어요. 작년까지만 해도 밤나무 골은 알밤으로 풍성했어요.
한밤중에도 밤 터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주먹만 한 알밤들이 반질반질 윤기가 흘렀어요.
그런데 올해는 달랐어요.
며칠을 두고 장마와 가뭄이 번갈아 계속되더니 속이 차지 않고 벌레를 먹거나 빈 껍질이 많았어요.
그래도 석이는 벌레 먹은 밤까지 모두 자루에 주워 담았어요.
금방 두 자루를 채웠습니다.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서산에 걸렸어요.
석이는 밤 자루를 지게에 얹고 막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다람쥐가 밤나무 꼭대기에서 쪼르르 내려오더니 석이를 빤히 쳐다보았어요.
마치 석이가 원망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어요.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어?”
“그래.”
석이가 묻는 말에 다람쥐는 잔뜩 볼이 부은 채 대꾸를 했어요.
“무슨 일인데?”
“보면 몰라?”
“아, 이거 제사에 쓸 밤이야. 그리고 엄마 약값도 필요하고 해서…”
“그렇다고 모조리 다 털어 가면 어떡해, 나도 먹고 살아야지.”
“다른 밤나무도 많은데 뭘.”
“너도 알다시피, 밤나무 골을 한번 쳐다봐, 도둑들이 밤을 다 털어 갔어. 그리고 떨어진 알밤들도 모두 벌레 투성이야.”
석이는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울창한 밤나무들이 전부 털려 후줄근히 빈 가지만 남겨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낙엽 위에도 알밤 하나 눈에 띄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다람쥐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룩한 밤 자루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다람쥐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 같았어요.
석이는 자루를 풀었어요.
그리고는 다람쥐를 향해 알밤 몇 개를 던져 주었어요.
“애걔걔, 겨우 이거야? ”
“그거면 겨울을 충분히 지낼 수 있잖아.”
“우리 집에 한번 가볼래?”다람쥐는 촐랑거리며 석이를 다람쥐 굴로 안내를 했어요.
그리고는 석이에게 굴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굴이 저렇게 좁은데 어떻게 들어가?”
“그럼 거기서 안을 들여다보라고.”
마침 그때 약한 햇살이 굴속을 비췄어요.
어둑하던 굴속이 희미해지더니 오종종 모여 있는 아기 다람쥐들이 보였어요.
대충 눈으로 세어 봐도 열 마리 정도는 될 것 같았어요.
“아니, 이 많은 식구들을 어떻게…
”석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어요.
“산에서 굶고 있던 친구들을 내가 전부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어.”
석이는 아예 한 자루를 통째로 다람쥐에게 던져 주었어요.
그때서야 다람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어요.
마저 남은 한 자루를 지게에 지고 끙끙 산길을 내려오는 석이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가벼웠어요.
개미와 찌르레기
눈발이 무릎 깊이 쌓이고 찬바람이 몰아치자 들판은 고요했습니다.
숲이 무성한 산자락이라 그 아래 보리밭은 물론 사람들 몇 명이 오가던 마을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럴 땐 찌르레기가 큰 걱정이었습니다.
무더운 여름철에 노래만 부르다가 겨울을 맞는 찌르레기가 어떻게 지내는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
렇지만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흩날리는 눈발 때문에 풀밭이 온통 눈으로 뒤덮였기 때문입니다.
찌르레기가 어느 쪽에 살고 있는지 방향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큰일이에요. 찌르레기가 혹시 굶어 죽지나 않았는지”
“왜 할 일없이 그런 녀석 생각을 해”
개미 할머니의 걱정에 개미 할아버지는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그렇지만 인정이 어디 그래요. 매일 한 가족처럼 얼굴을 대했는데”
“참 걱정도 팔자네. 할 일 없으면 낮잠이나 자요”
개미 할아버지는 고함을 버럭 질렀습니다.
“큰일이야. 왜 이 마을에는 놀고먹는 아이들이 그리 많은지”
“찌르레기 말고 또 누구 있어요”
“베짱이와 귀뚜라미, 그리고 매미”
“놀고먹기는요. 저들도 나름대로 사는 방법이 있겠지요”
“하라는 일은 하지 않고 노래만 부르는데 무슨 방법이 있어”
“그래도 전 노래 소리가 듣기 좋은 걸요”
“당신도 큰일이야. 벌써 물이 들었어”
개미 할아버지가 불만을 터뜨리는데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를 때마다 개미 할아버지의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기 때문입니다.
그 때 찌르레기는 풀잎 위에 올라앉아 할 일없이 노래만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개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땀을 뻘뻘 흘리며 먹잇감을 밀고 당기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찌르르 노래만 불러댔던 것입니다.
그 꼴이 얼마나 보기 싫었던지 개미 할아버지는 찌르레기를 향해 듣기 민망할 정도로 고함을 질렀습니다.
“야, 이놈아, 우리 좀 도와 줘. 노래만 부르지 말고”
“힘드시죠. 전 할아버지, 할머니를 돕고 있는 걸요. 제 노래만 들어도 힘이 솟지 않으세요”
“예끼, 버릇없는 놈. 그렇게 게을러서 어찌 겨울을 나려고 그래”
“걱정 마세요. 전 이미 겨우살이 준비를 다 마쳤어요”
찌르레기도 뒤질세라 큰 소리를 쳤습니다.
올 여름, 이미 겨울에 먹을 식량을 미리 모아두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풀숲 마을의 어린 풀벌레를 모아 놓고 공연을 열었던 것입니다.
목소리가 아름답기로 유별난 찌르레기의 공연이 열리자 풀벌레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마을 앞 공터에 마른풀로 엮어 무대를 만들고 그 위에서 구름과 별을 벗 삼아 노래를 불렀습니다.
밤이 깊어가도 노랫소리는 그칠 줄 몰랐습니다. 풀숲 마을의 친구들도 모두 찌르레기의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새벽이 가까워오고 별들이 깜박깜박 졸음을 이길 때까지 풀벌레의 노래는 계속되었습니다.
귀청이 따가웠습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풀벌레들이 따라 부르는 노래 소리는 금방 눈물이 되어 졸고 있는 별들을 깨우곤 했습니다.
공연이 끝날 시간에는 풀벌레들이 물어다 준 식량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맛있는 벌레나, 구수한 알들이 무대 아래서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그래서 찌르레기는 겨우살이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개미 할아버지는 찌르레기가 빈둥거리며 노래만 부르는 걸로 알았던 것입니다.
“뭘 믿고 그러는지 몰라도 너 앞날이 걱정이구나. 올 겨울에 우리 집에 찾아와 구걸할 생각하지 말거라. 작년에는 베짱이가 찾아왔지만 먹을 것 하나 주지 않고 쫓아 버렸지. 그 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직도 소식이 없더구나. 모두 제 책임이니 누굴 탓 하겠어”
“걱정 마세요. 저는 베짱이하고 달라요. 베짱이는 순진하고 어리석어서 힘들게 노래만 불러주고도 구걸만 하고 다녀요. 식량 구하는 법을 모르는 바보예요” “두고 봐 네 놈도 결국엔 베짱이 신세가 될 테니까”
개미 할아버지의 말에 찌르레기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베짱이와 비교를 하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입니다. 옛날 노래를 부르는 베짱이와는 달리 찌르레기는 자신이 어린 풀벌레들이 좋아하는 신세대 가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개미 할아버지의 충고가 찌르레기의 마음을 움직일 리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개미 할아버지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처럼 끙끙 일만해야 배불리 먹을 식량을 얻는 줄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따스한 집안에 들어 앉아 개미 할머니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던 개미 할아버지는 찌르레기를 생각하며 “휴~” 하고 한숨을 내 쉬었습니다
키다리 전봇대 아저씨
아침 해가 밝게 떠올랐지만 아직도 전봇대는 한밤중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꼭대기에 매달린 노란 등이 밝게 불을 밝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골목 어귀에 세워져 있는 전봇대는 겉모습으로 봐서는 평범해 보였지만 아주 말썽꾸러기였습니다. 제 주변의 전봇대들은 날이 새자마자 등불을 끄고 곧장 아침을 맞이했으나 키다리 전봇대만은 노란 불을 켠 채 쿨쿨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상모르게 잠을 자다가 오후에 잠을 깨곤 했습니다. 전봇대는 언제나 이런 버릇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보다 못한 사람들이 전봇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렇지만 전봇대는 못들은 척했습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욕을 먹고 산 탓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다른 전봇대들 같으면 정신을 바싹 차리고 귀담아 들을 말을 키다리 전봇대는 외면했습니다. 약이 바싹 오른 사람들이 투덜거렸습니다.
“큰일이야, 저 놈은 점심때가 되었는데도 등불을 끌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매일 전기를 아끼자고 떠들어봤자 헛수고야.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태연하지”
키다리 전봇대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무엇을 믿고 그러는지 몰라도 정말 얼굴이 두꺼웠습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전봇대에게 손가락질을 하거나 욕을 퍼부었지만 전봇대의 나쁜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나무들의 불만은 대단했습니다.
전봇대 주변에 자리를 잡고 있는 나무들은 대낮에도 훤한 노란 불빛 때문에 몹시도 눈이 부셨습니다. 안 그래도 밤새도록 몰려든 날 파리들 때문에 잠을 설친 나무들은 또 날이 밝아서도 눈부신 전등을 쳐다봐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나무들의 이런 고통을 몰랐습니다. 더구나 밤만 되면 키다리 전봇대 아래로 몰려드는 불량배들 때문에 골치가 아팠습니다. 대낮같이 환한 등불아래서 싸움을 하거나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골목은 늘 시끄러웠습니다.
더구나 잠을 설친 사람들의 얼굴이 피곤해 보였고 밤낮을 구별하지 못한 나무들은 뒤늦게 꽃을 피우는 일도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차라리 키다리 전봇대의 등이 깨지기를 바랐습니다.
그 동안 키다리 전봇대에 대한 감정이 너무 큰 탓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바람이 현실로 다가오고 말았습니다. 오늘 아침 날이 훤히 밝았는데도 키다리 전봇대가 일치감치 등불을 끄고 잠을 깬 것입니다.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습니다.
게으름뱅이 잠꾸러기가 일찍 일어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키다리 전봇대가 나쁜 버릇을 고친 모양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키다리 전봇대를 찬찬히 살펴보니 와장창 등이 깨져 있었습니다. 누가 돌을 던져 등을 깬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동안 키다리 전봇대를 미워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게 큰 상처를 보니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이 흘러갔습니다. 그전처럼 전봇대 주변이 시끄럽거나 사람들과 나무들이 잠을 설치는 일도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전봇대 주변이 꽤 평화로운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도둑들이 어둠을 틈타 하나씩 집을 털어 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키다리 전봇대가 서 있는 골목 첫 집부터 마지막 집이 차례로 도둑들에게 털린 것입니다. 값 비싼 물건들은 물론 장롱 속에 깊이 넣어둔 통장까지 훔쳐갔습니다. 도둑맞은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골목에는 으레 훤히 등불을 켠 전봇대가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오랫동안 전봇대를 미워한 사실을 후회했습니다.
전봇대가 아침까지 등불을 켠 채 늦잠을 자거나 불량배들로 시끄러워도 키다리 전봇대가 옛날처럼 노랗게 등불을 켜 주기를 바랐습니다.
노래하는 무쇠 종
마을 언덕에 서 있는 느티나무는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었습니다. 덩치 큰 청년 둘이 손을 맞잡고 껴안아야 겨우 닿을 정도로 우람했습니다.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사신 할아버지도 나무의 나이를 모른다고 고개를 가로저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할아버지가 태어났을 때도 느티나무는 여전히 두 팔을 벌린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느티나무를 신성하게 여겼어요. 마을을 보호해주고 평화를 준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마을이 이만큼이라도 평화로운 것은 순전히 느티나무의 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느티나무에는 언제부턴가 커다란 무쇠 종 하나가 매달려 있었어요. 그 무쇠종도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두텁게 녹이 슬고 한 쪽 귀퉁이가 깨져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고 심심하면 마을 사람들에게 쇠망치로 두들겨 맞은 탓입니다. 어쩌다가 마을에 불이라도 나면 무쇠 종을 쳐서 위급한 상황을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양동이며 바가지를 하나씩 들고 모여 들었어요.
그리고는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도랑가로 달려가 양동이나 바가지에 물을 가득 퍼 담아 무작정 불에 뿌렸습니다. 무서운 줄도 모르고 활활 타오르던 불도 삽시간에 꺼져 버렸어요. 그 덕분에 사람들의 생명을 많이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무쇠종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그럴수록 무쇠 종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마을에 불이 나면 왜 자신을 두들겨 패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몇 번씩 두들겨 맞고 나면 정신이 없었습니다. 몸도 퉁퉁 붓게 되고 맞은 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났어요. 며칠 동안 끙끙 앓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고통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무쇠 종이 비명을 지를 때면 몇 십 년을 함께 붙어 산 느티나무조차 실바람에 잎새를 흔들며 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그렇지만 더 괘씸한 것은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졸다가 심심하면 나무에 올라와 무쇠 종을 두들겼어요.
그 바람에 마을 어른들이 몰려 나와 웅성거렸습니다. 나중에 아이들의 행동인 줄 눈치 챈 어른들은 아이들을 불러 놓고 호통을 치기도 했습니다.
“ 야, 이놈들아. 저 무쇠 종은 마을에 불이나면 사용하는 줄 모르느냐. 너희들 때문에 몇 번 속았다가 진짜 불이라도 나게 되면 어떡할 참이냐. 나쁜 놈들”
그러면 아이들은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어른들의 훈계를 듣고 나서는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무쇠 종은 마음을 놓지 못했습니다.
그 탓인지 무쇠 종은 얼굴을 항상 찡그렸어요. 느티나무는 그것이 못마땅했습니다. 무쇠 종의 찡그린 얼굴을 보고 느티나무는 오늘 기어코 한마디를 던졌어요.
정말 못 봐주겠다. 얼굴 좀 펴고 살아라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심심하면 맞고 사는 내 마음을 누가 알기나 해”
무쇠 종은 도리어 화를 냈습니다. 오랫동안 친한 친구로 지냈던 느티나무조차 무쇠종의 마음을 몰라주었기 때문입니다.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구나”
“그게 무슨 뜻인데”
“너는 맞을 때마다 아픈 것만 생각했지. 다른 사람들 생각은 왜 못하냐는 뜻이야”
무쇠 종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느티나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 자세히 설명해 줘,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네가 두들겨 맞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구한단 말이야”
“어떻게 생명을 구한다는 거지”
“네 노랫소리를 듣고서 사람들이 미리 도망을 치거든”
“노랫소리라고, 그건 내 몸이 아파 내지르는 비명인데”
“천만에 모두를 노랫소리로 알고 있어”
“거짓말하지 마, 매일 나와 붙어 있으면서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지. 난 듣지도 못했는데”
“ 난 분명히 들었어”
사실 느티나무는 며칠 전 마을사람들 몇 명이 서로 수군대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어요.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오후였습니다.
그 때 무쇠 종은 햇살에 축 늘어져 신나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 한 명이 잠에 곯아떨어진 무쇠 종을 가리키며
“‘햐, 저 놈은 우리 마을의 보물이야. 불이 나면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미리 도망치게 하거든' 하는 말을 느티나무는 잊지 않고 기억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느티나무의 말을 들은 무쇠 종은 기분이 좋았어요. 그렇지만 한 편 걱정도 앞섰어요.
"그러면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언제까지 고통을 참으며 희생을 해야 되지“
“너의 고통은 잠깐이지만 생명은 고귀한 거야. 네가 고통을 참게 됨으로써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거든. 얼굴을 찡그려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어. 차라리 신나게 맞고 즐겁게 노래를 불러”
무쇠 종은 느티나무의 말이 서운했어요. 신나게 맞고 즐겁게 노래를 부르라고. 그 뒤부터 무쇠 종은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자신이 쇠망치로 두들겨 맞을 때 사람들이 생명을 구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값진 희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쇠 종은 생각을 고치기로 했습니다.
느티나무의 말처럼 신나게 맞으며 즐겁게 노래를 부르기로 했습니다. 쇠망치가 자신을 신나게 두들겨도 고통을 꾹 참으며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주기로 했습니다.
하모니카가 된 옥수수
열차 소리에 민수는 퍼뜩 잠이 깼습니다.
매일 겪는 일이라 아무렇지는 않았지만 꼭 하필 식구들이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진 새벽에 눈이 뜨였습니다.
이제 철길 옆 마을로 이사 온 지도 몇 해가 흘러서 시끄럽게 달리는 열차 소리에도 신경이 예민할 만도 한데 민수는 그렇지가 않았어요.
꼭 새벽녘 이 시간에 눈이 뜨이는 것은 그 동안의 습관 탓이기도 합니다. 민수는 눈을 뜨고서도 한참 동안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립니다.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해도 잠은 오지 않고 쓸데없는 공상만 머릿속에 쌓여갑니다.
작년에 민수 옆집에 살다 도시로 이사를 간 은지 생각이 간절합니다. 은지는 이름처럼 얼굴도 곱고 예뻐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가슴이 콩닥거립니다.
더욱이 무릎까지 드러나는 짧은 치마를 입고 공주처럼 뛰어오는 상상을 하면 저절로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민수가 이불 속에 누워 은지 생각을 하는 동안 또 육중한 열차 한 대가 무거운 쇠 바퀴 소리를 내며 어둠을 가릅니다.
그 바람에 철 길 옆 옥수수 잎들이 살랑살랑 몸을 부딪치는 소리를 냅니다. 아마 옥수수도 잠을 깼나 봅니다.
올 봄에 엄마가 심심풀이로 심은 옥수수들 입니다. 철길을 따라 골을 파고 심은 옥수수가 한없이 키를 늘려 하늘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아마 며칠만 더 있으면 옥수수 대궁에 달린 옥수수가 탄탄하게 익을 것 같습니다.
아직은 붉은 수술이 철없는 아이의 턱수염 같아서 보기에도 민망해 보입니다.
그 수술이 붉은 빛을 지우고 까맣게 변하면 비로소 옥수수 알도 누렇게 되고 딱딱하게 여물게 됩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도 오늘따라 참 곱습니다. 큰 항아리를 기울여 누런 꿀을 옥수수 밭으로 쏟아 붓는 것만 같습니다.
민수는 혼자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새벽녘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다 보니 아예 옥수수와 친구가 된 것입니다. 민수가 옥수수에게 말을 걸면 옥수수도 민수에게 척척 대답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옥수수야,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겠어?”
“뭔데”
“내 친구 은지가 보고 싶어죽겠어”
"그러면 하모니카를 불면서 마음을 달래면 되지”
“하모니카!”
“그래, 나중에 옥수수로 하모니카를 만들어 불면 돼. 하모니카 소리가 은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몰라”
민수는 눈웃음을 쳤습니다.
“그러면 옥수수는 언제쯤 따지?”
“조금 더 참고 기다려 봐”
옥수수는 민수를 안심시켰어요.
그리고 며칠이 흘러갔어요. 아기 손목만한 옥수수가 붉은 수염을 지우는가 싶더니 갈바람과 함께 토실토실 옥수수 알이 여물어가기 시작했어요.
옥수수의 붉은 수염은 까맣게 변하고 팔뚝만큼 부풀어 올라 대궁에 매달려 위험스레 흔들렸어요. 딱딱하게 여물었으니 빨리 꺾어가라는 표정 같았어요.
민수는 잘 익은 옥수수를 하나 뚝 땄습니다. 탄탄하게 여문 알들이 묵직하게 민수의 손에 잡혔습니다.
민수는 옥수수 껍질을 차례대로 벗겼습니다. 겹겹이 두른 껍질들이 말끔하게 벗겨지더니 누런 이빨 같은 옥수수 알들이 빽빽이 드러났어요.
민수는 옥수수 알을 한 줄씩 떼어내고 하모니카를 만들었어요. 그리고는 입에다 대고 입술을 좌우로 움직였더니 신기하게도 아름다운 하모니카 소리가 흘러 나왔어요. 하모니카 소리는 하늘로 퍼져 올라갔습니다.
그 바람에 하늘의 별들이 살랑살랑 춤을 추며 내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별빛들이 옥수수 밭에 서리처럼 물들었습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나야, 은지. 어떻게 지냈니?”
“아니, 네가 어떻게…”
민수는 정신이 아찔했어요. 은지가 전화를 걸어오다니 꿈을 꾸는 것만 같았어요.
“하모니카 소리 너무 아름다워”
민수는 가슴이 뜨거웠어요. 가슴이 불같이 달아오를수록 민수의 속옷도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어요.
민수는 그날 밤 꿈을 꾸며 몽정을 한 것입니다.
“아니 이 녀석 좀 봐, 아직도 안 일어났네”
어제 저녁 외할머니 댁에 가셨다 아침에 돌아온 엄마가 민수를 흔들어 깨웠어요.
민수는 창피했어요. 혼자만이 간직한 비밀을 들켜 버린 듯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밤을 꼬박 새운 옥수수 대가 열차의 바람을 안고 술렁술렁 흔들렸습니다.
숲 속의 우체통
마을 뒷산 등산로에서 발견한 우체통 때문에 미나는 잠을 설치는 일이 많았어요.
매일 할아버지와 등산을 할 때에도 보지 못했던 우체통을 그날 발견한 것은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울창한 숲속에 숨어 있던 우체통을 처음에는 빨간 비닐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가까이 다가가보니 놀랍게도 우체통이었습니다.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몸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듯 쓸쓸히 서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도 우체통을 두드리며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로구나. 이런 숲 속에 우체통이 있다니”
“할아버지, 옛날엔 이곳이 큰 도로가 아니었을까요”
“글쎄다”
미나는 꼭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 들어 손등을 힘껏 꼬집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꿈은 아니었어요.
쓰리고 아픈 통증 때문에 눈가에 핑그르르 눈물이 고였습니다.
미나는 턱을 괴고 우체통 옆에 않았습니다.
따스한 햇살이 보드랍게 미나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듬성듬성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가랑잎들도 기분이 좋은지 마른 몸을 뒤척였습니다.
그 때 낙엽 속에서 단잠을 자고 있던 다람쥐들이 얼굴을 속 내밀고는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어요.
마치 미나가 심술장이인줄 알고 엉겁결에 도망을 친 것 같았습니다.
“얘. 난 심술장이가 아니야”
미나는 쏜살같이 달아나는 다람쥐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서 가자 미나야”
멀리서 물끄러미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지었습니다.
“할아버지 먼저 올라가세요. 전 나중에 갈게요”
“원 녀석도 우체통이 무척 신기한 모양이로구나”
미나는 아예 우체통 옆에 털썩 주저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울퉁불퉁 굴곡을 이룬 산 능선 아래로 펼쳐진 마을이 아늑히 눈에 들어왔어요.
얼마 안 되는 집들은 이미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판 때문인지 아주 쓸쓸해 보였어요.
울긋불긋 색칠한 지붕들이 막 넘어가려는 햇살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습니다.
미나의 집은 늙은 느티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어요.
몇 해 전만 해도 불길이 타오르듯 가랑잎을 흔들던 느티나무는 이제 죽음을 앞둔 고목 같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잎들을 몽땅 떨어내고 빈 몸으로 서있는 나무를 보고 있으니 자신도 느티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쓸쓸했습니다.
저녁이 되어 마을로 내려온 미나는 함께 식사를 하시는 할아버지 앞에서 이상한 말을 불쑥 꺼냈습니다.
“할아버지, 저 우체통에 편지를 보내도 될까요”
“글쎄다. 이미 못쓰게 된 우체통 아니냐. 편지가 갈 이유가 있겠냐. 그러려면 집배원도 있어야 되는데 집배원이 저 숲에 올리는 없고”
“그래도 할아버지 장난삼아 편지를 한 번 띄어볼 게요”
“허허 녀석, 그럼 그렇게 해 보려무나”
다음날 서둘러 잠을 깬 미나는 전날 깨알같이 적은 편지를 들고 마을 뒷산의 우체통으로 갔습니다.
우체통은 마치 미나를 기다리듯이 산뜻한 모습으로 서 있었어요. 미나는 편지에다 쪽하고 입을 맞추고서는 귀여운 우체통의 입속에 편지를 쏙 집어넣었습니다.
“잘 가라, 편지야”
미나가 편지에 적은 내용은 다름 아닌 단짝 친구에게 띄우는 겨울 소식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미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친구 한 명이 있었어요.
얼굴이 복스럽고 어깨까지 긴 머리를 덮은 아주 예쁜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병명을 모르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 친구가 이웃집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것이었어요.
아마 생활이 힘든 가족들이 살길을 찾아 먼 곳을 떠난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미나는 그 친구의 행방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마음속으로만 이별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친구가 떠난 후 미나는 끙끙 앓아누웠습니다.
모든 것이 싫었습니다.
밥을 거르는 일도 많았어요.
하늘을 떠다니는 새털구름을 보며 친구의 얼굴을 떠올려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꾸만 산 너머로 눈이 갔어요.
들판 끝에 나지막이 솟아있는 산 너머에 친구가 살고 있는 듯한 상상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이렇게 꿈결처럼 친구를 그리워하며 지내다가 어느 날 숲 속에서 우체통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런데 꿈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미나가 보낸 편지가 얼마 후에 예쁜 꽃 그림이 새겨진 답장 한 통으로 날아온 것입니다.
“미나야, 나 잘 있어. 겨울이 오고 있으니 건강 조심하라는 네 말 영원히 가슴 속에 간직할 게. 여기도 솜털 같은 눈발이 흩날리고 있어. 주변이 온통 새하얀 눈의 나라야. 언제 한 번 놀러와”
편지는 쓸쓸하게 끝을 맺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편지 봉투를 훑어 봐도 주소가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한 송이 꽃처럼 친구 이름만 눈에 뛸 뿐, 편지 봉투는 새하얀 백지였어요.
미나는 편지 봉투를 가슴 속에 파묻고 들판 건너 산을 쳐다보았습니다.
흩날리는 눈발이 산을 덮으며 마을 쪽으로 뿌옇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달맞이꽃의 노래
어둠이 깔린 산골에 달맞이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달맞이꽃들은 몽우리를 오므린 채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달이 떠오르면 꽃잎을 활짝 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산골은 삽시간에 금빛 축제로 술렁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산골을 달골이라 부르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름처럼 산골에서 떠오르는 달은 눈이 시리도록 맑아 달맞이꽃들이 온통 금빛 물결 속에 잠겨 있는 듯합니다. 그 광경은 흡사 수많은 달맞이꽃들이 달을 향해 은은한 기도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와, 저게 뭐지”
엄마 달맞이꽃 옆에 붙어 있던 아기 달맞이꽃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습니다. 한 번도 달이 떠오른 걸 구경 못한 아기 달맞이꽃은 처음 태어나면서 만난 세상이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엄마 달맞이꽃에게 늘 물어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럴 때마다 엄마 달맞이꽃은 잘 대답해 주었습니다. 엄마 달맞이꽃은 아기 달맞이꽃을 쳐다보며 속삭이듯이 말했습니다.
“저게 바로 반달이란다. 너는 오늘 처음 반달을 보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저렇게 크지 않았어. 처음엔 손톱 모양이었지. 그러다가 반달이 되고 보름달로 변하지.
그 과정을 지켜보며 달맞이꽃들은 허전한 가슴 속에 그리움을 차곡차곡 쌓게 된단다. 그리움이 쌓이면 온몸에 금빛 물이 들게 되거든”
그럴 즈음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반달도 점차 모양이 바뀌면서 더 크게 부풀어 올랐습니다. 달맞이꽃들은 온몸에 금빛 물이 든 채 눈부신 빛을 계속 뿜어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기 달맞이꽃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달맞이꽃들이 노란 물이 들어 축제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에도 아기 달맞이꽃은 달빛이 가득한 빈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도리어 창백한 꽃빛이 주변에 우울한 그늘만 내려주었습니다. 아기 달맞이꽃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제 몸을 찬찬히 훑어보며 궁금한 듯 말했습니다.
“엄마, 그런데 왜 내 몸은 노란 물이 들지 않지”
“그건 네 마음에 문제가 있는 거란다. 너는 아직 어려 세상을 잘 모르겠지만 마음을 활짝 열어 달을 맞이할 때만 변화가 올 수 있지. 손톱달이 반달이 되고 보름달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그동안 네 마음은 의심으로 꽉 차 있었거든. 보름달을 상상하며 마음으로 노란 빛깔을 빨아 들여라. 그러면 네 몸도 보름달처럼 노란 물이 든단다.”
아기 달맞이꽃은 엄마의 말을 귀담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때 쓸쓸한 바람이 먼 산을 휘돌아 불어왔습니다.
달맞이꽃들은 모처럼 불어온 바람에 몸을 내맡기며 기분 좋게 흔들거렸습니다. 아기 달맞이꽃은 무성한 달맞이꽃들에 섞여 보름달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구름이 나룻배처럼 달을 스치며 지나갔습니다.
아기 달맞이꽃은 엄마의 말대로 눈을 꼭 감고 보름달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보름달이 아기 달맞이꽃의 가슴에 가득 차올랐습니다. 허전하던 마음속이 뭉클했습니다.
아기 달맞이꽃은 며칠 동안 노란 달빛을 쭉 빨아들였습니다. 아기 달맞이꽃의 가슴 속에는 누런 물이 출렁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달은 보름달로 변했습니다. 희미한 달 골이 보름달빛을 받아 환했습니다.
“어, 내 몸이 어느새 물이 들었네”
아기 달맞이꽃은 자신도 모르게 노란 물이 든 제 몸을 훑어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엄마 달맞이꽃은 아기 달맞이꽃을 쳐다보며 웃었습니다.
“맞지, 엄마 말이. 내 새끼 기특하구나”
아기 달맞이꽃은 엄마의 칭찬에 날아갈 듯했습니다. 엄마의 칭찬이 이렇게 힘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기 달맞이꽃은 달맞이꽃들 속에 섞여 꿈같은 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풍만하던 달이 또 기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름달이 작아질 때마다 아기 달맞이꽃도 제 마음 한 쪽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아기 달맞이꽃은 엄마 옆에 붙어 매일 작아지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찬 이슬방울이 아기 달맞이꽃에게서 반짝거렸습니다.
“엄마, 내 마음이 왜 이리 아프지”
엄마 달맞이꽃은 아기 달맞이꽃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아기 달맞이꽃을 위로하며 천천히 말을 꺼냈습니다.
“우리들이라면 누구든 겪게 되는 아픔이란다. 달이 기울면 시들고 노란 빛깔도 결국에는 희미해지니 마음이 아프지 않겠니”
“그러면 우리 목숨도 이걸로 끝나게 되나요”
“그렇단다. 그렇지만 아픔 뒤에는 또 희망이 돌아오는 법이란다. 달이 다시 떠오르면 우리들도 가슴을 열고 그리움을 차곡차곡 쌓게 되지. 그러면 우리들도 노란 물이 들고 이 달골에는 시끄럽게 축제가 벌어지겠지. 이렇게 시들고 노란 물이 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이니 그렇게 슬퍼할 일도 아니란다.”
아기 달맞이꽃은 엄마의 말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철없는 달맞이꽃이 아니었습니다. 몸이 바뀌는 달의 과정을 지켜보며 아기 달맞이꽃은 온몸에 노란 물이 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다음에 달이 다시 떠오르면 제 엄마가 그랬듯이 아기 달맞이꽃도 제 자식에게 노란 물이 드는 법을 가르치게 될 것입니다.
개똥벌레가 들려준 전설
강둑 위로 개똥벌레가 불꽃처럼 흩날리고 있습니다. 밤이 깊었는데도 아이들은 개똥벌레를 따라 시끄럽게 강둑을 뛰어다녔습니다.
마치 황홀한 불꽃축제를 벌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믐달도 얼굴을 씻고 강둑을 내려다보고, 별빛들도 신기한 듯 반짝반짝 눈웃음을 쳤습니다.
가을은 그래서 좋았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에 신비한 꿈을 실어다주고 마음껏 상상을 펼쳐주는 개똥벌레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개똥벌레와 친구처럼 놀았습니다. 강둑을 달리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개똥벌레는 꽁무니의 노란 불빛으로 아이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개똥벌레와 신나게 놀던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재미있는 일을 꾸몄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참외서리를 하자는 거였습니다. 개똥벌레가 앞장서 어둑한 길을 밝히고 아이들이 그 뒤를 따른다면 참외서리는 누워서 떡먹기일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참외서리를 하는 데는 위험이 따랐습니다. 마을에서 무섭기로 소문난 털보 영감에게 붙잡히면 그걸로 끝장이었습니다. 산신령이라 불리는 털보 영감은 별명처럼 늘 흰 바지저고리에 누런 수염을 하늘거리며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장죽을 물고 담배를 뻑뻑 빨았습니다. 이 장죽으로 등짝이라도 한 대 맞는다는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그렇지만 가을밤이 주는 공포는 어쩌면 아이들에겐 오히려 매력적이었습니다. 아이들은 킥킥 웃음을 참으며 참외밭으로 들어갈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개똥벌레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만약 이런 짓을 하느님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그날로 큰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개똥벌레는 오늘 하룻밤의 재미있는 놀이보다 나중에 하느님에게 받을 벌이 더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린 그만 두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같이 약속을 해 놓고선”
“자꾸만 마음에 걸려. 우리들은 지켜야 할 의무 같은 게 있어”
“어떤 건데”
“꽁무니의 불은 항상 좋은 일에만 쓰도록 되어 있어. 만약 나쁜 일에 쓰면 후회할 수 없는 큰 일이 닥치거든”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까르르 웃었습니다.
“이 바보들아, 그런 걸 믿니. 그건 전설이야. 너희 조상들이 이런 짓 하지 말라고 다 꾸며낸 얘기야”
“그럴까”
개똥벌레들은 아이들의 말이 미심쩍었지만 결국은 꽁무니에 불을 밝힌 채 앞장서서 아이들을 인도했습니다.
참외밭에 도착하자 팔뚝만한 참외들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참외들은 뽀얀 살갗을 드러내기가 창피한지 무성한 참외 넝쿨 속으로 자꾸만 몸을 숨기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한 아름씩 참외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대충 참외를 갉아 먹고 강둑 풀 더미 속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습니다.
다음 날도 아이들은 강둑으로 나왔습니다. 어제의 참외서리를 까맣게 잊고 평소처럼 개똥벌레를 따라 강둑길을 달렸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상한 개똥벌레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어제 참외서리를 할 때 어둔 길을 밝혀 준 바로 그 개똥벌레들이었습니다.
개똥벌레들은 꽁무니에 불이 꺼진 채 풀이 죽어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불티처럼 흩날리는 친구 개똥벌레의 웃음소리를 부러운 듯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웃음소리가 잔잔히 물결을 치자 강둑의 풀들이 서로 이파리를 비비며 속삭였습니다. 그런데도 불 꺼진 개똥벌레들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뿐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궁금했습니다.
“어쩌다가 꽁무니에 불이 꺼졌니”
“모두 우리들 탓이야. 전번에 말한 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이야”
개똥벌레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습니다.
“그럼 정말이었구나”
“그래 옛날에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꽁무니에 불을 달아 주며 말씀하셨어. 꽁무니의 불은 꼭 필요한 것에만 써야 되느니라. 길 잃은 사람들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 주어 어둔 세상의 밝은 길잡이가 되거라. 만약 명령을 어길 때는 꽁무니에서 스스로 불이 꺼지는 큰 벌을 받게 될 거라는 말을”
개똥벌레의 말을 듣고 나자 아이들은 미안했습니다. 참외서리를 단순한 재미로만 알았던 아이들은 개똥벌레의 꽁무니에 불이 꺼진 광경을 보고는 미안한 감정을 가졌습니다. 아이들은 개똥벌레를 불쌍하게 쳐다보며 위로를 던졌습니다.
“미안해, 개똥벌레들아. 우리가 죽을죄를 졌어”
“자금 와서 그런 말을 하면 뭐해. 재미있게 놀다가 그런 건데 뭘”
“그런데 영원히 불은 켜지지 않니”
“두고 봐야 돼.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진심으로 하느님 말씀을 지키면 저절로 불이 켜지거든. 모두 우리하기 나름이야. 그렇지만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어”
아이들은 개똥벌레가 소원을 이루기를 빌었습니다. 불 꺼진 꽁무니에서 노란 불빛을 깜박이며 예전처럼 아이들과 강둑을 달리는 그런 날이 오기를 빌었습니다.
나무새를 타고 간 아이
착한 사람들은 제각각 별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늘 별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나중에는 별로 돌아갑니다. 착한 사람일수록 별을 쳐다보는 것은 자꾸만 별이 그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고아 소년 노마도 기회 있을 때마다 별을 쳐다보며 상상에 잠깁니다. 노마는 친구들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동화책에 나오는 노마라는 아이가 이 고아 소년과 너무 흡사하게 닮았기 때문입니다.
노마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지만 비닐하우스에서 고모의 채소밭 일을 거들며 하루해를 보냅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밖에 나와 턱을 괴고 앉아 별을 쳐다봅니다. 그리고는 엄마를 생각합니다. 아직 얼굴조차 몰랐지만 별을 쳐다볼 때면 이상하게 엄마 얼굴이 떠오릅니다.
아마 엄마도 마음이 착해서 별나라로 간 모양입니다. 늘 별을 쳐다보며 지내다보니 노마는 별 꿈을 먹고 사는 아이 같기도 합니다.
오늘도 노마는 평소처럼 비닐하우스 앞에 앉아 별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랑을 맨 도인이 지나가다가 노마 앞에 걸음을 딱 멈추고 합장을 합니다.
“불쌍한 지고, 쯧쯧”
도인은 안타까운 듯 몇 번이나 혀를 차더니 노마에게 말을 합니다.
“얘야, 네 엄마가 보고 싶지 않느냐”
엄마라는 말에 노마는 눈빛이 반짝 빛납니다. 엄마가 없어 친구들로부터 종종 무시를 당하던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년 봄, 친구들과 어린이 대공원에 갔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때도 친구들은 모두 엄마의 손을 잡고 참새처럼 조잘대며 놀았으나 노마만은 외로웠습니다. 솜사탕을 먹는 친구 곁에 서서 입맛을 다시는가 하면 놀이 기구에 올라타 빙글빙글 도는 친구들을 쳐다보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누구라도 함께 놀아줄 만도 한데 선뜻 손목을 잡아끄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노마는 무척 서운했습니다. 그런데 더 참을 수 없는 건 회전목마를 타고 놀던 친구 아이가 노마를 놀릴 때였습니다.
“너는 엄마가 없지, 메롱”
친구는 혀를 쏙 내밀며 자꾸만 놀렸습니다. 그렇지만 꾹 참았습니다. 속에서는 부글부글 화가 치밀었지만 엄마와 함께 온 친구를 이긴다는 건 무리였습니다.
엄마 없이 자란 아이들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이런 일을 자주 당하는 처지였기에 도인의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엄마를 어떻게 찾아요?”
“나도 전설로만 떠도는 소문만을 알고 있지, 저 산 능선을 넘어 가면 구름이 걸린 바위산이 나오고 그 바위산 위에 나무새 하나가 날개를 좌악 펴들고 있단다. 그 나무새가 엄마를 찾아줄지도 모른단다”
“나무새라고요?”
“옛날 옛적에 신의 손을 가진 사람이 나무새를 만들었단다. 정말 신기하지. 단지 마음의 무게를 달아 부모를 찾는 길을 알려주지. 마음이 가벼운 아이만소원을 이룰 수가 있어. 마음이 가벼운 아이는 그만큼 욕심이 없거든”
노마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는 멀리 떨어진 산 능선을 쳐다보았습니다. 비닐하우스 너머로 펼쳐진 산 능선은 별빛에 물들어 더욱 신비로웠습니다.
도인도 그 산 능선을 쳐다보며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나무새가 부모를 찾아준 적은 없단다”
“왜요?”
“그만큼 이 세상에는 착한 아이가 없다는 증거지”
“그러면 그 나무새는 착한 아이만 데려다주나요“
“그렇단다”
그렇게 말을 하고는 도인은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노마는 다음날 도인이 가르쳐 준 산을 향해 떠났습니다. 황혼이 산자락을 에워쌀 무렵에 겨우 산꼭대기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인의 말처럼 큰 나무새가 누군가를 기다리듯 앉아 있었습니다. 하늘을 향해 날갯죽지를 펴들고 하늘을 날 기세였습니다. 정말 웅장했습니다. 저토록 정교하게 나무를 깎아 나무새를 만든 사람은 도인이 말한 대로 정말 신의 손이 틀림없을 것 같았습니다.
노마는 나무새 옆에 바싹 붙어 신기한 듯 요모조모 훑어보았습니다. 무서움도 이미 달아나 버렸습니다.
“나무새야, 엄마를 찾아줄 수 있어”
“일단 타봐야 알아. 네가 착한 아이인지 우선 마음을 재봐야 알아. 마음이 가벼운 아이는 하늘을 나는 데 힘이 들지 않거든”
나무처럼 딱딱하게 대답을 하는 나무새의 말에 노마는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엄마를 만나는 건 순전히 나무새의 능력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마음이 무거워 나무새가 하늘을 날수 없다면 어찌할까하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마치 나무새에게 죄의 심판을 받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노마는 쿵쿵 가슴을 억누르며 나무새의 등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나무새는 쏜살같이 하늘을 솟구쳐 올랐습니다. 현기증이 일었습니다.
노마는 나무새의 목을 꼭 끌어안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눈앞을 막아서는 바람 앞에 숨이 막혔습니다. 나무새는 가끔씩 천둥치는 소리를 냈습니다.
수많은 별들이 노마의 눈앞을 어지럽게 스쳐갔습니다.
지금 나무새는 별을 향해 달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노마가 밤마다 눈여겨보았던 별에서 엄마를 만나 엉엉 울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무새를 타고 하늘을 나는 노마의 눈앞에 함박꽃처럼 환히 웃는 엄마의 얼굴이 지나갑니다.
벌들의 패싸움
사방을 둘러 봐도 과수원만 있는 마을입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양편으로 넓게 펼쳐진 들판은 과일나무가 빽빽이 들어서있는 과수원뿐이었습니다. 포도 밭은 물론이고 복숭아 밭, 사과 밭이 서로 경계를 한 채 넓은 들판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때맞춰 봄이 돌아와 과수원은 온통 꽃망울투성이었습니다.
과일나무들이 밥풀 같은 꽃망울을 매달고 포근한 햇살 아래 졸고 있었습니다. 한차례 봄비라도 지나가면 꽃망울들은 화들짝 놀라 꽃을 활짝 피울 것만 같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배씨 아저씨네 배 밭은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비록 손바닥만 한 배 밭이었지만 꽃망울들이 복스럽게 뭉쳐 쳐다만 봐도 눈이 시렸습니다.
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그늘이 깔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불이 난 듯 시끄럽게 날아왔던 벌들이 올해는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습니다. 그 많던 벌들이 과수원으로 날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더구나 배씨 아저씨 네 배 밭조차 며칠째 조용한 것을 보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배씨 아저씨의 마음은 허전했습니다. 배씨 아저씨는 가끔씩 들판 끝에 있는 산자락을 하염없이 쳐다보았습니다. 까
치발을 뜨거나 한 쪽 손바닥을 이마 위에 갖다 붙이고 한참동안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그
것은 벌들에 대한 그리움이었습니다.
포근한 봄바람을 타고 벌들이 그 쪽 산자락에서 날아올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산 속 어디쯤에 벌들이 모여 살고 있는지 배씨 아저씨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조용하게 며칠을 보내던 꽃들은 이제 시들거렸습니다.
눈부신 꽃잎도 색깔이 흐릿해져갔습니다. 더욱이 힘없이 떨어지는 꽃잎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절망이었습니다. 땅으로 떨어지는 꽃들의 힘없는 모습에서 그런 기분을 느꼈습니다.
이때 벌들은 두 패로 갈려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과수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비탈 고목에 벌들이 몰려들어 며칠 동안 싸움을 벌였으나 결말이 나지 않았습니다. 벌들도 과수원의 꽃들이 힘없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무척 가슴이 아팠을 것입니다.
“저기 저 과수원 좀 보라구. 지금 꽃들이 지고 있어. 하루라도 더 늦기 전에 빨리 과수원으로 가서 꽃들에게 꽃가루를 묻혀 줘야 해”
“모르는 소리 하지 마, 과수원 주인들이 나쁜 마음을 고치기 전까지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구. 그동안 인내심으로 참고 견뎠는데 또 참으라니 그게 말이나 돼”
“그래도 참아야 해, 아무리 주인들이 미워도 우리가 임무를 포기한다면 삶을 포기한 것과 똑 같아. 주인들이 다 나쁘다고 하지만 배씨 아저씨 같은 양심적인 분도 있잖아. 괜히 다른 사람들 때문에 그 분이 피해를 입겠어. 배씨 아저씨를 위해서도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한다구”
‘그럼 우리는 배씨 아저씨네 배 밭으로 날아갈 거야“
“좋아, 과수원 주인들 스스로 깨우치기 만들어야 해. 우리들이 배 밭에서 앵앵거리면 아주 나쁜 주인이라도 자신들의 마음을 고치게 되겠지 뭐”
두 패로 갈라섰던 벌들은 결국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결사적으로 임무를 포기하자며 버티던 벌들도 여왕벌의 명령에 따라 모두 배씨 아저씨네 배 밭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사실 벌들이 다른 과수원은 버려두고 배씨 아저씨네 배 밭을 찾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배씨 아저씨의 착한 마음씨 때문입니다.
과수원 주인들이 농약을 뿌리며 과일 농사를 지어도 배씨 아저씨만은 그 방법을 싫어했습니다.
더구나 성급한 과수원 주인들이 꽃이 활짝 핀 동안에도 마구잡이로 농약을 뿌리는 바람에 꽃가루를 묻혀 왔던 벌들은 불쌍하게도 죽는 일이 많았습니다. 벌들은 이 날의 사건을 오랫동안 가슴 속에 새겨 놓았습니다.
앞으로는 이 과수원으로 날아오지 말자고 벌들끼리 굳게 맹세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배씨 아저씨는 달랐습니다. 농약을 뿌리는 대신 언제나 손작업을 했습니다. 과일나무가 벌레에 시달리거나 잎이 이상하다 싶으면 미련 없이 그 부분을 잘라냈습니다. 며칠이 걸리더라도 자신의 고집대로 했습니다.
배 밭 주변의 과수원 주인들은 배씨 아저씨의 답답한 일솜씨를 보고 혀를 끌끌 찼습니다. 더구나 그 방법대로 일을 하다가는 다른 과일나무까지 병충해를 옮길지 모른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렇지만 수확 철에는 배씨 아저씨의 숨은 노력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배씨 아저씨네 배가 다른 과일보다 더 굵고 싱싱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농약을 쓰지 않는 무공해 과일이란 소문 때문에 배들은 먼 도시로 순식간에 잘 팔려 나갔습니다. 그래도 과수원 주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배씨 아저씨의 배가 굵고 싱싱한 이유가 벌들이 부지런히 꽃가루를 묻혀준 덕분이란 사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벌들은 과수원 주인들이 무척이나 답답하다는 듯 한참동안 과수원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배씨 아저씨의 웃음 띤 얼굴도 떠올랐습니다. 벌들은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자, 빨리 떠나야 해”
여왕벌이 명령을 내리자 벌들은 일제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습니다. 산 능선 고목에 새까맣게 붙어 있던 벌들은 소방차 소리를 내며 배꽃이 하염없이 지고 있는 배씨 아저씨네 배 밭으로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약력)
충북 영동 출생
경성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졸업
1993년 "문학세계"로 등단
저서(시집)
‘아직도 낯선 길가에 서성이다“(문학과지성사)
‘날다람쥐가 찾는 달빛' (문학과지성사)
"환한 꽃의 상처"(시에)
" 달콤한 세월(시선)"
"붉은 밥(시에)"등이 있다.
한국작가회의 회원
대전작가회의 이사
대전 창작지원금 2회 받아 시집 발간
현재 무천문학회 회장
손 전화, 010 9556 8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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